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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작가 - 전은희 '지구를 살리는 특별한 세금'

기후 정의를 위한 환경세 많은 매체에서 이상 기후에 대한 문제를 접하는 일은 흔한 일상이 되었다. 거기에 맞춰 지구 환경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어제오늘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기후 온난화로 인한 우리가 직접 체감하는 기후 위기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대기 중의 온실가스가 늘어나는 활동을 멈추거나 감소시키지 않으면, 결국 지구상에서 생명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거라는 경고는 이미 시작됐다. 이러한 위험성을 진작 인지하고 세계 각국에서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 중 하나가 세금 정책이다. 지구를 살려보려는 궁여지책의 선택이라고나 할까? 세금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구를 살펴야 할 일이지만 개인과 기업, 정부까지 안일한 상황에서 조금은 지구 환경에 눈을 돌린 결과라고 보여진다. 얼마 전, 어린이를 위한 비문학 서적으로 환경을 지키기 위한 세금에 관련한 책이 나왔다. 전은희 작가가 저술한 것으로 《지구를 살리는 특별한 세금》이라는 제목처럼 환경을 지키는 세금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쓴 책이기는 하지만 환경세가 얼마나 다양하게 부과되는지를 알고 싶다면 어른들이 함께 봐도 무방하다. 딱딱한 세금 이야기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짧은 동화로 녹여내고, 각종 환경세가 어디에서 시작하고, 왜 부과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자료가 상세하게 서술되었다. 각 나라의 사정에 맞는 세금 정책 상황과 사진, 도표, 통계표에 이르기까지 시각적 자료와 더불어 환경세가 처음 도입된 나라의 사례와 적용 후 달라진 점 등을 꼼꼼하게 보여준다. 환경을 지키기 위한 세금의 종류는 다양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탄소세나 비만세, 소 방귀세와 더불어 ‘일회용 나무젓가락세’, ‘빗물세’, ‘자동차 주행세’, ‘도시세’, ‘반려동물 보유세’까지 이색적이다 싶은 세금의 종류도 많았다. 환경세는 단순히 세금을 걷는 게 목적은 아니다. 이미 망가진 환경을 복원하는 일도 하지만 예방하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보면 탄소세는 무너져가는 생태계를 유지 및 복원해서 지속 가능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세금들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환경을 지키고, 어떤 효용 가치가 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이기는 하다. 2022년 여름 파키스탄에서 홍수로 17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저지대에 있는 섬나라들은 물에 잠기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예측할 수 없는 기후변화에 따른 재난상황도 결국 온실가스가 주범이라는 걸 상기시키는 최소한의 정책이 세금이라는 거다. 이 책은 단순히 환경이 세금으로 해결된다는 걸 넘어서서 개개인이 주체가 되어 환경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다. 물론 거시적으로 국제사회의 협조, 특히나 기후 재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선진국들의 산업구조 변화가 우선이지만 당장 해결하기에는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쉽사리 실마리를 찾기에는 아직 어려움이 있다. 다만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지 않으면 기후 재난은 요원한 문제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수많은 일회용품과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적 분위기, 육식 문화가 만연된 식생활을 돌아볼 일이다. 우리 손에 들어온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오래 보관하고 소비를 줄이는 일, 자연에서 주는 대로 먹었던 소박한 밥상이 그리운 건 오래된 것이 우리를 지켜주리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오늘, 지구 환경을 위한 작은 행동이 필요한 때이다. 이경옥 동화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두 번째 짝>으로 등단했다. 발간한 책으로는 장편 동화 <달려라, 달구!> 등이 있다. 2019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사업, 올해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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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23 17:1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헌수 작가 - 앤 카슨 '녹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모든 사람에게 바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태원참사로 가족과 친지를 먼저 떠나보낸 이들, 11월에 갑자기 떠난 하나 밖에 없는 제부, 황망한 죽음 앞에 사무침과 애절함, 그리움이 가득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나는 얼굴, 자려고 눈감으면 떠오르는 얼굴,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조각들의 집합체, 통합할 수 없는 삶의 형체를 본뜨면서 말이다. 물성의 아름다운 비가(悲歌)에 새겨진 전율에 한없이 스며들었다. <녹스>는 시인이자 번역가, 고전학자인 앤 카슨이 22년간 헤어져 있던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만든 책이다. 형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고대 로마 시인의 비가를 하나씩 해체하여 오빠의 기억들과 나란히 두었다. 이 책은 처음엔 수첩이었다. 앤 카슨은 오빠와 자신의 유년시절 사진, 먼 곳에서 오빠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우표, 앤 카슨의 온갖 제스처와 흔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툴루스라는 고대 로마시인의 시를 번역하면서 죽음의 상념을 쓰고, 그리고, 인쇄하고, 찢거나 날카롭게 오려내어 풀로 붙이면서 하나의 수첩으로 완성했다. 최초의 수첩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재현하며 기계의 영역을 벗어나 사람의 손으로 수작업을 거쳐 만들었다. 눌러 쓴 것이나 붙인 흔적들이 너무 생생했다. 만질 수 없는 감정이 만져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섯 페이지씩 인쇄된 더미들이 접히고 서른 번 이상의 풀칠을 통해 완성되었다. 192쪽의 종이가 아코디언처럼 하나로 쭉 이어진 책이다. “녹스를 처음 읽을 때 대부분은 오른쪽 페이지만 읽는다. 그러나 왼쪽 페이지를 읽어야 왜 녹스 인지 알 수 있다. 라틴어 사전을 옮긴 것처럼 보이는 왼쪽 페이지에는 앤 카슨이 지은 예문마다 녹스(nox)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이것은 비밀을 적는 방식과 닮았다. 뻔히 드러나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라고 녹스를 번역한 윤경희 작가는 말한다. 펼치면 왼쪽 면에는 고대 로마 시인 카툴루스의 시를 번역하는 과정이 들어있다. 오른쪽 면에는 오빠를 먼저 떠나보낸 동생 앤 카슨의 이야기가 있다. 밤의 단어, 밤의 문장, 밤의 구절로 이루어진 카툴루스의 시와 산문은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비가로 완성이 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글쓰기를 통해 펼치고 접으며 노래를 지었다. 단조의 옥타브를 드나들며 슬픔을 연주한다. 어두운 것 같으나 결코 어둡지 않은 비가는, 상실의 아픔을 기워내고 존재에 대한 기억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빠를 위한 기억들은 밤의 언어가 되었다. 오빠를 해체하고 재조립하고 기억하고 추측해보고 문학적으로 풀어내었다. “녹스에서 가장 밤 같은 낱말은 어쩌면 “saekken” 일 테다. 덴마크어로 가방, 봉지, 주머니를 뜻하는 이 조그만 어둠 안에 죽은 자에게 주고 싶었으나 미처 주지 못했던 것, 뒤늦게야 준 것, 아직 주지 못한 것을 다 담을 것, 꽃, 책, 술, 손, 현존, 사진, 눈물, 질문들의 소낙비, 구름이야기, 목숨, 웃음, 밤의 상자 속에 이것들이 뒤섞여서 사그라들만 하면 다시 들리는 소리를 낸다고 상상하자. 온몸을 고막으로 하여 밤의 기척에 닿자“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읽는 내내 시간을 되돌려주며 가족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정형화 되어 있지 않은 애도의 문장을 보면서, 이렇게 추모하는 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헌수 시인은 2018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로 등단했다. 시집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 <조금씩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 시화집 <오래 만난 사람처럼> <마음의 서랍>이 있다.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기획하며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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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16 17:3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 - 오카 슈조 '힘들어도 괜찮아'

그의 작품 속에는 갖가지 장애들이 등장한다.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이 진솔하다. 장애로 인한 상처와 고통을 과잉으로 부각시키거나 일반화 시키지 않는다. 동정하거나 불쌍하다고 구구절절이 서술하지 않는다.『나는 입으로 걷는다』의 다치바나처럼 현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감사한다. 어제와 변하지 않은 오늘이 소중하다. 『힘들어도 괜찮아』의 시게루는 손 하나 움직일 수 없어, 아주 소소한 일도 못하는 극한 장애를 가졌다. 태어날 때부터 갖은 장애는 아니었다. 점점 근육이 굳어지는 병으로 인해 지금에 이르렀다. 여동생 가즈요가 요강을 가져다 옷을 벗겨주지 않으면 생리현상을 해결할 수 없다. 가즈요는 친절하지 않다. 그럼에도 손을 빌려야 한다. 그리고 시게루는 속으로 말한다. ‘햄버거도 먹었고, 물도 마셨고, 오줌도 누웠고. 배가 좀 덜 찼긴 하지만…… 나는 참을성이 많은 아이다. 이제 눕자.’ 시게루의 독백처럼 전개되는 글속에서 포기는 볼 수 없다. 말을 할 수 있어 도움을 청할 수 있다. 눈치를 보지 않는다. 웬만하면 엄마와 동생을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는다. 예전에 척수마비 장애자가 생활하는 곳에서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신체에 대한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움직일 수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휠체어를 굽어진 손가락이 있어 휠체어를 밀 수 있어 다행인 이도 있다. 하지만 휠체어에서 자리를 옮기려면 재활치료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감각이 남아있는 얼굴을 모기가 물어도 속수무책으로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몸에 감각이 없을 뿐, 감정은 살아있다. 시게루는 엄마와 동생이 자신에게서 등 돌릴까 봐 두렵다. 아빠처럼 떠날지 모른다는 조바심을 가슴에 숨기고 지낸다. 자꾸 몸이 안 좋아지는 것을 시게루는 느낌으로 안다. 그런 자신을 엄마가 시설로 보내려한다는 오해를 한다. 낭떠러지 위에 홀로 남겨진 꿈에 시달린다. 이 동화를 함축한 겉표지 그림이 인상적이다. 큰 손 위에 앉은 시게루와 아오키 형이 앉아 새에게 모이를 뿌려준 모습이다. 둘의 표정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아오키는 손도 들어 올리지 못하고, 그나마 손목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정도였다. 누구의 손이 필요한 장애, 다행이게 움직이는 손목.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오카 슈조는 절망의 탁한 공기를 환기시켜주는 힘이 있다. 장애 뿐 아니라 본성까지도 거듭날 수 있다고. 『힘들어도 괜찮아』를 검색하면 ‘장애인의 날에 추천하는 책’이란 글이 보인다. 잊고 지내는 것보다 낫겠지만, 왠지 씁쓸하다. 날을 정해 기억하는 일, 너무 속보이지 않을까? 장애와 비장애는 늘 공존한다. 그들과 가족이고, 친구이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니까. 시게루의 몸은 점점 굳어지지만, 그의 이성은 성숙한다. ‘내가 밝아지면 모두가 밝아지는…… 것일까?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뜻밖에 단순할지도 모른다. 내가 변하면 내 주위 모습도 변할지 모른다.’ 오카 슈조는 특수학교에서 근무했던 경험들이 모두 소재가 되었다. 장애 뿐 아니라 비장애인의 상처까지 드러냈다. 『우리 누나』의 다운증후군 장애를 갖은 누나를 둔 쇼이치, 『거짓말만 가득』의 게이 아저씨의 거짓 아닌 진실, 『바람을 닮은 아이』속 자폐아, 우리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는 함께 사는 세상이란 걸 작품마다 알리고 인식시킨다. 특별한 날이 아닌 오늘의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다. 김영주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수필로 등단했으며, 2018년 동양일보 동화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레오와 레오 신부’, ‘가족이 되다’ 가 있다. 현재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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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9 17:0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박태건 작가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가을볕이 찬란하다. 나뭇잎 하나에도 가을 냄새가 난다. 계절의 표정이 바뀌는 이 계절에 나는 태어났다. 진통이 시작되자 어머니는 심호흡을 하며 눈부시게 파란 하늘을 보았다 했다. 파란색은 하느님의 색. 하늘이 사람을 내일 적에는 귀애하는 것도 함께 내어 준다고 하였으니, 손가락 사이에 닿는 햇볕이 혈육 같다. 가을빛 풍성하게 쏟아지는 창 앞에서 바라노니, 내가 가는 날도 오늘 같길....... ‘가을은 여름이 타고 남은 것’이라 했던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 데카당스 문학의 대표 작가다. 데카당스는 퇴폐주의 혹은 염세주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인간 관계에 대한 공포와 회의를 표현했다. 텔레비전에 나온 사람들이 뻔뻔한 표정으로 뻔뻔한 이야기를 펀펀(fun fun)하게 한다. 주객이 전도되고 주어가 없는 말들이 뛰어다닌다. 취한 시정잡배의 말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세상이 돌아간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 소설 『인간실격』은 서로 속고 속이며 사는 위선적인 사회를 고발한다. 주인공 ‘오바 요조’는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는 사람들이 무섭고 두렵다. 거짓을 겨루며 사는 사회란 ‘참으로 산뜻하고 해맑고 명랑한 불신의 무대’다. 어린 ‘요조’는 위선적인 세상에 위악으로 대응한다. 익살과 위악은 소심한 이의 위장의 기술이다. 광대처럼 자신을 숨기고 살다 보면 남은 것은 허무뿐이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기’에 총명하고 아름다웠던 청년은 서서히 파멸에 이른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다자이 오사무도 서른아홉의 나이로 자살했다. 자살은 ‘인간실격’일까? 죽음으로써 자신을 지키려 했던 이들을 나약함으로 폄홰하지 말자.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사람이 절망에 빠질 때는 오직 자기 스스로에게 절망할 때’이니까. 며칠 전, 전주시 노송동에 있는 오래된 이발소에 갔다. 팔순의 이발사는 가위질만 60년이라고 했다. 기린봉으로 향하는 언덕배기의 작은 이발소에는 연탄난로가 지펴져 있었고 곁에는 서너 개의 연탄이 포개져 있었다. 이 연탄이 다 타고나면 쌓인 순서를 바꿔 길가에 쌓일 것이다. 그리하여 눈이 오고 길이 얼면 연탄은 찬란히 부서질 것이다. 연탄재가 쌓인 이 언덕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 가를 평생 의식한다’고 했다. 소설 속 ‘요조’처럼 나도 가을 햇볕이 담뿍 드는 이발소 의자에 앉아 ‘째깍째깍’ 가위질 소리를 할아버지의 시계 소리처럼 졸음에 겨워 듣는다. 그리고 기린봉 언덕배기에 이발소를 차리고 아이를 키워 재금 낸 노인과, 눈이 와서 미끄러운 언덕 길에 산산이 부서지고 또 부서졌을 연탄들을 생각했다. 『인간실격』을 소개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때다. 박태건 시인은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와반시 신인상, 불꽃문학상을 받았다.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를 비롯하여 인문서 『익산 문화예술의 정신』, 『마을, 오래된 미래를 담다』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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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2 17:0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오은숙 작가 - 헤르만 헤세 '데미안'

데미안은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에 출간되었다. 유럽의 많은 청년들은 전쟁터에서 데미안을 읽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것은 학창시절 어느 수업 시간이었다. 양지바른 곳에서 홀로 집중하여 데미안을 읽은 뒤였지만 줄거리조차 잡지 못한 때였다. 하여, 유럽 청년들이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며 데미안을 읽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절망했다. 범접할 수 없는 문해력. 그것을 뒷받침하는 통찰력. 십대의 내겐 없는 것들이 그들에게 있다는 생각으로 한동안 유럽 청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데미안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얼마 전이었다. 나이 들어 다시 읽으니 줄거리가 선명하게 잡혔다. 유럽 청년들이 데미안을 손에 들고 전쟁터를 누빌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정신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으리라는 생각도 했다. 열 살 소년 싱클레어는 재단사 술꾼의 아들인 악동, 프란츠 크로머를 무서워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한다. “나를 다른 애들과 똑같이 취급한다는 것은 기뻤다. 그 애는 명령했고, 우리는 복종했다. 그러는 것이, 처음 그 애와 함께 있었건만, 마치 오래 해오던 일처럼 여겨졌다.” 싱클레어에게 크로머는 어둠의 세계다. 자신이 다니는 라틴어 학교처럼 밝고 올바른 세계라 믿었던 집에서 늘 보았던, 하녀 리나가 머리 없는 난쟁이 이야기를 하고 이웃 아낙들과 싸움을 벌이는 것처럼 일상적인 세계. 그 세계는 “자주 낯설고 무시무시했”다. “그곳에서는 규칙적으로 양심의 가책과 불안을 얻을지라도.” 싱클레어가 한동안 “가장 살고 싶어한 곳은 금지된 세계 안이었다.” 이처럼 어린 싱클레어는 집안에서 벌어지는 밝고 어두운 세계를 예민하게 포착한다. 평화롭고 사랑 가득한 집에서 소음과 폭력이 난무한 어둠을 인식한다. 두 세계의 간극을 치명적으로 경험한 사람은 싱클레어 자신이다. 자랑삼아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쳤다고 크로머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데미안을 만난 뒤로 싱클레어는 자란다. 선악에 대한 사유가 끝없이 이어진다. 어린 시절 집에서, 크로머에게서 보았던 어둠을 내면에서 찾는다. 데미안의 엄마인 에바 부인을 만나고 베아트리체를 상상하며 새를 꿈꾸고 선악의 신인 압락삭스로 이끌리며 진정한 자신을 만날 때까지. 적군과 아군이 뚜렷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으려고 죽여야만 했던 유럽 청년들의 정신적 트라우마. 죄책감과 혼돈을 극복하고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길 희망하던 그들에게 책, 데미안은 구원이었을 것이다. 세계는 경험을 통해서 재확인 된다. 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다. 한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이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다면화된 세계에서 싱클레어의 화두였던 선악 대립은 고리타분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데미안은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하다. 세계는 곧 자신이라 말하며 온전한 자기가 되어 보겠다는 싱클레어와 그를 인도하는 데미안이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고 응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워낙 오래 홀로였고, 포기를 연습하고, 내 자신의 고통으로 힘들게 허우적거리는데 익숙했던 터라 H시에서의 이 몇 달은 꿈의 섬처럼 느껴졌다.(p.210/민음사)”는 싱클레어가 되어 데미안을 다시 만나니 깊어진 가을, 스산한 바람이 반갑다. 오은숙 소설가는 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납탄의 무게’로 등단했다. 공저로는 <1집 스마트 소설>,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은>, <2021 신예작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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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26 17:2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 - 오해룡 '초보자를 위한 한국나비 생태 도감'

나비를 시작하거나 나비 애호가에게 꼭 필요한 필드형 도감이 나왔다. 30년 동안, 나비 연구에 매진한 저자가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해 발간한 『초보자를 위한 한국나비 생태 도감』이다. 이 책은 1년 중 280일 이상 나비를 보러 가는 남자, 상제나비가 보고파서 연변까지 한달음에 날아간 나비학자, 공작나비를 보기 위해 기꺼이 한 장소를 300번 이상 달려가는 저자의 열정과 끈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초보자를 위한’이라는 제목을 내걸었지만 이 도감은 전문가의 갈증을 충족시키기에도 손색없는 수준을 갖추고 있다. 그동안 여러 형태의 나비 도감이 출간되었으나 실제 현장에서 초보자가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나비를 판별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나비 표본을 사진으로 찍어 만든 도감과 눈앞에서 보는 실제 나비와의 괴리감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몇 도감은 나비의 이름을 잘못 표기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초보자를 혼란스럽게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 나비 도감은 저자가 현장에서 찍은 나비의 알과 애벌레, 그리고 번데기와 성충까지 충실하게 수록함으로써 초보자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구별이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또한 『초보자를 위한 한국나비 생태 도감』은 초보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나비 구별이 가능하도록 정확한 동정 포인트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이 나비 도감은 나비의 서식지, 나비의 습성, 생태 주기, 기주식물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기록종과 아종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저자는 그동안 나온 다른 나비 도감과 달리 관찰 난이도를 별 숫자로 표시하고 감소 추세를 신호등으로 나타냄으로써 초보자들의 나비 안내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나라의 나비는 급격한 기후변화, 기주식물의 서식지 파괴, 농약 등의 환경오염 등에 의해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몇 년 내에 지금은 사라진 상제나비나 쐐기풀나비처럼 이 나비 도감에 있는 나비를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초보자를 위한 한국나비 생태 도감』이 저자의 염원대로 초보자들이 나비를 좀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충실한 길라잡이가 되기를 기대한다. 장창영 시인은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 와 문학이론서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을 펴냈다. 그동안 다녀온 여행기를 여행잡지 <뚜르드 몽드>에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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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19 17:1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지호 작가 - 이병초 '노량의 바다'

물이 마시는 존재에 따라 독이 되고 젖이 되고 약이 되듯. 머문 장소와 형상에 따라 구름이 되고 안개가 되고 바다가 되듯. 한 시인의 붓끝도 닿는 자리에 따라 시가 되고 소설이 되고 역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물이 외양은 변해도 그 본성은 언제나 물이듯 붓끝이 어디에 닿건 시인의 뜻은 한결같아서 변방의 언어로 이름 없는 풀과 잊힌 민중들을 소환했다. 시인의 삶 또한 그의 해타(咳唾)와 다르지 않아 뜻 맞는 시인들과 함께 시를 쓰고 그 시로 전쟁으로 고통받는 미얀마 문인들을 도왔고. 막 등단해 쭈뼛쭈뼛 말석에 앉아있는 새내기 작가들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술을 따라주었다. 이미 이름이 높고 묵향이 진한 작가들이 문단을 오래 이끌었으니 막 등단해 자리를 잡지 못하고 겉도는 신입 작가들에게 문단 일을 맡겨 생기라면 생기, 변화라면 변화를 이끈 사람도 그였다. 전 전북작가회의 회장 이병초였다. 그리하여 그의 붓은 심술궂어 보이지만 뿌리를 다독이는 바람이었고, 약자를 품는 느티나무의 넉넉한 그늘이자 위로였으며, 죽은 역사를 깨워 산 사람을 위로하는 박수무당의 넋두리였다. 시인의 ‘무릎걸음’ 술잔을 받은 다음날 송구하여 그의 시집 『까치독사』를 ‘내돈내산’하여 읽었고 그 시집을 책갈피 삼아 그의 넋두리이자 역사소설 『노량의 바다』를 읽었다. 시인이 쓴 소설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조사를 아껴 문장을 벼렸고, 적확한 단어를 찾아와 제자리에 앉혔으며, 행간의 여백으로 아련함을 만들어 가끔, 무연히 멈추게 했다. 화려하고 지나친 비유가 없으므로 문장이 여는 길이 분명했고, 플롯으로 서사에 힘을 더해 긴장을 놓지 않게 했으며, 말하고자 하는 바가 칼끝처럼 분명해 에둘러 돌아가지 않게 했다. 책을 덮은 이후의 여운도 길어 쓸쓸함이 버들잎처럼 흘러 노량의 바다까지 닿을 수 있게 했다. 이제 시인이자 소설가인 작가는 시집 『까치독사』 등장했던 ‘들몰댁’과 ‘즈아부지’와 ‘군산댁’과 ‘그 가시내’와 같은 이름 없는 것들을 역사소설 『노량의 바다』에서 노꾼으로, 감시병으로, 피 냄새 나는 군복을 “생선의 포를 뜨듯이 실을 박아 깁고 훌치고 호며감치고 후미벼 공그렸던” 순옥으로 다시 불러냈다. 그들에게 “밥과 나물과 푸성귀가 어우러진 비빔밥의 평등과 상하 구별 없이 너나들이로 퍼먹는 밥의 평등을 수저처럼 쥐어” 주고 싶어 했다. 그것을 작가는 “아버지가 된 자가 해야 할 일” 이라고 믿었다. “김을 매고 베를 짜고 염천을 견디고 난 뒤에 곡식을 거두는 일- 거기에 목숨을 바치다시피 했던 만백성의 역사, 양반층에게 함부로 무시당하고 멸시당했지만, 헐벗고 굶주린 조선 백성이 어째서 조선 역사 발전의 주체가 되었는가를 분명하게 짚어줄 글줄은 어디에 있는가” 분노하며 스스로 먹을 갈아 이 소설을 썼다. 백성의 코와 귀가 소금에 저려질 때 나만 살겠다고 몽진을 떠난 왕. 세한의 소나무 같은 선비들을 죽이고 옥에 가둬 가문과 권력, 부귀와 명예를 지키려 했던 칼 든 신하. 부하들을 승산 없는 전투에 내몰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능력 없는 장군을 소환했다. 그 소환한 자들을 이 시대 위정자들에게 들이밀며 ‘이것들이 너희 아니냐고 이들처럼 목민해서는 안 된다’ 고 일갈하며 죽비 대신 내리치려고 이 소설을 쓴 것이다. 그것도 시인이 소설을 쓴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황지호 소설가는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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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12 17:2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형미 작가 - 김원철 '가지 많은 나무의 뿌리가 되어'

가을이다. 수확을 앞두고 쌀값 하락과 재고 폭증의 난관에 부딪힌 일부 농민들은 애써 농사지은 논을 갈아엎었다. 사실 농촌지역에 어두운 장막이 드리워진 것이 비단 어제오늘 일인가.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일손이 부족한데다, 쌀 소비량이 현저히 줄어든 현대인들의 생활습관도 농촌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김원철 부안농협 조합장의 자전에세이 『가지 많은 나무의 뿌리가 되어』(2022, 신아출판사)는, 우리가 ‘밥맛이 없다’고 뒷전에 둔 농촌의 현실을 현저히 보여주고 있다. 김원철 조합장은 1998년 부안농협 제10대 조합장으로 취임한 이후, 조합장 6선에 이어 농협중앙회 3선 이사라는 남다른 이력을 지니고 있다. 자그마치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농협의 일꾼으로 고군분투해 온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자전에세이는 개인의 인생사를 넘어 한국 농업과 농협의 역사를 감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조합장 초선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IMF 구제금융 요청으로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금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많은 농업인은 물론 대기업까지 줄도산을 면치 못하는 시절이기도 했다. 부안농협 역시 부안 관내 다른 농협에 비해 정도가 심했다. 과다한 부실대출로 연체비율만 해도 20%를 웃돌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본잠식은 무려 55억 원이나 되었다. 조합원들에게 배당금은커녕 직원들 상여금 주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가지 많은 나무의 뿌리가 되어』에는 당시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몇 날을 뜬눈으로 지새운 그의 고뇌와 좌절, 아픔이 담겨 있다. 합병으로 인한 경영 악화 상태에서 10년이 걸릴 것을 4년 만에 정상화시킨 기쁨도 녹아 있다. 또한 이후에 닥쳐온 농촌의 크고 작은 일들을 온몸으로 맞으며 내린 결단과 그에 따른 결과가 오롯이 농촌의 나아갈 방향이 되어 이어오고 있다. 물론 기존의 관행을 뒤엎고 그 체질을 바꾸기란, 바다를 막아 다리를 놓는 일만큼 쉽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 “벼슬을 사귀지 말고, 사람을 사귀어라!”라고 말해온 그의 신조대로 평생을 사람에 대한 신의를 지켜왔기에 지금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거라. 한여름 뙤약볕과 숱하게 불어오는 천둥 번개, 비바람 속에서도 끄떡없이 조합원들의 버팀목이 되어줄 농협을 만드는 데 일생을 허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농협 본연의 목적대로 농민조합원이 주인인 농협으로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크기가 훨씬 작아진 공깃밥 한 그릇도 많다고 덜어내고, 다이어트 한다고 안 먹고, 출근하느라 바쁘다며 밥 먹을 시간이 없고, 밥하기 싫어서 먹기 싫고, 이런 저런 이유로 건너뛰는 게 밥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밥맛이 없어서 안 먹는 것이 또 쌀”이 되어버린 시대. 김원철 조합장과 같은 이들이, 그리고 수많은 농민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힘들게 지켜온 우리의 농촌이 다시 이 땅의 ‘미래’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우리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오천 년 문화가 담겨 있는 벼농사인 만큼 우리에게 있어 쌀 생산을 위한 농업은,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는 그 이상의 공익적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일이 있어도 쌀만은 지켜야 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김원철 조합장의 자전에세이 『가지 많은 나무의 뿌리가 되어』는, 잃어버린 밥맛이 돌게 하는 특별한 것이 있다. 올가을, 하루 저녁 정도는 책장을 넘기며 그 비법을 전수받아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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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05 17: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작가 - 조정 '그라시재라, 서남 전라도 서사시'

그녀들이 쏘아올린 역사인식과 방언의 지극함 서남전라도 방언 “그라시재라”는 공감과 연민, 연대의식을 함의하는 따뜻한 온도를 지닌 언어다. 방언이란 공동체 문화역사를 담는, 그 지역 사람들 ‘존재’에 대한 입증이요 삶의 갈피다. 『그라시재라』에서 시인은 시적 자아의 정서와 사유를 시적 대상에 투사하거나 동화시키는 한편 현실을 내면에 포섭, 현실과의 화해 혹은 합일을 모색한다. 괄목할 점은 자신의 모어母語로 내면정서와 사유를 이야기(구체적 용례)로 구현한다는 것이다. 서효인의 발문처럼 1960년대 전남 영암지역 여성들의 실화 “죽음보다 깊은 비극, 삶보다 넓은 희극”인 근현대사의 참혹한 역사가 펼쳐진다. 전쟁으로 인한 이산과 신분박탈, 한국전쟁의 무고한 양민학살, 좌익으로 몰려 자행되던 보복학살, 가난으로 인한 행려병자 등이 속수무책 등장한다. 특히 노작문학상 심사위원회 평가대로 “현대사에서 격락되거나 묻힌 부문을 여성 주인공들의 목소리로 복원, 재구조화는 점에서 여성 서사의 새로운 진경을 열고 있”다. “육요지남서 자네집 식구 줄고 고샅이 호젓했는디 인자 애기 우는 소리 날 것 아닌가” “즈가부지 난리 때 가불고 어찌 사꼬 했는디 옹사건 살림이래도 인자 훈짐이 돌아라” <분통같은 방에 새각시(20쪽)> “지둥에 뭉꺼놓고 죄를 물음서 부연 살을 칼로 뿌어서 죽이는디 눈 뜨고는 못보제. 이놈들아 죽일라면 그냥 죽여라허고 영감님은 소리 지르고 뿌는 것이 머시냐고? 무시국 끼릴 때 한손에 무시 들고 칼로 슥슥 쳐서 넣는 것 모르냐? 그렇게 살을 비어내는 거시여” <지하실이 필요해(52쪽)> “오매 이 사람아 어째 이랑가 못 살 시상 살어났응게 되얐네 그러지 마소” “살도 못 허고 죽도 못 허것소 성님”<산 사람은 살아야지(62쪽)> 독자들이 이 시집을 읽는다면 ‘토벌 때 서방이랑 자석 죽인 웬수인 갱찰서 토벌 갱찰하고 살게 된 떼보각시’등의 질펀한 피울음이 내내 서럽고 아플 것이다. 이런 소중한 독서경험이 그들과의 연대가 가능해지는 지점이다. 표준어와 감각적 표현방식에 길들인 필자 또한 ‘사어死語에 가까운 지역방언만으로 시를?’ 돌올한 의문과 함께 읽기 시작했다. 돌이켜보건대 목포에서 태어나 영암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필자에게는 행운이고 필연이었다. 현재 영암은 사회경제학 측면에서 낙후와 인구소멸지역으로 간단히 정리된다. 그러나 영암은 고대 마한의 무역도시였고 도기문화가 화려하게 꽃 피웠던 곳이다. 월출산의 아름다움과 예술적 정취가 녹아있는 영암에서 『그라시재라』는 영암의 ‘길가메시’요 ‘니벨룽겐의 노래’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생태주의자들이 종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언어 진화를 모색한다면 대표 단수만 옹호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 정 시인은 “전라도 서남 방언을 바탕으로 모어의 확장 가능성과 그 아름다움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밑으로부터의 역사’ 즉 소외계층(여성)으로 한국 근현대사 연구 범위를 확대시킨 역사의식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겠다. 타향을 전전하는 동안 삶이 심드렁해지고 녹록치 않을 때 습관처럼 남도사투리를 읊조린다. 타지의 생경함이나 부침에서 기인된 것도 있지만 귀소본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조 정 시인은 필자에게 한 권의 대서사시와 어머니와 고향을 선물해주셨다. 기명숙 시인은 전남 목포 출신이며,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몸 밖의 안부를 묻다>가 있다. 현재 강의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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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8 16:3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작가 - 이매창 '매창 시집'

시인들에게 부안은 늘 아련한 꿈의 공간이다. 그 꿈의 한가운데 부안 출신 시인 이매창(1573∼1610)이 있다. 매창의 이름은 낯설더라도 이별가의 절창으로 꼽히는 시조 「이화우」는 다 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떠나간 임을 그리워하며 한 생애를 시와 거문고로 달래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 여인의 삶은 이 시 한 편으로 더 애절하다. 그리움의 대상은 장안에 이름 높던 시인 유희경(1545∼1636)이다. 매창의 소문을 듣고 부안에 내려온 그는 매창과 깊은 사랑으로 묶인다. 그러나 서른여덟 길지 않은 매창의 일생을 애절한 상사로 몸부림치게 만든 서럽고 짧은 정의 나눔이었다. ‘임도’, ‘그도’ 아니라 홀대하듯 ‘저도’라고 쓴 것은 무심코 튀어나온 고혹적인 한마디일 것이다. 매창의 시는 대부분 이별의 슬픔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옛 임을 그리워하고, 이별을 서러워한다. 그래서 매창의 시는 편편이 연모요, 그리움이다. 시에 풀어낸 그 마음은 숨결 가파른 절규가 아니라, 먼 곳에 눈길을 둔 사람의 가느다란 읊조림이다. 매창은 풍류와 정취, 삶의 멋, 운치와 풍자, 예지를 두루 갖춘 조선의 대표적인 예인이었고, 그녀의 시재와 거문고 솜씨는 시인 묵객을 설레게 했지만, 자신은 늘 빈방에서 공허에 시달렸다. ‘야속타 그리움 하소 못하고/ 하룻밤 애태우니 머리가 반백/ 그 누가 알 것인가 이 설운 상사/ 가락지 할갑구나, 야위어만 가네.’ 그리움에 가락지가 헐거워진다는 묘사의 아름다움은 ‘가슴 속에 시름 맺혀 옷 적시지 않은 날 없네’라고 이어지지만,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마음은 변함없이 향기로우니, 매창의 생명은 영원하다. 매창은 많은 사대부와 교유했지만, 그들과 시의 벗으로 존재했다. 특히 부안 우동리에 터 잡고 칠산바다 위도를 율도국 삼아 「홍길동전」을 쓴 허균(1569∼1618)은 매창과 십여 년 동안 시문과 인생을 논하며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을 그리던 매창은 차마 님을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부안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매창공원과 매창테마관, 매창시비, 매창길이다. 1974년 매창기념사업회는 부안군청 뒤 상소산 기슭 서림공원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매창이 님을 그리며 시를 짓고 거문고를 탔다는 너럭바위 금대 바로 앞이다. 부안군과 부안문화원은 2001년 매창의 묘를 정비해 매창공원을 조성하고 매창문화제를 열고 있다. 공원에는 「이화우」, 「옛 님을 생각하며」, 「취하신 님께」, 「어수대」 등 매창의 시편들이 커다란 돌에 새겨 있다. 그리움이 사무쳐도 볼 수 없는 애끊는 심정이 담긴 유희경의 「매창을 생각하며」와 매창을 사모했던 허균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가람 이병기와 송수권 등이 매창을 기리며 쓴 시도 만날 수 있다. 2018년 문을 연 매창테마관에선 매창의 삶과 작품 세계가 풍성하다. ‘매창’의 이름을 붙인 ‘매창길’에서 『매창 시집』(2019·평민사)을 펼치면 첫사랑이 아련하다. 최기우 극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다. 희곡집 『상봉』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은행나무꽃』 『달릉개』와 어린이희곡 『뽕뽕뽕 방귀쟁이 뽕함마니』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 인문서 『꽃심 전주』 『전주, 느리게 걷기』 『전북의 재발견』 등을 냈다. 현재 최명희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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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1 16:5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아현 작가 - 이유진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

이전에 다른 책을 통해 아토피를 앓고 있다고 말한 적 있다. 이 원고를 통해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내가 찾아낸 슈퍼 파워는 한편 나를 위한 최면이었다. 그 책을 통해 그럴듯한 위로를 얻은 것이 거짓은 아니지만 사실은 일상생활을 방해하는 아토피 때문에 고되고 우울한 날이 조금 더 많다.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는 아토피, 글쓰기, 페미니즘을 골자로 작가의 투병 경험을 솔직하게 적어낸 에세이다. 아토피를 앓는 동안 겪은 치료 경험이나,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상황, 자기 몸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읽다 보면 가끔은 공감의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아토피 박사’를 자처하며 나를 구원해주고 싶어 안달이다. (중략) 그들의 말을 일일이 들어주기엔 너무 지루하고 짜증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제발 닥쳐!”라고 말하기엔 내가 아직 교양과 이성을 잃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입꼬리를 올리려고 노력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다.”(『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 中) 남몰래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종종 있었지만, 나 역시 속으로 비아냥거리기나 하는 내 성격이 모난 것이라 자책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자의 속 시원한 말에 어찌나 웃음이 나던지! 함께 내 마음을 공감하며 말해주는 것 같아 책을 넘기는 동안 자주 웃었다. “아주 오랫동안 마법 같은 순간을 기다렸다. 한순간에 깨끗해진 몸, 하얀 피부, 누구도 이상하고 추하다고 여기지 않는 얼굴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고, 그것이 좌절될 때마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고통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고통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이라 여겼다.”(『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 中) 저자가 말하기를 시작한 것은 글쓰기를 통해서였다. 오는지 마는지 알 수도 없는 마법 같은 순간을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보다 지금의 자신을 말하고 일으켜 세우는 글쓰기를 선택했다. 그렇게 찬찬히 쌓은 기록을 엮어 책으로 냈다. 이 책을 읽으며 최면 같은 위로도 필요하지만, 냉소적이고 솔직한 감상도 퍽 위로가 됨을 느꼈다. “이 고통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자 나는 덜 수치스럽고 덜 외로워졌다. 그래서 나도 함께 말하고 싶다. 나와 타인 모두를 잠식하는 이 혐오감을 조금씩 덜어내고 싶다. 여기에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 있다. 길거리에서 나와 같은 얼굴, 나와 같은 몸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날을 기다린다.” 저마다의 몸과 얼굴, 우울과 불안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테다.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삶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빛나는 성공사례 말고도 모나더라도 꾸준히 오늘을 견디는 이야기들 말이다. 최아현 소설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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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14 16:4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작가 - 박월선 '닥나무 숲의 비밀'

부드럽고 질긴 한지를 통해 배우는 인생 오래전 박월선 동화작가의 작품 <닥나무 숲의 비밀>을 읽고 한지를 소재로 이토록 흥미로운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얼마 전 한지 관련 글을 쓰기 위해 이 책을 다시 펼쳤다. 한지의 정보를 오롯이 담은 이 동화책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에듀테이먼트 스토리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야기와 정보가 함께 담긴 책이니 즐거움과 지식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한지는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다. 무려 99번의 손길 뒤, 마지막 한 번이 더해져야 한 장의 한지가 탄생한다. 그래서 백지라고도 한다. 닥나무가 한 장의 한지가 되기까지는 삶아지고 벗겨지고 씻기고 햇빛에 말려지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장인의 땀과 굳게 다문 입매와 게으른 줄 모르는 손놀림이 더해져 더 고귀하다. 그러기에 한지가 인간의 위대한 족적을 남기는 도구로 쓰인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이들에게 한지는 그다지 흥미 있는 이야기 소재가 아닐 수 있다. ‘고리타분한 옛날 종이’라는 생각이 앞설 테니 작가의 고민이 컸으리라. 박월선 작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판타지 형식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갔다. 닥나무 숲에서 댕기 소녀를 만난 지우가 아빠로 인해 힘든 현실을 이겨내고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설정한 이야기는 재미와 감동이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안겨 주었다. 이 책에는 대립 관계에 놓인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홍 지장 할아버지, 아버지, 길담이 삼촌. 한지 마을의 지장인 할아버지는 철저히 전통을 고수하는 장인이다. 그렇게 배웠다고 그것이 명품 한지를 만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할아버지가 지우 아빠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더 쉽고 빠른 방법으로 한지를 만든다면 두 배, 세 배의 돈을 벌 수 있으니 한탕주의자 아빠에게 할아버지는 고집 세고 융통성 없는 노인으로 보일 밖에. 결국, 지우 아빠는 쉽고 빠른 방법을 이용해 돈을 벌어볼 요량이다. 그러나 오염된 폐수 방류로 할아버지에게 된통 혼이 나고 만다. 아빠와 대척점에 선 인물은 길담이 삼촌이다. 그는 홍 지장 할아버지처럼 잔머리와 묘수를 쓰지 않는다. 사람의 성품이 그러한 이유도 있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그에게는 한지에 관한 나름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우 아빠처럼 우리는 가끔 목표를 향해 가느라 목적을 잃는 경우가 많다. 목표가 자신이 원하는 지점이라면 목적은 그곳까지 가는 과정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목적을 잃고 헤매는 이들에게 목표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로 <닥나무 숲의 비밀>을 권하고 싶다. 한지로 못 만드는 물건이 없다고 한다. 한지의 우수성은 한창 개발되고 있는 한지 파생 상품을 보면 더욱 실감 난다. 전통을 지키되 나아가 전통이 현대의 기술과 접목되어 그 우수성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 전통을 오래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닥나무 숲의 비밀>을 읽으며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한지의 매력에 푹 빠져 보길 바란다. 김근혜 동화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선물> 로 등단했다. 발간한 책으로는 동화 <제롬랜드의 비밀>, <나는 나야!>, <봉주르 요리 교실 실종사건> 등이 있다. 현재 전주 최명희문학관 상주 작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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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31 15:2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준호 작가 - 이희영 '페인트'

가족의 어원은 라틴어 파물루스(famulus)로, 한 남성에게 속한 아내와 자녀, 노예와 가축 등의 소유물 전체를 지칭한다. 이 소설은 태생부터가 종속과 억압의 의미를 담고 있는 ‘가족’이 평등과 자유가 보편 가치가 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사실 가족을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단순하지만 사회학적인 측면에선 아주 복잡다단하다. 가치관이 다른 타인들이 비자발적으로 구성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가족이 끊임없이 소설과 영화 같은 서사의 주된 소재가 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리라. 이 소설의 시간은 가까운 미래, 공간은 NC 센터다. 부모에게 버려졌거나 고아인 아이들은 NC 센터라는 기관에서 보육된다. 아이들은 부모가 되려는 어른들을 상대로 면접(parent’s interview)을 봐야 한다, 이를 NC 입소생들은 영어 발음과 비슷한 은어인 ‘페인트’라 부른다. NC 센터의 역할은 현재의 보육원과 같고, NC 출신에 대한 사회의 차별과 냉대는 심하다. 입소생 중 한 명인 주인공 제누 301은 생각이 많은 아이다. 어서 입양되고 싶은 생각뿐인 또래와 달리 자의식이 강하고 주체적이다. 제누 301은 당당하게 선언한다. 자신은 원산지를 표시하는 농수산물과 다르다고. 나는 그냥 나라고. 부모에게 양육되지 않았다고 불완전한 인간인 건 아니라고. 미래의 제누 301이 당하고 있는 배제와 혐오는 낯설지가 않다. 현재 우리 주변에 있는 외국인 근로자나 조선족, 새터민과 사회적 약자를 제누 301과 환원 가능하기 때문이다. 제누 301은 ‘어른’과 ‘독립’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견을 제시한다. 어른이 다 어른스러울 필요는 없다고. 부모도 자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자녀가 부모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는 걸 배신이 아닌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고. 이렇듯 이 소설은 보편적인 가치와 상식을 위반하고 전복하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NC 센터의 가디언들은 터치 한 번이면 입소생들의 모든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하지만 NC 입소생들은 가디언들의 성(姓)밖에 알지 못한다. 소설 <삼포 가는 길>과 영화 <김씨 표류기>에선 여주인공이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밝힘으로써 남주인공(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완성한다. 하지만 제누 301이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자 센터장인 박은 “여긴 센터고, 너는 NC의 아이다.”라며 거부한다. 박과 제누 301은 서로를 잘 이해하는 사이지만, 박은 한 명의 아버지이기를 거부하는 대신 불특정한 다수의 아버지로 남기를 선택한다. 여기에서도 이 소설의 주제를 엿볼 수 있다. 제목인 ‘페인트’는 입소생들이 NC 출신이라는 사실을 물감으로 지우거나, 자신의 미래를 원하는 색깔로 칠하고 싶은 욕망이 담긴 의미이기도 하다. 어쩌면 작가는 롤링 스톤스의 <페인트 잇 블랙> 가사처럼 가족에 대한 기존의 관념과 질서를 검은색으로 칠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부디, 어서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이준호 작가는 소설과 동화를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할아버지의 뒤주>, <그해 여름, 닷새>, <커렉터>, <탁류의 시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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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24 16:5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작가 - 문신 '죄를 짓고 싶은 저녁'

그대에게 숫자를 불러 줍니다. 그대는 숫자들을 기억했다 말합니다. 인류라면 어김없이 7±2개만 다시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마법의 수’입니다. 왜 그럴까요? 한 번에 100개를 회상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라는 진화의 섭리 아닐까요. 요즘 우리의 정신은 많이 갈라지고 흩어져요. 하나에 온전히 몰입할 수가 없죠. 유리컵에 들어있는 낮에 밤의 잉크 방울이 미끄럼을 타고 내려옵니다. 등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을 켰고, 품엔 흰밥을 짓고 있군요. 가로등 불빛이 한곳에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저물녘은 얼마나 오랫동안 한자리에 내려와 골몰을 지켜 왔을까요. 문신 시인의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을 그대에게 읽어 줍니다. 죄에서 crime과 sin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이 지을 죄는 아름다울 거라는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 그의 시를 읽으면 저녁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시인의 저녁은 언제일까요? “싸리나무가 꼿꼿이 일어서면 저녁이다/ 이런 날 바람은 참 건들거리고 조그마한 새들도 풀숲에 들어 기척이 없다/ 비가 내리는 것이다”(‘늦은 저녁때 오는 비’ 중). 싸리나무가 꼿꼿이 일어서는 저녁은 참, 몰두하기 좋습니다. 마음이 구부러져서는 어떤 일에 열중할 수가 없죠. 뒤숭숭해서는 더 안 되죠. “하루쯤 휘청, 하고 그대로 주저앉아도 좋으련만 누군가 묵묵하게 페달을 밟아대는 저녁”이어야 합니다(‘누군가 페달을 밟아대는 저녁’ 중). 저녁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온종일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쓰라리지 않기 위해/ 울음보다 가볍다는 소리까지 몽땅 토해”내야 저녁이 옵니다. 잘 익은 느낌, 생각, 행동을 힘 있게 드러내야 오는 것이 저녁입니다. 시인은 저녁을 “무르익어 무너진 영혼의 잔해”라고 말합니다. 소리를 다 들어내지 않아도 오는 저녁을 바랐던 날도 있었지요. 그게 부끄러웠던 날도 있었고요, 시인이 저녁을 맞이하는 자세입니다. “후박나무는 후박나무답게 저녁을 맞이하고/ 저녁에는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므로/ 견습생 같은 삶이라도 어설퍼서는 안” 되지요(‘신도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이다’ 중). 사랑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는 풍선처럼 가볍습니다. 그럴수록 거리를 잡은 손에 힘을 꼭 주어야 합니다. 그런 저녁이면 “버스는/ 브레히트 서사극의 단역배우처럼 끄떡없이/ 골똘해”지고, “버스에 탄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살아가게” 되겠지요(‘버스’ 중). 낮엔 남을 위한 일을 하기 좋고, 저녁엔 자기를 위한 일을 하기 좋아요. 낮엔 에너지를 내보내기 좋고, 저녁엔 들이기 좋죠. 자신은 저녁을 즐기려 하고, 타인에게는 일하라고 하는 세태가 걱정스럽습니다. 이제 저물녘으로 들어가 이쁜 죄를 하나 짓기로 해요. 한 번에 한 가지만 하겠다는 하얀 궁리를 하는 거죠. 놀 때는 놀기로 해요. 이야기할 때는 이야기만 해요. 걸을 때는 걷기만 해요. 음악을 들을 땐 음악만 듣기로 해요. 잘 때는 뒤척이지 말고 잠만 자요, 눈을 볼 때는 눈만 보아요. 먼 곳을 생각할 땐 먼 곳만 생각해요. 이영종 시인은 2012년에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2020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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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17 16:2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작가 - 이규태 '한국인의 의식구조'

1960년 소설 「대지」의 작가 펄벅(1892∼1973)이 한국에 왔을 때, 이규태는 그와 여행을 함께했다. 늦가을,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렸다. “저거 봐요.” 펄벅이 외쳤다. 지게에 볏단을 짊어진 농부가 볏단을 실은 소달구지를 끌고 있었다. 첩첩산중 장수가 고향인 새내기 기자에게는 새로운 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펄벅의 흥분은 가시지 않았다. “미국 같으면 지게의 짐도 달구지에 싣고 농부도 올라탔을 거야. 소의 짐마저 덜어주려는 저 마음, 내가 한국에 와서 보고 싶었던 모습이었어.”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의식을 탐사하고 기록하는 일에 생애를 바친 이규태(1933∼2006)의 ‘한국학 시리즈’는 이렇게 잉태되었고, 소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지게에 볏단을 짊어진 농부의 마음은 한국인의 정신과 기상으로 승화되었다. 이규태는 평생 언론인으로 지내면서 120권에 이르는 저서를 냈다. 한국인 마음씨의 원형을 파헤친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한국인의 민속 문화』, 『한국인의 샤머니즘』, 『한국인의 밥상 문화』, 『한국인의 정신문화』, 『한국인의 생활문화』 등은 우리에게 한국인이 누구인가를 깨우치며 ‘한국인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국민필독서’들이다. 저작들의 많은 부분은 1983년 3월 1일부터 2006년 2월 23일까지 24년간 조선일보에 연재한 ‘이규태 코너’에서 비롯됐다. 장장 6,702회. 한국 신문 사상 최장기 연재 기록이다. 그와 전주사범학교 동문인 소설가 최일남은 이 연재물을 “나날의 생활 속에서 불거진 파편 같은 현실에 나름의 줄기를 세우고 가닥을 잡는다.”라고 말했으며,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많은 이들은 “대한민국의 든든한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 것”이라고 애통해했다. 그의 글은 문학작품과 영화로도 태어났다. 1961년 그는 나병 환자의 요양원이 있는 소록도를 취재하고 바다를 메워 ‘천국’을 만들겠다던 그들의 ‘눈물’을 기사로 썼다. 그 기사를 바탕으로 이청준(1939∼2008)이 쓴 소설이 「당신들의 천국」이다. 소설 속 취재기자 ‘이정태’는 이규태였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정전 암흑 속에 좀도둑도 없었다.’라는 제목의 현장 사설은 국민적인 성원을 끌어냈다. 한국의 ‘씨받이 문화’를 세상에 알린 이도 그다. 1971년 취재한 대리모 할머니의 기사를 바탕으로 쓴 칼럼 「씨받이 부인」(1984년 2월 9일 자)이다. 임권택 감독은 이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고, 배우 강수연(1966∼2022)은 19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어릴 적 종이를 처음 보고 너무 신기해서 그걸 자다가 펴보고 자다가 펴보고 반복했다.”라던 그는 “전주 쪽에 철길이 나서 기차가 다닌다는 말을 듣고 땅바닥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보려고 했다.”라면서 고향에서의 추억을 말하곤 했다. 칼럼을 통해 전주를 ‘오두막 기둥에도 붓글씨를 써 붙이고 사는 예향의 수읍(首邑)이요, 먹물 잘 먹기로 옛 중국 천지에까지 소문났던 조선종이의 고장’이라고 표현한 그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전주전동성당, 전주비빔밥, 콩쥐팥쥐의 고장 완주 등 전북의 이곳저곳을 글에 담았다. 고금의 역사와 동서 문물의 귀재를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그의 노고는 글로 남아 한국인의 삶과 의식에 영원히 살아 있다. 최기우 극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다. 전북의 역사와 설화, 인물과 언어, 민중의 삶과 유희, 흥과 콘텐츠를 소재로 무대극 집필에 힘을 쏟으며, 희곡집 『상봉』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은행나무꽃』 『달릉개』 『뽕뽕뽕 방귀쟁이 뽕함나니』 등을 냈다. 현재 최명희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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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10 17:3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진숙 작가 - 목경희 '분홍옷 갈아입고 꽃길을 가네'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자에게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용서해라. 고마웠다. 사랑한다. 잘 가시라? 우리가 그 문턱을 넘어가는 자라면, 지나온 삶에 대한 반성과 용서, 사랑 고백이 필요할 것이다. 나아가 남아 있는 자들에게 행복을 기원해주고 동행했던 지난날들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떠난다는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을까? 답을 찾을 수 있는 책을 만났다. 〚분홍옷 갈아입고 꽃길을 가네〛이다. 이 책은 목경희(어머니)와 박혜신(딸)의 산문집이다. 목경희 작가는 전북춘추(전북일보) 필진으로 활동했고 전북문인협회 상임이사를 연임했으며 여권옹호협회 전북지부장을 하는 등 활동 영역이 넓었다. 박혜신은 국어교사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후 불혹(不惑)을 겨우 지나 세상을 떠났다. 목경희 작가의 고난 극복은 탁월하다. 그녀가 35세 때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둘째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녀는 자신이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지 못하도록 수예를 배우며 지혜롭게 고통을 극복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회갑을 갓 넘은 나이에 의지하고 아끼던 딸을 또 먼저 보내게 된다. 젊은 딸을 보낸 후 기도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자리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알았기에 몸부림을 치며 암울한 동굴에 불을 켰다. 4년만에 이 책을 출간한 것이다. 이것은 딸을 보내주는 의식의 일환이지 않았을까? 박혜신은 위암 수술을 하고 항암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체력이 약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오기도 했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병마를 이겨내려고 노력했다. 친지들에게 남긴 편지에서 “죽음 앞에서 가장 절실했던 건 ‘시간의 가치’였다는 것.”과 “사랑을 잃으면 삶 전체를 잃게 되는 것이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의 가치를 깨닫고 실천하려 애를 쓴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느꼈을 때 “어머니의 사랑의 목소리가 죽음 저편까지도 따라올 것 같아 외롭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죽음을 독대했을 때조차도 평안으로 삶을 정리하는 모습이 일기와 편지에 가득하다. 특히 그녀가 떠나기 3일 전까지 기원을 모아 쓴 딸을 향한 편지는 두 딸들이 엄마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지침서가 되었을 것이다. 목경희 수필가, 그리고 그녀의 고명딸 박혜신 선생님. 그녀들의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날들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언젠가는 삶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그때 가까운 이들에게서 ‘잘 살았다’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그 죽음은 축복이지 않을까? 생의 끝자락이 아름다운 뒷모습이기를 원하는 그대에게 이 책을 권한다.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고교 국어교사로, 201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됐다. 2010년부터 최명희문학관에서 혼불 완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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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03 17:3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작가 - 한정영 '히라도의 눈물'

살다보면 ‘운명의 수레바퀴’에 치여 막다른 길에 서게 되는 때가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암초에 걸린 배가,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서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어 헤매는 것처럼 말이다. 『히라도의 눈물』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 ‘히라도’로 끌려간 도공의 아들 세후의 이야기이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운명에 휘말려 일본 땅에서 살아가야 했던 세후가 부딪혀야하는 현실은 참혹했다. 도공인 아버지는 끊임없이 조선으로 돌아가려하지만 세후는 일본인 엄마를 두고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다마쿠라 장군에게 잡혀가 갖은 고문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가면서도 일본에게 보복하려는 ‘왜벌단’을 돕고, 백자 만드는 흙을 발견했으면서도 ‘왜놈들의 것이 될 그릇을 빚지 않겠다.’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세후는 ‘반쪽 왜놈’이라고 놀림 받고, 또래 아이들한테 두들겨 맞으면서, 도공이 되기를 거부하고 사무라이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자신이 조선에서 태어났고, 채 한 살도 되지 않았을 때 일본에 끌려왔으며, 친엄마가 일본군에 의해 바다에 던져졌다는 진실을 알게 되면서 혼란에 빠진다. 그런 세후에게 아버지는 “그릇을 빚어야 우리가 살 수 있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넌 타고난 사기장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라는 말을 반복한다. 세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자기를 만들면서 비로소 ‘그릇이 아버지의 생명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기장은 그저 그릇을 만드는 게 아니라 물과 흙과 나무와 불로 조선을 빚는다.’는 아버지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결국 세후는 히라도에 내동댕이쳐진 운명의 수레바퀴를 자신의 의지로 돌려놓으며 아버지를 대신해 바다 건너 ‘오란다’로 향한다. 작가는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세후가 아버지와 히라도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구하려고, 도공이 되어 바다를 건너기로 결심하는 과정을 통해, 세후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세후가 서양오랑캐가 득실거리는 ‘오란다’로 떠난 것처럼 살아가는 일은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정답은 알 수 없고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새로운 꿈을 꾸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는 것을 『히라도의 눈물』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장은영 동화작가는 200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통일 동화 공모전에서 수상했다. 그동안 펴낸 책 7권 중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실록수호대>는 전주의 책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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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27 17:4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아현 작가 - 이순자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작년 겨울, 친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글이 있었다. 바로 이순자 작가의 「실버 취준생 분투기」다. 메시지나 SNS를 통해 간간이 본 적 있는 제목이었다. 게다가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자극했기 때문에 시간이 나면 읽어야겠다는 마음을 늘 품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에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이 늘 그렇듯 쏟아지는 메시지의 파도에 밀려 채팅창 저 뒤편으로 넘어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결국 마음먹은 지 한참 지난 올해 봄에야 링크를 눌러 첫 문장을 마주했다. 해당 글을 포함한 산문집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한차례 링크가 다시 돌고 있던 덕이었다. 그동안 미룬 것이 무색하게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곧장 단행본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그 책이 「실버 취준생 분투기」로 상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 그의 유고 산문집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였다. 이 책은 늦은 나이에 창작을 시작한 그의 노트북 안에 있던 산문 여럿과 소설 한 편을 엮어 만든 것이다. “일흔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이른이다. 이른(일흔) 전(前) 나의 분투기가 이른(일흔) 후(後) 내 삶의 초석이 되길 기원한다. (중략) 사방 벽 길이가 다른 원룸에서 다리미판 위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을 쓴다. 하나, 둘 작품을 완성하는 기쁨은 나를 설레게 한다. 이제 시작이다. 정진하리라, 죽는 날까지. 이른 결심을 축하받고 싶다.”(『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中) 그가 다리미판 위 노트북에 그려낸 호흡을 따라, 삶의 궤적을 따라 나도 때때로 비장하기도, 무력하게 무너지기도, 숨을 가삐 몰아쉬기도 하며 글을 읽었다. 잊고 있던 즐거움을 되짚기도 했고, 흘려보낸 다짐도 다시 새겼다. 기록하는 사람의 궤적인지라 매 순간이 생생하고 꼼꼼했다. 하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것은 비장함도 아니었고, 창작에 대한 욕구도 아니었다. 고소하고 따뜻한 냄새를 솔솔 풍기는 그의 단단한 다정함이었다.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나를 완성하는 참고서 같은 것이라,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달라졌다. 생각을 접고, 계산을 접고, 나눔을 했다. 그래 보니 나눔이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다.” “가만있어도 누군가 살며시 기대온다면 반은 성공한 삶이요, 멀리 있으나 생각만 해도 누군가가 힘을 얻는 이라면 그는 이 세상에 없어도 있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의 든든한 벽이고 싶다.”(『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中) 그의 산문 속에는 단단한 심지와 사려 깊은 어른의 다정함이 곳곳에 담겨있다. 작가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책을 덮고 난 지금까지 내내 다정하고 든든한 벽을 만난 것 같아 기뻤다. 누구나 그렇듯 그도 수많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자주 경계인의 자리에 서 있었다. 동시에 늘 곁에 손 내미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그 손은 마치 내 앞에도 있는 것 같다. 언제든 나와도 손을 맞잡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최아현 소설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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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20 17: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작가 - 단요 '다이브'

2057년 물에 잠긴 서울 2020년,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혼란과 긴장의 연속선상에서 펜데믹 상황에 처한다. 준비되지 않은 펜데믹은 두려움과 공포를 가져왔고, 방향을 잡지 못해 우왕좌왕하기도 했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을 만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게 되고 그 틈바구니에서 작은 해결의 불빛을 잡아나갔다. <다이브>는 2057년 홍수로 물에 잠긴 서울을 배경으로 물꾼 소녀 ‘선율’과 삶과 죽음을 겪어본 기계 인간 ‘수호’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물속으로 나서는 이야기이다. 미래의 서울이 물속에 잠겨 있고,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난민처럼 살아간다. 생존을 위해 물에 잠긴 도시에서 물건을 건져 올리는 아이들 ‘물꾼’. 기계를 고치며 아이들을 돌보는 삼촌, 그러다 물꾼인 ‘선율’이는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아이와 물속에서 건져온 물건 중 최고를 가리는 내기를 한다. 쓸만한 물건을 찾기 위해 바닷속 깊숙한 건물 안에서 기계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기계 인간의 이름은 ‘수호’이다. 수호의 마지막 기억은 2038년에 머물러 있다. 지금은 2057년. 세상이 지금과 같이 바뀐 것은 15년 전이다. 그 시간을 제외하면 기억이 멈춘 4년의 공백이 생긴다. 수호는 그 4년의 기억에 집착한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해 기억되지 않는 과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소설 속 배경은 현재를 살아가는 지구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냈다. 자연재해로 물에 잠긴 도시 서울, 인간의 욕심으로 발명된 기계 인간 ‘수호’ 등 미래 아이들이 바라본 한국은 현재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지금 우리는 현재를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지속 가능하게 유지하고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냥, 그런 세상이 있었던 거야. 없어진 것도, 아주 먼 곳에 있는 것도 눈앞에 불러낼 수 있었던 세상이. 그게 너무 당연해서 만질 수 있는 무언가를 간직할 필요가 없던 세상이.” -<다이브> 본문 이처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세상의 시스템이 완전히 멈추어버리고, 단지 추억의 대상화로만 남아 있다. 또한 ‘수호’가 잊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애쓰지만, 또 다른 인물들도 불편한 과거의 기억 때문에 힘들어한다. 가족의 죽음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혼자서 감당해내며 스스로를 깊은 수렁 속으로 빠뜨린다. 어른도 아이들도 이러한 불편한 기억 때문에 괴로워한다. 잠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느 정도의 기억을 유지하고 살아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생하게 기억되는 과거의 행적도 있지만 대부분을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또 기억해 낸 과거의 일들이 얼마나 많은 왜곡으로 둘러싸여 있는지 알 수 있을까? 결국 현재 자신의 실존에 유리한 기억들로 채워지고, 각색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기계 인간인 ‘수호’의 등장으로 꾹꾹 눌러두었던 잘못된 기억의 실타래가 하나씩 풀어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치유되지 않은 기억을 안고 갈등을 피하기 위해 모른 척하며 외면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 오른다. 잘못 저장된 기억들을 숨긴다고 상처가 아무는 건 아니었다. 상처는 밖으로 꺼내 드러내 보이는 것, 그것이 상처를 제대로 바라보고 치유할 수 있는 과정이지 싶다. 작가는 물에 잠긴 서울을 배경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통해 기억이라는, 과거라는 걸 찾아나서며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왜곡된 기억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디스토피아를 다룬 거라고 여겼지만, 인간이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재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실존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고뇌하는 모습 속에서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이러한 재난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인간은 늘 막다른 길에 서서도 돌파구를 마련하며 시작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책이다. 이경옥 동화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두 번째 짝>으로 등단했다. 발간한 책으로는 장편 동화 <달려라, 달구!> 등이 있다. 지난 2019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사업, 올해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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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13 17:2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헌수 작가 - 필립 자코테 '순례자의 그릇: 조르조 모란디'

그림이 가진 사색의 힘을 필립 자코테의 언어로 만나보았다. 50여 페이지의 얇은 책은 그림과 글의 닮음으로 가득하다. 이 책의 시작은 <두이노의 비가>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가 여기 있는 건 집, 다리, 분수, 현관, 항아리, 과수밭, 창문, 기껏해야 기둥, 탑... 이런 걸 말하기 위해서인지도 몰라” 정물의 시적 예술성을 완성한 사람은 화가라고 생각하며 필립 자코테는 자신의 삶에 내재된 예술 감각과 모란디의 작품세계를 분석했다. 오래된 사물의 흔적과 고요하고 단순한 선이 주는 평온함, 불투명하고 부드러운 빛, 모란디의 그림을 봤을 때의 느낌이다. 모란디의 작품을 보면 처음에는 뭉클한 감정에 녹아들고 다음 순간에는 자신의 감정에 동요하게 된다. 절제된 감성의 미학을 그려낸 모란디는 삶의 대부분을 정물화를 그렸다. 각각의 물성을 제거하며 단순한 정물의 형태를 배치하고, 음울하게 낮은 채도로 모노톤에 가까운 색조를 사용했다. 깊이감 있는 미묘한 색채와 사색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모란디는 볼로냐에서 거의 떠나지 않고 3평도 안 되는 작은 방 하나를 침실과 작업실로 썼다. 자신만의 소신으로 새로운 경험이나 자극을 불편해했고 거의 은둔하며 살았다. 모란디는 병(甁)의 화가 라 불릴 만큼 정물 중에서도 다양한 병을 모티프로 그렸다, 병치된 물건들을 장식화처럼 그렸다. 다소 지루해질 수 있지만 물체 하나를 더하거나 빼거나 자리를 옮기며 실험해 나갔다. 가시적인 세계에 연관된 것들을 탐구하며, 사색과 예민한 직관, 독특한 질서와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 차분한 붓질 속에서 미묘한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시인 필립 자코테가 모란디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존 버거와 아들 이브버거가 나눈 서간 모음집 <어떤 그림> 때문이었다. 그 후로 모란디의 정물화를 자주 들여다보았다. 그 자리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바라보며 사색하는 시간은 복잡스러운 일상을 해방시켜준다. 혼돈의 세상에서 홀로 떨어져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평범한 물건을 굽어보는 시선에서 강렬한 집중력을 느낄 수 있다. ‘마음속에 이미 다음 수, 나아가 체스판의 전체의 수를 읽으며 자신 앞에 놓인 수를 어떻게 둘지 곰곰이 생각하는 명인’에 비유하며 말이다. 시처럼 아름다운 문장과 뾰족한 생각이 켜켜이 쌓여있다. 정물이라는 주제가 갖고 있는 정형화된 기물의 변주가 시간의 순례자를 끌어당기고 있다. 기다리고 견디며 침묵하고 스며드는 일을 모란디의 그림에서 만났다. 평생 거의 유사한 작업을 반복한 그의 광기, 시종일관 차분했던 그는 계속 변화를 주며 여전히 무언가를 시도했다. 그림이 주는 매력은 다양하다. 화집을 펼쳐보고 그날의 기분에 맞는 그림을 보며 그림이 주는 다정한 위로 속으로 들어가 보자. 평온했던 일상에 교차하는 많은 고된 일들, 무채색의 정물화가 안겨주는 크고 작은 의미가 선명하게 마음을 흔들 것이다. 김헌수 시인은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삼례터미널’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 <조금씩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 시화집 <오래 만난 사람처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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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0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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