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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30)无量壽閣(무량수각)-추사의 글씨(16)

탁월한 창의성 돋보인 추사의 대표작

대흥사 무량수각 (desk@jjan.kr)

无(無)量壽閣(무량수각) -아미타불(무량수불)을 모시는 불전

 

无:없을 무/ 無:없을 무/ 量:헤아릴 량/ 壽:목숨 수/ 閣:집 각

 

본 연재 17에서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에 가면 조선 후기의 3대 명필이라고 할 수 있는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창암 이삼만의 글씨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원교가 쓴 枕溪樓(침계루), 추사가 쓴 无量壽閣(무량수각), 창암이 쓴 駕虛樓(가허루)가 바로 그것이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런데 충남 예산의 화암사에는 추사가 썼지만 대흥사 무량수각 현판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또 하나의 '无量壽閣' 현판이 있다.

 

충남 예산은 '추사고택'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서울 양반 추사 선생의 고택이 왜 예산에 있는 것일까? 추사 선생의 가문은 원래 충남 서산군 대교리에서 속칭 '한다리 가문'으로 불렸던 명문가인데 추사의 고조 김흥경(興慶)이 영의정에 오르면서 더욱 번성했다.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金漢藎)이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 즉 비운의 세자인 사도세자의 여동생과 결혼함으로써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고 아울러 봉토(封土=賜田)로서 서울 통의동 일대와 지금의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 일대의 땅을 하사받아 그곳에 집을 지어 후손들이 대대로 이어 살게 되었다. 추사의 어머니 기계유(兪)씨가 추사를 임신했을 때 서울에 전염병이 돌자 서울 통의동의 집을 떠나 예산의 향저에 내려가 있음으로써 추사는 예산에서 태어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오늘날 이 저택을 추사 집안에서 가장 이름을 떨친 '추사'를 기리는 의미에서 추사고택으로 부르게 되었다.

 

고택의 왼쪽에는 추사의 묘가 있다. 추사의 묘는 원래 추사가 만년에 거했던 경기도 과천에 있었는데 1937년 선조들이 묻혀 있는 이곳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추사의 묘 위쪽으로는 화순옹주와 김한신을 합장한 묘가 있고 그 옆에는 젊은 나이에 김한신과 사별한 후 개가를 하지 않은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훗날 정조가 내린 열녀문인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의 오른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기슭에 있는 추사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는 천연기념물 106호인 백송(白松)이 서 있다. 이것은 추사가 동지부사인 생부 김노경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가져와 심은 소나무이다.

 

추사고택 근처의 야산인 오석산(烏石山)에는 백제 때 창건된 화암사(華巖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을 추사의 증조부가 재건하여 추사 가문의 집안 절로 사용하였다. 추사가 쓴 이 무량수각 현판은 바로 화암사에 결려있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도 절을 다시 한 차례 중수하였는데 추사는 이 현판 글씨를 제주도에서 써 보낸 것이다. 따라서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 현판은 비록 귀양을 가는 길이지만 권문세가의 핵심인물로서 아직 기고만장할 때 쓴 글씨이고 화암사의 무량수각 현판은 유배생활의 고초를 겪으면서 氣도 한풀 꺾이고 고독 속에서 삶을 반추하던 시기에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화암사 무량수각 현판은 글씨가 매우 담담하다. 필획에 어떤 힘을 넣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 아니, 넣을 만한 힘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좋게 보면 의도하는 바가 없이 붓 가는 대로 쓴 '담(淡)'의 글씨라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자면 체념에 빠진 무기력한 글씨, 한 바탕 병을 앓고 난 후에 쓴 해쓱한 글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無를 无로 쓴 것이나 '量'자의 모양, 그리고 '閣'의 오른 편 문기둥에 해당하는 획을 오른 편으로 삐쳐 내린 특이한 결구 등 추사의 결자(結字) 습관은 그대로 다 드러나 있어서 대흥사 무량수각의 글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두 작품에 대한 평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閣'의 오른 편 문의 어깨를 낮추고 기둥에 해당하는 획을 오른 편으로 삐쳐 내린 특이한 결구를 통해 추사의 탁월한 창의성을 볼 수 있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의 진정한 탁월성은 '無'를 '无'로 쓴 데에 있다. 만약 無를 그냥 無로 썼다고 가정해 보자. 이 작품은 매우 답답한 작품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작품을 구성하는 네 글자 중 '量'과 '壽' 두 글자가 다 가로획의 연속적인 중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다가 첫 글자 '無'마저 가로획이 중첩된 모양을 하고 있는 '無'로 썼다면 이 작품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해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반복과 중첩의 답답함을 피하기 위해 추사는 '無'를 '无'로 쓴 것이다. 역시 천재적인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동일한 작가가 손에서 나왔지만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두 작품을 보면서 우리도 인생을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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