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내적 외적 스트레스에 / 적응하기 위해서는 / 재구조화될 필요가 있다
 
    이혼 신청한 부부가 나란히 판사 앞에 앉아있다. 아내 ‘씨민’(레일라 하타미 분)은 딸과 함께 이민 가자는 것을 남편 ‘나데르’(페이만 모아디 분)가 반대하기 때문에 이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데르는 치매 걸린 아버지를 두고 이민갈 수 없으며 이혼에도 동의 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딸의 장래를 위해서라는 씨민의 주장이 이혼 사유가 될 수 없다며 모두의 동의를 받아오라는 판사를 향해 씨민이 서글픈 표정으로 묻는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판사의 강한 목소리가 화면 밖 음성으로 쩌렁쩌렁 울린다. “그냥 전처럼 사세요.”
치매 걸린 아버지 수발을 씨민이 도맡았을 것이라는 추정 아래 영화를 보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은 전처럼 살지 않는다. 수미상관(首尾相關)구조의 영화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엔딩에서 이들을 다시 판사 앞에 대기시킨다. 딸 ‘테르메’(사리나 파르허디 분)가 법원에 나와 아빠와 엄마 중 한쪽을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는다. 영화는 이혼소송의 인과관계보다는 주요 등장인물의 답답하고 억울한 입장을 조명하려는 듯 보인다. 가족,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위급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정문자 외 3인 공저 <가족치료의 이해> 에 의하면 ‘어떤 가족이든 가족원의 상호작용을 반복적으로 관찰하다 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한다. 구조적 가족치료에서는 이런 가족의 상호작용 패턴을 가족구조 개념으로 설명한다.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일정한 구조로 되어 있듯이 가족의 상호작용도 일정한 구조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대표적인 학자 ‘미누친’(Minuchin)은 가족이 내적·외적 스트레스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재구조화 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만성질환자가 있는 가족은 그 가족원이 수행하는 기능이나 권력 일부가 다른 가족원에게 재구조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치료의>
법원을 나온 씨민은 별거를 선언하고 친정으로 향한다. 나데르는 아버지와 곧 11세가 되는 테르메를 돌본다. 급한 나머지 임신한 ‘라지에’(사레바얏 분)를 간병인으로 고용하는데, 침대에 누워있지 않고 계속 돌아다니는 아버지를 모시는 게 큰일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시내를 배회하는 장면이 포착되고, 라지에가 황급히 차도를 가로질러 가는 모습과 겹친다. 다음 날 아버지가 침대 봉에 한쪽 팔이 묶여 낙상한 채로 누워있다. 라지에는 보이지 않는다. 근무시간 중 잠시 집에 들른 나데르가 정신없이 응급처치한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다. 라지에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지만 이를 숨긴다. 나데르는 아버지를 이렇게 해놓고 돈까지 가져갔다며 호되게 추궁하다가 나가라며 문밖으로 밀어낸다. 돈을 가져가지 않았다고, 신께 맹세한다고 결백을 주장하는 라지에의 울부짖음이 복도 끝에서 메아리 된다.
다음 날 라지에가 유산했다며 남편 호얏이 불같이 항의한다. 라데르는 살인죄로 고소당한다. 그 역시 호얏의 폭력을 문제 삼아 맞고소하지만 싸움은 불리하기만 하다. 이때 씨민과 테르메가 한목소리로 나데르를 옹호하고 나선다. 가족의 상보적 역할이 이렇게만 강화된다면…. 재판은 라지에가 아버지를 찾아 나섰을 때 거리에서 차에 치여 유산된 쪽으로 결론 난다. 라지에는 이 사실을 시인한다. 코란에 대고 맹세하건대 거짓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할 수 없다며. 합의금을 받아 빚을 갚으려던 호얏의 계획이 수포가 된다.
호얏의 소행인 듯 나데르의 승용차 앞 유리창에 커다랗게 구멍이 났다. 차를 타고 말없이 돌아가는 부부와 딸. 차 속도가 빨라지니 강한 바람이 들어온다. 깨진 유리창은 구멍 난 가족의 은유이지 싶다. 이 상태로 계속 달리면 바람만 드셀 것 아니겠는가. “시아버지는 핑계에요. 아버님은 이 사람 알아보지도 못해요”라는 씨민의 말에 “아버지는 몰라도 나는 아버지를 알아”라고 응수하는 라데르를 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구조적 가족치료는 가족체계를 세 가지 범주로 제시한다. 첫째, 경직된 경계선이다. 가족원이 너는 너, 나는 나 식의 지나치게 독립적인 태도로 서로를 대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모호한 경계선이다. ‘너의 일은 모두 나의 일’이라는 정체성이 모호한 경우를 말한다. 셋째, 명확한 경계선이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면서도 필요할 때면 서로의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협동하고 의지하며 서로의 삶에 관여함을 말한다. ‘우리’라는 집단의식과 함께 ‘나’라는 감정을 잃지 않는다.
나데르 가족 4명, 라지에 가족 아이까지 3명. 이들은 모두 가족의 내적, 외적 스트레스 상황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경계선이 모호하니 하나같이 자기만 억울하다. 영화는 이렇게 답답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날으는 양탄자’에 실어 날려 버리기라도 할 듯 관계의 답답함을 촘촘히 엮고 있을 뿐이다.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전북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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