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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권하고 싶은 책] (20)장창영 시인 - 문태준의 '맨발'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에서 들려온 지진 소식은 우리에게 살아 있음과 그 소중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지진 이후 밀려온 쓰나미,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 짧은 찰나의 시간에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아내를 차 밖으로 밀어 살리고 사라진 남편이나 손자의 사진첩을 찾기 위해 죽음의 길을 떠났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족이, 또 아련한 추억이 우리 삶과 어느 지점 쯤에서 대체될 수 있는가를 반문하게 만든다.지진과 쓰나미로 엉망이 되어버린 도시, 도처에 깔린 죽음의 상흔 한켠에서 떠올리게 되는 시가 바로 문태준의 「가재미」이다. 시인은 어느 날 들렀던 큰어머니의 병문안 길에서 "죽음만을 보고" 있는 모습을 통해 그이가 살아 왔던 치열한 삶을 떠올린다. 그리고 병실에 누워 있는 모습 너머에서 지난했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현실을 목도한다. '가재미'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우리에게 삶이란 죽음의 또다른 얼굴로 다가오기도 한다.'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중략)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어쩌면 우리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은 우리 주변에 늘 함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삶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느 순간에 죽음이 삶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나 어떤 특별한 계기들을 통해서, 다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너무 늦어서 후회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얼마 전에 나온 시인의 산문집에는 그의 시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들이 보인다. 산문집 제목도 「느림보 마음」이다. 각종 미디어와 인터넷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느림의 미학'이라니. 이쯤 되면 눈치 빠른 이는 시인의 심성과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알아차렸을 법도 하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맨발」은 각박한 세상에서 우리 주변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일본 대지진의 희생자들도, 지금 이 순간 살아 숨쉬고 있는 우리도 결국에는 맨발에서 와서 맨발로 간다. 이처럼 삶과 죽음, 열림과 닫힘을 아우를 수 있는 시선이야말로 이 시인의 가장 큰 미덕이다. 오늘날 우리는 취직에 힘들어하는 88만원 세대, 장 보기가 살벌한 물가,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부동산 시장 등 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공허한 메아리보다 주변에 따뜻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가 시보다 더 큰 울림과 감동을 준다. 오늘만큼은 우울했던 세상사를 잠시 잊고 문태준의 「맨발」과 함께 멋진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겨우내 기다리던 봄이 성큼, 오고 있다.▲ 장창영 시인은 전주 출생으로 200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으로 등단했다. 전북대 국어국문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현재 전북대 국문과 겸임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3.28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⑦태양의 시인 김해강

해강 김대준(海剛 金大駿, 1903~1987)은 전주 출신의 시인이자 교육자였다. 그는 가친이 학감으로 재직하던 천도교단의 창동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보성고보에 진학하였다. 당시 고모부 최린의 집에 기거하던 그는 명망가들이 자신의 책상을 가운데 두고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사전 협의하던 광경을 목도하고,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일경의 피검을 피하여 귀향하였다. 그 사건으로 인해 상경하지 못한 그는 전주의 신흥학교와 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1925년 진안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부터 신문 지상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마침내 그는 192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새날의 기원'이 당선되었고, 11월에는 「신문예」의 작품 공모에 시 '흰모래 위를 걷는 처녀의 마음'이 당선되었다. 또 부인의 이름으로 공모한 '문자보급가'가 1931년 조선일보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한 그는 식민지 현실을 굵은 톤으로 비판하면서 일거에 중견시인으로 발돋움하였다. 당시 문단을 주도하던 카프가 그의 시를 주목하여 동반자작가의 반열에 편입한 사실이나, 당대의 평론가들이 고평한 사실들이 이를 뒷받침한다.그는 이웃의 시인 김창술과 연배가 비슷하고 시적 성향이 유사하여 잘 어울렸다. 두 사람은 조국의 현실에 분노하면서 서로 도우며 전북 시단을 주도하였다. 김해강은 시편들을 활발히 발표하는 한편, 지역의 청년운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천도교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천도교청년회 전주지회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도내 전역을 순회하며 강연하였다.1935년부터 그는 시전문지 「시건설」을 주재하였다. 중강진의 남인 김익부가 재정을 담당하고, 작품의 선고나 편집은 그가 맡았다. 이 잡지는 일제의 탄압으로 잡지 발간조차 순조롭지 못하던 시기에 유수 시인이나 신인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장이었다. 훗날 대시인이 된 서정주가 자발적으로 투고할 정도로 이 잡지의 명성은 전국에 자자했다. 이 무렵 그는 김남인의 초청을 받아 금강산과 만주 일대를 여행하며 이국정조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정적 경향의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김해강은 단적으로 말하여 '태양의 시인'이다. 그는 시단에 나온 후로 줄곧 식민지 상태의 해체를 노래하였다. 그의 웅건한 음성은 1920년대 시단에 유행하던 장시 형식으로 각종 지면을 장식하였다. 예를 들어 그의 시 '용광로'는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을 녹여버리자는 무정부주의적 사상을 시화한 작품이고, 시 '지주망'은 전국에 걸쳐 감시망을 친 일제의 잔악한 통치방식을 우유한 것이다. 시 '폭치시대'는 1920년대 말부터 식민지 도시인들을 감염시켰던 성적 타락을 폭로한 작품이고, '물레방아'는 일제에게 농작물을 수탈당하는 농민들의 애환을 담은 작품이다. 또 '오오 나의 옛 요람이어'는 전주의 화려한 과거를 회상한 작품이고, 한때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유명한 '가던 길 멈추고' 등은 금강산 8경을 노래한 서정시편이다. 이와 같이 그의 시가 거느리는 음역은 광활하다. 또 김해강은 '별나라'에 동요를 발표하였고, 1940년에는 전주에서 발행되던 동광신문에 소설 '장설라'와 '사랑의 여명' 등을 연재하기도 하였다.해방이 되자 모교인 전주사범학교 교사로 자리를 잡은 그는 이병기를 도와 1947년 전라북도문화인연맹을 창설하는 등 도내의 문단을 바로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또 1959년에 그는 전주문학회를 해체하고 신석정 등과 문인의 집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1962년에는 시력 60년 동안 한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도내의 문학 발전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회원들의 추대로 초대 예총 전라북도지부장을 맡았다.김해강은 교육자로서 한국전쟁 중에 전주고등학교를 자리를 옮긴 후 정년퇴직할 때까지 재직하며 숱한 인재들을 길러냈다.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1968년 퇴임하는 그를 향한 경의의 표시로 성금을 모아 시선집 「동방서곡」을 봉정하였다. 1984년 그는 제자 육기창의 도움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를 발간하여 생전에 두 권의 시집을 갖게 되었다. 1930년 「기관차」를 발간하려다가 검열에 걸려 실패하고, 1942년 「동방서곡」과 「아름다운 태양」을 발간하려다가 좌절되었던 그의 바람이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이 밖에 그는 '전북의 노래'를 비롯하여 '전주시민의 노래'와 '춘향의 노래' 등을 작사하였다. 한때 초등학교 운동회 때마다 시끄럽게 들었던 "모교의 영예를 한 몸에 모아 / 당당히 출전한 우리 선수들"로 시작되는 응원가도 그의 작사에 황덕철이 곡을 붙인 것이다. 또 김해강은 도내 여러 각급학교의 교가를 작사해 주었다. 이 점은 그가 도내에서 존경받는 대시인이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증거해준다.생전에 조국의 해방을 열망하며 태양을 노래하던 김해강은 이상스럽게 그보다 못하고, 시대에 따라 신념도 없이 모호한 행적을 보인 시인들보다 각광받지 못한 편이다. 차라리 그가 남긴 족적이 너무 넓어서 접근하기 어렵다고 하는 게 정직할 텐데, 덕진공원에 시비만 덜렁 남아 시인의 위업을 증언하니 씁쓸하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3.22 23:02

[내가 권하고 싶은 책] (19)극작가 최일걸 -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고전문학은 오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힌 작품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작품이 망각에 묻히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읽힐 수 있는 힘의 근원은 무엇일까? 고전의 지속성은 원형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굳이 칼 융의 원형무의식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간에겐 태고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근간을 이루는 원형이 있다. 고전문학이라 하면 시큰둥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거의 속도의 광기라 불릴 만큼 빠르게 변하는 현대 사회에 와서도 우리가 고전문학을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의 근간을 이루는 뼈대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고 어떻게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밝힐 수 있단 말인가? 고전문학은 결코 진부하지 않다. 고전문학 속엔 과거가 아닌 우리의 내일이 있다.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으로 불리는 햄릿, 리어왕, 오셀로, 멕베스는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는 고전문학에 속한다. 굳이 희곡집으로 접하지 않았더라도 영화나 연극으로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접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재해석되어 자주 연극 무대에 오른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희곡집이 아닌 소설이나 동화로 읽은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접했고, 알고 있는데도 필자가 희곡집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권하는 이유는 셰익스피어가 인간의 원형을 이루는 핵심을 정확히 짚어 그것을 극으로 집대성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삶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깨달음의 길을 열어두고 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대명제로 하는 <햄릿>은 인간의 증오심을 모티브로 한 복수극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갈등하고 번민하는가. 그 고뇌의 깊이를 햄릿에서 가늠할 수 있다. 간계에 속아 질투의 화신이 된 오셀로, 혈육 간의 유대의 파괴를 그린 리어왕, 야망이 초래하는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하는 멕베스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과 마주칠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삶이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각하게 된다.비극은 운명론과 모종의 결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운명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게 아니다. 운명이 촘촘한 그물이라 할 때, 그 씨줄이 외적 요인이라면 날줄은 자기 자신인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서도 외적 요인인 씨줄과 주인공인 날줄이 교묘하게 교차하며 상호 작용한다. 그런데 이 극이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하는 것은 주인공들이 자신의 삶에 주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적 요인에 자신을 그대로 내맡겼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조차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극을 스스로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은 자신의 내밀한 속에 있다. '주체가 되느냐, 개체에 머무느냐?' 햄릿처럼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작가 최일걸씨는 진안 출생으로 우석대를 중퇴했다. 199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2010년 제18회 전태일문학상 소설 부문과 5.18문학상 詩 부문에 당선됐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3.21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⑥전북 계급주의 사단의 개척자 김창술

야인 김창술(野人 金昌述·1902~1953)은 전주 출신의 시인이다. 일제 시대에 그는 유엽, 김해강 등과 전주시회를 조직하는 등 고향의 문학 발전에 공을 쏟았다. 해방 후에 그는 이병기, 김해강, 신석정, 채만식 등과 전북 문단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차에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수복되자 그는 향리를 떠나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1953년 11월 3일 그는 잠깐 외출하겠다고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유족들은 이 날을 기일로 삼고, 가묘를 써서 그를 기리며 봉제사하고 있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의 행적은 자세히 알 턱이 없는 연구자들은 한국근대시사를 그릇 서술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먼저 그는 무학의 노동자 시인이 아니다. 그는 전주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전주의 남부시장에서 순창상회라는 포목상을 하며 넉넉하게 살았다. 두 번째, 그는 시집 「열과 광」을 낸 적이 없다. 이 시집은 당시 조선일보에 출판 불허 사실이 나와 있고, 김창술은 문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시집을 내지 못하는 울분을 토한 바 있다. 셋째, 김창술은 1928년 동향의 시우 김해강과 함께 「기관차」라는 시집을 펴내려다가 그마저 불허되었다. 그는 생전에 변변한 시집조차 발간하지 못한 것이다.김창술은 사상적으로 진보적 색채가 강한 시인이었다. 그가 1927년 발표한 시 '전개'에는 '전북청년동맹위원회에게 보내노라'는 관련 정보가 부기되어 있다. 또 그 무렵에 발표한 시 '군산 해안에서'는 식민지시대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던 신간회의 군산 지부 활동을 암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밖의 시작품들도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는 강렬한 서사를 담고 있어서 문학사가들은 그를 카프 시인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마저 부정확하다. 그는 해방 전에 전주를 떠난 적이 없고, 카프가 전주 사건으로 해산되기 전에 시작 활동을 중단하였다. 그의 전기적 생이 불확실한 탓에 이러저러한 문학사적 과오가 생겨난 것이다. 그 증거는 해방공간에서도 확인 가능하다.1946년 2월 그는 조선문학자대회의 참가를 요청받았다. 하지만 신석정의 출석과 달리 회의록과 출석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다. 도리어 그는 1930년대 초반에 시작을 중단한 이후 작품 생산에 나서지 않았다.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이 시기에 그는 서울과 고향을 오가며 포목을 거래하느라 분주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그가 전쟁 중에 북한군에 끌려가 처형 직전에 탈출했다는 증언과 함께 해방기의 소란한 정국에서 시작보다는 은일을 택한 그의 행적을 유추하는데 도움을 준다.김창술의 시세계를 단적으로 말한다면, 반외세 민족 해방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1920년대 초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이 범주에서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비록 습작기의 작품에서는 개인적 서정을 노래한 작품들이 더러 눈에 띈다. 그러나 그가 강고한 시대 현실과 열악한 식민지적 조건을 직시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구체적 현실을 매개항으로 설정하여 당대의 상황을 응시하여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식민지 민중들에게 시급한 생의 조건은 '절대 평등'의 구현이라고 보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윤리적 명제를 정치적 명제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하였다.이처럼 김창술의 시적 욕망은 철저히 식민지 현실에 기초하여 발아되었다. 그는 일제의 교활한 분열정책에 의해서 민족 구성원 내부의 균열이 발생하고, 식민 당국의 비호를 받는 부르주아지들이 발호하자 그의 시는 집단적 화자를 내세워 당대의 궁핍한 현실을 고발하는데 집중되었다. 이 무렵 전북 도내에서는 옥구 이엽사농장 쟁의 사건(1927. 11), 도내 최대 지주 백인기 댁 습격 사건(1928. 12) 등을 거치며 소작쟁의가 격화되고 있었다. 또 삼례에서는 정미소와 운송점 사이의 임금 문제(1930. 7) 등이 발생하여 노동권의 보장은커녕, 농산물을 수탈당하며 생존을 위협받는 사태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김창술은 시 '앗을대로 앗으라'에서는 농민들의 울분에 찬 분노를 대신하고, '지형을 뜨는 무리'에서는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만치 그는 현실에서 단련된 경험을 토대로 일상적 체험을 시적으로 수용할 만큼 각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그 "문명! 발달이 빠름을 더할 때 일거리를 잃은 자가 버쩍 느나니"('진전')라고 예언할 정도로, 그는 시대의 흐름을 진단하고 예견할만한 예지를 확보하고 있었다.그렇지만 김창술은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시작을 중단하고 말았다. 살아서 시집 한 권조차 펴내지 못한 그의 시편들은 식민지시대의 시사를 조감하는 연구자들이 필수적으로 검토할 만큼 의의를 인정받고 있다. 만약 그가 작품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전라북도의 시단은 더욱 다채롭고 풍요로웠을 터이다. 무릇 서정시를 사소한 개인적 감수성의 표현과 동일시하는 무리들을 대할 적마다, 그의 현실지향적 시편들이 시의 다양성을 웅변하기에 충분하여 삼삼하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3.15 23:02

故박용하 모친, '나의 아들, 진실한 박용하' 출판

지난해 6월 세상을 떠난 한류스타 故박용하의 어머니 오영란 씨(58)가 8개월간의 침묵을 깨고 아들과의 추억을 담은 책을 출판했다. 산케이스포츠는 10일 오씨가 가도카와 서점을 통해 이날 수기 '나의 아들, 진실한 박용하'를 출간했다며 책은 박용하를 중심으로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끈끈한 가족간 사랑이 그대로 담겨있다고 전했다. 책에는 고인의 초등학교 시절의 첫사랑과 실연, 1994년 첫 출연 드라마의 에피소드, 배우 배용준과의 비화 등을 5장으로 나눠 260페이지에 걸쳐 소개됐으며 박용하의 미공개 사진을 비롯해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생전의 마지막 인터뷰도 수록됐다. 오영란씨는 수기를 출간한 배경과 관련, "훌륭했던 가족의 모습을 세상에 남기고 싶다. 용하의 끔찍했던 사고를 잊고 웃는 얼굴로 지냈던 가족의 지난날을 되찾고 싶었다"고 신문에 밝혔다. 오 씨는 이어 "용하가 남긴 자기 인생의 궤적을 이어가는 게 엄마의 몫"이라며 "박용하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주위 사람이나 팬과 함께 웃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렇게 밝은 아들과의 즐거운 추억만을 기억하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후지TV의 인기 정보프로그램 '도쿠다네'도 이날 오전 오 씨와의 인터뷰를 특별 제작해 방송했다. 한편, 박용하의 일본 공식 팬클럽이 주최하는 필름콘서트 '박용하 FILMS 2004~2010 ☆We LOVE Yong Ha☆'도 5일 니가타에서 시작돼 오는 29일 도쿄 공연까지 전국 11군데를 돌며 총 23회에 걸쳐 열린다.

  • 문학·출판
  • 연합
  • 2011.03.11 23:02

'전주시 열린 시민 강좌' 찾은 고은 시인

'떠도는 자'의 한평생 시 쓰기. 바로 고은 시인(78)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지난 7일 미국 '컨템퍼러리 아츠 에듀케이셔널 프로젝트'(Contemporary Arts Educational Project)가 수여하는 '아메리카 어워드'(America Award)의 수상자로 선정된 데에 "황송합니다, 황송해요."라고 답했다."사실 전주에 마음의 빚이 있어요. 2009년인가요. 나를 한 번 오라고 초청했는데, 거절했어요. 내 친구가 전화를 줘서 흔쾌히 오겠다고 했습니다."8일 전주 시청 강당에서 열린 전주시 열린 시민 강좌에서 그는 가람 이병기, 육당 최남선, 고운 최치원 등을 통해 시대와 시의 연결 울타리를 넘나들며 '바다의 시 정신'을 강조했다. 그에게 바다는 우주적이며 자기 폐쇄적인 세계를 벗어나는 것으로 '바다의 시 정신'은 사람들에게 적극 다가가는 시를 쓰겠다는 의지로 읽힌다."한국 근대시의 시초인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알고 있지요? 당시에 바다와 소년이 등장한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한국 현대시의 출현을 알린 사건이죠. 과거엔 우리 시에 바다가 거의 없었어요. 최치원의 시에 중국으로 건너갈 때의 풍랑이 시련으로 조금 언급되기도 했지만, 바다는 우리에게 금역의 공간이자 절망과 죽음의 부정적 대상이었지요."그는 이어 "황진이마저도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 하면 다시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할 제 쉬어간들 어떠리'라고 읊었듯 바다는 두 번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금기의 대상으로 여겨졌다"고 했다. 바다를 중심에 둔 시 정신이 중요하지만, 실제 삶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고민이다."그런 의미에서 육당이 대단한 발견을 한 것이죠. 이제 한국 문학이 바다 앞에서 청장년이 된 것인데, 바다는 시의 운명적 기호로서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겁니다. 한국 현대시는 노 하나 저으며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살아남아 100년인데, 사실은 그 바다가 강력한 원점이 됐다는 것이죠."그는 이어 시인들에게 당부하는 말로 "시를 쓸 때 절로 나오게 하라"면서 "시에 너무 고도의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시 정신에 너무 고취되지 말것"을 조언했다."시에는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많이 읽히는 시가 잘 쓴 시요, 또 하나는 어딘가 숨어 박힌 시가 잘 쓴 시에요. 요즘은 박혀 있는 시가 드물어요. 그게 있어야 하는데…. 시적 불운이 필요해요. 보면 아무 매력도 없는데 어딘가에 기가 막힌 것 말입니다."군산 출생인 그는 1958년 「현대시」와 「현대문학」 등에 추천돼 문단 활동을 시작, 첫 시집 「피안감성」(1960)을 비롯해 시선집 「어느 바람」, 서사시집 「백두산」(전 7권), 「고은 전집」(38권) 등 150여 권에 달한다. 1989년 이래 전세계 20여 개 언어로 번역 돼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된다.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의장, 하버드 옌칭연구소 특별연구교수 등을 거쳤으며, 현재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3.09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⑤전북시단의 개척자 유엽(2)

유엽은 생전에 자가본 시집 「임께서 나를 부르시니」(1931), 장편소설 「꿈은 아니언만」(고려사, 1939; 덕흥서림, 1953), 수필집 「화봉섬어」(국제신보사출판부, 1962) 등을 남겼다. 이 중에서 시집의 원본과 소설집의 초판본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문학 부문 외에도 유엽은 여러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여 큰 족적을 남겼다. 그 중에서 불교와 관련된 그의 공은 놀라울 만큼 크고 넓다. 그는 동경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한용운 스님이 주재한 잡지 「유심」의 발간을 도왔다. 그 후에 그는 금강산 신계사에서 석두 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불가에서는 효봉, 화봉, 금봉 큰스님을 일컬어 '석두하삼봉'이라고 칭하거니와, 그의 사리가 송광사에 모셔진 것도 사형제간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엽은 식민지 시대에는 불교 청년운동에 앞장섰으며, 해방 후에는 불교계의 정화운동에 솔선하였다. 그는 1974년 대한불교봉사활동본부장을 맡아 사회활동에 모범이었고, 특히 불교신문의 주필을 지내면서 학승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의 「멋으로 가는 길」(삼보인쇄사, 1971; 보림사, 1983)은 난해한 불경 「대승기신론소」를 주해한 것으로 선을 멋에 빗대어 쉽게 풀어쓴 해설서이다.일찍이 「금성」을 발행하여 잡지 발간을 경험한 유엽은 해방 후에 '민족문화'를 만들었다. 이 잡지는 여태 원본을 찾을 수 없으나, 문학과 사회에 관련된 당대 명망가들의 글을 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그는 서울신문 논설위원 겸 주필, 대구의 영남일보 주필 겸 부사장, 부산의 국제신보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유엽은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일제 말기에 전진한 하기락 등과 무정부주의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그 이력을 바탕으로 그는 해방 후에 무정부주의자들의 정치적 결사체였던 독립노동당의 외무위원장을 맡았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가 전주 제1선거구에서 낙선하였다.유엽은 교육자로도 활약하여 해인대학(현 경남대) 학장 서리와 마산대학 이사장 겸 학장으로 재직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생활고를 겪고 있던 시인 황석우 등을 교수로 초빙하여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여러 부문에서 활발히 활동한 유엽이지만, 한국문학사나 전북문학사에서 정당하게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그가 일제 말기에 산사로 들어가고, 해방 후에는 작품 발표를 멀리한 탓이 크다. 그의 다재다능한 능력은 해방 정국에서 유효하게 사용되는 대신에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훼방한 것이다.그밖에도 유엽의 집안은 전라북도의 사회운동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의 누나 유보경은 교직에 종사하며 「개벽」 기자로 재직하였다. 그녀는 식민지시대에 애국부인회와 전주여자청년회 등을 지도하다가 영어의 몸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동생 유춘경은 고산 지역에서 개척교회를 이끌어 신도들로부터 추앙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개명한 가문의 자손들이 사회적 책무를 다한 모범 사례로 칭송될만 하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3.08 23:02

[내가 권하고 싶은 책] (17)소설가 박미경 -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새벽녘,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으스스 한기가 느껴진다. 꿈속에서 나는 맨발로 눈 덮인 벌판을 헤매고 있었다. 한 손엔 꽁꽁 언 양동이를, 다른 손엔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빵 한 조각을 들고 있었다. 멀리 눈밭 한 가운데, 불 꺼진 수용소 건물이 짐승의 사체처럼 납작 엎드려 있었다.오래전부터 되풀이 되어온 악몽인데 스트레스가 많은 날이면 항상 어둡고 음침한 눈밭을 헤매다 잠에서 깨곤 한다. 어젯밤에도 나는 노역을 마친 죄수가 되어 수용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길은 늪 같았다. 앞으로 나아가려 용을 쓰는데도 눈 속에 빠진 발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이 악몽을 꾸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5년 때부터다.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었다. 1962년도에 발표된 이 소설은 간첩 혐의로 10년 형을 선고 받고 수용소에 복역 중인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라는 정치범의 하루 일과를 나열해 놓은 중편 소설이다.평범한 농민이었던 슈호프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죄목으로 수용소에서 수감되어 8년 째 복역을 하고 있다. 그는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대우에 저항할 의지도 없고 탈옥 따위는 꿈도 꾸지 않는 단순한 인물로 강제수용소의 지옥 같은 생활도 더 이상 악화되지 않는 게 행복이라고 느낀다.초등학교 시절,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등교시간만 되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증세가 심해, 나중엔 학교 갈 생각만 해도 신물이 넘어 올 정도였다.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지던 어느 날, 학교 교사 증축 공사를 시작하면서 내가 속한 학급이 도서관을 임시 교실로 사용하게 되었다. 도서관은 나에게 신세계였다. 나는 지루한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눈을 피해가며 몰래 책을 읽었고, 6학년이 되어 교실을 옮길 때쯤엔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두 독파할 수 있었다.그 때 내가 처음 손에 잡았던 책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였다. 표지가 너덜너덜한 명작선집 중의 한 권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이 책을 무척 좋아했다. 몇 번씩 반복해 읽는 것도 모자라 책장을 매일 한 장씩 찢어와 다시 제본을 해 읽을 정도였다. "삶은 도망치는 게 아니고 견디는 거란다." 나는 슈호프의 일과를 통해 삶에 순응하는 자세를 배웠다. 나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가르쳐 준 책.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눈 덮인 겨울 들판으로 노역을 나온 나를 소설로 이끌어준 스승이다.투닥투닥 빗소리가 들려온다. 창문을 열어 젖히니 비가 내리고 있다. 빗발이 제법 굵다. 내가 곧 갈 테니 조금만 더 견뎌보라고, 봄이 전령을 보내온 것 같았다. 경칩이 지났다. 세상을 모조리 얼려버릴 것 같던 동장군의 위세도 한풀 꺾였다. 곧 나무에 물이 오르고, 세상천지가 꽃으로 뒤덮일 것이다. 봄은 겨울을 견뎌낸 이들을 위한 포상이다.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의 뒤끝에서도 훈기가 느껴진다. 방범창 창살 밖으로 손을 뻗어 본다. 손바닥에 톡톡, 빗물이 떨어진다. 물비린내가 훅 끼친다.△ 소설가 박미경씨는 경기도 기흥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200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3.06 23:02

"한 권의 책도 여러 시각으로 볼때 참맛 느끼죠"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따져요. 책 모임도 마찬가지라고 봤어요. '오픈 데이'에 각각의 모임은 평소와 다름 없이 진행될 겁니다. 책을 읽는 모습을 평범한 시민들에게 보여줘 자극을 준다는 게 목적이죠."지난해 창립된 전주 독서 모임 연합체 전주시민독서포럼의 대표이자 책모임 온(On)의 대표인 최재덕씨(52). 프리랜서 통역가이기도 한 그는 다함께 책 읽기의 즐거움을 강조해왔다."한 권의 책을 여러 사람의 시각으로 읽을 때 큰 소득이에요. 혼자서 라면 결코 읽지 않았을 책을 (강제로) 접하고 그것의 진가를 배우는 게 커다란 선물입니다. 최고의 유익은 공동체적인 경험이 주는 평온함이에요. 회원의 학력과 경제력이 다양할수록 이 평온함은 커지죠."이런 시도는 인문학 열기와도 딱 맞아 떨어진다. 'CEO 인문학' '백화점 인문학'에서 벗어나 인문 고전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설명."IMF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비참한 상황에 처하면서, 불이 붙은 게 자기개발서에요. 사람들에게 다시 일어설 희망을 줬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개발서로도 근본적인 변화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 겁니다. 경쟁력은 곧 창의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창의력은 곧 인문학에서 나오는 거구요."그는 "지금까지 책읽기에 전혀 성취감을 못 느껴 마음 한 구석이 허한 분들께 월 1회 정도의 독서회 참가를 추천한다"며 "묻어가면 쉽다"고 웃으며 말했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3.01 23:02

책 읽기 즐거움, 시민들과 함께합니다

인문과 실용을 대척점에 놓는 것은 이제 낡은 방식이다. '인문학의 열기'에 힘입어 책 읽는 모임이 늘고 있는 추세. 전주의 독서 모임 연합체 전주시민독서포럼(대표 최재덕)이 다른 독서 단체들과 함께 '오픈 데이(Open Day·3~4월)'를 진행한다.최재덕 대표는 "수많은 독서 모임이 운영되고 있지만, 책 읽기에 대한 부담을 갖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며 "누구나 와서 자신에게 맞는 성격의 모임을 찾게 하고, 책 읽기의 씨앗을 널리 퍼뜨리기 위한 취지"라고 설명했다.모임의 성격은 하나로 규정될 수 없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책읽기를 좋아하는 시민들과의 만남. 학부모 독서회로 출발한 주부 독서회인 책모임 온(On·대표 박진자)을 비롯해 전라북도 우수학습 동아리로 선정된 리더스클럽(대표 유길문)과 꿈나 북클럽(대표 조계영), 전주 인후동 옹달샘 작은 도서관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모임 옹달샘(대표 허재은), 전주 삼천도서관 주민들의 모임 더불어 書(대표 이병무), 공무원과 주민들이 소통하는 삼천3동 독서콘서트 (대표 김정홍)를 꼽을 수 있다.인문 고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고전읽기의 즐거움(대표 이은송)과 담쟁이(대표 황춘임), 생물학·신경과학·역사학의 고전을 돌아가면서 읽는 인간 + X(대표 오항녕) 동시 읽기 즐거움에 빠진 동시 읽는 모임(대표 유희진), 성경 공부와 책 읽기를 병행하는 종이거울(대표 장효근), 생활 속 여성학을 배우면서 인문학 소양을 쌓는 여성 다시 읽기(대표 이영진)까지 다양하다.전북환경운동연합이 진행하는 초록 강좌 수강생들의 모임 행복한 화요일의 책 읽어(대표 허정화)에서는 인문·사회 학습 동아리에 가깝고, 파피루스의 숲(대표 서병철)은 책도 좋아하지만 산을 좋아하는 동아리 성격이 강하다. 독서 지도사와 독서토론 코칭 수강생이 주축을 이루는 청솔모(대표 차미영)와 말·글·길(대표 김순희)를 비롯해 작가 혹은 전문가와 만남이 주선되는 홈엔히즈 독서대학(대표 오정화), 헤드페이크독서회(대표 백용식), 전주 서원노인복지회관의 어르신 모임 서원(대표 이종기), '시대의 스승' 신영복 선생의 책을 중심으로 한 전주 더불어 숲(대표 김성숙)도 인기다.문의 010-7390-3290. cafe.daum.net/jeonjureadingforum/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3.01 23:02

[내가 권하고 싶은 책] (16)김형미 시인-맘 놓고 병 좀 고치게 해주세요

아직은 산이 그쳐 있군요. 바람이 많이 순해지긴 했지만, 나뭇가지에 꽃눈을 내비치긴 이른 때인가 봅니다. 하지만 산은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꽃이 오는 때를 아는 나무는, 애써 빈 가지를 채우려 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다만 때가 되면 가장 아끼는 꽃을 세상에 내어놓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야 열매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지요.나를 주고 나를 얻는 방법을, 자연은 이리도 잘 알고 있네요. 해서 자연은 병이 나지 않는가 봅니다. 설령 막힌 곳이 있어 병이 들었다 하여도, 스스로 치유하는 법을 아는 것이겠지요. 자연을 잘 들여다보면 수(數)가 보입니다. 이러할 수(數) 있는지, 저러할 수(數) 있는지, 상황에 대처할 수(數) 있는 지혜가 열립니다. 자연을 보고 지혜를 얻는 것, 그것이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겠지요.박광수 님이 엮은 「맘 놓고 병 좀 고치게 해주세요」란 책이 있습니다. 신의(神醫) 장병두 할아버지의 삶과 의술 이야기를 구술을 통해 담아놓은 책이지요. 장병두 할아버지는 모든 '앎'을 자연에서 얻습니다. '자연을 주시하고 관찰해서 그 이치와 원리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된 존재가 아닌 전체와 부분의 관계로 파악하는 거죠. 인간을 자연의 축소판으로 보고, 육경신(六庚申)이라고 하는 지독한 정신수련으로 깨달음을 얻어 환자를 대합니다. 자연을 알면 사람의 맥이야 저절로 짚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모든 병은 나로부터 나옵니다. 버리지 못한 나, 비우지 못한 나로 인해 몸이 아프고 삶이 낡아갑니다. 자신을 붙들고 스스로 병을 키우던 자신 안의 자신을 놓아야 건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지요. 나를 바꿀 수 있는 큰 기운, 그것은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그 힘을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의사가 할 몫이겠지요. 그러기에 장병두 할아버지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 눈앞에 드러난 병을 보지 않고, 그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미움이나 증오, 원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면 고를 풀 듯 풀어 없애야만 비로소 새 삶을 살 수 있는 게지요. 즉 훌륭한 의사는 타인의 한을 잘 풀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양의 공부란 언뜻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조용히 관조하면 보입니다.'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도를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라고 합니다.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랫동안 등창을 앓으면서 기른 인내심을 바탕으로 진정한 인술(仁術)을 편 장병두 할아버지. 큰 병은 큰 약을 안고 있습니다. '남자는 등창에 죽고 여자는 발치(拔齒)에 죽는다'고 할 만큼 무거운 중병이 장병두 할아버지와 같은 신의를 내었으니 말입니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틀 밖에서 얻은 지혜라, 틀 안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진짜 의사가 누구인지를.역(易)은 아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실천으로써만이 진리를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장평두 할아버지는 나를 주고 나를 얻은, 가장 큰 꽃이 아닐까 합니다. 살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병 하나쯤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지초(芝草)와 같은 큰 꽃 한 송이 만나는 것으로 신묘년(辛卯年) 봄을 여는 것도 좋을 듯하군요. 그쳐 있으나 매일 조금씩 그 몸을 움직이고 있는 산처럼, 자연 속에서 내내 막혀 있던 수(數)를 찾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김형미 시인은 부안 출생으로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와 2003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지난해 첫 시집 「산 밖의 산으로 가는 길」을 펴냈고, '제6회 불꽃문학상'을 수상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2.2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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