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05 02:37 (Wed)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형미 작가 - 김원철 '가지 많은 나무의 뿌리가 되어'

가을이다. 수확을 앞두고 쌀값 하락과 재고 폭증의 난관에 부딪힌 일부 농민들은 애써 농사지은 논을 갈아엎었다. 사실 농촌지역에 어두운 장막이 드리워진 것이 비단 어제오늘 일인가.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일손이 부족한데다, 쌀 소비량이 현저히 줄어든 현대인들의 생활습관도 농촌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김원철 부안농협 조합장의 자전에세이 『가지 많은 나무의 뿌리가 되어』(2022, 신아출판사)는, 우리가 ‘밥맛이 없다’고 뒷전에 둔 농촌의 현실을 현저히 보여주고 있다. 김원철 조합장은 1998년 부안농협 제10대 조합장으로 취임한 이후, 조합장 6선에 이어 농협중앙회 3선 이사라는 남다른 이력을 지니고 있다. 자그마치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농협의 일꾼으로 고군분투해 온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자전에세이는 개인의 인생사를 넘어 한국 농업과 농협의 역사를 감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조합장 초선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IMF 구제금융 요청으로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금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많은 농업인은 물론 대기업까지 줄도산을 면치 못하는 시절이기도 했다. 부안농협 역시 부안 관내 다른 농협에 비해 정도가 심했다. 과다한 부실대출로 연체비율만 해도 20%를 웃돌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본잠식은 무려 55억 원이나 되었다. 조합원들에게 배당금은커녕 직원들 상여금 주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가지 많은 나무의 뿌리가 되어』에는 당시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몇 날을 뜬눈으로 지새운 그의 고뇌와 좌절, 아픔이 담겨 있다. 합병으로 인한 경영 악화 상태에서 10년이 걸릴 것을 4년 만에 정상화시킨 기쁨도 녹아 있다. 또한 이후에 닥쳐온 농촌의 크고 작은 일들을 온몸으로 맞으며 내린 결단과 그에 따른 결과가 오롯이 농촌의 나아갈 방향이 되어 이어오고 있다. 물론 기존의 관행을 뒤엎고 그 체질을 바꾸기란, 바다를 막아 다리를 놓는 일만큼 쉽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 “벼슬을 사귀지 말고, 사람을 사귀어라!”라고 말해온 그의 신조대로 평생을 사람에 대한 신의를 지켜왔기에 지금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거라. 한여름 뙤약볕과 숱하게 불어오는 천둥 번개, 비바람 속에서도 끄떡없이 조합원들의 버팀목이 되어줄 농협을 만드는 데 일생을 허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농협 본연의 목적대로 농민조합원이 주인인 농협으로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크기가 훨씬 작아진 공깃밥 한 그릇도 많다고 덜어내고, 다이어트 한다고 안 먹고, 출근하느라 바쁘다며 밥 먹을 시간이 없고, 밥하기 싫어서 먹기 싫고, 이런 저런 이유로 건너뛰는 게 밥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밥맛이 없어서 안 먹는 것이 또 쌀”이 되어버린 시대. 김원철 조합장과 같은 이들이, 그리고 수많은 농민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힘들게 지켜온 우리의 농촌이 다시 이 땅의 ‘미래’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우리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오천 년 문화가 담겨 있는 벼농사인 만큼 우리에게 있어 쌀 생산을 위한 농업은,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는 그 이상의 공익적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일이 있어도 쌀만은 지켜야 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김원철 조합장의 자전에세이 『가지 많은 나무의 뿌리가 되어』는, 잃어버린 밥맛이 돌게 하는 특별한 것이 있다. 올가을, 하루 저녁 정도는 책장을 넘기며 그 비법을 전수받아보는 것도 좋겠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10.05 17: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작가 - 조정 '그라시재라, 서남 전라도 서사시'

그녀들이 쏘아올린 역사인식과 방언의 지극함 서남전라도 방언 “그라시재라”는 공감과 연민, 연대의식을 함의하는 따뜻한 온도를 지닌 언어다. 방언이란 공동체 문화역사를 담는, 그 지역 사람들 ‘존재’에 대한 입증이요 삶의 갈피다. 『그라시재라』에서 시인은 시적 자아의 정서와 사유를 시적 대상에 투사하거나 동화시키는 한편 현실을 내면에 포섭, 현실과의 화해 혹은 합일을 모색한다. 괄목할 점은 자신의 모어母語로 내면정서와 사유를 이야기(구체적 용례)로 구현한다는 것이다. 서효인의 발문처럼 1960년대 전남 영암지역 여성들의 실화 “죽음보다 깊은 비극, 삶보다 넓은 희극”인 근현대사의 참혹한 역사가 펼쳐진다. 전쟁으로 인한 이산과 신분박탈, 한국전쟁의 무고한 양민학살, 좌익으로 몰려 자행되던 보복학살, 가난으로 인한 행려병자 등이 속수무책 등장한다. 특히 노작문학상 심사위원회 평가대로 “현대사에서 격락되거나 묻힌 부문을 여성 주인공들의 목소리로 복원, 재구조화는 점에서 여성 서사의 새로운 진경을 열고 있”다. “육요지남서 자네집 식구 줄고 고샅이 호젓했는디 인자 애기 우는 소리 날 것 아닌가” “즈가부지 난리 때 가불고 어찌 사꼬 했는디 옹사건 살림이래도 인자 훈짐이 돌아라” <분통같은 방에 새각시(20쪽)> “지둥에 뭉꺼놓고 죄를 물음서 부연 살을 칼로 뿌어서 죽이는디 눈 뜨고는 못보제. 이놈들아 죽일라면 그냥 죽여라허고 영감님은 소리 지르고 뿌는 것이 머시냐고? 무시국 끼릴 때 한손에 무시 들고 칼로 슥슥 쳐서 넣는 것 모르냐? 그렇게 살을 비어내는 거시여” <지하실이 필요해(52쪽)> “오매 이 사람아 어째 이랑가 못 살 시상 살어났응게 되얐네 그러지 마소” “살도 못 허고 죽도 못 허것소 성님”<산 사람은 살아야지(62쪽)> 독자들이 이 시집을 읽는다면 ‘토벌 때 서방이랑 자석 죽인 웬수인 갱찰서 토벌 갱찰하고 살게 된 떼보각시’등의 질펀한 피울음이 내내 서럽고 아플 것이다. 이런 소중한 독서경험이 그들과의 연대가 가능해지는 지점이다. 표준어와 감각적 표현방식에 길들인 필자 또한 ‘사어死語에 가까운 지역방언만으로 시를?’ 돌올한 의문과 함께 읽기 시작했다. 돌이켜보건대 목포에서 태어나 영암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필자에게는 행운이고 필연이었다. 현재 영암은 사회경제학 측면에서 낙후와 인구소멸지역으로 간단히 정리된다. 그러나 영암은 고대 마한의 무역도시였고 도기문화가 화려하게 꽃 피웠던 곳이다. 월출산의 아름다움과 예술적 정취가 녹아있는 영암에서 『그라시재라』는 영암의 ‘길가메시’요 ‘니벨룽겐의 노래’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생태주의자들이 종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언어 진화를 모색한다면 대표 단수만 옹호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 정 시인은 “전라도 서남 방언을 바탕으로 모어의 확장 가능성과 그 아름다움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밑으로부터의 역사’ 즉 소외계층(여성)으로 한국 근현대사 연구 범위를 확대시킨 역사의식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겠다. 타향을 전전하는 동안 삶이 심드렁해지고 녹록치 않을 때 습관처럼 남도사투리를 읊조린다. 타지의 생경함이나 부침에서 기인된 것도 있지만 귀소본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조 정 시인은 필자에게 한 권의 대서사시와 어머니와 고향을 선물해주셨다. 기명숙 시인은 전남 목포 출신이며,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몸 밖의 안부를 묻다>가 있다. 현재 강의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9.28 16:3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작가 - 이매창 '매창 시집'

시인들에게 부안은 늘 아련한 꿈의 공간이다. 그 꿈의 한가운데 부안 출신 시인 이매창(1573∼1610)이 있다. 매창의 이름은 낯설더라도 이별가의 절창으로 꼽히는 시조 「이화우」는 다 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떠나간 임을 그리워하며 한 생애를 시와 거문고로 달래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 여인의 삶은 이 시 한 편으로 더 애절하다. 그리움의 대상은 장안에 이름 높던 시인 유희경(1545∼1636)이다. 매창의 소문을 듣고 부안에 내려온 그는 매창과 깊은 사랑으로 묶인다. 그러나 서른여덟 길지 않은 매창의 일생을 애절한 상사로 몸부림치게 만든 서럽고 짧은 정의 나눔이었다. ‘임도’, ‘그도’ 아니라 홀대하듯 ‘저도’라고 쓴 것은 무심코 튀어나온 고혹적인 한마디일 것이다. 매창의 시는 대부분 이별의 슬픔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옛 임을 그리워하고, 이별을 서러워한다. 그래서 매창의 시는 편편이 연모요, 그리움이다. 시에 풀어낸 그 마음은 숨결 가파른 절규가 아니라, 먼 곳에 눈길을 둔 사람의 가느다란 읊조림이다. 매창은 풍류와 정취, 삶의 멋, 운치와 풍자, 예지를 두루 갖춘 조선의 대표적인 예인이었고, 그녀의 시재와 거문고 솜씨는 시인 묵객을 설레게 했지만, 자신은 늘 빈방에서 공허에 시달렸다. ‘야속타 그리움 하소 못하고/ 하룻밤 애태우니 머리가 반백/ 그 누가 알 것인가 이 설운 상사/ 가락지 할갑구나, 야위어만 가네.’ 그리움에 가락지가 헐거워진다는 묘사의 아름다움은 ‘가슴 속에 시름 맺혀 옷 적시지 않은 날 없네’라고 이어지지만,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마음은 변함없이 향기로우니, 매창의 생명은 영원하다. 매창은 많은 사대부와 교유했지만, 그들과 시의 벗으로 존재했다. 특히 부안 우동리에 터 잡고 칠산바다 위도를 율도국 삼아 「홍길동전」을 쓴 허균(1569∼1618)은 매창과 십여 년 동안 시문과 인생을 논하며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을 그리던 매창은 차마 님을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부안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매창공원과 매창테마관, 매창시비, 매창길이다. 1974년 매창기념사업회는 부안군청 뒤 상소산 기슭 서림공원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매창이 님을 그리며 시를 짓고 거문고를 탔다는 너럭바위 금대 바로 앞이다. 부안군과 부안문화원은 2001년 매창의 묘를 정비해 매창공원을 조성하고 매창문화제를 열고 있다. 공원에는 「이화우」, 「옛 님을 생각하며」, 「취하신 님께」, 「어수대」 등 매창의 시편들이 커다란 돌에 새겨 있다. 그리움이 사무쳐도 볼 수 없는 애끊는 심정이 담긴 유희경의 「매창을 생각하며」와 매창을 사모했던 허균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가람 이병기와 송수권 등이 매창을 기리며 쓴 시도 만날 수 있다. 2018년 문을 연 매창테마관에선 매창의 삶과 작품 세계가 풍성하다. ‘매창’의 이름을 붙인 ‘매창길’에서 『매창 시집』(2019·평민사)을 펼치면 첫사랑이 아련하다. 최기우 극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다. 희곡집 『상봉』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은행나무꽃』 『달릉개』와 어린이희곡 『뽕뽕뽕 방귀쟁이 뽕함마니』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 인문서 『꽃심 전주』 『전주, 느리게 걷기』 『전북의 재발견』 등을 냈다. 현재 최명희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9.21 16:5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아현 작가 - 이유진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

이전에 다른 책을 통해 아토피를 앓고 있다고 말한 적 있다. 이 원고를 통해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내가 찾아낸 슈퍼 파워는 한편 나를 위한 최면이었다. 그 책을 통해 그럴듯한 위로를 얻은 것이 거짓은 아니지만 사실은 일상생활을 방해하는 아토피 때문에 고되고 우울한 날이 조금 더 많다.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는 아토피, 글쓰기, 페미니즘을 골자로 작가의 투병 경험을 솔직하게 적어낸 에세이다. 아토피를 앓는 동안 겪은 치료 경험이나,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상황, 자기 몸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읽다 보면 가끔은 공감의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아토피 박사’를 자처하며 나를 구원해주고 싶어 안달이다. (중략) 그들의 말을 일일이 들어주기엔 너무 지루하고 짜증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제발 닥쳐!”라고 말하기엔 내가 아직 교양과 이성을 잃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입꼬리를 올리려고 노력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다.”(『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 中) 남몰래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종종 있었지만, 나 역시 속으로 비아냥거리기나 하는 내 성격이 모난 것이라 자책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자의 속 시원한 말에 어찌나 웃음이 나던지! 함께 내 마음을 공감하며 말해주는 것 같아 책을 넘기는 동안 자주 웃었다. “아주 오랫동안 마법 같은 순간을 기다렸다. 한순간에 깨끗해진 몸, 하얀 피부, 누구도 이상하고 추하다고 여기지 않는 얼굴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고, 그것이 좌절될 때마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고통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고통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이라 여겼다.”(『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 中) 저자가 말하기를 시작한 것은 글쓰기를 통해서였다. 오는지 마는지 알 수도 없는 마법 같은 순간을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보다 지금의 자신을 말하고 일으켜 세우는 글쓰기를 선택했다. 그렇게 찬찬히 쌓은 기록을 엮어 책으로 냈다. 이 책을 읽으며 최면 같은 위로도 필요하지만, 냉소적이고 솔직한 감상도 퍽 위로가 됨을 느꼈다. “이 고통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자 나는 덜 수치스럽고 덜 외로워졌다. 그래서 나도 함께 말하고 싶다. 나와 타인 모두를 잠식하는 이 혐오감을 조금씩 덜어내고 싶다. 여기에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 있다. 길거리에서 나와 같은 얼굴, 나와 같은 몸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날을 기다린다.” 저마다의 몸과 얼굴, 우울과 불안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테다.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삶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빛나는 성공사례 말고도 모나더라도 꾸준히 오늘을 견디는 이야기들 말이다. 최아현 소설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9.14 16:4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작가 - 박월선 '닥나무 숲의 비밀'

부드럽고 질긴 한지를 통해 배우는 인생 오래전 박월선 동화작가의 작품 <닥나무 숲의 비밀>을 읽고 한지를 소재로 이토록 흥미로운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얼마 전 한지 관련 글을 쓰기 위해 이 책을 다시 펼쳤다. 한지의 정보를 오롯이 담은 이 동화책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에듀테이먼트 스토리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야기와 정보가 함께 담긴 책이니 즐거움과 지식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한지는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다. 무려 99번의 손길 뒤, 마지막 한 번이 더해져야 한 장의 한지가 탄생한다. 그래서 백지라고도 한다. 닥나무가 한 장의 한지가 되기까지는 삶아지고 벗겨지고 씻기고 햇빛에 말려지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장인의 땀과 굳게 다문 입매와 게으른 줄 모르는 손놀림이 더해져 더 고귀하다. 그러기에 한지가 인간의 위대한 족적을 남기는 도구로 쓰인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이들에게 한지는 그다지 흥미 있는 이야기 소재가 아닐 수 있다. ‘고리타분한 옛날 종이’라는 생각이 앞설 테니 작가의 고민이 컸으리라. 박월선 작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판타지 형식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갔다. 닥나무 숲에서 댕기 소녀를 만난 지우가 아빠로 인해 힘든 현실을 이겨내고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설정한 이야기는 재미와 감동이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안겨 주었다. 이 책에는 대립 관계에 놓인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홍 지장 할아버지, 아버지, 길담이 삼촌. 한지 마을의 지장인 할아버지는 철저히 전통을 고수하는 장인이다. 그렇게 배웠다고 그것이 명품 한지를 만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할아버지가 지우 아빠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더 쉽고 빠른 방법으로 한지를 만든다면 두 배, 세 배의 돈을 벌 수 있으니 한탕주의자 아빠에게 할아버지는 고집 세고 융통성 없는 노인으로 보일 밖에. 결국, 지우 아빠는 쉽고 빠른 방법을 이용해 돈을 벌어볼 요량이다. 그러나 오염된 폐수 방류로 할아버지에게 된통 혼이 나고 만다. 아빠와 대척점에 선 인물은 길담이 삼촌이다. 그는 홍 지장 할아버지처럼 잔머리와 묘수를 쓰지 않는다. 사람의 성품이 그러한 이유도 있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그에게는 한지에 관한 나름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우 아빠처럼 우리는 가끔 목표를 향해 가느라 목적을 잃는 경우가 많다. 목표가 자신이 원하는 지점이라면 목적은 그곳까지 가는 과정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목적을 잃고 헤매는 이들에게 목표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로 <닥나무 숲의 비밀>을 권하고 싶다. 한지로 못 만드는 물건이 없다고 한다. 한지의 우수성은 한창 개발되고 있는 한지 파생 상품을 보면 더욱 실감 난다. 전통을 지키되 나아가 전통이 현대의 기술과 접목되어 그 우수성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 전통을 오래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닥나무 숲의 비밀>을 읽으며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한지의 매력에 푹 빠져 보길 바란다. 김근혜 동화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선물> 로 등단했다. 발간한 책으로는 동화 <제롬랜드의 비밀>, <나는 나야!>, <봉주르 요리 교실 실종사건> 등이 있다. 현재 전주 최명희문학관 상주 작가로 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2.08.31 15:2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준호 작가 - 이희영 '페인트'

가족의 어원은 라틴어 파물루스(famulus)로, 한 남성에게 속한 아내와 자녀, 노예와 가축 등의 소유물 전체를 지칭한다. 이 소설은 태생부터가 종속과 억압의 의미를 담고 있는 ‘가족’이 평등과 자유가 보편 가치가 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사실 가족을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단순하지만 사회학적인 측면에선 아주 복잡다단하다. 가치관이 다른 타인들이 비자발적으로 구성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가족이 끊임없이 소설과 영화 같은 서사의 주된 소재가 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리라. 이 소설의 시간은 가까운 미래, 공간은 NC 센터다. 부모에게 버려졌거나 고아인 아이들은 NC 센터라는 기관에서 보육된다. 아이들은 부모가 되려는 어른들을 상대로 면접(parent’s interview)을 봐야 한다, 이를 NC 입소생들은 영어 발음과 비슷한 은어인 ‘페인트’라 부른다. NC 센터의 역할은 현재의 보육원과 같고, NC 출신에 대한 사회의 차별과 냉대는 심하다. 입소생 중 한 명인 주인공 제누 301은 생각이 많은 아이다. 어서 입양되고 싶은 생각뿐인 또래와 달리 자의식이 강하고 주체적이다. 제누 301은 당당하게 선언한다. 자신은 원산지를 표시하는 농수산물과 다르다고. 나는 그냥 나라고. 부모에게 양육되지 않았다고 불완전한 인간인 건 아니라고. 미래의 제누 301이 당하고 있는 배제와 혐오는 낯설지가 않다. 현재 우리 주변에 있는 외국인 근로자나 조선족, 새터민과 사회적 약자를 제누 301과 환원 가능하기 때문이다. 제누 301은 ‘어른’과 ‘독립’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견을 제시한다. 어른이 다 어른스러울 필요는 없다고. 부모도 자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자녀가 부모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는 걸 배신이 아닌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고. 이렇듯 이 소설은 보편적인 가치와 상식을 위반하고 전복하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NC 센터의 가디언들은 터치 한 번이면 입소생들의 모든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하지만 NC 입소생들은 가디언들의 성(姓)밖에 알지 못한다. 소설 <삼포 가는 길>과 영화 <김씨 표류기>에선 여주인공이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밝힘으로써 남주인공(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완성한다. 하지만 제누 301이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자 센터장인 박은 “여긴 센터고, 너는 NC의 아이다.”라며 거부한다. 박과 제누 301은 서로를 잘 이해하는 사이지만, 박은 한 명의 아버지이기를 거부하는 대신 불특정한 다수의 아버지로 남기를 선택한다. 여기에서도 이 소설의 주제를 엿볼 수 있다. 제목인 ‘페인트’는 입소생들이 NC 출신이라는 사실을 물감으로 지우거나, 자신의 미래를 원하는 색깔로 칠하고 싶은 욕망이 담긴 의미이기도 하다. 어쩌면 작가는 롤링 스톤스의 <페인트 잇 블랙> 가사처럼 가족에 대한 기존의 관념과 질서를 검은색으로 칠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부디, 어서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이준호 작가는 소설과 동화를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할아버지의 뒤주>, <그해 여름, 닷새>, <커렉터>, <탁류의 시간> 등이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8.24 16:5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작가 - 문신 '죄를 짓고 싶은 저녁'

그대에게 숫자를 불러 줍니다. 그대는 숫자들을 기억했다 말합니다. 인류라면 어김없이 7±2개만 다시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마법의 수’입니다. 왜 그럴까요? 한 번에 100개를 회상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라는 진화의 섭리 아닐까요. 요즘 우리의 정신은 많이 갈라지고 흩어져요. 하나에 온전히 몰입할 수가 없죠. 유리컵에 들어있는 낮에 밤의 잉크 방울이 미끄럼을 타고 내려옵니다. 등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을 켰고, 품엔 흰밥을 짓고 있군요. 가로등 불빛이 한곳에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저물녘은 얼마나 오랫동안 한자리에 내려와 골몰을 지켜 왔을까요. 문신 시인의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을 그대에게 읽어 줍니다. 죄에서 crime과 sin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이 지을 죄는 아름다울 거라는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 그의 시를 읽으면 저녁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시인의 저녁은 언제일까요? “싸리나무가 꼿꼿이 일어서면 저녁이다/ 이런 날 바람은 참 건들거리고 조그마한 새들도 풀숲에 들어 기척이 없다/ 비가 내리는 것이다”(‘늦은 저녁때 오는 비’ 중). 싸리나무가 꼿꼿이 일어서는 저녁은 참, 몰두하기 좋습니다. 마음이 구부러져서는 어떤 일에 열중할 수가 없죠. 뒤숭숭해서는 더 안 되죠. “하루쯤 휘청, 하고 그대로 주저앉아도 좋으련만 누군가 묵묵하게 페달을 밟아대는 저녁”이어야 합니다(‘누군가 페달을 밟아대는 저녁’ 중). 저녁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온종일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쓰라리지 않기 위해/ 울음보다 가볍다는 소리까지 몽땅 토해”내야 저녁이 옵니다. 잘 익은 느낌, 생각, 행동을 힘 있게 드러내야 오는 것이 저녁입니다. 시인은 저녁을 “무르익어 무너진 영혼의 잔해”라고 말합니다. 소리를 다 들어내지 않아도 오는 저녁을 바랐던 날도 있었지요. 그게 부끄러웠던 날도 있었고요, 시인이 저녁을 맞이하는 자세입니다. “후박나무는 후박나무답게 저녁을 맞이하고/ 저녁에는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므로/ 견습생 같은 삶이라도 어설퍼서는 안” 되지요(‘신도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이다’ 중). 사랑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는 풍선처럼 가볍습니다. 그럴수록 거리를 잡은 손에 힘을 꼭 주어야 합니다. 그런 저녁이면 “버스는/ 브레히트 서사극의 단역배우처럼 끄떡없이/ 골똘해”지고, “버스에 탄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살아가게” 되겠지요(‘버스’ 중). 낮엔 남을 위한 일을 하기 좋고, 저녁엔 자기를 위한 일을 하기 좋아요. 낮엔 에너지를 내보내기 좋고, 저녁엔 들이기 좋죠. 자신은 저녁을 즐기려 하고, 타인에게는 일하라고 하는 세태가 걱정스럽습니다. 이제 저물녘으로 들어가 이쁜 죄를 하나 짓기로 해요. 한 번에 한 가지만 하겠다는 하얀 궁리를 하는 거죠. 놀 때는 놀기로 해요. 이야기할 때는 이야기만 해요. 걸을 때는 걷기만 해요. 음악을 들을 땐 음악만 듣기로 해요. 잘 때는 뒤척이지 말고 잠만 자요, 눈을 볼 때는 눈만 보아요. 먼 곳을 생각할 땐 먼 곳만 생각해요. 이영종 시인은 2012년에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2020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에 선정됐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8.17 16:2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작가 - 이규태 '한국인의 의식구조'

1960년 소설 「대지」의 작가 펄벅(1892∼1973)이 한국에 왔을 때, 이규태는 그와 여행을 함께했다. 늦가을,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렸다. “저거 봐요.” 펄벅이 외쳤다. 지게에 볏단을 짊어진 농부가 볏단을 실은 소달구지를 끌고 있었다. 첩첩산중 장수가 고향인 새내기 기자에게는 새로운 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펄벅의 흥분은 가시지 않았다. “미국 같으면 지게의 짐도 달구지에 싣고 농부도 올라탔을 거야. 소의 짐마저 덜어주려는 저 마음, 내가 한국에 와서 보고 싶었던 모습이었어.”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의식을 탐사하고 기록하는 일에 생애를 바친 이규태(1933∼2006)의 ‘한국학 시리즈’는 이렇게 잉태되었고, 소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지게에 볏단을 짊어진 농부의 마음은 한국인의 정신과 기상으로 승화되었다. 이규태는 평생 언론인으로 지내면서 120권에 이르는 저서를 냈다. 한국인 마음씨의 원형을 파헤친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한국인의 민속 문화』, 『한국인의 샤머니즘』, 『한국인의 밥상 문화』, 『한국인의 정신문화』, 『한국인의 생활문화』 등은 우리에게 한국인이 누구인가를 깨우치며 ‘한국인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국민필독서’들이다. 저작들의 많은 부분은 1983년 3월 1일부터 2006년 2월 23일까지 24년간 조선일보에 연재한 ‘이규태 코너’에서 비롯됐다. 장장 6,702회. 한국 신문 사상 최장기 연재 기록이다. 그와 전주사범학교 동문인 소설가 최일남은 이 연재물을 “나날의 생활 속에서 불거진 파편 같은 현실에 나름의 줄기를 세우고 가닥을 잡는다.”라고 말했으며,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많은 이들은 “대한민국의 든든한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 것”이라고 애통해했다. 그의 글은 문학작품과 영화로도 태어났다. 1961년 그는 나병 환자의 요양원이 있는 소록도를 취재하고 바다를 메워 ‘천국’을 만들겠다던 그들의 ‘눈물’을 기사로 썼다. 그 기사를 바탕으로 이청준(1939∼2008)이 쓴 소설이 「당신들의 천국」이다. 소설 속 취재기자 ‘이정태’는 이규태였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정전 암흑 속에 좀도둑도 없었다.’라는 제목의 현장 사설은 국민적인 성원을 끌어냈다. 한국의 ‘씨받이 문화’를 세상에 알린 이도 그다. 1971년 취재한 대리모 할머니의 기사를 바탕으로 쓴 칼럼 「씨받이 부인」(1984년 2월 9일 자)이다. 임권택 감독은 이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고, 배우 강수연(1966∼2022)은 19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어릴 적 종이를 처음 보고 너무 신기해서 그걸 자다가 펴보고 자다가 펴보고 반복했다.”라던 그는 “전주 쪽에 철길이 나서 기차가 다닌다는 말을 듣고 땅바닥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보려고 했다.”라면서 고향에서의 추억을 말하곤 했다. 칼럼을 통해 전주를 ‘오두막 기둥에도 붓글씨를 써 붙이고 사는 예향의 수읍(首邑)이요, 먹물 잘 먹기로 옛 중국 천지에까지 소문났던 조선종이의 고장’이라고 표현한 그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전주전동성당, 전주비빔밥, 콩쥐팥쥐의 고장 완주 등 전북의 이곳저곳을 글에 담았다. 고금의 역사와 동서 문물의 귀재를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그의 노고는 글로 남아 한국인의 삶과 의식에 영원히 살아 있다. 최기우 극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다. 전북의 역사와 설화, 인물과 언어, 민중의 삶과 유희, 흥과 콘텐츠를 소재로 무대극 집필에 힘을 쏟으며, 희곡집 『상봉』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은행나무꽃』 『달릉개』 『뽕뽕뽕 방귀쟁이 뽕함나니』 등을 냈다. 현재 최명희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8.10 17:3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진숙 작가 - 목경희 '분홍옷 갈아입고 꽃길을 가네'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자에게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용서해라. 고마웠다. 사랑한다. 잘 가시라? 우리가 그 문턱을 넘어가는 자라면, 지나온 삶에 대한 반성과 용서, 사랑 고백이 필요할 것이다. 나아가 남아 있는 자들에게 행복을 기원해주고 동행했던 지난날들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떠난다는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을까? 답을 찾을 수 있는 책을 만났다. 〚분홍옷 갈아입고 꽃길을 가네〛이다. 이 책은 목경희(어머니)와 박혜신(딸)의 산문집이다. 목경희 작가는 전북춘추(전북일보) 필진으로 활동했고 전북문인협회 상임이사를 연임했으며 여권옹호협회 전북지부장을 하는 등 활동 영역이 넓었다. 박혜신은 국어교사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후 불혹(不惑)을 겨우 지나 세상을 떠났다. 목경희 작가의 고난 극복은 탁월하다. 그녀가 35세 때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둘째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녀는 자신이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지 못하도록 수예를 배우며 지혜롭게 고통을 극복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회갑을 갓 넘은 나이에 의지하고 아끼던 딸을 또 먼저 보내게 된다. 젊은 딸을 보낸 후 기도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자리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알았기에 몸부림을 치며 암울한 동굴에 불을 켰다. 4년만에 이 책을 출간한 것이다. 이것은 딸을 보내주는 의식의 일환이지 않았을까? 박혜신은 위암 수술을 하고 항암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체력이 약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오기도 했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병마를 이겨내려고 노력했다. 친지들에게 남긴 편지에서 “죽음 앞에서 가장 절실했던 건 ‘시간의 가치’였다는 것.”과 “사랑을 잃으면 삶 전체를 잃게 되는 것이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의 가치를 깨닫고 실천하려 애를 쓴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느꼈을 때 “어머니의 사랑의 목소리가 죽음 저편까지도 따라올 것 같아 외롭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죽음을 독대했을 때조차도 평안으로 삶을 정리하는 모습이 일기와 편지에 가득하다. 특히 그녀가 떠나기 3일 전까지 기원을 모아 쓴 딸을 향한 편지는 두 딸들이 엄마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지침서가 되었을 것이다. 목경희 수필가, 그리고 그녀의 고명딸 박혜신 선생님. 그녀들의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날들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언젠가는 삶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그때 가까운 이들에게서 ‘잘 살았다’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그 죽음은 축복이지 않을까? 생의 끝자락이 아름다운 뒷모습이기를 원하는 그대에게 이 책을 권한다.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고교 국어교사로, 201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됐다. 2010년부터 최명희문학관에서 혼불 완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8.03 17:3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작가 - 한정영 '히라도의 눈물'

살다보면 ‘운명의 수레바퀴’에 치여 막다른 길에 서게 되는 때가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암초에 걸린 배가,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서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어 헤매는 것처럼 말이다. 『히라도의 눈물』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 ‘히라도’로 끌려간 도공의 아들 세후의 이야기이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운명에 휘말려 일본 땅에서 살아가야 했던 세후가 부딪혀야하는 현실은 참혹했다. 도공인 아버지는 끊임없이 조선으로 돌아가려하지만 세후는 일본인 엄마를 두고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다마쿠라 장군에게 잡혀가 갖은 고문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가면서도 일본에게 보복하려는 ‘왜벌단’을 돕고, 백자 만드는 흙을 발견했으면서도 ‘왜놈들의 것이 될 그릇을 빚지 않겠다.’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세후는 ‘반쪽 왜놈’이라고 놀림 받고, 또래 아이들한테 두들겨 맞으면서, 도공이 되기를 거부하고 사무라이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자신이 조선에서 태어났고, 채 한 살도 되지 않았을 때 일본에 끌려왔으며, 친엄마가 일본군에 의해 바다에 던져졌다는 진실을 알게 되면서 혼란에 빠진다. 그런 세후에게 아버지는 “그릇을 빚어야 우리가 살 수 있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넌 타고난 사기장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라는 말을 반복한다. 세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자기를 만들면서 비로소 ‘그릇이 아버지의 생명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기장은 그저 그릇을 만드는 게 아니라 물과 흙과 나무와 불로 조선을 빚는다.’는 아버지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결국 세후는 히라도에 내동댕이쳐진 운명의 수레바퀴를 자신의 의지로 돌려놓으며 아버지를 대신해 바다 건너 ‘오란다’로 향한다. 작가는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세후가 아버지와 히라도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구하려고, 도공이 되어 바다를 건너기로 결심하는 과정을 통해, 세후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세후가 서양오랑캐가 득실거리는 ‘오란다’로 떠난 것처럼 살아가는 일은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정답은 알 수 없고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새로운 꿈을 꾸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는 것을 『히라도의 눈물』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장은영 동화작가는 200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통일 동화 공모전에서 수상했다. 그동안 펴낸 책 7권 중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실록수호대>는 전주의 책으로 선정됐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7.27 17:4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아현 작가 - 이순자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작년 겨울, 친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글이 있었다. 바로 이순자 작가의 「실버 취준생 분투기」다. 메시지나 SNS를 통해 간간이 본 적 있는 제목이었다. 게다가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자극했기 때문에 시간이 나면 읽어야겠다는 마음을 늘 품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에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이 늘 그렇듯 쏟아지는 메시지의 파도에 밀려 채팅창 저 뒤편으로 넘어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결국 마음먹은 지 한참 지난 올해 봄에야 링크를 눌러 첫 문장을 마주했다. 해당 글을 포함한 산문집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한차례 링크가 다시 돌고 있던 덕이었다. 그동안 미룬 것이 무색하게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곧장 단행본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그 책이 「실버 취준생 분투기」로 상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 그의 유고 산문집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였다. 이 책은 늦은 나이에 창작을 시작한 그의 노트북 안에 있던 산문 여럿과 소설 한 편을 엮어 만든 것이다. “일흔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이른이다. 이른(일흔) 전(前) 나의 분투기가 이른(일흔) 후(後) 내 삶의 초석이 되길 기원한다. (중략) 사방 벽 길이가 다른 원룸에서 다리미판 위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을 쓴다. 하나, 둘 작품을 완성하는 기쁨은 나를 설레게 한다. 이제 시작이다. 정진하리라, 죽는 날까지. 이른 결심을 축하받고 싶다.”(『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中) 그가 다리미판 위 노트북에 그려낸 호흡을 따라, 삶의 궤적을 따라 나도 때때로 비장하기도, 무력하게 무너지기도, 숨을 가삐 몰아쉬기도 하며 글을 읽었다. 잊고 있던 즐거움을 되짚기도 했고, 흘려보낸 다짐도 다시 새겼다. 기록하는 사람의 궤적인지라 매 순간이 생생하고 꼼꼼했다. 하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것은 비장함도 아니었고, 창작에 대한 욕구도 아니었다. 고소하고 따뜻한 냄새를 솔솔 풍기는 그의 단단한 다정함이었다.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나를 완성하는 참고서 같은 것이라,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달라졌다. 생각을 접고, 계산을 접고, 나눔을 했다. 그래 보니 나눔이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다.” “가만있어도 누군가 살며시 기대온다면 반은 성공한 삶이요, 멀리 있으나 생각만 해도 누군가가 힘을 얻는 이라면 그는 이 세상에 없어도 있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의 든든한 벽이고 싶다.”(『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中) 그의 산문 속에는 단단한 심지와 사려 깊은 어른의 다정함이 곳곳에 담겨있다. 작가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책을 덮고 난 지금까지 내내 다정하고 든든한 벽을 만난 것 같아 기뻤다. 누구나 그렇듯 그도 수많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자주 경계인의 자리에 서 있었다. 동시에 늘 곁에 손 내미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그 손은 마치 내 앞에도 있는 것 같다. 언제든 나와도 손을 맞잡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최아현 소설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7.20 17: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작가 - 단요 '다이브'

2057년 물에 잠긴 서울 2020년,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혼란과 긴장의 연속선상에서 펜데믹 상황에 처한다. 준비되지 않은 펜데믹은 두려움과 공포를 가져왔고, 방향을 잡지 못해 우왕좌왕하기도 했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을 만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게 되고 그 틈바구니에서 작은 해결의 불빛을 잡아나갔다. <다이브>는 2057년 홍수로 물에 잠긴 서울을 배경으로 물꾼 소녀 ‘선율’과 삶과 죽음을 겪어본 기계 인간 ‘수호’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물속으로 나서는 이야기이다. 미래의 서울이 물속에 잠겨 있고,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난민처럼 살아간다. 생존을 위해 물에 잠긴 도시에서 물건을 건져 올리는 아이들 ‘물꾼’. 기계를 고치며 아이들을 돌보는 삼촌, 그러다 물꾼인 ‘선율’이는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아이와 물속에서 건져온 물건 중 최고를 가리는 내기를 한다. 쓸만한 물건을 찾기 위해 바닷속 깊숙한 건물 안에서 기계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기계 인간의 이름은 ‘수호’이다. 수호의 마지막 기억은 2038년에 머물러 있다. 지금은 2057년. 세상이 지금과 같이 바뀐 것은 15년 전이다. 그 시간을 제외하면 기억이 멈춘 4년의 공백이 생긴다. 수호는 그 4년의 기억에 집착한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해 기억되지 않는 과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소설 속 배경은 현재를 살아가는 지구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냈다. 자연재해로 물에 잠긴 도시 서울, 인간의 욕심으로 발명된 기계 인간 ‘수호’ 등 미래 아이들이 바라본 한국은 현재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지금 우리는 현재를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지속 가능하게 유지하고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냥, 그런 세상이 있었던 거야. 없어진 것도, 아주 먼 곳에 있는 것도 눈앞에 불러낼 수 있었던 세상이. 그게 너무 당연해서 만질 수 있는 무언가를 간직할 필요가 없던 세상이.” -<다이브> 본문 이처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세상의 시스템이 완전히 멈추어버리고, 단지 추억의 대상화로만 남아 있다. 또한 ‘수호’가 잊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애쓰지만, 또 다른 인물들도 불편한 과거의 기억 때문에 힘들어한다. 가족의 죽음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혼자서 감당해내며 스스로를 깊은 수렁 속으로 빠뜨린다. 어른도 아이들도 이러한 불편한 기억 때문에 괴로워한다. 잠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느 정도의 기억을 유지하고 살아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생하게 기억되는 과거의 행적도 있지만 대부분을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또 기억해 낸 과거의 일들이 얼마나 많은 왜곡으로 둘러싸여 있는지 알 수 있을까? 결국 현재 자신의 실존에 유리한 기억들로 채워지고, 각색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기계 인간인 ‘수호’의 등장으로 꾹꾹 눌러두었던 잘못된 기억의 실타래가 하나씩 풀어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치유되지 않은 기억을 안고 갈등을 피하기 위해 모른 척하며 외면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 오른다. 잘못 저장된 기억들을 숨긴다고 상처가 아무는 건 아니었다. 상처는 밖으로 꺼내 드러내 보이는 것, 그것이 상처를 제대로 바라보고 치유할 수 있는 과정이지 싶다. 작가는 물에 잠긴 서울을 배경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통해 기억이라는, 과거라는 걸 찾아나서며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왜곡된 기억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디스토피아를 다룬 거라고 여겼지만, 인간이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재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실존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고뇌하는 모습 속에서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이러한 재난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인간은 늘 막다른 길에 서서도 돌파구를 마련하며 시작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책이다. 이경옥 동화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두 번째 짝>으로 등단했다. 발간한 책으로는 장편 동화 <달려라, 달구!> 등이 있다. 지난 2019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사업, 올해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에 선정됐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7.13 17:2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헌수 작가 - 필립 자코테 '순례자의 그릇: 조르조 모란디'

그림이 가진 사색의 힘을 필립 자코테의 언어로 만나보았다. 50여 페이지의 얇은 책은 그림과 글의 닮음으로 가득하다. 이 책의 시작은 <두이노의 비가>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가 여기 있는 건 집, 다리, 분수, 현관, 항아리, 과수밭, 창문, 기껏해야 기둥, 탑... 이런 걸 말하기 위해서인지도 몰라” 정물의 시적 예술성을 완성한 사람은 화가라고 생각하며 필립 자코테는 자신의 삶에 내재된 예술 감각과 모란디의 작품세계를 분석했다. 오래된 사물의 흔적과 고요하고 단순한 선이 주는 평온함, 불투명하고 부드러운 빛, 모란디의 그림을 봤을 때의 느낌이다. 모란디의 작품을 보면 처음에는 뭉클한 감정에 녹아들고 다음 순간에는 자신의 감정에 동요하게 된다. 절제된 감성의 미학을 그려낸 모란디는 삶의 대부분을 정물화를 그렸다. 각각의 물성을 제거하며 단순한 정물의 형태를 배치하고, 음울하게 낮은 채도로 모노톤에 가까운 색조를 사용했다. 깊이감 있는 미묘한 색채와 사색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모란디는 볼로냐에서 거의 떠나지 않고 3평도 안 되는 작은 방 하나를 침실과 작업실로 썼다. 자신만의 소신으로 새로운 경험이나 자극을 불편해했고 거의 은둔하며 살았다. 모란디는 병(甁)의 화가 라 불릴 만큼 정물 중에서도 다양한 병을 모티프로 그렸다, 병치된 물건들을 장식화처럼 그렸다. 다소 지루해질 수 있지만 물체 하나를 더하거나 빼거나 자리를 옮기며 실험해 나갔다. 가시적인 세계에 연관된 것들을 탐구하며, 사색과 예민한 직관, 독특한 질서와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 차분한 붓질 속에서 미묘한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시인 필립 자코테가 모란디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존 버거와 아들 이브버거가 나눈 서간 모음집 <어떤 그림> 때문이었다. 그 후로 모란디의 정물화를 자주 들여다보았다. 그 자리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바라보며 사색하는 시간은 복잡스러운 일상을 해방시켜준다. 혼돈의 세상에서 홀로 떨어져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평범한 물건을 굽어보는 시선에서 강렬한 집중력을 느낄 수 있다. ‘마음속에 이미 다음 수, 나아가 체스판의 전체의 수를 읽으며 자신 앞에 놓인 수를 어떻게 둘지 곰곰이 생각하는 명인’에 비유하며 말이다. 시처럼 아름다운 문장과 뾰족한 생각이 켜켜이 쌓여있다. 정물이라는 주제가 갖고 있는 정형화된 기물의 변주가 시간의 순례자를 끌어당기고 있다. 기다리고 견디며 침묵하고 스며드는 일을 모란디의 그림에서 만났다. 평생 거의 유사한 작업을 반복한 그의 광기, 시종일관 차분했던 그는 계속 변화를 주며 여전히 무언가를 시도했다. 그림이 주는 매력은 다양하다. 화집을 펼쳐보고 그날의 기분에 맞는 그림을 보며 그림이 주는 다정한 위로 속으로 들어가 보자. 평온했던 일상에 교차하는 많은 고된 일들, 무채색의 정물화가 안겨주는 크고 작은 의미가 선명하게 마음을 흔들 것이다. 김헌수 시인은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삼례터미널’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 <조금씩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 시화집 <오래 만난 사람처럼>이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7.06 17: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 - 우오즈미 나오코 '하모니 브러더스'

검색하다 눈에 띄는 책 표지가 있어 클릭해보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두 사람, 무언가 부자연스라운 모습이었다. 독특한 끌림에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주문했다. 그렇게 『하모니 브러더스』를 무작정 만났다. 7년 전 사라졌던 형, 유이치가 불쑥 나타나면서 가족이 저마다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 마치 프로타주처럼 엄마와 아빠, 형과 특히 히비키가 도드라진다. 중학생인 히비키는 중고등학교 통합과정인 중학교에 입학한 우등생이었다. 집을 나간 형으로 인해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공부는 점점 어려워져 성적은 곤두박질치지만, 불안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숨 막히는 현실을 같은 반 후토시에게 은밀한 분풀이를 시작한다. 가끔 엄마가 가꾸는 화분을 밖으로 떨어뜨려 부숴 놓는다. 유이치 형이 돌아왔다. 크림색 원피스에 허리까지 기른 갈색 머리, 오렌지색 입술과 손톱을 하고 어느 날 불쑥 나타났다. 마치 사나흘 집 나가 동생이 잠든 사이 귀가한 것처럼 형은 태연했다. 형이 돌아온 후, 엄마와 아빠는 될 수 있는 한, 서로 마주치는 일을 피한다. 엄마는 형이 목욕하고 나온 욕조를 닦고, 자기 말만 불도저처럼 한다. 엄마의 기에 눌려 자기주장이 없던 아빠가 형에게 머무는 3주 동안 말 걸지 말라고 한다. 가슴 속에 따끔따끔한 것이 어느 때보다 더 많이 굴러다니는 사춘기를 지내는 히비키는 자꾸 형이 내는 소리가 거슬린다. 모두 불편한데, 유일하게 형만 여유로운 자유를 만끽하는 것만 같다. ‘이게 바로 저예요. 아버지! 숨 막혀서 나갔지만,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돌아온 거예요. 아버지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바로 진짜 나!’ 당당한 자기를 보이는 형과 히비키는 달랐다. 뜻대로 안 되는 공부, 남모르게 하는 화풀이 대상인 후토시, 화분. 결국 끝은 분명히 있어서 후토시가 히비키의 속마음을 알아차린다. 약속한 3주가 지나고 떠나기 전 형이 작곡한 음악은 화해로 바꿔 놨다. 집에 돌아와 가족의 소리를 주워 담은 소리로 용기를 내는 히비키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후토시에게 손을 내민다. 동네에 있는 ‘양말 공장과 스타킹공장’을 ‘남자공장과 여자공장’이라고 말하는 편견처럼 우리는 가끔 보고 싶은 대로 보려고 한다. 일방적인 시각을 모두 나처럼 볼 것이라 착각한다. 가족이니까 오히려 말 못하고, 반대로 가족이니까 걸림 없이 아무 말이나 한다. 어쩌면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사실 가족은 보이지 않는 틈새가 많을 때가 있다. 너무 더웠던 여름 한낮, 나는 아들과 너무나 다르고 같았던 얘기로 소리를 높였던 적이 있었다. 이제껏 반항 없던 아들이 슬리퍼를 신은 채 서울로 가출했다. 나는 아들의 큰소리가 화났던 것이 아니었다. 글 속에 ‘양말공장’을 남자공장이라고 하는 것처럼 일방적인 내 말만 한 것을 깨닫지 못한 대화였다. 우기니 내 말을 이해 못하는 건 당연했다. 오히려 지금에서야 아들과 잘 소통하고 있다. 형 유히치는 성정체성을 찾는 과정이다. 가족의 이해보다 자기존중이 우선이다. 자기의 진짜 모습을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환멸을 느낀다. 만약 내 아이가 성정체성으로 혼란을 겪는다면 흔쾌히 기뻐할 부모는 없을 것이다. 여기 나오는 부모처럼…. 아들이 밖에서 소변을 보지 않으려고 하루 종일 참는다는 말에, 자식 잃어버릴까 봐 수술에 동행한 부모를 뉴스에서 보았다. 내가 이해할 일보다 자식을 먼저 보는 마음이 얼마나 먼 얘긴지 알기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우오즈미 나오코의 문장은 간결하다. 얇은 부피의 책 안에 가감 없이 표현하지만 섬세하고 단출하다. 주변인물인 후토시가 살아서 움직이는 묘사는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글에는 상처보다는 성장의 메시지가 있어서 희망적이다. 『불균형』,『원예반 소년들』,『하고 싶은 말 있어요.』,『에이 바보』 비록 찢어진 상처지만 봉합해 아물게 해주는 많은 이야기를 권해본다. 김영주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마키코 언니’로 등단했다. 2018년 동양일보 동화부문에서 ‘가족사진’으로 신인문학상 수상했다. 동화 ‘레오와 레오 신부’와 청소년 소설 ‘가족이 되다’가 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2.06.29 16:3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박태건 작가 - 김영관 '나의 문턱을 넘다'

날이 흐리다. 반쯤 열어둔 창 안으로 습한 공기가 밀려온다. 아스팔트 도로위로 내리꽂히는, 함성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고 싶다. 비 오는 날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내 앞엔 ‘갓 구운 빵’ 같은 시집이 있다. 김영관의 시집 ‘나의 문턱을 넘다’(천년의 시). 세상에 나온 지 채 보름이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시집이다. 이미 김영관 시인은 ‘박새 몇 마리 귓속에 살다’,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아’, 수필집 ‘11남매 이야기’를 냈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김영관은 대가족의 일원으로 성장하며 도시에 살지만 고향에 마음의 뿌리를 두고 산다. 농부는 땅에 묻혀도 계절이 바뀌면 다시 태어난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온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산나무에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상상력에 깃든다. 김영관의 시에는 가난하지만 희망을 잊지 않고 사는 순박한 시간들에 대한 경의로 가득하다. 도시의 생활이 각박할수록 순수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 또한 간절해진다. 이 간절한 마음을 찾아 김영관의 시심은 더욱 깊고 따뜻한 곳으로 뻗어나갔을 것이다. 시집 곳곳에 나타나는 생동감 넘치는 표현은 자연에 대한 경의로 야외에 나간 인상파 화가 같다. 김영관은 교사 시인이기도 한데 5부에 수록된 ‘시로 쓴 생기부’는 제자들에 대한 인상으로 풍성하게 그려낸 풍경화같다. 그런데 생기부에는 객관적이고 개량화된 내용으로만 채워져야 했다. 그래서 그가 제자의 인상을 정성스럽게 받아 적은 글들은 시가 되었다. 학생들이 집에 돌아간 저녁의 교무실에 홀로 남아서 생기부를 시로 쓰는 김영관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빗소리가 교실 창문을 넘어 올 것만 같다. 시집을 덮으며 카라바조의 그림 <의심하는 성 토마스>가 생각났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도마(토마스)에게 스승이 말했다.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그런데 제자는 정말로 스승의 몸에 손가락을 넣는다. 옷자락을 헤쳐 보이는 스승의 모습은 착잡해 보인다. 망설이면서도 상처를 만져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제자의 표정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카라바조는 흑사병 이후, 발흥하는 종교개혁의 요구와 이성주의 태동을 의심하는 도마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시를 읽고 나자 눈이 아프다. 상처를 후비는 손가락 같다. 자고나면 물가가 뛰는 세상이다.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김영관은「나무를 새기며1」에서 시 쓰는 행위는 곧 나무에 상처를 새기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는 ‘토마스’처럼, 시인은 조각도를 들고 나무에 기억의 무늬를 새긴다. 인간이 살아온 무늬가 곧 인문(人文)이다. 김영관이 보여준 가치는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던 오래된 가치다. ‘좀처럼 길을 내주지 않는 나무에 조금씩 새기는 시인의 길은 안 보이는 것을 상상하는 힘으로 단단하다. 김영관의 무늬를 손끝으로 따라 읽으며 올 여름은 여여하겠다. 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박태건 시인은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시와반시 신인상, 불꽃문학상을 받았다.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를 비롯하여 인문서 『익산 문화예술의 정신』, 『마을, 오래된 미래를 담다』, 『익산, 도시와 사람』, 『전북의 재발견』, 『전북문화지도』, 『강을 거닐다』등을 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6.22 16:3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오은숙 작가 - 김다연 '우연히 잡힌 주파수처럼, 필라멘트처럼'

『우연히 잡힌 주파수처럼, 필라멘트처럼』을 읽고 나는 자주 부끄럽고 지난한 삶에 짓눌려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곤 한다. 지병이 되어버린 무기력증은 스무 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젊은 날의 나는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어떤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고 고백한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을 외우며 무기력증을 떨쳐내곤 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시인의 고백은 내게서 힘을 잃었다. 무기력증이 엄습할 때마다 삶의 동력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몰라 버둥대다 바닥이다 싶을 때까지 내려간 뒤, 겨우 올라오기를 반복하였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무기력이 일상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어느 날, 김다연 시인의 시집 『우연히 잡힌 주파수처럼, 필라멘트처럼』을 만났다. 무얼 해도 기운이 나지 않았기에 시를 통해 어떤 영감을 받고 삶을 치유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책장에 꽂아져 있던 파스텔블루 표지의 『우연히 잡힌 주파수처럼, 필라멘트처럼』이란 시집이 제목처럼 내 손에 우연히 잡혔을 뿐이었다. 그렇게 펼친 시집에서 “머리와 가슴 사이/우물이 있다//생각은 짜고/감정은 차갑다//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좋았으리,//그것만 퍼내면/된다”는 「시인의 말」을 접하고 순간, 멈칫했다.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그것만 퍼내면/된다”고 말하는 시인이 나를 꾸짖는 듯했다. 절망하지 않으려고 욕망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차가워진 감정. 해서, 무기력한 삶을 어찌하면 좋을 것이냐고 반문하는 것도 같았다. 어찌 살라는 것인데, 하며 다소 공격적인 마음으로 첫 시 「은행잎지전나비」를 읽었다. “새살이 밀어내는 딱지처럼 몸속의 푸른 독毒 뿜고서” 살아가고 있다 생각하면 더욱 무기력해질 뿐인데 시인은 “이 얼마나 눈부신 날개인가?”라고 말했다. “밤마다 가려운 쪽으로 기우는 나무,”가 나임을 알기에 뒤척임 없이 잠들었다가도 가려워 깨고 마는데 시인은 또 노래했다. “상처 아물리던 그늘이 날개였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울컥’을 삼키자/코뚜레가 뚫렸다”로 시작하는 「38도9부」에서 시인은 내게 보여주었다. 살아 있어 느끼는 절망과 고통 속 열병 끝에 있는 것은 무기력이 아니라고. “손가락을 내 머리에 겨누는 버릇이 생겼”다 해도 “빈 총에 쓰러져줄 줄 아는 애인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놓지 않으니 「방아쇠 증후군」은 희망이었다. 시집을 끝까지 읽고 난 후에는 무기력증이 사라졌고 “여그가 그라고 안 좋다 안 흡디요!”「뭐뎌」라며 다시, 삶을 긍정하게 되었다. 만약에 당신이 나와 같다면, 시집을 펼치고 글자를 읽어 나가자. 오독(誤讀)하여 더욱 좋았던 「아카시아」를 비롯해 「한도를 초과한 말」, 「가라앉히다」, 「정지론」 등 많은 시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문신 시인의 해설과 김유석 시인의 추천 글도 당신을 맞을 것이다. 어떤 시는 분명, 당신의 삶에 『우연히 잡힌 주파수처럼, 필라멘트처럼』 생기를 불어넣으리라 믿는다. 오은숙 소설가는 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납탄의 무게’가 당선돼 소설가로 등단했다. 공저로는 <1집 스마트 소설>,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은>, <2021 신예작가>가 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2.06.15 17:3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작가 - 김병용, 문신 외 '천이두 다시 읽기'

누구나 장편소설 몇 권쯤의 사연이 있다. 그의 삶이 특히 그렇다. 그는 아물 수 없는 상처들의 의미를 추적하며 한 생을 살았다. 한(恨), 그 자체를 자기 삶으로 여기며, 우리 삶의 그늘에 드리워진 애달프고 응어리진 마음을 달래고 어루만졌다. 문학평론가 하남(何南) 천이두(1929∼2017). “도피할 수도, 망각할 수도 없는 것을 한이라고 할 때, 그 한과 익숙해지면서 그 한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길을 찾을 수는 없을까, 한국인으로서 자아를 정립하는 길을 찾을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어둠과 밝음의 경계에 드리워진 모호한 세계, 상실과 좌절과 원망과 한탄의 삭임 속에서 아련하게 피어나는 세계. 원통하고 기막힌 일들을 ‘기똥차게’ 풀어줄 한의 미학을 찾아 나선 그는, 한을 넘어서는 길을 세심하게 살펴 들려주었다. 원한에서 한탄으로, 한탄에서 체념으로, 체념에서 삭임으로, 삭임에서 화해로, 화해에서 지혜로 이어지는 상생. 민족의 한을 기록하는 일은 묵은 시대를 떨쳐버리고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는 길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다. 전북대학교와 원광대학교 강단에 선 그는 뚜렷한 학문 세계를 추구하며 학자의 책무에 충실했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못지않게 후학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그에 대한 깊은 신뢰는 문학평론가와 판소리연구자, 교수, 소설가, 발행인, 문화예술단체 수장 등의 권위에 기대 붙여진 허명이 아니었다. 시대의 진실을 바라보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선과 논리의 타당성, 그리고 판소리 ‘쑥대머리’와 ‘군사설움’의 흥을 아는 인간적인 멋 때문이었다. 그는 1980년대 혼란스러운 시국에도 옳은 일은 강하게 주장했고 그른 일은 어떤 압력에도 끝내 굴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우리는 숱한 의혹의 오리무중을 겪으며 살아왔다. 그런 의혹의 오리무중이 세월이 흐를수록 시간의 이끼를 뒤집어쓴 채 민족사의 바른길을 곳곳에서 가로막고 있다. 올바른 일에 대한 국민적 냉소주의와 미래에 대한 집단적 허무주의는 여기서 온다. 이런 모든 병적인 요인은 이제 제거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공명정대한, 정의와 진실이 일월(日月) 같이 살아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천이두는 삶을 작품에 투영하는 단순한 증언자나 기록자가 아니라 특별하고 내밀한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연구자다운 연구자, 작가다운 작가였다. 자신의 문학을 일으킨 텃밭의 소중함을 알고, 이곳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며, 고유한 것을 찾아 특화했다. 정의와 평등, 균형과 조화가 어느 때보다 서러운 지금, 천이두의 삶과 시대 의식과 문학적 관심과 비평 세계를 다시 새기고 널리 알리는 일은 그래서 더 절실하다. 김미영•김병용•김영미•문신•박태건•서철원•임명진•최동현•현순영 등 후배 연구자들이 웅숭깊은 그의 비평 세계를 되짚어본 『천이두 다시 읽기: 한을 넘어 비평을 넘어』(모악•2022)는 긴 호흡으로 이어질 ‘추앙’의 바른 시작이다. 이런 책은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삶을 다잡는 든든한 벗이 된다. 최기우 극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다. 전북의 역사와 설화, 인물과 언어, 민중의 삶과 유희, 흥과 콘텐츠를 소재로 무대극 집필에 힘을 쏟으며, 희곡집 『상봉』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은행나무꽃』 『달릉개』와 인문서 『꽃심 전주』 『전주, 느리게 걷기』 『전북의 재발견』 등을 냈다. 현재 최명희문학관 관장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6.08 17:2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지호 작가 - 이근영 '심폐소생술'

반성문을 마지막으로 쓴 때는 고등학교 2학년 봄이었다. 교문에서 복장단속을 하던 선생님께서 내 두발 상태를 지적했다. 선도부원이 다가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눈썹과 귀를 넘어선 머리카락을 무쇠 가위로 댕강 잘랐다. 삐죽 솟는 까치머리를 꾹 누르고 선무당 가위질하듯 머리카락을 잘랐으니 헤어스타일이 볼만했을 것이다. 종일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을 자주, 쓸어내렸을 것이다. 하교를 하며 죽마고우들을 꾀어 삭발을 했다. 남원 사람이었던 장수읍 양조장 위 현대 이발소 아저씨가 ‘아따! 야들이 이제 공부를 할랑갑다.’ 하며 머리카락을 말끔히 밀어주었다. 다음날 걱정하며 등교를 했으나 별문제가 없었다. 몇몇 선생님들은 칭찬까지 해주었다. 다만 여자친구들을 비롯해 어여쁜 후배 여학생들이 사모하던 옆집 총각이 출가라도 하는 것처럼 퍽 서러워했다. 교복이 승복 같아서 더 그랬을까. 우리는 곧바로 ‘핵인싸’가 되었다. 우리를 보기 위해 막 복도에 여학생들이 꽉 들어차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였다. 라고 기억하고 싶다. 다음날 동급생들이 죄다 삭발을 하고 나타났다. 덕분에 현대 이발소를 비롯해 은혜, 창동, 홍콩 이발소가 돈 좀 벌었을 것이다. 우리들 삭발에 친구들 삭발이 더해지니 집단행동으로 보였던가 보다. 본보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는 얼떨결에 집단행동의 주동자 되어 지금으로 말하면 학폭위원회 같은 것에 회부되었다. 수업에 들어가고 싶었으나(진·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며칠 동안 운동장에서 풀을 뽑았다. 비듬 같은 붉은 먼지가 학교 운동장에 자욱하게 날렸다. ‘홍진’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때 반성문도 많이 썼다. 반성 없는 반성문도 문장이라면 문장이니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봄부터 지금까지, 그전에도 반성문은 학생들만 쓰는 것으로 알았다. 요즘은 반성문 대신 명심보감을 쓴다는 데 그런 것들은 모두 나 같은 불량품만 쓰는 것으로 알았다. 그 시절 선생님들이 사용했던 말처럼 티눈 같은 존재, 쥐젖 같은 놈들이라 불렸던 문제아들만 쓰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시인도, 어른도, 국어선생님도 반성문을 쓴다는 것을 이근영 시인의 시집 ‘심폐소생술’을 통해 알았다. 이런저런 껍데기 다 걷어내고 심층을 들여다보면 시들이 한결같이 반성문인데…… 배가 가라앉을 때를 대비해 심폐소생술을 익히라고 명령한, 혹은 현장체험학습과 관련된 26개의 공문서 작성을 요구한 관청 사람들, 졸업식 끝자락에 학위 수여증을 찢으며 열정, 희망 같은 것을 너무 일찍 내려놓은 청춘들, 사랑과 돈과 명예를 향한 사다리에서 미끄러진 삼류 아웃사이더들, 실내화를 대신해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 꽃 같은 아이의 뺨을 후려갈겼던 선생 같은 것들, 아버지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대신해 혹은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근영 시인이 반성문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집을 읽고 나서 알았다. 불량품으로 살아온 우리의 과거를 위해, 티눈으로 살아갈 다음 세대 몇몇 청춘들을 위해, 그래도 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꽃잎 같은 것들을 위해 이근영 시인이 소주를 잉크 삼아 반성문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집을 읽고 나서 알았다. 황지호 소설가는 전북 장수 출생으로,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됐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6.01 22:1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 - 황경택 '자연을 그리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연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야생화를 보기 위해, 색다른 식물을 관찰하기 위해 자연으로 나서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덩달아 최근에 부쩍 자연을 다룬 책이 주변에 넘쳐나는 것을 느낀다. 아마 숲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겠지만 우리 집에도 숲 이야기를 다룬 책이 하나 둘 쌓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예전에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거나 글을 쓰고 싶었다는 이들의 의외로 많다. 누구나 어린 시절 벽에 한 번쯤 낙서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피폐함에 찌들다 보니 어느새 꿈은 사라지고 후줄근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허무해하기도 한다. 그래도 가끔 삶에 찌들 때마다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충동이 혹시 일어나지 않았던가. 사실 나도 그런 부류의 사람 중 하나였다. 이 책은 당신의 기억 저편에 자리 잡고 있던 어린 시절의 꿈에 다시 불을 지피기에 충분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황경택은 만화가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생태놀이 코디네이터이자 생태 관련 책을 여러 권 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신문과 잡지에 만화를 연재하다가 우연히 숲을 만난 이후 그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10년 넘게 <황경택의 생태놀이 연구소>라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뚝심 있게 그 자리를 지켜왔는가를 알 수 있다. 황경택의 『자연을 그리다』는 자연 관찰과 이 결과물을 그림으로 표현해내는 방법을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은 그림에 대해 막연하게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졌던 이들이 그동안 잊고 지내던 자연 앞으로 한 걸음 나설 수 있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자가 직접 그린 꽃과 나무를 다룬 세밀화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풀부터 나무, 그리고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의 소재까지 그림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저자는 펜으로 그려낸 따뜻함과 섬세함으로 자연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특히 내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모든 그림에는 이야기가 있다.”라는 구절이었다. 그렇다 우리 삶도, 그림도 이야기를 빼면 재미가 없다. 평범한 그림도 이야기가 곁들여지면 다시 한번 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느낌은 푸근함과 풍요로움이다. 아마도 이 책을 다 덮고 나면 당신도 책을 따라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질지 모른다. 나 역시 덕분에 화방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한참 고생했다. 가끔 우리는 우연의 힘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내가 그랬듯이, 이 책이 당신이 삶의 뒤켠으로 밀쳐두었던 ‘그림’이라는 매체를 바탕으로 자연에 성큼 다가서게 해주리라 믿는다. 올해가 끝나갈 무렵, 당신이 자연을 따라가며 그리워하고 감동했던 흔적이 멋진 그림으로 환하게 변할 수 있기를 응원한다. 장창영 시인은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 와 문학이론서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을 펴냈다. 그동안 다녀온 여행기를 여행잡지 <뚜르드 몽드> 에 연재하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5.25 17:4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작가 - 존재의 구멍, 찬란함의 무늬

찬란한 것은 짧다. 맹렬한 녹음이 도착했다. 왜 살아야 하는가? 근본적인 몇 다발의 의문이 빛 그물에 걸린다. 척박한 대지 음울한 하늘, 지상의 꽃들을 찬양하려면 지구의 감각에 기댈 수밖에 없다. 청소년은 백인백색의 세계와 맞닥뜨릴 때 성장한다. 학교와 집, 학원이라는 제한된 환경에서는 타자와 사회에 대한 탐구심이 깊어질 수 없다. 필자를 충격에 빠뜨린, 청소년 소설 <합체>와 <맨홀>은 그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박지리는 작가 수업을 받아본 적 없는, 문학판과 교류 없이 글만 썼다. 스물다섯에 첫 작품 <합체>를, 서른한 살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끝으로 2016년 세상을 떠났다. <합체>의 주인공은 키 작은 고3 쌍둥이 합과 체다. 체가 계도사를 만나 키 크는 비법을 전수받고 323일 동안 수련을 위해 계룡산 형제 동굴을 찾아간다. 계도사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동굴 알게 돼 도중(화나서)에 돌아오지만 결국은 개학날 교복 바지가 현격하게 줄어들어 있다. 계도사가 아닌 난쟁이 아버지가 성장 비법을 가르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의 탄력도란다. 실수로 잘못 쏜 공이 땅에 떨어지더라도 그대로 깨지지 않고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는 힘” “쇠공이나 유리공 같은 건 아무리 강하고 예뻐도 좋은 공이 될 수 없지. 다시 튀어 오르지 않고 땅에 박히거나 깨져 버리니까”(<합체>65쪽) 진정한 비법을 듣고도 여전히 주인공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큰 공’을 쏘고 싶어 한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는 난쟁이라는 ‘도시 빈민’ 상징을 통해 사회 현실을 고발했다. 반면 <합체>의 난쟁이 아버지는 ‘튀어 오르는 공’의 비유를 통해 쪼그라든 우리에게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다는 ‘성장 메시지’를 전한다. <맨홀>은 막을 수 없는 ‘존재의 구멍’을 탐구한다. <합체>가 코믹하다면 <맨홀>은 ‘살인을 저지른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어둡고 무겁다. 또 <합체>가 장르의 혼합을 꾀한다면 <맨홀>은 ‘의식흐름기법‘으로 맨홀을 추적해 나간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피해 누나와 함께 헤매다 수상한 맨홀 안으로 들어가 안식을 느낀다. 뚜껑을 처음 연 날 주인공은 악몽을 꾼다. “머리에서부터 몸통 다리까지 내 몸은 점점 구멍 속으로 야금야금 먹혀 들어갔고 나는 그곳에서 빠져나오려고 필사의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맨홀>91쪽) 주인공은 존재의 구멍(무의식, 공허, 진실 등)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함께 들어갔던 누나는 어른이 되어 더는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을 떠난다. 존재의 구멍은 본질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누구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각기 삶의 의미를 규정하면서 벗어난 것처럼 연기를 하는 것이다. 즉 <맨홀>은 우리가 벌이고 있는 연극을 까발리고 있는 셈이다. “나는 언제나 인간관계란 하나라도 틀어져 버리면 돌이킬 수 없게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집에서는 학대를 당하면서 밖에서는 완전 순결무구한 것만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맨홀205>쪽) 자라온 환경이나 유년기 기억은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평생을 지배한다. 주인공은 악마 같은 아버지가 사라지면 제대로 된 삶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살인에 가담함으로써 ‘폭력의 절정’에 선 것은 본질의 구멍이며 인생의 아이러니다. 읽는 내내 내러티브의 유사성이 전혀 없지만 가정과 학교라는 제도에 의해 서서히 파괴되어 가는 청소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헤르만 헤세를 떠올렸다. 분명 고통받았을 ‘작가적 감수성’이 돌올해서일 것이다. 헤세는 “작품을 창조해내는 것은 포도주와도 같아서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라고 하였다. 어찌하여 박지리는 서른한 살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등져버렸을까! 헤세처럼 정원을 가꾸고, 낙엽을 태우며 마법 같은 글을 지속하여 헤세처럼 85세를 살다 갈 수는 없었을까! ‘존재의 구멍’을 어쩌지 못하고 삶의 끈을 놓아버린 천재 작가 박지리의 생몰이 그리하여 너무도 안타깝다. 기명숙 시인은 목포 출신으로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로 당선됐다. 글쓰기 센터, 공무원 연수원 등에서 강의 중이며 시집으로 <몸 밖의 안부를 묻다> 가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5.18 17:44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