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에 써 준 호…진실한 우정 엿보여
以此二字轉承疋囑. 欲以隸寫, 而漢碑無第一字, 不敢妄作, 在心不忘者, 今已三十年矣. 今頗多讀北朝金石, 皆以楷隸合體書之, 隋·唐來, 陳思王·孟法師諸碑, 又其尤者, 仍?其意寫就. 今可以報命而?酬夙志也. 阮堂幷書.- 바로 잡아주실 양으로 이 두 글자를 쓸 것을 부탁하셨는데 (곧바로 써드리지 못하고) 뭉그적대며 오늘까지 이어왔습니다. 예서로 쓰고자 하였으나 (예서의 범본이 되는) 한나라 때의 비석에는 첫 번째 글자인 '?'자가 없었습니다. 제 맘대로 지어내어 쓸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마음에 넣어두고 잊지 않은 채 이미 3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제가 북조시대 금석문을 공부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북조시대 금석문은 거의 다 해서와 예서를 합쳐서 쓴 모양(예서와 해서의 과도기적 글씨)이었습니다. 수나라 당나라 때에 쓴 진사왕비나 맹법사비는 더욱 그랬습니다. 이에, 이러한 북조의 비와 수·당의 비에 새겨진 글씨의 분위기를 모방하여 마침내 이 '?溪' 두 글자를 완성하였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글씨를 쓰라하신 명령에 보답함과 동시에 가슴속에 두고 있던 오랜 뜻을 시원하게 갚은 것 같습니다. -완당이 쓰고 아울러 글을 지어 붙이다.
?:물푸레나무 침/ 溪:시내 계/ 此:이(This) 차/ 轉:구를 전/ 承:이을 승/ 疋:바를 정(=正)/ 囑:부탁할 촉/ 隸:노예 예/ 寫:쓸 사/ 妄:망령될 망/ 頗:자못(상당히) 파/ 隋:수나라 수/ ?:터 놓을 쾌/ 酬:갚을 수/ 夙:일찍 숙
참 감동적인 글이다. 제대로 된 서예 작품을 창작하기 위하여 30년 동안이나 망설이다니! 추사 김정희 선생의 학자적 풍모와 예술가적 열정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溪(침계)는 추사보다 7세 연하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윤정현(尹定鉉1793-1874)의 호이다. 윤정현은 51세에야 과거에 급제했으나 규장각 대교, 성균관 대사성, 황해도 관찰사 등을 거쳐 7년 만에 병조판서에 오른 시쳇말로 하자면 '고속승진'을 한 인물이다. 병조판서 이후에는 함경감사로 부임하였는데 이 때 추사는 함경도 북청에 유배 중이었다. 함경도 감사로 나온 윤정현이 유배 중인 추사를 잘 보살피고 도운 것은 물론이다. 이런 까닭에 혹자는 왕이 추사를 돕기 위해 일부러 윤정현을 함경감사로 내보냈다는 추론을 하기도 한다. 함경감사로 부임한 윤정현은 추사의 지도를 받아가며 윤정현에 앞서 함경감사로 있던 추사의 또 다른 친구인 권돈인이 발견했던 신라 진흥왕의 황초령 순수비를 재발견하여 바로 세우고 비각을 지어 보존하였다. 뜻이 맞는 친구가 관(官)과 민(民)의 입장에서 서로 협조하여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위대한 일을 해 낸 것이다.
이처럼 추사 김정희와 침계 윤정현은 각별한 사이였다. 그런 윤정현이 자신의 호를 써달라는 부탁을 하였으니 내심 추사는 생애 최고의 역작으로 쓰고자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질박하면서도 호방한 예서로 쓰리라는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웬걸, 예서의 범본으로 많이 사용하는 한나라 때의 비문 탁본을 다 뒤져봐도 '?'자의 예서 글꼴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리 뭉그적거리고 저리 뭉그적거리며 미루기를 무려 30년, 끝내 예서의 글꼴은 찾지 못하고 대신 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인 위진남북조의 북조 비석들과 수나라 당나라 때의 여러 비석 글씨를 참고하여 예서와 해서를 혼합한 형태의 글자체로 마침내 이 '?溪' 두 글자의 현판을 완성하게 되었다. 본래 구상했던 예서체로 쓰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30년 묵은 친구의 부탁을 들어 주었으니 얼마나 속이 시원했겠는가? 그래서 추사는 말미에 "이제야 비로소 명령에 보답함과 동시에 오랜 뜻(숙제)을 시원하게 갚았다"는 호언을 한 것이다. 추사의 학문적 진지함과 예술적 열정을 볼 수 있고 또 친구간의 담백하면서도 진실한 우정을 볼 수 있으며, 그런 진지함과 열정과 담백한 우정을 담은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과 두툼한 글씨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명작이다. 그런데, 윤정현은 왜 그렇게 까다로운 글자를 넣어 호를 지음으로써 추사를 30년 동안이나 고심하게 했을까? 다음 주에는 윤정현의 호 '침계'의 내력과 황초령의 진흥왕 순수비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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