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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잔] 대상 부재의 그리움, 커피로 형상화

현실을 직시하는 투명한 기억만이 그리움 뒤에 움츠리고 있는 주름을 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요즈음 온 나라가 커피 열풍으로 뜨겁다. 도심은 한 칸 건너 커피숍이고 골목마다 커피 향이다. 사가기 용 종이컵 하나 들고 있지 않으면 이방인이 된 듯 뻘쭘할 때도 있다. 전문가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금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장소와 분위기입니다. 잘 꾸며진 카페를 찾아 오감 만족하자는 것이죠. 입맛 또한 자꾸 진화하니 선순환 하는 거죠.” 맛과 향이 포인트인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커피가 문헌상에 처음 언급된 것은 10세기경 아라비아의 의학자 ‘라제스’가 저술한 의학서적이라고 한다. 거기에 ‘커피 열매는 위장의 수축을 부드럽게 해주고 각성제로 좋은 약’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커피 열매의 과육과 씨를 분리하지 않고 갈아 마시던 때가 있었다고 하니 격세지감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커피를 잘 모르던 시절,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를 보며 그 꽃에 정신을 빼앗겼던 적이 있다. 연한 운무 속에서 송알송알 피어나는 꽃은 우윳빛이었다. 광활한 대지 위를 쌍익 비행기가 날고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 분)와 ‘카렌’(메릴스트립)이 빨갛게 익은 커피 알맹이처럼 농익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기다란 물통 가득 흘러내려 가는 저 알맹이들은 무엇일까? 알고 보니 과육을 벗겨낸 커피콩 이었다. 콩을 세척하고, 일정 시간 욕조에 담가 두는 것은 끈적거리는 과육 점액질을 제거하기 위함이란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 커피의 메카라는 강릉을 여행하며 다양한 맛을 음미해봤다. 강릉 커피 하면 ‘일서 삼박’ 즉 한 명의 서 씨와 세 명의 박 씨가 회자한다. 그들이 경합하며 커피를 발전시켰는데, 지금은 ‘박이추’ 한 분만이 남아 맛좋은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주고 있다. ‘안목항’ 커피 거리에서 해풍 쐬며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시름을 녹이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커피는 기다림의 은유 아닌가 한다. 한때 우리는 이 답답함을 대중가요로 승화했다.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대오기를 기다려 봐도’라던가 ‘그 다방에 들어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기다리는 그 순간만은 꿈결처럼 감미로웠다’등. 광고 문안도 빼놓을 수 없다. 배우 안성기 씨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며 대중의 감성을 자극했다.

 

최근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잔> 이라는 일본영화가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영화는 일본의 땅끝 마을이라는 이시카와 현 ‘오쿠노토’해변이 무대다. 네 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헤어졌던 ‘미사키’(나가사쿠 히로미 분)가 어린 시절에 아빠와 함께했던 이곳에 와 배 넣어두던 창고를 개조해서 ‘요다카’라는 커피숍을 연다는 이야기다. 사람이라고는 홀로 남매를 키우며 사는 ‘에리코’(사사미 노조미 분)일가 뿐인 이곳에서 미사키는 로스팅(생콩을 볶아 맛을 생성하는 공정)한 커피를 택배로 배송하는 일을 주로 한다. “커피콩은 멀리 아프리카나 남미에서 와요. 여기는 손님에게 가기 전에 잠깐 들르는 곳에 불과하지요.”

 

로스팅 기계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오를 때쯤이면 어김없이 한 잔의 커피를 내린다. 깔때기에 커피가루를 넣고 시계방향으로 타원을 그리며 물줄기가 끊어지지 않게 붓는다. 다 내리면 향을 깊게 들이마신 뒤에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바다를 바라본다. 몇 년 전에 배 타고 나가 실종된 아버지를 생각한다. 언젠가 돌아오시겠지. 그때 아빠는 이 자리에서 기타를 연주해 주었다.

 

커피숍에 에리코 일가족이 합세한다. 벌이가 변변치 못한 에리코가 카페 일을 돕는 것이다. 낮에는 애들의 담임선생님이 다녀갔다. 날이 어두워진다. 건물 모서리에 세워둔 외등에 불이 들어온다. 바다가 색을 바꾸고 구름이 자리를 잡는다. 달이 떠오른다. 외등, 바다, 구름, 달 그리고 미사키. 그들이 하나가 된다. 그 사이로 진한 커피 향이 피어오르면 그리움은 절정에 이른다.

 

이 영화에는 남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미사키도 에리코도 아이들도 낮에 잠깐 들른 선생님도 동경에서 찾아왔다는 손님 두 명까지 모두 여자다. 영화는 대상 부재의 그리움을 커피 향으로 형상화 하려 든다.

 

일련의 흐름은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의 화자 ‘마르셀’이 마들렌 과자를 홍차에 찍어 먹다가 갑자기 파도처럼 밀려드는 어린 시절 기억과 직면하는 모습과 닮았다. 소설은 이를 ‘동일한 순간의 견인력이 아주 멀리서 찾아와 내 깊숙한 곳으로부터 부추기고 움직이고 끌어올리려 하고 있는데, 내 선명한 의식의 표면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라고 묻는 대목과 비슷하다. 조가비 모양(주름 잡힌)을 한 마들렌, 접힌 주름을 편다는 것은 과거의 부활을 뜻하는 것일 터. 결국 현실을 직시하는 투명한 기억만이 그리움 속에서 움츠리고 있는 주름을 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뜻 아닐지…?

 

제목을 다시 한 번 음미하자면 ‘세상의 끝’은 특정 장소나 위치일 뿐만 아니라 그리움의 뿌리랄 수 있겠다. 세상 끝에서 커피 한 잔 하실래요?·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전북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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