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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시인 – 김성철 ‘풀밭이라는 말에서 달 내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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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이라는 말에서 달 내음이 난다 표지./사진=작가 제공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은 단순해요. 검은 티와 흰 티를 입은 두 팀이 공을 주고받는 영상을 피험자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얀 팀이 패스하는 횟수를 세도록 합니다. 이제 질문을 해요. 고릴라를 보았나요?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고릴라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지나갔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잠시 멈추어 춤까지 추었죠. 

“짧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에게서 짧고/ 시간에 짧고/ 세금계산서에 짧다// 풀밭이란 말에서 달 내음이 난다// 나는 흔한 풀이고/ 흔한 풀이 받는 달빛이고// ……// 어느 날/ 당신의 말마다/ 독한 소주 향이 났다/ 당신도 나를 따라/ 세속적이라는 말// 쌓이는 세속이 나도/ 모르게 쌓이고 쌓인” (‘풀밭이란 말에서 달 내음이 난다’ 중). 

어떤 것에 몰두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죠. 김성철 시인은 그걸 우려했는지 세속 뒤에 바로 달을 놓았군요. 당신, 시간, 세금에 집중해서 살아도 우리는 늘 거기에 닿지 못해요. 약 38만 4천 킬로미터를 날아온 달 내음을 맡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요? 풀밭에 엉덩방아까지 찧었을 텐데 말입니다. 시인은 흔한 풀에서 쏟아져 나오는 긴 달빛을 보라고 하는군요. 그러면 소주 향같이 쌓이고 쌓인 세속에도 달 내음 나는 날이 오겠죠. “보이지도 않는, 잡을 수도 없는, 맡지도 못하는/ 염병스런 열병”인 사랑에게도 “-밥이나 한 끼 하자. 우리 밥 먹은 지 오래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겠죠. 

“아랫목에서 피었다 윗목으로 옮아가는 말/ 저기에서 오고/ 여기에서 다시 저기로 가는/ 붉은 말/ 탄성을 짊어졌으나/ 곧 뼈대만 남을 말/ 당신이란 말에 곁을 주었다가/ 앙상한 골격만 드러나는 말/ ……” (‘결이라는 말’ 중). 

아랫목에 핀 말, 여기의 붉은 말, 탄성을 짊어진 말, 당신에게 곁을 준 말에 주의를 기울이면 윗목에 핀 말, 저기의 붉은 말, 뼈대만 남을 말, 골격만 드러나는 말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물론 그 덕에 앞에 있는 말에 몰입할 순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 다른 말이 있다는 걸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걸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 때문이겠죠. 선거철입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도록 앞에 이것저것 가져다 놓는 철이죠. 경제, 민주주의, 평화, 기후같이 소중한 것들이 울면서 지나가도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그것들을 해치는 괴물들이 웃으며 지나갔다 해도 믿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왜 그리 이쁠까?/ 오구오구 궁둥이를 두드려도/ 새하얀 흰 눈꽃 사이로 금니로 웃는 당신// 이 이쁨을 모를 이가 있을까?/ 아니지, 모를 이가 더 많겠지” (‘나날들’ 중). ‘나날들’은 이뻐요. 눈부시게 웃고 있어요. 그러나 모르는 이가 더 많다네요. 우리는 눈앞을 흘러가는 ‘나날들’ 대신 무엇에 홀려 있는 걸까요? 

이영종 시인은

2012년에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에 선정되어 2023년에 첫 시집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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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 #시집 #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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