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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19)?溪(침계)-추사 김정희의 글씨(6)

以此二字轉承疋囑. 欲以隸寫, 而漢碑無第一字, 不敢妄作, 在心不忘者, 今已三十年矣. 今頗多讀北朝金石, 皆以楷隸合體書之, 隋·唐來, 陳思王·孟法師諸碑, 又其尤者, 仍?其意寫就. 今可以報命而?酬夙志也. 阮堂幷書.- 바로 잡아주실 양으로 이 두 글자를 쓸 것을 부탁하셨는데 (곧바로 써드리지 못하고) 뭉그적대며 오늘까지 이어왔습니다. 예서로 쓰고자 하였으나 (예서의 범본이 되는) 한나라 때의 비석에는 첫 번째 글자인 '?'자가 없었습니다. 제 맘대로 지어내어 쓸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마음에 넣어두고 잊지 않은 채 이미 3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제가 북조시대 금석문을 공부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북조시대 금석문은 거의 다 해서와 예서를 합쳐서 쓴 모양(예서와 해서의 과도기적 글씨)이었습니다. 수나라 당나라 때에 쓴 진사왕비나 맹법사비는 더욱 그랬습니다. 이에, 이러한 북조의 비와 수·당의 비에 새겨진 글씨의 분위기를 모방하여 마침내 이 '?溪' 두 글자를 완성하였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글씨를 쓰라하신 명령에 보답함과 동시에 가슴속에 두고 있던 오랜 뜻을 시원하게 갚은 것 같습니다. -완당이 쓰고 아울러 글을 지어 붙이다.?:물푸레나무 침/ 溪:시내 계/ 此:이(This) 차/ 轉:구를 전/ 承:이을 승/ 疋:바를 정(=正)/ 囑:부탁할 촉/ 隸:노예 예/ 寫:쓸 사/ 妄:망령될 망/ 頗:자못(상당히) 파/ 隋:수나라 수/ ?:터 놓을 쾌/ 酬:갚을 수/ 夙:일찍 숙참 감동적인 글이다. 제대로 된 서예 작품을 창작하기 위하여 30년 동안이나 망설이다니! 추사 김정희 선생의 학자적 풍모와 예술가적 열정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溪(침계)는 추사보다 7세 연하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윤정현(尹定鉉1793-1874)의 호이다. 윤정현은 51세에야 과거에 급제했으나 규장각 대교, 성균관 대사성, 황해도 관찰사 등을 거쳐 7년 만에 병조판서에 오른 시쳇말로 하자면 '고속승진'을 한 인물이다. 병조판서 이후에는 함경감사로 부임하였는데 이 때 추사는 함경도 북청에 유배 중이었다. 함경도 감사로 나온 윤정현이 유배 중인 추사를 잘 보살피고 도운 것은 물론이다. 이런 까닭에 혹자는 왕이 추사를 돕기 위해 일부러 윤정현을 함경감사로 내보냈다는 추론을 하기도 한다. 함경감사로 부임한 윤정현은 추사의 지도를 받아가며 윤정현에 앞서 함경감사로 있던 추사의 또 다른 친구인 권돈인이 발견했던 신라 진흥왕의 황초령 순수비를 재발견하여 바로 세우고 비각을 지어 보존하였다. 뜻이 맞는 친구가 관(官)과 민(民)의 입장에서 서로 협조하여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위대한 일을 해 낸 것이다.이처럼 추사 김정희와 침계 윤정현은 각별한 사이였다. 그런 윤정현이 자신의 호를 써달라는 부탁을 하였으니 내심 추사는 생애 최고의 역작으로 쓰고자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질박하면서도 호방한 예서로 쓰리라는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웬걸, 예서의 범본으로 많이 사용하는 한나라 때의 비문 탁본을 다 뒤져봐도 '?'자의 예서 글꼴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리 뭉그적거리고 저리 뭉그적거리며 미루기를 무려 30년, 끝내 예서의 글꼴은 찾지 못하고 대신 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인 위진남북조의 북조 비석들과 수나라 당나라 때의 여러 비석 글씨를 참고하여 예서와 해서를 혼합한 형태의 글자체로 마침내 이 '?溪' 두 글자의 현판을 완성하게 되었다. 본래 구상했던 예서체로 쓰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30년 묵은 친구의 부탁을 들어 주었으니 얼마나 속이 시원했겠는가? 그래서 추사는 말미에 "이제야 비로소 명령에 보답함과 동시에 오랜 뜻(숙제)을 시원하게 갚았다"는 호언을 한 것이다. 추사의 학문적 진지함과 예술적 열정을 볼 수 있고 또 친구간의 담백하면서도 진실한 우정을 볼 수 있으며, 그런 진지함과 열정과 담백한 우정을 담은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과 두툼한 글씨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명작이다. 그런데, 윤정현은 왜 그렇게 까다로운 글자를 넣어 호를 지음으로써 추사를 30년 동안이나 고심하게 했을까? 다음 주에는 윤정현의 호 '침계'의 내력과 황초령의 진흥왕 순수비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하기로 한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7.06 23:02

신석정, '눈물의 답시' 47년만에 햇빛

6일은 신석정 시인(辛夕汀·1907~1974) 작고 37주기가 되는 날이며, 7일은 탄생 104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원·목가시인으로 알려진 석정 선생이 실제로는 제국주의 비판시를 썼다고 밝혀온 허소라 군산대 명예교수(75·시인)가 미발표 엽서를 공개했다. 전북일보 1964년 2월 26일자에 발표된 허 교수의 시 '목종(木鐘)'을 읽고 석정 선생은 참담한 심정을 담아 시'슬픈 서정(소라의 '목종'에 괘념하여)'을 썼다. '목종'은 1964년 경기도 운천리 미군부대에서 굶주리던 소년이 통조림을 훔치다 발각 돼 경비병에 사살된 사건을 통해 때려도 울리지 않는 나무종에 자신의 심경을 빗대 쓴 시. 석정 선생은 이를 읽고 '어무찬 설움에 가슴이 뜨거워 / 끝내 안으로 피를 새겨야 하는 / 목종(木鐘)이 아니라 차라리 벙어리가 되고 싶구나'라고 절규했다. 석정 선생은 허 교수에게 쓰는 엽서에 '〈책임 전가〉의 상표를 또 한번 確認한 채 小年은 갔다. 그리고 조용하였다. 가슴 아픈 이 귀절을 나는 몇 번이나 외었는 지 모르오.'라고 적었다. 하지만 석정 선생이 잊고 붙이지 못한 이 엽서는 올해 석정 선생 유족이 발견, 만 47년 만에 수취인 (허소라 교수)에게 전달됐다."'목가시인'으로만 알려진 석정 선생의 가시면류관을 벗기고 싶다"는 허 교수는 석정 선생은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1941년 순문예지'문장'의 강제 폐간으로 친일 어용지'국민문학'의 원고 청탁을 거부하고 낙향해 친일시를 남기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5·16 직후 교원노조를 지지한 시'단식의 노래'와 '민족일보'에 발표한 시'다가온 춘궁'으로 당국에 끌려가 호된 심문을 받았던 석정 선생은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약소국 침탈의 부당함을 지적해온 '한양'의 주요 필진이 됐다고도 했다. 40여 년 넘게 석정 선생을 연구해온 허 교수는 "석정 선생이 돌아가신 뒤 공개된 시'인도의 노래','슬픈 위치' 외에도 시대적 제약으로 인한 미발표 시가 많다"며 "9~10월 개관을 앞둔 부안 석정문학관에서 자필 원고로 쓴 미공개 시가 선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7.06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20)전북 시조의 부흥가, 박병순

박병순(구름재 朴炳淳·1917~2008)은 진안 부귀 출신의 시조시인이다. 그가 문학을 접하게 된 동기는 시인 김해강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김해강이 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진안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하면서 그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그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지, 구름재는 대구사범학교로 진학하여 스승과 같은 길을 걷게 된다. 그들의 아름다운 인연은 사제간의 표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거니와 요새 사람들이 본받아 우러러야 마땅하다.1954년 박병순은 전북대학교에 국문과가 생기자 1회 입학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문학을 공부하였다. 뒷날 전쟁통에 가람 이병기가 전주의 양사재에 머문 동안 그는 본격적으로 시조를 공부하게 된다. 그 뒤로 그는 평생 동안 스승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으며, 극진히 예우하였다. 가람이 중풍으로 여산에 은거할 당시에 그는 주말마다 거르지 않고 문안인사를 드렸다. 두 분의 스승을 잘 둔 덕분에 그는 민족의 고유한 시형식인 시조를 쓰며, 여러 편의 수작을 남길 수 있었다. 그가 두 스승을 기리며 바친 작품을 읽노라면, 스승을 향한 제자의 순정한 단심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그는 대구사범학교에서 김영기로부터 시조를 통한 민족정신을 전승받았다. 3학년 때부터 문학청년으로 자처한 그는 4학년 때 독립을 모의하는 좌담회를 열고, 1937년 자작시조 '무궁화'를 써서 하숙방에 붙여 두고 좌우명으로 삼을 정도로 강렬한 민족주의자였다. 그가 졸업 후에 경북 상주의 학교에 근무하던 중에 항일 혐의로 경찰에 구금된 것도 반골 기질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그로 하여금 서력기원을 마다하고 일부러 단기를 사용하도록 견인한 원동력이다. 그가 시조시인이란 사실에 남다른 자긍심을 갖고, 가난 속에서도 올곧은 선비의 길을 고수하던 모습은 죄다 민족주의자의 행적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어린 시절에 만났던 스승의 영향으로 일생을 교단에서 후학을 기르는 일에 진력하였다. 전주에서 사는 기간에 그는 초중고등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영생대학교에 출강하여 시조창작론을 가르쳤다. 1979년 2월 상경한 뒤에 그는 한양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시조와 고전문학을 강의하였다. 그 인연으로 박병순은 모범장서가로 뽑힐 만큼 일생 동안 모아둔 6,700여 권의 고서를 한양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하여 구름재문고를 설치하였다. 이 일은 가람문고가 서울대학교에 설치된 것과 함께 지역 출신 작가에 대한 도내 대학의 무관심을 증명한다. 두 분의 귀중한 국문학 자료들이 서울로 유실되지 않고 이 고장에 소장되었더라면, 문학연구는 물론 대작가를 접하는 기회가 더 많아졌을 터이다. 그로 인해 두 시조시인이 정작 고향에서 홀대되는 듯해 두고두고 안타깝다.박병순은 1938년 '동광신문'에 시조 '생명이 끊기기 전에'를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그는 이병기의 가르침대로 시조를 현대화하는 일에 고심하였다. 작품의 배경에는 한국적 서정을 장치하면서도, 종래의 전통적 기법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스타일을 모색하느라 공을 쏟았다. 그의 시조가 지닌 특장은 작품과 생활이 일체화되어 녹아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일체의 기교를 멀리하고 진솔한 심성에 비친 진실한 정감을 정직하게 형상화하느라고 노력한 시인이다.또 박병순은 시조문학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만사를 뒤로 물렸다. 1952년 최초의 시조 전문지 '신조'를 5집까지 발행하였고, 한국시조시인협회장 등을 역임하며 시조작가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시조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열성적으로 임하였다. 1985년 그는 한춘섭 등과 '한국시조큰사전'을 상재하여 시조를 종교로 숭앙하던 신념의 일단을 선보였다. 이 사전으로 기존의 한국 시조는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으며, 고려말에 시작된 이후의 역사를 정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전라북도문화상을 비롯하여 노산문학상 등을 받았다.시조 외에 그는 해방 후의 혼란기에 전주의 카톨릭회관에서 한글강습회를 열어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그 후에도 그는 한글전용운동을 위시한 한글운동에 헌신하여 1972년 한글학회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그에 비하여 그가 교직에 종사하면서 받았던 교육상은 세 번이나 장을 수술하며 시종시간을 정확히 지킨 평교사의 공을 치사하는 상치고 격이 나무 낮았다. 이제라도 그에게 어울리는 상이라면, 고향 진안에 번듯한 문학관을 지어 시조를 중흥하기 위해 헌신하던 그의 공로를 기리는 것이다.다행히 박병순은 1993년 희수를 맞아 '구름재시조전집(가꿈)'을 간행한 바 있다. 그의 영식과 사위가 앞장서서 대가의 작품들을 한곳에 모은 점은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만하다. 이 작품집에는 1954년 낸 첫 시조집 '낙수첩(항도출판사)'을 비롯하여 발행 당시까지의 전작품 762편 2,906수가 묶여 있다. 게다가 인생도 갈무리되어 있어서 그의 체취를 느끼고 살피기에 알맞다. 또 가곡화된 여러 편의 악보와 전주상고 등의 교가가 수록되어 있어 음악사와 교육사 측면에서도 의의를 지닌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7.05 23:02

제5회 국제해운문학상·제22회 열린시문학상 시상식

'제5회 국제해운문학상·제22회 열린시문학상 시상식'이 지난 1일 전주 완산구청 대강당에서 열렸다.(주)국제해운(대표이사 윤석정)·(유)현대건설안전연구소(대표이사 김병국)가 주최하고 열린시문학회 시창작교실(대표 이운룡)이 주관하는 이번 시상식에는 해운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송재옥 시인과 본상을 수상한 강진숙 시인, 열린시문학상 금탑상을 수상한 강태구 시인과 이현정 시인이 기쁨을 나눴다.윤석정 대표이사는 "바다는 우리나라와 국민이 세계로 나가는 지름길인 만큼 이 문학상이 단명하지 않고 장수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으며, (유) 현대건설안전연구소 김병국 대표이사는 "문학상을 통해 향토 문인들의 창작활동이 더욱 활발해져 우수한 작품이 쏟아져 나오길 바란다"고 밝혔다.이날 시상식에는 건강을 회복한 이운룡(열린시문학회 대표), 이동희(전북문인협회 회장), 선기현(전북문인협회 회장)의 축사가 있었다. 시상식에는 이병주(군산지방해양항만청장) 이철원(한국해양신문 사장), 유희태(민들레포럼 대표), 황병근(전 전북예총 회장), 서재균·소재호(전 전북문인협회 회장), 이동희(전북문인협회 회장) 등을 비롯해 수상자 가족 200여 명이 참석했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7.04 23:02

행촌수필 문학회, '행촌수필' 제19호 발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올해로 행촌수필문학회가 발족한 지 9주년이 됐습니다. 회원 숫자가 다섯 배나 늘었고, 세 명의 회원이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됐는가 하면, 48명의 회원들이 수필집을 발간해 행촌수필문학회 위상을 높였죠. 위상에 걸맞는 축제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신임 행촌수필문학회 박귀덕 회장(64)이 28일 오후 전주시청 강당에서 행촌수필문학회 9주년 기념해 '전주시민과 함께하는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초청 강연(민용태 고려대 교수)으로 문향(聞香)을 더하고, 설예원의 차 대접으로 다향(茶香)에 젖었다."행촌문학회 회원들의 수필사랑은 유별납니다. 해마다 수필기행을 찾아다니며 좋은 글을 엄선해 동인집'행촌수필'을 발간해오면서 창작의욕이 높아지는 걸 확인했어요. 정원의 꽃이 무리지어 필 때 향기가 더욱 진하듯 '행촌수필'의 회원들이 더 좋은 작품을 써준다면, 한국문단에도 주목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전주시청 앞 노송광장 잔디밭에서는 원로·현직 회원들의 수필화가 전시됐다. 출판기념회를 찾은 시민들에게는 '행촌수필(제19호)' 을 선물로 전달하기도 했다.그는 지난 2005년 공직생활을 접고, 전북대 평생교육원에서 수필 쓰기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수필쓰기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맛과 멋이 어우러진 전주, 선비의 고장 전북에서 수필문학이 활짝 꽃피울 수 있도록 행촌수필문학회를 아껴달라"며 또한 전북이 한국수필의 메카로 우뚝 솟을 수 있도록 관심과 애정도 당부했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6.29 23:02

[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18)묵소거사(默笑居士) 자찬(自撰) -추사 김정희의 글씨(5)

當?而?, 近乎時, 當笑而笑, 近乎中.周旋可否之間, 屈伸消長之際. 動而不悖於天理, 靜而不拂乎人情. ?笑之義, 大矣哉. 不言而喩, 何傷乎?. 得中而發, 何患乎笑. 勉之哉. 吾惟自況, 而知其免夫矣. ?笑居士自讚.응당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한다면 상황에 맞게 처신한다 할 수 있고, 응당 웃어야 할 때 웃는다면 중용(中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 상황이 있다.)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조절해야 할 때도 있고, 몸을 굽혀야 할 때와 나래를 활짝 펼 때가 있으며, 뭔가를 없애야 할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북돋아야 할 경우가 있다. 이런 때, 저런 경우마다 때로는 활발히 움직여 활동하면서도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때로는 조용히 멈춰서면서도 인정(人情)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저런 어떤 경우에도 침묵하는 가운데 빙그레 웃는 '?笑'처럼 좋은 처신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笑의 의미는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지 않고서도 상대를 깨우칠 수 있다면 침묵한다고 해서 해를 당할 일이 무엇이겠으며, 중용의 입장에서 웃음을 보인다면 웃었다고 해서 무슨 환난을 당하겠는가? 그러니 ?笑하기에 힘써야겠다. (지금 실어증에 걸려 말을 못하는 가운데 빙그레 웃기만 하는) 나의 경우에 빗대어 봄으로써 (묵소하며 산다면 세상의 모든 비방과 환난을) 면하고 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當:응당 당/ :잠잠할(침묵할) 묵/ 笑:웃을 소/ 周:두루 주/ 旋:돌(선회) 선/ 屈:굽힐 굴/ 伸:펼 신/ 消:사라질 소/ 際:즈음(때)/ 悖:어긋날 폐/ 拂:털(털어낼) 불/ 矣:어조사의 哉:어조사 재/喩:깨우칠 유/傷:상할 상/ 患:병 환/ 勉:힘쓸 면/惟:오직 유/ 況:빗댈 황/ 免:면할 면/ 讚:기릴 찬오늘 소개한 글은 상당히 길다. 그러나 약간의 인내심을 가지고 읽으신다면 큰 재미와 보람을 느끼시리라고 생각한다. 짧은 글이지만 속뜻이 너무 깊어 필자도 번역하는데 적잖이 고심했다. 번역의 어려움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이 작품은 추사의 나이 51세에서 54세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하는데 추사 해서(楷書)의 백미이다. 원래는 추사 자신이 짓고 쓴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이〈추사 김정희, 학예일치의 경지〉라는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둘레를 빙 돌아가며 찍힌 도장이 추사의 절친한 친구인 황산(黃山) 김유근(金?根1785~1840)의 것임을 발견함으로써 김유근이 글을 짓고 추사가 글씨를 쓴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는데 후에 김유근의 문집인 《황산유고(黃山遺稿)》에 이 〈묵소거사(?笑居士) 자찬(自讚)〉이 수록되어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김유근의 글임을 확정하게 되었다. 게다가 김유근이 1837년부터 1840년까지 실어증에 걸려 고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이 글을 실어증에 시달리던 그 시기에 지은 것으로 짐작하게 되었고 글씨 또한 그 시기 즉 추사의 나이 51세에서 54세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김유근의 이〈묵소거사 자찬〉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의 질(質)이 크게 달라짐을 보여주는 명문(名文)이다. 실어증에 걸린 상황에서 침묵하는 가운데 웃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오히려 그런 침묵과 웃음으로 자신을 갈고 닦으려 하는 태도가 얼마나 여유롭고 긍정적인가? "말하지 않고서도 상대를 깨우칠 수 있다면 침묵한다고 해서 해가 될 일이 무엇이겠으며, 중용의 입장을 지키면서 웃음을 보인다면 웃었다고 해서 무슨 환난을 당하겠는가? 그러니 말이 없는 가운데 빙그레 웃기에 힘써야겠다."고 하며, 실어증에 걸리고 보니 그런 '?笑'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는 작자 김유근은 이미 삶에 달통한 도인(道人)이라는 생각이 든다. 추사의 글씨 또한 글만큼이나 명작이다. 추사의 작품 중에 해서가 별로 보이지 않는데 이작품은 유독 해서로 또박또박 쓴 걸 보면 글씨에도 '말없이 빙그레 웃는' 수신(修身)의 의미를 담고자 한 것 같다. 필획에서 마치 살아있는 물고기를 잡았을 때 용쓰는 물고기의 힘과 같은 그런 힘을 느낄 수 있다.?笑, 말없이 빙그레 웃는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이 편하고 쾌활해야 빙그레 웃을 수 있는데 어디 범인(凡人)들이 그렇게 할 수 있나? 말을 안 하다보면 평안해지기는커녕,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울증에 빠지고 마는데 어디에서 '빙그레'웃음이 나올 수 있겠는가?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 말없이 웃을 수 있도록.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6.29 23:02

'엄마를 부탁해', 아마존닷컴 상반기 베스트10

지난 4월 미국에서 출간된 신경숙의 장편 '엄마를 부탁해(Please Look After Mom)'가 최대 인터넷서점 아마존닷컴 상반기 결산(Best of 2011 So Far)에서 편집자가 뽑은 베스트 10에 뽑혔다. 아마존닷컴이 최근 편집자에게 의뢰해 뽑은 2011년 상반기 베스트 10에 따르면 '엄마를 부탁해'는 쟁쟁한 베스트셀러를 제치고 10위에 올랐다. 또 이 책은 또 편집자 선정 픽션 부문에서는 4위에 랭크됐다. '엄마를 부탁해' 영문판은 아마존닷컴 전체 순위에서는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지만 '문학ㆍ픽션' 부문의 하위 분류인 '본격문학(Literary)' 부문에는 29위에 올라있다. 신경숙 작가의 해외 판권을 관리하는 KL매니지먼트의 이구용 대표는 "신 작가의 작품이 아마존닷컴 편집자 선정 베스트 10에 뽑혔다는 것은 상업적인 면 뿐만 아니라 작품가치 측면에서도 충분히 인정받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 책은 지난 4월 출간 하루 만에 아마존닷컴 전체 순위 100위에 진입하는 등 미국 시장에 선보이자마자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뉴욕타임스에 두 차례 소개되는 등 현지 언론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 양장본소설(Hardcover Fiction) 부문에서는 14위까지 올랐다. 이 책의 영문판을 펴낸 미국의 유명 출판사 크노프는 출간 전 이미 초판 10만부를 찍었고 지금까지 8쇄까지 소화했다. 미국 등 28개국에 번역 출간됐다.

  • 문학·출판
  • 연합
  • 2011.06.29 23:02

국제해운문학상 송재옥·강진숙 시인

(주)국제해운(대표이사 윤석정)과 열린시문학회 시창작교실(대표 이운룡)이 시상하는 '제5회 국제해운문학상'의 대상은 시집 '시간 구워먹기'를 펴낸 송재옥 시인에게 돌아갔다. 본상은 시 '푸른 축제' 외 25편을 지은 강진숙 시인이 선정됐다. '제22회 열린시 문학상' 금탑상에는 강태구 시인과 이현정 시인이 받는다.심사위원회(위원장 이동희)는 27일 시집을 출간했거나, 1년간 신작을 발표한 후보자 중 우수한 작품을 내놓고 왕성한 활동을 한 4명을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송 시인의 작품은 현대 문명세계의 비극적인 삶을 여과시켜 강도 높은 휴머니즘을 드러냈으며, 풍자성 짙은 철학적인 심상을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송 시인은 1991년 '표현'을 통해 신인작품상으로 등단한뒤, 열린시문학상·모악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한국문인협회·전북문인협회·전북시인협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강진숙 시인은 2009년 '한국문학예술'로 등단, 삶에 대한 문제의식에 천착해 존재의 부조리나 모순 등을 바로잡기 위한 내면의식을 미적감각으로 승화시킨 시를 창작해왔다. 삶의 여백을 채우는 서정적 세계를 보여준 강태구 시인은 2004년 '해동문학'으로 문단에 나와 전북문인협회, 전북시인협회, 전주문인협회, 열린시문학회 회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짙은 서정성을 함축성이 강한 시어로 표상해 온 이현정 시인은 10년 간 창작 수련을 거친 중고 신인이다.'국제해운문학상'은 군산에 지사를 둔 (주)국제해운 윤석정 대표이사가 매년 창작지원금(대상 300만원, 본상 200만원)을 지원하면서 창작의욕을 고취시키고 있다. 전북 출신으로 포항해운항만청장, 목포해양수산청장, 바다살리기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을 역임한 윤 대표는 지역 문학 활성화에 헌신하고 있다. '열린시문학상'은 올해부터 (유)현대건설안전연구소 김병국 대표이사가 기업의 메세나 운동으로 창작지원금(200만원)을 지원하면서 지역 문단의 경쟁력을 제고시키고 있다. 시상식은 7월 1일 오후 4시 전주 완산구청 8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6.28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19)전북 서정시의 원정, 최승렬

최승렬(園丁 崔承烈·1921~2003)은 전주 출신의 시인이다. 아버지 없이 자란 그는 살아가는 내내 어머니에게 지극한 효자였다. 그에 관한 하나의 일화이다. 그는 어릴 적에 서울의 여관에서 부엌에 장작을 지피고, 수원의 한 종묘장에서 씨앗을 골라내었다. 그는 일해서 받은 첫 월급으로 어머니에게 흰 고무신을 사다드렸는데, 어머니는 아들이 땀흘려 번 돈으로 사온 고무신이 아까워서 평생 동안 한번도 신지 않고 아끼다가 신발은 결국 영위 앞에 놓였단다. 그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철철 넘치는 사연이다. 청년 시절에 그는 흥안령 계곡과 몽고의 고비사막을 방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생과 방랑으로 점철된 그의 성장기는 커서 타인과의 접촉 기회를 차단하고, 자신을 문학과 학교 속에 유폐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그는 해방 후에 귀국하여 국학대학을 졸업하고 목포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의 인연으로 그의 첫 동시집 '무지개(항도출판사·1955)'가 목포에서 출간된 것이다. 그 뒤에 그는 서산 등지를 전전하다가 전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도내 신문지상에 활발히 작품을 발표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안락을 누렸다. 고향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그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들처럼 평안하였고, 신석정을 찾아다니며 시를 공부하였다. 그런 이유로 그의 시에는 석정의 시풍이 배어 있다. 석정도 그를 끔찍하게 아꼈던지, 동시집에 글을 써주고 격려하였다.최승렬은 전쟁 후에 전북 시의 전통이었던 전원시를 다시 꽃피웠다. 그에 이르러 엄격한 자기 수양으로부터 비롯된 정갈한 시형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전주에 있는 동안에 쓴 작품들에는 자연 취향이 남다르게 표출되어 있다. 아마 고향에 돌아와 생활하는 도중에 갖게 된 정신적 아늑함이 평화한 성정을 돋보이도록 도와주었을 터이다. 아울러 이 시기에 전라북도의 시단을 지배하던 서정적 경향은 그의 시적 어조를 단정하게 가다듬어주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엄연히 시집을 낸 시인이라고 할지라도, 동시인 축에 들어야 맞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은 온통 사모곡이었고, 시적 주제는 항상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아들의 효도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수단으로 시를 썼던 것이다.그런 성향은 전쟁 후에 발간된 시집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동족상잔을 겪는 동안에 어머니를 추억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그가 전후에 발간한 시집에서 전쟁이라는 거대 서사를 다루었을지라도, 그것은 결국 초기의 시편에서 잦게 출현하던 어머니를 찾아가기 위한 우회로에 마련된 전략적 대상물이었을 뿐이다. 그에게는 전란이라는 비극상조차 궁극의 여성적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소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일러서 전후시의 비인간적 경향을 수용했거나, 실존적 존재의 의미를 탐색했다고 별명할지라도, 그것은 어머니를 찾으며 종료하게 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차이가 없다. 최승렬에게 자연은 어머니요, 어머니는 곧 자연이었던 셈이다.최승렬 시의 형식적 특징은 감정의 절제와 언어의 조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예컨대, 그는 새봄의 기운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서 소리 외의 움직임을 고의로 사상하여 감각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또 그는 시의 여백 효과를 충분히 살리기 위해 불필요한 언어들을 과감히 삭제해버린다. 이런 노력들은 그의 성품을 닮은 것일 테지만, 전쟁 후의 산란한 마음들을 위로하기에 알맞다. 도처에서 분출하는 소란한 소리는 전후의 일반적인 풍경이거니와 이런 상황에서 시가 담당할 수 있는 최우선적 기능은 위안일 터이다. 그는 이처럼 시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전원의 아름다움을 집요하게 시화한 이면에는 전쟁으로 인해 피멍든 가슴을 치유하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 점은 그의 시가 획득할 수 있는 시사적 의의이다.1950년대 전북의 문단을 빛내던 그는 1957년 초에 인천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그는 제물포고등학교와 대건고등학교를 거쳐 신명여자고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교육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동안에 시집, 국어 연구서 등을 출판하며 고향을 그리워하였다. 이런 연유로 그는 전북문학사에서 출향 인사로 분류되어 논의선 밖에 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작품들은 사장된 채, 지금껏 변변히 거론되지 않는 실정이다. 그 원인들 중에서 그의 결벽에 가까운 성품 탓이 크다. 그는 '소년시집'이라 불리우는 '푸른 눈동자에 그린 그림'(익문사·1975)의 머리말에서 '스스로 사람들 틈에 끼어 법석대기를 꺼리는 성미라 홀로 초야에 묻혔다'고 고백한 것처럼,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여 문단 활동을 삼갔다. 그가 좀더 폭넓게 교유하고 활동했었더라면, 도내 문단에 끼친 영향은 더욱 확대되었을 것이다. 이 점은 그가 최근까지 활약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전기적 이력조차 온전하게 재구성하기 힘들도록 만든 요인이다. 그의 시적 성과에 관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6.28 23:02

"전북문인협회가 중심 돼 추진하자"

한국 시조문단의 거목인 구름재 박병순 선생(1917~2008)의 생가 복원사업이 첫발을 뗐다.25일 시인의 고향인 진안군 부귀면 적내마을에서 가진 생가 복원 발기모임에서 전북문인협회(회장 이동희)가 중심이 돼 문단적 사업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이들은 이날 모임에서 국내 시조문학의 거목인 박병순 시인의 생가 복원을 위해 힘을 모을 것을 다짐했다.이동희 회장은 "없는 문학적 자산도 발굴하는 상황에 가람 선생의 맥을 잇는 시조시인의 생가를 방치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진안군이 소중한 자산이 흩어지기 전에 모아 바로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구름재 시인은 시조시인이자 교육자, 한글 운동가로 외길 인생을 살아오며 실천적 교육자로 존경받았다. 김해강 시인을 통해 시에 눈을 뜨게 됐으며, 고향을 떠나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해 시조를 통해 민족의식을 다졌다. 참혹한 일제 치하에서 '시조집'을 몰래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8·15 해방 후 구름재 선생은 만학으로 전북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스승인 가람 이병기 선생을 중심으로 시조 부흥에 힘썼으며, 최승범 최진성 장순하 등과 함께 '새벽' 동인을, 신석정 백양촌 장순하 최승범 등과 함께 '가람동인회'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1938년 동광신문에 시조 '생명이 끊기기전에'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시인은 평교사로만 40여년 가까이 교단을 지키면서 '별빛처럼', '문을 바르기전에', '새 눈 새 맘으로 세상을 보자' 등 많은 작품집을 냈다.이날 모인엔 김남곤(시인·전북일보사 사장), 손석배(아동문학가), 최공엽(전 전북적십자협회장), 허소라(시인·군산대 명예교수), 이운룡(시인·문학박사), 허호석(아동문학가·전 진안예총회장), 유휘상(시인·전라시조문학회장), 정순량(시인·우석대 명예교수), 이승철(진안예총회장), 송영수(진안문인협회장), 양규창(전북문인협회 사무국장) 등이 참석했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6.27 23:02

고은 시인 문학·사상 재조명

노벨문학상 유력후보로 거론돼 온 고은(78) 시인의 문학적 가치와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민간주도로 추진된 '만인의 물결 군산운동본부'가 다음달 1일 군산에서 출범한다.운동본부는 이날 오후 5시30분 군산 궁전예식장에서 아리랑TV의 초청 인터뷰 장면 상영을 식전행사로 발대식을 갖고 국악공연, 시낭송, 피아노연주 등 축하공연과 특별행사로 고은 사인회를 마련한다.운동본부는 출범식을 계기로 고은 선생의 작품세계와 인물에 대한 재조명과 생가 복원, 문학관 건립 등을 통해 문화자원화에 나서 그의 문학적 가치를 연계하는 기념사업을 본격적으로 시행해 나갈 계획이다.또한 1인 1만원(년) 기금마련 운동과 다양한 홍보활동을 통해 향후 고은 문화재단을 설립한다는 계획이며, 문화재단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전국 10만명 회원확보를 목표로 운영된다.이와 함께 풍요물결, 감동물결, 평화물결이란 세가지 주제와 조직구성으로 '현장홍보'와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사이버 홍보클럽'을 운영한다.운동본부의 산파 역할을 해 온 조시민 만인보문화재단 준비위원장은 "만인의 물결 운동본부는 고은 선생과 그의 대표작인 '만인보'의 정신을 함께하고 홍보하기 위해 민간이 주축이 돼 추진돼 왔다"며 "선생이 태어난 군산에서부터 시작해 전주 등 도내는 물론 전국적으로 확산돼 나간다면 노벨상 수상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한편 고은 시인은 군산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로 1958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후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을 내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 수십편의 시집을 발간했다.시인이 집필한 '만인보'는 민족의 다양한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지난 1986년부터 2010년까지 총 30권 3800여편이 시집으로 연작되면서 세계최대 인물 대서사시로 평가받아 지난해를 비롯해 노벨상 유력 후보로 수년째 거론돼 왔다.

  • 문학·출판
  • 이일권
  • 2011.06.27 23:02

[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17)해남 대흥사의 현판들

枕溪樓(침계루) -시내를 베개 삼아 세워진 누대無量壽閣(무량수각) -아미타불(무량수불)을 모시는 불전駕虛樓(가허루) -허공을 타는 누대枕:베개 침/ 溪:시내 계/ 樓:다락 루/ 無:없을 무/ 量:헤아릴 량/ 壽:목숨 수/ 閣:집 각/ 駕:탈 가, 수레 가/ 虛:빌 허대흥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도립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절이며 달리 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한다. 이 절은 원래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거느린 승군의 총본영이 이곳에 자리하였고 또 서산대사가 자신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전한 후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한 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는 조선 후기의 3대 명필이라고 할 수 있는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그리고 창암 이삼만의 글씨로 쓴 현판이 걸려 있어서 3대 명필의 서예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枕溪樓, 無量壽閣, 駕虛樓가 바로 그것이다.침계루(枕溪樓)는 글자 그대로 '시냇물을 베개 삼는 누대'라는 뜻이다. 절 주변에 흐르는 시내 위에 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대를 앉히거나 시냇가 언덕에 누대를 지었다는 의미를 아름답게 표현하여 '침계루'라고 한 것이다. 대흥사 외에 경북 울주의 석남사에도 침계루라는 이름의 누대가 있고 순천 송광사에도 침계루가 있다. 무량수각(無量壽閣)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불전인데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커다란 염원을 품고 한량이 없는 수명을 이어가며 서방정토의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지금도 설법을 계속하고 있다는 부처이다. 달리 무량수불이라고도 부른다. 가허루(駕虛樓)는 불교보다는 도교적인 색채를 많이 띠고 있는 이름이다. 설악산 한계사(寒溪寺)에도 가허루라는 누대가 있는데 한계사 가허루에 대한 기록인〈가허루기(駕虛樓記)〉에는 "표표히 속세를 떠나 날개를 달고 신선의 세계에 오르고자하는 뜻을 품게 된다.(其飄飄如遺世 羽化登仙之志)"는 구절이 있다.이광사가 쓴 침계루 현판은 글자의 모양이 매우 호방하고 시원스러운 초서이다. 그러나 모양 즉 결자(結字)에 비해 필획은 다소 약한 편이다. 호방한 초서를 너무 점잖은 필획으로 썼다고나 할까? 허우대에 비해 골기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점이 이광사 글씨의 한계라면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추사가 쓴 무량수각 현판은 다분히 디자인적이고 현대적이다. 필획도 두툼하여 실팍지고 결구도 중후한 가운데 시원하다. 지금 보아도 파격적인 글씨인데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특히 '閣'자의 '門'부분 문기둥에 해당하는 획의 끝부분을 오른편으로 쭉 삐친 점은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시도이다. 추사의 실험정신과 예술성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창암이 쓴 가허루 현판은 매우 단정한 해서체이다. 창암은 제자들에게 현판 글씨 쓰는 법을 따로 가르칠 만큼 현판 글씨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 필자가 최근 연구한 바에 의하면 창암은 현판글씨만큼은 예술성도 예술성이지만 가독성(可讀性) 즉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자 모양으로 쓰는 것'을 매우 중시한 것 같다. 이 가허루 현판은 창암의 이러한 서예정신을 담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대흥사는 조선 후기에 조선의 지성들이 모여 담론하는 세미나실 역할을 톡톡히 해낸 절이다. 초의선사와 추사의 교류도 유명하고, 다산 정약용과도 관련이 깊은 절이며, 신지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이광사와도 연관이 있는 절이다. 36세에 요절한 천재 아암 혜장 스님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절이다. 그런데 유독 창암 이삼만과 대흥사와의 관계에 대한 자료는 전하는 게 거의 없다. 창암과 초의가 주고받은 시가 몇 편 있다는데 최근 필자는 창암이 쓴〈남해의 스님 초의와 이별하며(贈別南海僧草衣)〉라는 시 한 수를 접하였다. 창암도 대흥사 세미나실을 자주 드나들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대흥사와 원교, 창암, 추사, 다산, 아암 등과의 관계를 밝히는 일은 조선 후기 지성인의 교류를 연구하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우리가 대흥사의 현판에 주목해야 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6.22 23:02

전북도립문학관, 곧 문연다

도내 문인들의 창작활동 공간 제공과 작가들의 작품발표및 교류의 장이 될 '전북도립문학관'이 곧 문을 열게돼 문학의 본향인 전북의 이미지 제고가 기대된다.특히 전북도립문학관은 전국 시·도에서 건립되는 첫 도립문학관으로서 특정 작가의 작품에 국한하지 않고 현존하는 도내 모든 문인은 물론, 작고 문인들의 작품 전시와 교류활동, 문학테마 여행 등을 다루게 될 중심체로 기능할 것으로 보인다.도의회는 20일 열린 제281회 임시회 본회의에서 전북도립문학관 설립 관련 리모델링비 5억원과 올 하반기 운영비 5000만원 등 총 5억5000만원의 추경예산안을 심의, 의결했다. 도의회는 시기상조론및 전북문화재단과의 통합 등을 이유로 두 차례나 이 예산을 삭감했으나, 그 필요성을 인정해 이번에 통과시켰다. 이에따라 전북도는 전주시 덕진동 옛 전북외국인학교 부지 6607㎡를 개조해, 전북도립 문학관으로 운영할 방침이다.옛 도지사 관사로도 쓰였던 이 부지에 대해 도는 내달까지 리모델링 공사를 마친 후, 8월 건물 사용승인 신청을 거쳐 9월 민간위탁 사업자를 선정, 곧바로 개관한다.민간위탁에는 전북문인협회, 전북작가회의 등 도내 문인단체는 물론, 전문성을 갖춘 각 단체나 이벤트사가 뛰어들 것으로 보인다.도내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다른 시·도를 보면 지역명칭을 딴 일부 문학관이 있기는 하지만, 전북도립문학관은 지방정부가 주도적으로 설립하고 운영은 민간 자율에 맡기는 전국 최대 규모이자, 첫 광역단체 지원 문학관이 될 것"이라면서 "30년동안 북해도 문학의 흩어진 자료를 모아 집대성해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일본 훗가이도 도립문학관이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서정주·신석정·이병기·채만식·이매창·최명희·고은·신경숙 등 유명 작가를 배출해 문학의 본향으로 널리 알려진 전북이 바야흐로 국내 문학관광의 메카로 자리매김할지 여부가 주목된다.

  • 문학·출판
  • 위병기
  • 2011.06.21 23:02

[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16)원교 이광사의 글씨③-지리산 천은사의 현판들

智異山泉隱寺(지리산천은사): 천은사 일주문(一柱門) 현판極樂寶殿(극락보전):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 좌우의 협시보살로는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혹은 지장보살)을 둔다.冥府殿(명부전): 명부란 염마왕(閻魔王)이 다스리는 저승세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며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절 집을 말한다. 지장보살을 모셨기 때문에 지장전이라고도 함.智:지혜 지/ 異:다를 이/ 泉:샘 천/ 隱:숨을 은/ 寺절 사/ 極:다할 극, 지극할 극/ 樂:즐거울 락/ 寶:보배 보/ 殿:집 전/ 冥:어두울 명/ 府:곳집(창고)부, 마을 부지리산(智異山)은 전라북도 남원시와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함양군·산청군·하동군 등 3개 도의 5개 시·군에 걸쳐있는 웅대한 산군(山群)에 대한 통칭이다. 한자 발음대로라면 '지이산'이어야 하지만 예로부터 '지리산'으로 읽어온 것으로 보아 '지리'에 순 우리말 어원이 있고 한자 '智異'는 '지리'에 대한 음역어가 아닌가 한다. 옛 문헌에 지리산을 '두류(頭流, 頭留)'로 표현한 예가 많은데 이 '두류'가 '지리'로 음이 변하고 그것을 다시 한자로 표기한 것이 '智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지리산의 옛 이름인 '두류(頭流, 頭留)'의 '頭'는 백두산(白頭山)의 '頭'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즉 백두대간 산맥의 산세(山勢)가 주욱 흘러내리다가(流) 머물러서(留) 이루어진 산이기 때문에 두류산(頭流山 혹은 頭留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지리산의 한자 표기 그대로를 풀이하여 "특이하게 슬기롭고 지혜로운 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조선의 대학자이자 스승의 표상이었던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은 지리산을 일러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의 산, 즉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는 산"이라고 표현하였다. 지리산의 웅장함을 표현한 명구이다.전라남도 문화재 제35호인 천은사는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에 자리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서기 828년(흥덕왕3)에 덕운선사(德雲禪師)가 창건하였는데 경내에는 이슬처럼 맑고 찬 샘이 있어 원래는 절 이름을 감로사(甘露寺)라고 하였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증축과 개축을 거치다가 1773년(영조49)에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1775년에 혜암 스님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천은사의 일주문에 걸려있는 '지리산 천은사' 현판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의 피해를 복구하여 절을 중건할 때 샘에서 큰 구렁이가 나오자 잡아 죽였더니 그 후로는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절의 이름을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泉隱寺)'라고 바꾸었는데 그 뒤로는 원인 모를 화재와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절을 지키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하며 명필 이광사에게 청하여 '지리산 천은사' 현판을 마치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서체로 써서 일주문에 걸자 그 뒤로는 재앙이 그쳤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원교 이광사의 이 현판 글씨에 마치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율동감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예로부터 정성을 다하여 쓴 글씨에는 神이 붙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현판 글씨가 바로 그런 글씨인가 보다. 천은사에는 이 일주문 현판 외에도 이광사가 쓴 極樂寶殿(극락보전)과 冥府殿(명부전) 현판이 있다. 이렇게 여러 장의 현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은사와 이광사 사이에 모종의 관련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천은사에 가거든 이광사의 글씨에 주목해 볼 일이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6.15 23:0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