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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혜원씨 "삶의 진실이나 진정성 시로 표현"

'먼지'로 시부문에 당선된 김혜원씨(49·우석대대학원 문예창작학과)는 개인전을 네차례나 한 사진작가다.우석고 국어교사로, 동료교사인 이세재 문정희씨가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을 보며 한편으로 부러운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시란 모든 예술 중 인간 정신의 가장 높은 영역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동안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가 시를 쓴 것은 순전히 사진때문. 어렸을 때부터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경제적 여건상 국문학과에 들어갔고, 좌절된 꿈 때문에 결국 사진을 뒤늦게 전공했다. 사진을 찍게 되면서 카메라로 다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 속에 시로 남기 시작했다."사진과 시의 차이를 많이 생각하고 있는데도, 솔직히 아직도 많이 헷갈려요. 사진적 주제를 가지고 시로 쓰면 늘 실패하거든요. 사진은 시보다 현실 가까이에 있고 시는 현실 너머 저쪽, 상상의 세계를 사진보다 훨씬 많이 필요로 하는 장르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그는 "시도 결국 허구지만, 잘 만들어진 허구 속에서도 배어나올 수 밖에 없는 육화된 삶의 진실이나 진정성을 나누고 싶다"고 덧붙였다."제가 사진과에 처음 들어갔을 때, 한 교수님께서 사진가는 먼지 같은 존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카메라를 메고 괜히 재고 다니지 말라는 뜻이었던 것 같은데, 그 때부터 모든 먼지가 제 눈에 의미있게 띄게 시작했어요."당선작 '먼지'를 쓰면서는 먼지가 단순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그치지 않도록 일반화하려고 노력했다. 가난하고 허름하고 고단한 인생살이를 성찰하고 그 견딤과 희망을 드러내어, 우주 속 하찮은 한 점 먼지를 모든 인간존재의 초상으로 만들고 싶었다. '먼지' 안에 세 편의 시를 묶어놓은 것은 개성적이면서도 한 편으로 말할 때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동안 사진으로 지형과 환경에 대한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시도 생태환경주의 쪽으로 갈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아직은 공부 중이니 행로가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그는 "신춘문예 출신이 많이들 문단의 미아가 된다던데, 지금 시를 못 쓰는 것은 괜찮지만 앞으로 시력이 쌓이고도 못 쓸까봐 걱정이 된다"며 수줍게 웃었다.▲ 나에게 시란? 시는 내가 꿀 수 있는 가장 맑고 간결하고 섬세한 꿈. 맑다는 것은 시경에 나오는 사무사(思無邪), 마음에 사악함이 전혀 없다는 경지를, 간결하다는 것은 시의 압축성을, 섬세하다는 것은 유일무이를 위한 지극히 미묘한 차이의 결을 말한다. 그리고 꿈은 상상력이다.▲ 문학의 힘이란? 문학에는 현실을 위무(慰撫)하는 힘이 있다. 개인적 현실이든 시대적 정치사회사적 현실이든, 현실을 위안, 위로, 격려, 고무, 고양하는 힘이 바로 문학의 힘이다.▲ 시를 통해 나누고 싶은 것은? 육화된 삶의 진실 혹은 진정성.

  • 문학·출판
  • 도휘정
  • 2010.01.04 23:02

소설 정희경씨 "글쓰기 통해 상처 치유하고 또 성장"

무엇을 해도 힘겹게 따라가기 바빴다. 학창시절에는 공부를, 사회에 나와서는 직장생활을, 겨우 겨우 턱걸이하며 버텨왔다. 그런 그에게 소설이란 자기 구원. 처음에는 일기를 썼고, 다음에는 책을 읽고 감상을 썼다. 일기도, 독후감도, 형식은 달랐지만 글쓰기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또 성장할 수 있었다.'액땜'으로 소설부문에 당선된 정희경씨(42). 그는 "사람으로 살면서 상처를 받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사람들은 그런 상처를 자기가 사랑하는 분야에 몰입하면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신춘문예 당선이란 그에게 헛되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칭찬과도 같은 것. 그렇게 그는 한단계 뛰어오를 수 있는 자기변신의 기회를 얻었다."모든 소설의 원형질은 똑같아요.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사건은 톨스토이의 소설이나 텔레비전 막장드라마나 마찬가지죠. 사랑하고, 미워하고, 죽고, 복수하는 것이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도 어떤 것은 인류역사에 길이 남을 고전이 되고 또 어떤 것은 막장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그건 작가가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죠."정씨는 "같은 사건이라도 남들이 미처 살펴보지 못하는 측면을 보고 새롭게 만들 때 독자가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그는 자신의 소설을 읽는 독자가 무릎을 치며 경탄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것은 마치 독자와의 기싸움과도 같아서 작가로서 독자에게 지는 순간, 독자는 작가의 소설을 손가락 끝에서 튕겨버린다.'액땜'은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면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며, 변화가 불안하기는 하지만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문체와 상상력은 생기발랄한 20대 같지만, 그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은 입심이 좋아 '아줌마 소설'이라고 한다."단편소설은 밀도가 높아야 하기도 하지만 사유의 응집이라고 생각해요. 제 소설은 아직은 어떤 사유의 지점을 만들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소설 형태는 만들어 내지만 실험정신이나 새로움은 부족한 것 같아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제부가 운영하는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정씨. 수의사인 제부가 동물을 보러 밖으로 도는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앉아서 소설을 쓰는 것 뿐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입심이 끝없이 달려가면서도 재미있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나에게 소설이란? 자기구원을 통한 성장의 통로▲ 문학의 힘이란? 작가가 만들어놓은 이야기를 통해 독자가 자기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 소설을 통해 나누고 싶은 것은? 자기구원의 끝은 타인과의 공감. 상처 입은 개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듯 내 상처를 양분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위로받기를 원한다.

  • 문학·출판
  • 도휘정
  • 2010.01.04 23:02

동화 백상웅씨 "어렵지 않은 글, 아이들에게 꿈 안겨줘"

한 살 어린 여동생이 아이를 낳았다. 돈 없는 학생 신분이었던 삼촌은 조카에게 선물하기 위해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2년 전 겨울부터 써온 동화. 시는 쓸 때 힘들고 쓰고나면 성취감이 느껴진다면, 동화는 쓸 때에도 즐겁다.'꽃 켜는 아저씨'로 동화부문에 당선된 백상웅씨(29·우석대 문예창작학과4). 그는 2008년 '제8회 창비신인시인상'에 당선된 젊은 시인이다. 창비에 당선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 역시 신춘문예의 열병을 앓고있던 문청(文靑·문학청년). 이번에는 신춘문예를 준비하던 후배들의 시를 봐주다가 써놨던 동화를 고쳐 같이 보내게 됐고, 엉겹결에 당선돼 주적(主敵)이 됐다.'꽃 켜는 아저씨'는 여자친구와 벚꽃이 활짝 핀 밤 캠퍼스를 걷다 얻은 소재. "벚꽃이 한꺼번에 밤 중에 켜진 것 같다"는 여자친구 말에 "그거 나 줘라"하고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우석대 문창과 수업은 특이해요. 안도현 교수님은 꽃이름이나 꽃 피는 순서를 자주 물으시죠. 그걸 동화로 쓴다면 아이들에게 꽃 피는 순서도 알려주고 이야기로 감동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사실 '꽃 켜는 아저씨'의 아저씨는 안도현 교수님이세요."시인이라고는 교과서에 나오던 김지하 김수영 백석 정도만 알던 시절. 수업시간 선생님이 불러주던 '타는 목마름으로'란 노래에 '시가 저렇게 멋진 것이었구나. 나도 저런 시를 한 번 써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다."요즘에는 현실과 관련된 동화가 많이 나오는데, 아이들에게 너무 일찍 현실을 알려주는 것은 아닌가 걱정될 때가 있어요. 아이들에게는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판타지를 쓰되 그 안에서 현실 이야기를 다루고 싶습니다."동화를 쓰는 데 있어 지금은 어떠한 제약이나 한계를 두고 싶지 않다는 백씨. 다만, 어렸을 때 자신이 생각했던 것들, 궁금해 했던 것들을 되새김질하며 동화를 쓰려고 노력한다.그가 생각하는 좋은 동화란 어렵지 않아야 한다. 쉬운 소재와 주제, 쉬운 문장과 내용…. 어려운 내용은 쉽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동화가 아이들에게 꿈을 주고 아름다운 세상을 가르쳐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에게 동화란? 동심 그 자체. 동화를 쓰면 지금 머리 아픈 일들도 말끔히 사라진다. 동화로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판타지 세계를 마음껏 펼치고 싶다.▲ 문학의 힘이란? 문학은 오래 남는다. 이것만이 문학이 가진 오래된, 강한 힘이다. 그러나 문학은 되도록 힘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향해 이야기할 줄 알고, 누구나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을 것이다.▲ 동화를 통해 나누고 싶은 것은?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세상.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은 세상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 문학·출판
  • 도휘정
  • 2010.01.04 23:02

수필 문솔아씨 "낯설게 보이는 수필 더 재미있게"

"휴대전화에 '063'이 뜨길래 달려나가면서 전화받았어요. 내년에 더 건필하자고 마음 정리를 다 했는데, 당선 연락이 와서 깜짝 놀랐죠."'누드'로 수필 부문에 당선된 문솔아씨(46·본명 문춘희). 그에게 수필이란 미처 보지 못했던 생의 발견과도 같다."생각만큼 글이 잘 안써지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내려놓지 못할 때, 수필이 내게 그 무엇이 되어주지도 그 무엇을 해주지도 않으면서 끊임없이 노력을 요구할 때, 힘들었습니다. 습작시기를 건널 때는 회의도 많이 들었죠."지금은 전업주부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동안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쳤었다. 학생들을 데리고 백일장을 나갈 때면 학생 지도보다는 직접 글을 쓰고 싶어 손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마찬가지였다.본격적으로는 시를 먼저 썼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자신의 시가 설명적이고 산문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산문으로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구나 싶어 3년 전부터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누드'는 제목부터가 외래어이고 기존 수필과는 다른 시도를 했기 때문에 당선될 줄 몰랐어요. 같이 공부하는 문우들도 반응이 천차만별이었거든요. 솔직히 당선보다는 '붉새'를 쓴 작가에게 이런 신선함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누드'는 '붉새(붉은 노을을 일컫는 전라도 방언)'를 제목으로 내건 응모작을 보완하기 위해 함께 제출한 작품. 문씨는 "발가벗은 시나 소설이 많은데도 수필은 아직도 엄격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며 "수필에도 낯설게 보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수필을 쓰면서 수필이 문학이란 범주안에서 다른 장르에 비해 밀려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때로는 수필도 문학이냐는 말을 들을 때면 열등감이나 열패감도 느껴지죠. 글에 대해 고뇌하고 절망하는 것은 똑같은데, 대중들한테 멀어지고 문학평론가들로부터 생활문 정도로 취급받는 현실이라면 수필 쓰는 사람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새로운 수필. 그는 수필을 시보다 더 잘 읽히고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장르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가 "수필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라며 질문을 던졌다.▲ 나에게 수필이란? 남편과 아이들 외에 내가 간절히 기댈 어깨같은 존재. 내 삶의 숨구멍 같은….▲ 문학의 힘이란? 문학은 치유의 힘을 가졌다. 꼭 전문 작가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고통, 절망, 슬픔, 분노 등을 글로 표현하다 보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고 내면도 한결 다듬어지게 된다.▲ 수필을 통해 나누고 싶은 것은? 누군가의 고단한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누군가의 시린 가슴을 데워줄 수 있는 따뜻한 손을 나누고 싶다.

  • 문학·출판
  • 도휘정
  • 2010.01.04 23:02

어린왕자, 어리석은 지구인을 꾸짖다

"사람이라고? 숲에다 도로를 만든다면서 너희 별에선 사람들한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단 말이야? 당연히 나무들한테 물어봐야지. 나무들은 베이는 게 싫을지도 모르잖아."스위스 작가 찰스 레빈스키의 동화 '499살 외계인, 지구에 오다'(비룡소 펴냄)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이지만, 오히려 어른들이 읽으면 뜨끔할 만한 내용이 많다. 주인공인 소설가에게 어느 날 다른 별 출신 '늙은 아이'가 수학여행을 온다. 겉모습은 10살 남짓한 아이이나 사실 499살이나 됐다. 그 별에서는 어른으로 태어나 다 자라야 비로소 어린이가 될 수 있고 학교도 다닐 수 있다. 소설가는 동ㆍ식물과 대화하고 신기한 재주를 부리는 아이에게 미셸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함께 살며 지구의 풍습을 하나씩 알려주는데, "넌 뭘 모르는구나", "그렇게 살면 참 불편하겠네"라며 호통을 치는 것은 소설가가 아니라 미셸이다. 이들의 선문답에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연상케 하는 철학이 있다. 동물과 식물을 짓밟으며 지구의 주인인 양 행세하거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목적과 가치를 향해 허덕이며 달려가는 인간 문명에 대한 풍자다. 사자를 숲에 풀어주자는 미셸의 제안에 소설가가 "그러면 경찰과 군인들이 총을 들고 사자와 전쟁을 벌일 거야. 사람들은 사자를 무서워하니까"라고 말하자 미셸은 "전쟁을 하는 이유가 단지 겁나서라고?"라고 서글픈 얼굴로 묻는다. 검표원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전철을 타려면 차표부터 사야 한다면서? 당연히 차표를 안 산 사람은 전철을 안 탔겠지"라고 의아해하고, 감옥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동물원에 가서는 "원숭이가 어쩌다 범죄자가 됐어?"라며 운다. 작가는 인간이 당연시하는 사회 규범과 관습, 가치가 과연 옳은 것인지 묻는다. 다만, 아이들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그저 재기와 해학이 넘치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동화에는 아이가 고향별에서 배운 여러 학문의 '교과서'가 한쪽씩 실렸는데, 언중유골이라 읽다 보면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목에 무언가가 걸린다. "인생학(63학년용 교과서). 어른들은 '정치'라고 부르는 놀이를 좋아한다. 어른들은 이 놀이를 하면서 만날 싸우지만, 그렇다고 이 놀이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 어른들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어린이로 자라나려면 누구 한 사람이 미래의 일을 결정하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흐리겔 파르너 그림. 김영진 옮김. 232쪽. 8천500원.

  • 문학·출판
  • 연합
  • 2010.01.01 23:02

국제법·역사적 관점에서 본 독도 문제

독도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의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정재정)이 '독도와 한일관계'라는 연구총서를 발간했다. 역사적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분석해 독도 현안을 풀어보자는 취지로 펴낸 이 책은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에 재직하고 있는 연구자 5명의 논문을 실었다. 홍성근 연구위원은 '일본의 독도 영토 배제조치의 성격과 의미'라는 글에서 일본이 1905년 이전에는 독도를 영유할 의사가 없었고 1945년 이후 독도를 실질적으로 점유한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일본이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으로 편입시킨 조치는 러일전쟁이라는 한반도 침탈 전쟁 중에 은밀하게 내린 것으로 일본이 정당하게 평화적으로 관할권을 행사한 시기는 없다고 설명했다.그는 1667년 '은주시청합기', 1877년 메이지 정부의 태정관 지시문, 1946년 연합국 총사령부 훈령 제677호, 1951년 일본 총리부령 제24호 등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권리행사 대상에서 제외한 사례를 제시하면서 "일본은 1905년 이전에는 독도에 대한 영유 의사를 표시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곽진오 연구위원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한계'에서 1951~1953년 일본 의회의 독도와 관련된 속기록을 분석했다. 그는 일본 의회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지만 '근거가 없다'든지 '논리가 빈약하다'는 등 독도 영유권 주장이 한계에 부딪히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고 밝혔다. 김용환 위원은 '독도와 한일 해양경계'에서 도서 영유권 및 해양경계 획정에 관한 최근의 국제판례를 분석, 분쟁의 앙금을 남기는 국제재판보다도 나라 외교 실무진과 전문가로 구성된 조직을 통해 화해와 협력의 정신으로 타협점을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하영 위원은 1876년 조일수호통상조규를 시작으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이르기까지 근대 조약과 식민법령 등 근대 한국법 체계와 일본의 식민지 법체계를 비교분석해 일본이 법을 통해 한국을 침략하고 식민지배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김영수 위원의 '근대 독도와 울릉도 명칭 문제를 둘러싼 논쟁과 그 의미'는 일본이 '죽도'(일본이 칭하는 독도)라는 명칭을 의도적으로 사용해 마치 독도가 무주지(無主地)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1905년 소위 독도 영토편입 조치를 했다고 논증했다. 동북아역사재단. 202쪽. 1만원.

  • 문학·출판
  • 연합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심사평

본심에 올라 온 글의 수준이 여느 해보다 높아 글을 읽는 내내 행복했다.  예심에서 올라 온 작품은 <꽃 켜는 아저씨> <윤아와 알록이> <알을 품은 요강> <부거리8282> <손수레 여행> <잊은 거 아니지>, 이렇게 여섯 작품이었다.  각기 장단점이 있었다. 이 중에서 어른 투의 문장, 진부한 소재, 아쉬운 결말 처리 등으로 세 작품이 우리 손에서 떠났다. 남은 세 작품을 가지고 얘기를 진행했다. <윤아와 알록이>(홍인재)는 문장 구성이 매끄럽고 탄탄했으나 곤충과 대화를 하는 부분은 좀 느닷없었다. 연결 장치를 만들었더라면 화자의 시점이 무너지는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알을 품은 요강>(남주희)은 강점이 많은 작품이었다. 잘 짜인 이야기 구조와 버려진 요강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는 결말 처리는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약간의 비약과 항아리와 요강을 불분명하게 사용한 부분이 옥에 티였으나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이 작가는 다음을 기약하고 싶다.  <꽃 켜는 아저씨>(백상웅)를 당선작으로 올린다. 시적, 동화적 상상력이 근래에 보기 드문 작품이었다. 세상의 꽃들은 그냥 피는 것이 아니라 요절한 영혼들이 세상에 내미는 손이라는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아쉬웠던 점은 왜 봉이 아저씨가 꽃 켜는 일을 하게 되었는지 알려주었더라면 어린 독자와의 소통이 더 쉬웠을 것이다. 눈 오는 날에 두 번 세 번 반복해 읽으며 세상의 봄꽃이 한꺼번에 피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좋은 동화 작가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김자연(아동문학가) 김종필(동화작가)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소감 - 백상웅

동생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조카라고 부르고 그 아이는 저를 삼촌이라고 부릅니다. 삼촌이 되었을 때부터 동화와 동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카가 삼촌이 쓴 동시와 동화를 읽고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조카가 어서 글을 읽는 나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전공 수업은 특이합니다. 느닷없이 교수님께서 꽃 피는 순서를 물어보거나, 야외수업을 나가서는 나무와 꽃, 풀의 이름을 배웁니다. 그걸 모르면 '글을 못 쓰는 놈'이 되어버리니, 이제 봄이 되면 눈을 크게 뜨고 골목을 천천히 엿봅니다. 방에 누워서는 귀로도 엿듣습니다. 그곳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꽃이 피고지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문학이란 것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것을 우석대학교에 입학하고 배웠습니다.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 큰절을 올립니다. 10월, 11월 함께 밤을 지새우던 문예창작학과 시륜 동인들. 그대들 덕에 신춘문예의 계절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힘든 시간들, 도망치고 싶은 시간들을 참 잘 견뎌준 그대들이 올 겨울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그대들이 몇 년이고 견뎌야할 길입니다. 그 길을 조금이라도 함께 걸어주고 싶었습니다. 제 자신이 몹시 부족해서 다행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시를 쓰는 애인을 갖은 남자 중, 제가 가장 아름다운 애인을 갖은 남자입니다. 그리고 가장 시를 잘 쓰는 애인을 갖은 남자입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꽃 켜는 아저씨」의 모티브를 준 윤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서른이 된 못난 아들 뒷바라지 하느라, 눈물 꽤나 쏟았을 부모님. 무릎을 꿇고 죄송하다는 말을 수천 번해도 모자랄 부모님. 사랑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어 제가 쓰고 사랑하고 살아갑니다. 고맙습니다.  못생긴 동화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동화를 쓰고, 그 글을 읽으면서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다른 것은 모르겠고, 열심히 쓰겠다는 것, 이것 하나만은 제 생을 걸고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 백상웅 : 1981년 전남 여수 출생, 2006년 최명희청년문학상 시부문 당선, 2006년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 당선, 2008년 창비신인시인상 당선, 현재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재학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 꽃 켜는 아저씨(백상웅)

"음, 보자……. 산수유 3월 15일, 매화 3월 17일, 목련 4월 10일, 자목련 4월 12일……"  봉씨 아저씨가 수첩을 뒤적이며 중얼거립니다. 수첩에는 봄꽃이 피는 순서가 날짜 별로 차례차례 적혀 있습니다.  아저씨는 허공에 리모컨을 대고 빨간색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러자 이름표가 붙은 새끼줄들이 하늘에서 빼곡하게 내려왔습니다. '목련나무'라고 적힌 이름표를 찾은 아저씨는 형광등을 켜는 것처럼 힘껏 줄을 당겼습니다. 방금 전까지 입을 꼭 다물고 있던 목련 꽃망울이 금세 입술을 활짝 열었습니다. 아저씨도 목련꽃처럼 크게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아, 이런 늦었네? 이젠 옆 마을로 가볼까?" 봉씨 아저씨는 서둘러 자전거를 페달을 밟으며 마을을 빠져나왔습니다. 아무도 아저씨를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저씨의 직업은 '꽃 켜는 사람'입니다. 기어도 없는 구식 자전거를 몰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며 하늘에 연결 된 새끼줄을 당깁니다. 그러면 봉오리는 꽃잎 열고 봄소식을 전합니다. 요즘은 주로 목련꽃을 켜는 일을 합니다. 아저씨가 지나간 동네는 어김없이 전구처럼 환한 목련꽃이 피어납니다. 아저씨의 자전거가 막 옆 마을로 들어설 무렵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으앙, 엄마! 엄마!" 아이는 애타게 엄마를 찾았습니다. 봉씨 아저씨는 꽃 켜는 일을 젖혀두고 아이에게 달려갔습니다. 아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를 잃어버렸어요. 아무 것도 기억이 안나요. 집 주소도, 학교도, 전화번호도 기억이 안나요." "그것참 큰일이구나. 이름은 뭐니?" "정호에요. 정호. 으앙. 엄마!" 정호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얘야. 그만 울고 이것 좀 보렴. 목련나무를 잘 보렴. 네 주먹같이 생긴 목련 봉오리 말이야." 아저씨는 리모컨으로 하늘 속의 새끼줄을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목련꽃'이라고 적힌 새끼줄을 당겨 마을의 목련나무의 꽃을 활짝 피게 했습니다.  정호는 신기한 광경에 울음을 뚝 그치고 방긋 웃으며 아저씨에게 물었습니다. "와! 그게 뭐에요 아저씨는 천사죠?" "아니란다. 아저씨는 '꽃 켜는 사람'이란다." "에이. 거짓말 말아요. 꽃은 그냥 피는 것이에요." "아니란다. 사람들은 그냥 비가 오고, 그냥 꽃이 피고, 그냥 열매가 여는 줄 알고 있지만 그게 아니란다. '비 내리는 사람'이 먹구름을 짜내서 비를 뿌리고, '꽃 켜는 사람'이 새끼줄을 당겨 꽃을 피워내고, '열매 맺는 사람'이 나무에 씨앗을 풍선처럼 불어서 나무에 매다는 것이란다." 정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아저씨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활짝 벌어진 목련꽃을 바라보다가 꽃잎을 벌리지 못한 봉오리를 발견했습니다. "저 꽃은 이상해요. 아직 안 폈는데요?" "아이고. 또 고장이 났구나. 요즘에는 나무가 고장이 자주 나거든." 아저씨는 가방에서 사다리를 꺼냈습니다. 정호는 아저씨가 작은 가방에서 기다란 사다리를 꺼내는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아저씨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고장 난 봉오리를 빼고 다른 봉오리로 바꿔 끼웠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꽃을 갈아 끼운다고 말한단다. 옛날에는 꽃을 갈아 끼우는 일이 거의 없었어. 요즘은 자동차가 많아지고,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나무에 못을 박거나 끈을 묶고, 그래서 나무가 고장이 나는 거야." 봉씨 아저씨는 슬픈 표정을 짓더니 정호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네가 살던 마을에 어떤 꽃이 많이 폈는지 생각해낼 수 있겠니?" "음……. 마을 입구의 커다란 벚나무가 생각나요." "그래? 벚꽃 켜는 일도 곧 해야 하니까. 아저씨랑 같이 찾아보자." 봉씨 아저씨는 정호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길을 떠났습니다. 정호는 아저씨 등을 꼭 안았습니다.  한참을 달려가는데 낯선 아줌마가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 아줌마는 봄인데도 하얀 털옷을 입고 털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봉씨 아저씨는 낯선 아줌마의 등을 떠밀며 돌아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 다투는 동안에 하늘에서는 싸락눈이 내렸습니다. 윙윙거리며 꿀을 모으고 있던 꿀벌들과 나비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별처럼 핀 별꽃이 덜덜 몸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못살아. 저 여자는 일을 끝낼 줄을 모른다니까!" "저 아줌마가 누군데요?" "응. '눈 내리는 사람'이거든. 겨울이 지났는데도 돌아다니면서 눈을 내리게 한다니까. 내가 애써 피운 꽃들이 다 얼어 죽게 생겼네. 어서 여기를 떠나는 게 상책이야." 봉씨 아저씨는 다시 자전거를 몰고 꽃을 피우러 출발했습니다. 몇 시간을 달렸을까요? 자전거는 튼튼한 목련나무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안 돼! 정호야! 뭐하는 거야?" 봉씨 아저씨가 한 눈 판 사이에 정호가 일을 저질렀습니다. 아저씨가 하는 일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정호가 아저씨 몰래 새끼줄을 당겼던 것입니다. 이름표도 확인하지 않고 새끼줄을 내려 엉뚱한 꽃이 피어버렸습니다.  다음 날 뉴스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가을에 피는 코스모스가 봄날에 피어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며, 기상학자와 식물학자가 나와 환경오염 때문에 이상기후가 생긴 것이라고 떠들어댔습니다. 라디오를 듣던 아저씨와 정호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깔깔깔 웃었습니다. 봉씨 아저씨와 정호는 쉬지 않고 길을 재촉했습니다. 아저씨가 정호를 만나 쉬엄쉬엄 일을 하면서 꽃 피우는 일이 밀렸기 때문입니다.  정호는 아저씨의 일을 도왔습니다.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아저씨의 수첩을 함께 보며 꽃 이름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 마을인 것 같은데? 네가 말한 커다란 벚나무가 저게 맞니?" 정호는 그제야 자전거 앞에 버티고 있는 아름드리 벚나무를 발견했습니다. 벚나무에는 꽃 피지 않은 작은 눈들이 수없이 달려 있었습니다.  "정호야. 기억나니? 잠깐만 기다려. 아저씨가 마을 좀 다녀올게." 정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봄날이면 화사하게 핀 벚나무 밑에서 일 나간 엄마를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쏴아 벚꽃이 흩날리면 벚꽃을 잡으려고 뜀뛰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엄마 이름도 집 주소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정호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아저씨가 돌아왔습니다. "정호야. 이 마을도 아닌 것 같아." 아저씨의 말에 정호는 실망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저 아랫집에서 며칠 전에 아이가 한 명 죽었다는데……. 너는 살아 있는 것 맞지?" "당연하죠. 엄마가 저를 애타게 찾고 있을 거예요." "그래 가자. 네가 말한 벚나무는 이것보다 훨씬 커다랄 거야." 봉씨 아저씨와 정호는 자전거에 올랐습니다. 마을을 빠져나오는 동안 두 사람은 입을 떼지 않았습니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저씨였습니다. "정호야. 다음에는 네가 새끼줄 당겨볼래?" "네? 정말요?" "응. 정호 너도 공부 많이 했으니까." "알았어요! 대신에 실수해도 화내면 안 돼요!" "녀석도 참. 그래 알았다!" 다시 침묵이 오갔습니다. 마을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호야." "네?" "아저씨도 너 만할 무렵부터 이 일을 시작했단다." "정말요? 우와. 그럼 정말 오랫동안 꽃을 켰겠네요." "응……. 그런데 정호야." "아, 왜요!" "실수하면 절대로 안 돼!" 정호는 아저씨의 옆구리를 간질이며 장난을 쳤습니다. 자전거도 간지러운지 비틀비틀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어느새 일 년이 흘렀습니다.  자전거가 다시 아름드리 벚나무가 자라던 마을에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정호 혼자 찾아왔습니다. 봉씨 아저씨가 몰던 자전거를 벚나무 밑에 세운 정호는 불 꺼진 마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능숙하게 하늘에서 새끼줄을 끌어내려 '벚꽃' 이름표가 붙은 새끼줄을 잡아 당겼습니다.  순식간에 벚꽃이 켜졌습니다. 수천, 수만 개의 꼬마전구가 한꺼번에 켜진 것 같습니다. 캄캄한 밤이었는데도 환하게 빛났습니다.  일을 마친 정호는 자전거를 돌려 세우고 마을을 빠져나왔습니다. 때마침 아이를 잃었다는 아주머니가 대문을 열고 마을 바깥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주머니는 정호의 뒷모습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그저 방긋 웃고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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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심사평

요즈음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시 쓰기가 어려운 시대가 아닌가 한다. 첫째는 광야에서 골리앗 장군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던 시대의 공동과녁이 유체화된 데에다, 또 하나는 그 옛날 감히 다가서지 못했던 시 쓰기의 엄위한 비의(秘義)가 이곳저곳에서 그만 해킹되고 만 것이다. 이런 때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아무 고민 없는 사적(私的) 요설이다.이런 몇 가지를 상정하면서 조심스레 심사에 임했다. 807편을 상회하는 응모작 속에서 예심을 거쳐 우리에게 넘겨 온 작품들은 10명의 것이었다. 이 가운데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먼지> <신발 고르는 저녁> <호후(虎侯)> 등 세 편이었다. 이 세 작품은 어느 작품을 내세워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으리만치 수준이 가즈런하나, 규정에 따라 고심 끝에 <먼지>를 택하였다.<신발 고르는 저녁>은 세차원인 '쑤안'(이주여성)이 파장에 신발을 고르는 모습을 통해 그려낸 인간애가 눈물겹기만 한 작품이다. 그러나 심사자는 응모자를 바라봐야지 시 속의 '쑤안'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냉정 때문에, 그리고 화살이 빗나간 날들의 변두리에 박힐 때마다 손가락질이나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녁으로 서보라는 <호후(虎侯)> 역시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훌륭한 작품이나 아무래도 주제의 깊이에서 <먼지>에 밀릴 수밖에 없어 아쉬움이 크다.당선작 <먼지>는 한 주제를 가지고 세 편으로 나눈 일종의 연작시 형태를 취하고 있는바 신춘문예 응모작으로는 대단히 모험적인 기법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세 작품은 내적으로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다.이 작품 속의 하찮은 <먼지>는 화자 자신, 나아가 우리 인간존재의 등가물로서 내밀한 삶과 그 가치를 성찰하고 긍정코자 한 시도로 이해된다. '1. 무게'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먼지'처럼 버리고 비우며 가뿐하게 사는 소박한 모습을 통해 가진 자들의 욕망에 대한 반성을 꾀하였고 '2. 높이' 역시 고단한 삶을 견뎌내게 하는 힘은, 바로 내일이라는 희망에 물꼬를 대고 있다. 특히 "먼지도 세월을 견디며 높이를 갖는구나"라는 아포리즘적인 시행이 두 심사자의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하였다. '3. 길'은 쌓였다가 깎였다가 하면서 오랜 시간 존재해온 '먼지'와 그들이 걸어온 '길'을 통해 무한한 시간 속에서의 부단한 자기 성찰을 드러내려 한 작품으로 속도감 있는 운율이 돋보인다.그리고 '방구석→차 안→허공→우주'로 확대되는 공간배치의 기법도 탁월하다. 자칫 관념으로 떨어지기 쉬운 소재를 끝내 작은 것들의 '견딤'의 미학으로 이끈 것은 오랜 동안의 습작의 뒷받침이 아닌가 싶다.요즈음 시인은 많으나 시가 없다라든가 아니면 시는 지천으로 흐드러지는데 정작 시인이 안보인다 라는 말을 뒤집어보면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된다. 금번 최종심으로 넘어온 10명의 응모작들은 그 궁핍증을 덜어주는데 족히 일조가 될 만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노들강변으로 널려 있는 등단길을 외면한 채 연마에만 몰두해온데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다.그러므로 낙심은 금물, 응모자 제위의 행운을 빌어마지 않는다. /허소라(시인) 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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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소감 - 김혜원

시와 사진과 길먼저 사진이 있었다. 문학을 전공하고서도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건만, 사진을 찍으면서부터 카메라로 다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에 시(詩)로 남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가 내게로 왔다.'당선 소식도 내게로 왔다. 본격적인 시쓰기를 시작한 것은 작년. 아직도 혹독한 습작기련만 예상보다 일찍 당선 소식을 들은 지금, 그래서 내 앞길은 더 캄캄하고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당선'이란 습작기의 성실함을 '운 좋게도' 인정받은 것일 뿐이고, 시집 한 권도 내지 않은 사람을 시인이라 부를 수 없다는 내 지론이 있지 않은가. 다만 나는 내게 더욱 겸손해지고 엄격해지고 가혹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부족한 시를 뽑아 주신 허소라, 김용택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또한 굼뜨고 더딘 나를 질책과 채근으로 길러 주시고 앞으로도 키워 주실 우석대 문창과 정 양, 안도현 교수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쓰고쓰고쓰고 고치고고치고고쳐 더 큰 성장으로 보답해 드리는 길밖에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음악과 미술과 문학을 동경할 수 있도록 키워 주신 부모님! 나의 피붙이 형제들과 그의 가족들! 이들 모두의 묵묵한 지원이 아니었더라면 '나밖에 모르는 삶'은 애초 불가능했을 것이다.마지막 감사는 홀로 걸어온 길!'먼지'처럼 함부로 떠도는 그 길에는 언제나 시와 사진이 함께할 것이다.△ 김혜원 : 1961 전주 출생, 전북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백제예술대학 사진과 2년 중퇴, 중앙대 일반대학원 사진학과 졸업, 현재 우석고 국어교사, 사진가, 우석대 경영행정문화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개인전 4회, 단체전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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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먼지(김혜원)

1. 무게체중계를 꺼내려다나보다 먼저 올라앉은 먼지를 본다저것도 무게라고 저울 위에 앉았을까털어내는 순간 허공으로 날아오르는저 가뿐한 내공내가 눈금처럼 꼼꼼히몇 장의 졸업장과 얼마간의 통장으로몸집 불리는 동안 너희는 세상을깎고 갈고 부서지며 삭으며 살아왔구나저울 위에 앉아 제 발자국 헤아리다가세상 변두리 어디쯤 다시 찾아 날아올랐겠지버려야만 이루어지는 저 가뿐한 무게달 수조차 없는 그 삶에문득 마음 무겁다2. 높이먼지도 세월을 견디면 높이를 갖는구나어둠 속에서 말을 잊다보면 눈이 밝아지는 법, 나는저 허름한 생의 목록을 다 적을 수 있을 것 같다양말이 벗어놓은 하품 바스러진 각질의 한숨 비틀대던 머리카락과 맥없이 흘러내리던 낡은 옷의 넋두리 나뒹굴던 보풀의 푸념 몇 낱 희미해진 거울의 깨진 비명도 몇 개, 그런 것들이그런 것들이 뒷걸음쳐 이 구석 찾았을 게다내일이 꼭 오리라 믿었을 그들나는 오지 않은 날의 달력을 찢어숨죽여 쌓인 어제의 높이를 가만히 들어 올린다3. 길차 안에 쌓이던 먼지어느 날 흔적이 없어졌다닦은 적도 없는데 저희끼리 뭉쳤다가알갱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나 보다어디든 다시 떠돌고만 싶은 것 같아조심조심 발판을 걷어 밖에 뿌려준다순간 바람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서일제히 질주하는 저 하얀 맨발들길이란 열망이란 얼마나 서늘한가천 길 절벽은 허공에도 있어지상으로 추락하여 얼룩지는 생이여흙물이 제 지나온 길 가라앉히듯빗물에 씻겨 다시 먼 길 떠나는구나밤하늘에 담겨 반짝반짝 눈을 뜨는 별들도떠나온 별을 찾아 몇억 광년 속으로저렇게 먼지처럼 뛰어든다던데나 이제 몇십 킬로의 동력을 켜고내게 남은 시간의 벌판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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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심사평

문솔아의 <누드>를 심사위원의 의견일치로 당선작으로 뽑았다. 축하한다.<누드>는 수필문학의 조건과 장점을 두루 갖췄다.수필은 지성과 교양과 사유의 글일 때 읽을 맛이 난다. 회화적인 제목과 자연이라는 흔해터진 소재와의 신선한 연결, 현실성을 끌어들이는 삶의 현장성과 문장의 함축미가 당선에 도움이 되었다.야생초목을 누드로 인식하는 건 일종의 독창성이다. 예술은 결국 언어인지에 의해 생산되고 이해되는데, 주로 미술용어로 쓰이는 누드라는 단어를 문학적으로 해석한 점이 독특하다. 게다가 정서를 말살시키며 문명의 신에 사로잡혀 생활이 풍족해진 현대인의 속성에 대하여 회의하는 과정이 철학적이다. 간접경험 곧 학(學)으로 타 예술과 소통하는 방법과, 자연 속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연결도 편안하고 부드럽다. 기승전결의 기본 작법과 구성도 매끄럽다. 한 가지 더. 문학성의 최대장점인 상상을 통해 누드아파트, 누드학교, 누드정상회담이란 어휘를 끌어낸 점이 미학적이다. 같이 보내온 <붉새>도 고른 수준이다.총 응모 460편 중에서 본심에 올라온 15명 45편에 전북의 응모작이 없어 서운했다. 전북일보의 신춘문예가 전국의 수필가 지망생의 관심을 끌고 있어 대단히 기쁘긴 하지만 문도(文道) 또는 문향(文鄕)이라는 전북의 수준작이 한 편도 본심에 오르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수필은 경험문학이라는 단견 때문인가. 대부분의 작품이 자기경험 곧 소재를 이야기하는 데 그치고 인식과 사유를 통해 인식하는 체험으로 승화시키는 문학성이 적다. 이야기꾼은 많으나 문학적 미학을 드러내질 못했다. 최아란의 <이음>, 이정순의 <인생소묘>가 최종심에서 탈락한 이유다.아깝게 밀쳐놓은, 정진규의 <생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은 내려놓기 아까웠다. 개인잡기 같은 글들 속에서 심리적이고 분석적인, 수필의 다양성에서 후한 점수를 주었다. 그러나 수필은 사색적이나 대중적인 지성의 이미지가 강한 글이다. 일반적이고 대중적이어야 하는 신문의 신춘문예가 아니라면 기꺼이 선했을 것이다. 정진규씨가 정진하여,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중수필로 인정받는 수필가로 만나게 되기를 빈다. /심사위원 전일환(수필가·전주대 언어문화학부 교수) 김용옥(수필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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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소감 - 문솔아

몇 해 동안 나는 간이역 주변을 서성이며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서 톡, 톡, 기다림을 발로 차는 동안 패랭이꽃들은 피었단 지고, 바람은 들녘을 건너갔다 건너오고, 눈발은 나뭇가지 위로, 침목 위로 내려앉았다.기다림에 지친 나는 가끔씩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철로 위를 달려보기도 하고, 기차가 산모롱이를 돌아오고 있는지 레일에 바짝 엎드려 귀를 대어 보기도 했다. 이제 그만 기차를 포기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차창에 노란 손수건을 매단 기차가 끼이익! 내 앞에 멈추어 섰다. 성탄절 전날 저녁이었다.노란 손수건은 필시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하늘에서 보내준 성탄절 선물이리라. 손수건을 바라보는 동안 따뜻한 손 하나가 내 어깨에 걸쳐졌다. 그때 지나가던 구름이 눈발 몇 개를 흩날려도 좋았으리라. 아니면 은하수의 별 몇 개 내려와 크리스마스트리 위에서 반짝여도 좋았으리라.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크고 억센 손등에 가만히 내 손을 얹었다.낱말과 낱말, 문장과 문장 사이를 부유하던 시간들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순간들이었지만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나를 절망하게 했던 글들이 내가 넘어질 때마다 오히려 손을 내밀어주었듯이, 이제는 내 글이 다른 이를 찾아가 따뜻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수필의 길을 가르쳐 주신 교수님들께 오롯이 당선의 영광을 돌린다. 언제나 큰 힘이 되어 준 김영식 시인께는 어떻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할지 모르겠다. 늘 격려의 말씀으로 힘을 북돋아 주던 김은주 작가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문학을 함께 공부한 '동목수필문학회', '문맥' 식구들과 덜 자란 글들을 보고도 매 번 칭찬을 마다않으며 용기를 세워준 '미리내' 식구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나만이 부를 수 있는 애틋한 이름인 남편과 글을 쓰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들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한다.끝으로 부족한 글에 눈 마주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전북일보사에 감사드린다. 어쩌면 이제 더 아파해야할 시간들만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순간만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걸 굳이 감추고 싶진 않다.△ 문솔아 : 본명 문춘희, 1964년 부산 출생, 영남대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졸업, 2008년 시흥문학상 수필부문 금상 수상, 2008년 대구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경주대 사회문화교육원 문예창작반 수료, 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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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휘정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 누드(문솔아)

모두들 옷을 벗고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걸 부끄러워하긴 커녕 깔깔대며 웃는 소리까지 들린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내연산 수목원, 화단에 핀 야생초들이 모두 누드다. 구절초, 꿩의비름, 물옥잠들이 나체로 피어 저마다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고 있다.꽃들뿐만이 아니다. 울타리처럼 둘러선 물푸레나무, 서어나무, 오동나무들도 모두 나체다. 수목원 연못으로 흘러드는 시냇물 소리도, 화단가에 잠든 고양이털을 슬쩍 만지고 가는 바람도 누드다. 지금 막 덤불 위로 날아오르는 새들이며 백양나무 꼭대기 위로 흘러가는 솜털구름, 이 모든 것들이 누드다. 지금 이곳에서 누드가 아닌 것은 나뿐이다.한때 누드열풍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누드화장품, 누드폰, 누드속옷. 너나없이 누드를 표방하며 상품화했다. 누드가 풍기는 약간의 에로티시즘과 자연으로의 회귀본능이 상품구매 욕구를 야기시킨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누드에 열광했으며 다투어 누드상품을 구매했다. 그건 어쩌면 문명화된 현대인들이 문명 이전의 원시를 그리워하는 마음의 발로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사리가 분명해져 어떤 것에도 혹함이 없어야 한다는 불혹지년(不惑之年)을 몇 해 전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욕망과 허영의 덩어리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지인들의 모임에 갔다 온 날에는 끊임없이 마음에 물결이 일기 일쑤이다. 오래간만에 만난 반가움보다는 건네받은 명함의 지위에 따라 품격이 달라지는 것 같아 자리가 불편하다. 걸치고 있는 보석, 들고 있는 가방이나 입고 있는 옷에 따라 묘한 괴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살고 있는 거주지와 집의 크기, 타고 온 차의 종류에 따른 생활상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씁쓸해진다. 출발은 똑같이 했건만 이미 속한 세계도, 생활상도, 성취의 결과도 확연히 달라진 친구들을 보며 인생의 성패에 대한 성급한 판단과 그로인한 열패감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그러고 보니 나는 너무 많은 옷을 입고 있다. 하나도 모자라 여러 겹의 옷을 덧입고 있다. 어디 옷들뿐이겠는가. 몸을 치장하고 있는 장신구며, 학벌, 명예, 권력, 아이와 남편에 대한 욕심까지. 나는 너무 두꺼운 가식과 위선의 옷으로 나를 휘감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내가 슬며시 부끄러워진다.존클리어의 걸작인 '레이디 고디바'는 고디바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하얀 말을 타고 가는 그림이다. 고디바의 남편 레오프릭은 11세기 중엽 영국의 백작으로서 지방 영주였다. 당시 그는 농노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매기기로 악명이 높았다. 꽃다운 열여섯 살의 고디바는 남편의 세금정책을 과감히 비판하고 세금을 낮추어달고 요구했다. 백작은 '알몸으로 말을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돌면 세금 감면을 고려하겠다.'라고 빈정댔다. 그녀는 정말 그렇게 했다. 주민들은 그날 창문과 커튼을 닫고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고 한다.애벌레의 몸을 벗지 않으면 나비는 자신을 완성하지 못한다. 뱀은 일생동안 여러 차례 허물을 벗는다고 한다. 누드는 이처럼 제 자신을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어서 본래의 자연 상태인 자신을 회복하는 일이다. 법정스님은 무소유의 철학을 이야기했다. 무소유란 모든 번뇌와 욕심으로부터 자신을 덜어내는 일이다. 무위자연의 도(道)를 설파한 노자도,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루소도 결국은 누드에 닿아있는 것이다.쉽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나는 요즘 벗는 연습을 자주 해본다. 손톱의 매니큐어를 벗겨낸다든지, 집안의 잡다한 장식품을 떼어내고 빈 공간을 많이 만든다든지, 살림살이를 조금씩 줄이는 일이 그것들이다. 그건 일견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이겠지만 작은 것들을 비워내야만 큰 것들도 비워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성적을 위하여 아이들을 밤늦게까지 학원으로 내모는 일이며, 더 높은 지위를 위하여 남편을 다그치는 것들도 요즘은 조금씩 자제를 한다. 그러다 문득 비워낸 공간에 다른 것들이 들어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빈 벽으로 빗살무늬처럼 비쳐드는 햇살이며, 출렁이며 창을 넘어 오는 노을이며,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남편의 사랑이 빈자리를 따뜻하게 채워주는 것이었다.김미루는 누드사진작가이다. 폐쇄된 기차역, 버려진 건물, 지하철, 터널 같은 도시의 폐허 속에서 자신의 누드를 직접 촬영한 작품들로 개인전을 열었다. 그녀는 문명의 더께를 벗고 벌거벗음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웠고,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고 밝혔다. 동양화에선 여백을 중요시한다. 화폭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때문이리라. 수묵화법도 먹의 농도를 풀어 풍경을 투명하게 함으로써 사물의 본래 모습을 들여다보려는 것이다.근래에 들어 누드열풍이 사라진 것이 개인적으론 무척 아쉽다. 누드열풍을 조금 더 연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누드학교, 누드국회, 누드정상회담. 이처럼 갈등과 분쟁이 있는 곳에 누드를 놓으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개인과 개인, 나라와 나라, 종교와 종교 간의 거리가 훨씬 줄어들 것이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평화와 화해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올해도 어김없이 환경운동가들이 모피반대 시위를 벌였다. 거리에서 전라(全裸)의 몸으로 시위를 하는 데모대의 모습을 본다. 인간의 벗은 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가 이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거리로 나서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스스로 높은 지위에서 내려온 고디바처럼 이들은 개인의 이익이 아닌 지구보호라는 큰 이익을 위해 옷을 벗은 것이다.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저만치 수목원을 뛰어다닌다. 꾸미지 않은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이야말로 누드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내게 꽃들과 나무와 바람이 손을 내민다. 나는 하나 둘 옷을 벗는다. 어느새 나도 누드가 되어 있었다. 어느 시인은 민둥산에서 옷을 벗고 구름의 자식들을 낳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지금 수목원에서 옷을 벗고 꽃의 자식들을 낳는다. 나무와 바람의 자식들을 낳는다. 훌쩍 커버린 꽃과 나무와 바람들이 내 젖꼭지를 빤다. 어느덧 나는 꽃이 되어 있었다. 나무와 바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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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심사평

예심을 거친 작품을 반씩 나누어 읽어 보았다. 이들 작품 가운데 우선 <몸살> <가슴 다이어트> <하늘길> <액땜> <태평원룸 202호> <미륵댕이> <재떨이를 비우는 여자>가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작품 나름의 광택과 흠결이 있었지만 결함을 보상할 장점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하늘길> <액땜> <재떨이를 비우는 여자>로 압축하였다.<몸살>은 다소 거칠지만 심연의 상처를 가진 젊은이의 방황과 고뇌를 그린 비유적 언술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서술의 긴장이 부족하고, 소재의 상투성도 흠이라고 할 수 있다. <가슴 다이어트>는 광고회사 직원인 '수아'의 스트레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가지만 단조로운 구성,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서술, 불안한 문장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태평원룸 202호>는 이야기의 박진감은 돋보였으나 서술 전략이 효과적이지 못하였다. 그 결과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전달하는데 역부족이었다. 화자의 감상적 개입을 자제하여 독자가 심리적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적정한 거리를 확보하면서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더라면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륵댕이>는 좋은 소재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쏟아놓아 서사의 일관성을 훼손한 것이 큰 흠이라고 할 수 있다. 단편소설은 무엇보다 단일한 시츄에이션을 지향해야 한다. 그래야 효과적이다. 이야기의 초점을 모았더라면 토속적 소재가 가진 장점이 잘 드러났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재떨이를 비우는 여자>는 자칫 사소할 수 있는 사랑의 밑그림을 곡진하게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과불급(過不及)이랄까, 그 원숙함이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하여 내면화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최종적으로 <하늘길>과 <액땜> 두 작품을 두고 논의한 결과 <액땜>이 가진 강점이 많다는 결론에 다다라 이를 당선작으로 하고 <하늘길>은 차후를 기약하기로 하였다. <하늘길>은 죽은 언니를 생각하며 티벳 고지대 사원을 찾아가는 여행담 형식의 작품이다. 언니의 불행한 일생이 잃어버린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게 천착한 서술의 밀도도 돋보이고, 사원에서 화자가 언니의 옛 연인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결말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객창감을 잘 살리지 못하면 로드픽션이 빠지기 쉬운 함정인, 무의미한 여행 기록이라는 인상을 주기 쉬운데 <하늘길>도 이러한 점 때문에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액땜>은 몸에 신기를 지닌 스무 살 화자가 액땜을 위해 뜻밖의 결혼을 하게 된 내용이다. 그 과정에서 남편과 생부의 운명, 자신의 태생 비밀 등 등장인물들의 타고난 굴레를 모티브로 잘 활용하였다. 이 작품은 무당집은 물론 남편의 서점 분위기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물론 캐릭터의 설정도 탁월하다. 그네들의 행적을 피력하는 거침없는 서술 태도도 매력적이다. 응모자의 작가적 재능을 담보하는 강점이 많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당선을 축하하며 큰 작가로 대성하길 바란다. /전상국(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정영길(소설가·원광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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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소감 - 정희경

국민학교 이학년 여름방학 숙제가 독후감 쓰기였습니다. 국민학교 들어가서야 한글을 배운 제가 그 때까지 읽은 것이라고는 교과서가 전부였습니다. 방학숙제를 하기 위해 책을 사러갔습니다. 시장에는 서점을 겸하는 작은 문방구가 있었습니다. 삼십년 전이라 까마득했었는데 이글을 쓰다 보니 생각나네요. 문방구 이름은 북부문구사였습니다. 소심한 저는 책 한 권 사는데도 뜸을 들이다 아저씨가 집어 주는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책 제목은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였습니다. 그게 처음이었습니다.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고 하지만 제게 있어 첫 키스보다, 첫사랑보다 더 황홀한 첫 경험은 바로 소설(이야기)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삽시간에 저를 매혹시켰고 열병에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부모님은 이야기책에 홀린 저를 위해 100권짜리 동서문화사 딱따구리 문고를 사주셨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방구석 귀신이 되었습니다. '빨간 머리 앤'을 읽으면 '키다리 아저씨'가 튀어나오고 '꿈을 찍는 사진관'을 읽으면 '만년셔츠'가 튀어나왔습니다. 저를 키운 것은 팔 할이 이야기였습니다.이부자리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밤마다 조금씩 이야기는 길어졌지만 머릿속 저장장치는 부실해서 오늘 이야기만 만들어지면 지난 번 이야기가 사라졌습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토막토막 끊어지고 저는 그 이야기를 어디에 써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삼십년이 지났습니다. 어디다 써야할지 몰라 방치해 두었던 이야기들이 아우성을 쳐댔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저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조금 늦되고, 많이 부족한 저를 이야기가 선택했다면 거기에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썼습니다.당선소식을 듣고 제가 사랑한 이야기가 다른 분들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게 되어서 기뻤습니다. 방구석 귀신 노릇을 어여삐 보아 주신 부모님, 같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 주던 형제자매, 지칠 때마다 위로와 격려를 보내준 남편과 민정, 그리고 내가 소설공부를 위해 시간을 낼 수 있도록 배려해준 나의 오너인 제부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 분들의 지지와 성원 덕분에 A4용지 속에 영원히 갇혀 있을 뻔한 제 이야기가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언제나 의지가 되는 소행성 문우들과 선생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되먹지 못한 합평으로 많은 분들에게 상처를 주었음에도 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주시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끝으로 제 이야기가 살아 날 수 있도록 마지막 숨을 불어 넣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정희경 : 1968년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경제학과 졸업, 현재 경기도 광주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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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액땜(정희경)

나는 스무 살이다. 머리를 틀어 올려 묶고 버스에 타면 운전기사가 학생 요금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귀밑으로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아직 뺨에 젖살이 빠지지 않은 것이 다른 스무 살과 다를 바 없다. 굳이 차이를 들자고 한다면 내게는 남편이 있다는 사실 정도다. 남편은 대학근처 자신의 건물에서 서점을 하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서점은 한때 사회과학 서적으로 유명했던 곳이라고 한다. 시절이 변하면서 운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던 서점을 건물주의 아들이었던 남편이 넘겨받은 것이다. 서점은 예전의 명성을 이어받지도 못하고, 특화된 분야도 없이 문만 열고 있을 뿐이다. 드나드는 사람이라고는 담배를 사러오는 손님들뿐이다. 그래도 남편은 물려받은 건물 덕분에 날마다 출근을 하고 내게 생활비를 준다. 출근이라고 해봤자 건물 사 층 살림집에서 일 층으로 내려가는 것이 전부지만 말이다.내가 서점에 내려가 있는 날이면 어쩌다 들리는 손님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피하기 어렵다. 남편에게 조카냐고 물어보는 남학생들 심지어 따님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의 얼굴은 너무 익어 터질 것만 같은 토마토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곤 한다. 내가 재빨리 나서서 그의 아내라고 소개할 때 사람들의 눈에 스치는 당혹스러움을 남편은 잊지 않고 가슴에 담아둔다. 서점에는 스무 살 어린 아내와 살아가는 남편의 복잡한 감정들이 책 먼지와 같이 쌓여가고 있다.내가 이렇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결혼생활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강신무당이다. 한때는 오방신장 장군님도 오시고, 용 할머니도 오시고, 가끔 아기동자도 왔지만 지금은 어쩌다 한 번 찾아올 뿐 신 내림의 기회가 거의 없는 퇴물 무당이다. 장군님이 들락거리고, 할머니가 하루에 몇 번씩 찾아올 때면 상위에 돈이 넘치어 흐르는 굿판을 예사로 벌였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사과, 배, 감귤, 감, 팥 시루떡, 산자, 부두전, 산적, 생선적, 부침개, 삼색 나물이 보는 사람 입을 벌어지게 하였다. 그때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올려놓은 상은 정말 볼만했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할머니가 예뻐지고 싶어서 거울만 본다고 타령하더니 얼굴을 뜯어고쳤다. 얼굴을 고치고 나니 장군님이 차가 맘에 안 드셔서 탈 때마다 기분이 상해하신다며 차를 바꿨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엄마는 아기 동자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한밤중에라도 나가서 사다 바쳤다. 아기 동자는 단 것을 아주 좋아해서 집안의 사탕이며 초콜릿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결국, 나는 아기 동자의 초콜릿 덕분에 매번 다이어트에 실패했다.이런 이야기는 옛말이고 지금은 손님 끊긴 지 오래되었다. 남의 굿에 청송을 나가기는 하지만 요즘은 그것도 뜸하다. 어쩌다 한 명씩 찾아오는 삼만 원짜리 점 손님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사는 형편이다. 그래도 거기서 내 고등학교 등록금이 나왔으니 현관에 낯선 신발이라도 보이는 날이면 엄마보다 내가 더 긴장했다. 이제 장군님이고 할머니고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다 아는데 사주를 본답시고 횡설수설하는 엄마를 보는 일은 정말 아슬아슬했다. 답답해서 찾아오는 손님 마음 적당히 어루만져 주면 삼만 원 값어치 하는 건데 거기서 한 건 하겠다고 살풀이 운운하다 망신을 당한다.신기 떨어진 엄마가 난데없이 내가 나이 많은 남자랑 결혼해야 액을 막을 수 있다고 했을 때는 기가 막혔다. 사기를 치려면 손님한테 쳐야지 칠 사람이 없어서 자식한테 사기를 치느냐고 코웃음을 쳤다. 더는 찾아오지 않는 귀신들을 불러들이겠다고 삼천만 원을 끌어서 굿판을 벌인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엄마의 신엄마는 삼천이나 되는 돈을 날름 집어먹고도 딴소리만 했다. 이제 신령님들이 다른 사람을 찾고 있으니 엄마는 틀렸다고 중얼거렸다. 그때 신엄마가 나를 바라보던 눈길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묘해진다. 육십이 다된 신엄마의 눈빛은 앞에 있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 순간적으로 몸이 굳는 것만 같은데 정신은 명료해졌다. 나는 엄마에게도 신엄마와 눈이 마주쳤던 순간의 경험을 말하지 않았다. 삼천만 원은 한 때 엄마가 시퍼런 작두 위에서 날듯이 춤을 추던 시절 엄마 덕분에 병을 고쳤다는 몇몇 사람들이 빌려준 돈과 사채로 끌어들인 돈이었다. 굿을 해도 귀신들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사채 고리는 날마다 늘어나서 엄마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내가 들어오셨다. 천금 같은 내 손주야, 만금 같은 내 손주야. 삼대 조 할머니 할아버지 양외조상이시다. 업질정 보망이 되소서. 이방불휘 타방불휘 내 고향 남을 주고 남의 고향에 와서 어찌 살았니. 불쌍한 내 손주야. 설우시다. 슬프시다. 아무쪼록 내오는 길에 복을 주시고 가는 길에 명을 주시마. 나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다."굿판에서 공수하던 것 마냥 중얼거리던 엄마는 갑작스럽게 곡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풀어헤친 채 장군님을 원망하고 할머니를 원망하는 엄마의 곡소리는 너무 슬퍼서 나도 모르게 동요되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 데려가시려거든 저를 데려가셔야지 이게 무슨 소리냐며 엄마는 신당 바닥을 구르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보다 못한 내가 도대체 나 보고 어쩌라는 거냐고 물어봤을 때야 엄마는 울음을 그쳤다. 급살을 맞지 않으려면 이 수밖에 없다며 엄마는 마치 준비했던 것처럼 낯설지 않은 남자의 사진을 꺼내놓았다.아기 동자 혼령이 씌울 때면 엄마는 어리광 섞인 아기 목소리를 내며 칭얼거렸다. 그럴 때마다 은성 식당 아줌마는 과일이나 과자를 사서 아기 동자 비위를 맞추며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다. 아줌마는 옛정 때문인지 엄마가 전 같지 않음에도 가끔 들려 쌀도 사주고, 몇 만 원씩 놓고 절도하곤 했다. 가끔 남동생을 데리고 왔는데 누나가 절을 하는 사이 마당 귀퉁이에 엉거주춤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파리하고 해쓱한 얼굴에 금테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첫눈에 소심하다는 단어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내가 교복차림으로 쪽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마치 나하고 눈이 마주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외면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 등 뒤에 들러붙은 찐득한 그의 시선을 말이다. 가슴의 봉곳한 선이 옷자락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낯선 남자들의 시선 속에 섞인 욕망에 익숙해졌다. 만원 버스 뒤에서 은근슬쩍 허리를 넘어오는 손이나 치마를 입은 채 학교 담장을 넘다 걸렸을 때, 느리고 끈적이게 훑어보던 선생님의 눈길 따위는 이미 애교스런 수준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교복 아래로 드러난 종아리를 흘끔거리던 남자의 시선은 그리 쉽게 잊히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은성 아줌마와 함께 남자가 들른 날이면 나는 옷을 갈아입기 전이나 화장실에 들어가서 자꾸만 주위를 둘러봤다. 그가 자리에 없어도 시선은 남아서 내 곁에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사진 속의 남자는 그였다. 그와의 인연이 평범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은 적중했다.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직 얼굴에 물기도 마르지 않은 엄마가 기대감에 잔뜩 부푼 눈망울로 나를 바라봤다."엄마, 지금 나보고 저 아저씨한테 시집가라는 거야?""그럼 어쩌니, 나이 많은 남자한테 액땜하지 않으면 니가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하고 급살을 맞는다고 할머니가 그러시는 걸.""아니 들어오라고 그렇게 통사정을 해도 못 본 체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나보고 시집을 가라니 지금 엄마 말이 곧이들릴 말이라고 생각해?"엄마는 다시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옆에 있던 휴지를 집어 들어 코를 세게 풀었다. 유난히 흰 얼굴에 코를 풀어대자 빨갛게 변한 콧등이 도드라져 보였다."이년아, 그 할머니가 누구시냐? 네 삼대 조 할머니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살려야지. 그 할머니가 너 급살 맞는 꼴은 못 보실 거 아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백화점 유아복 매장에 근무했다. 명품 매장은 비정규 판매직도 대졸자를 쓴다. 같은 백화점 안에서도 몇 층 어떤 코너에 근무하는가에 따라 신분이 달라진다. 나처럼 전문계열 고등학교를 나온 신입은 식품 매장 아르바이트 아주머니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내가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받느라 하루 열 시간씩 꼬마들 비위를 맞추고 있을 때 내 또래 아이들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 든 채 쇼핑을 즐겼다. 그나마 월급은 엄마가 진 빚의 뒤치다꺼리에 모두 들어가다시피 했다. 암울하기만 한 현실과 지긋지긋한 당집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렇지만, 남자의 첫인상은 두 번을 생각하기 싫도록 꺼림칙했다."엄마, 정말 미쳤구나. 이 아저씨 변태야! 변태! 스무 살이나 어린애를 올 때마다 훔쳐보더니 이제 아주 내놓고 작업을 하네.""이년아,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이 우리 집에 몇 번이나 왔다고 야단이야. 거기다 보긴 뭘 푸짐하게 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그 사람한테 가지 않으면 급살을 맞는다니까.""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시집을 가려면 엄마나 가. 그 아저씨 엄마하고 딱 맞는 나이네."처음에는 엄마 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년에 팔자는 얼마나 더럽기에 딸마저 앞세우게 생긴 건지 모르겠다며 우는 엄마를 계속 무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남자 이름으로 사 층짜리 건물이 있다는 말 또한 흘려버리기가 어려웠다. 결국, 나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커피숍에서 남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나를 처음 만나던 그날처럼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어린 내 맘에도 그가 밖으로 발산하지 못하는 욕망이 내면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었다."아저씨, 도대체 우리 엄마한테 나 얼마에 팔라고 했어요?""무슨 말인지?""뭘 시치미에요. 다 아는데. 우리 엄마한테 얼마 준다고 했냐고요?""그런 건 아닌데. 누나가 먼저 윤서 씨에 대해서 묻기에 본 적은 있다고 했지만 나도 지금 이 자리 몹시 당황스럽거든요."그는 너무 긴장해서 커피에 설탕을 다섯 스푼이나 넣었다. 커피를 입에 대고 얼굴을 찡그리는 그의 모습을 보다 실없는 웃음이 툭 터져나왔다. 스무 살이나 어린 여자애 앞에서 벌벌 떠는 남자의 모습은 어느 순간 긴장이 풀리게 했다. 만약 또래 남자였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소개팅이라도 좀 더 잘 보이고 싶어 했을 거다. 하지만 엄마뻘 되는 남자 앞에서는 내숭을 떨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난 제멋대로 굴었고 남자는 허둥댔다. 그럼에도 그가 진심으로 온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밥 대신 맥주를 마시고 비틀거렸다. 얼마나 마셨는지 정확히 기억나지지 않았다. 아차, 하는 순간에 균형을 잃고 그의 앞자락으로 넘어졌다. 코끝으로 낯선 냄새가 스며들었다. 엄마 방에 들락거리는 아저씨는 많았지만 한 번도 정식으로 아빠를 가져보지 못했다. 아빠 냄새는 이런 게 아닐까. 아직 경계심도 풀리지 않은 남자의 품에서 울컥 그리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나는 결국 남성용 화장품 냄새 속에 섞인 담배냄새 때문에 그가 조심스럽게 내민 손을 거부하지 못했다.주변 사람들의 항의 때문에 당집은 매번 허름한 변두리로 돌아야 했다. 삼 년 전에 이사한 이 집은 개발 제한 구역에 자리 잡고 있다는 핑계로 주인이 화장실조차 고쳐주지 않고 있다. 대문 옆에 붙어 있는 재래식 화장실은 아무리 관리해도 여름이면 구더기가 들끓는다. 엄마가 은성 아주머니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모양인데 아귀가 맞지 않는 문틈 사이로 다 들렸다."걔가 원조교제 하다 여자애 오빠한테 걸려서 천만 원이나 주고 합의를 봤잖아. 정말 무슨 귀신이 쓰여서 하라는 결혼은 하지 않고 어린애들만 자꾸 찾는지 알 수가 없어. 세상에 둘도 없이 얌전하고 멀쩡한 사람이 어쩌다 저리 못된 곳에 눈을 뜬 건지. 내가 속상해서 살 수가 없다니까. 저러다 패가망신하기 순식간이지. 이 일을 어쩌면 좋아.""열아홉에 죽은 그 집 삼촌 때문이야. 삼촌이 열아홉이니 그보다 나이 많은 여자들은 보이질 않는 거야. 우리 윤서가 스무 살이긴 해도 삼촌이 마음에 든대. 내가 우리 윤서 보내서 삼촌 마음 잘 달래 보낼 수 있게 해준다니까. 윤서년 팔자도 그렇게 풀어야 한다는 걸 어쩌겠어. 그나저나 삼촌한테 한 상 차려줘야지!"나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고 대뜸 엄마의 어깨를 밀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조용히 발을 돌려 내 방으로 몸을 숨겼다. 엄마 말이 기가 막히기는 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기도하다. 애초부터 애비 없는 무당 딸로 태어난 내 팔자라는 것이 이보다 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액땜을 하기는 해야 할 것이다. 사위스럽게 급살 운운하는 엄마의 엉터리 사설이 아니고 내가 가진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액땜이 필요하다.처음 서점에 방문했을 때 남자는 내가 온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계산대에 놓인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는 손님에게는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나는 천천히 서점을 한 바퀴 돌아 처음 들어왔던 출입구 앞에 섰다. 유리창 밖으로 대학의 교정이 보였다. 한 번도 좌절 따위는 겪어보지 않았을 것만 얼굴들이 보였다. 갑자기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폭삭 늙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찍었다. 지나가던 남학생 하나가 능청스럽게 윙크를 날렸다. 나는 몸을 돌려 계산대에 앉아 있던 남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우리 결혼할래요?"키보드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던 남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뭐, 뭐라고요?""나랑 결혼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은성 아줌마랑 우리 엄마 말대로 우리 결혼하자고요.""가 갑자기 왜 이래요?""나, 아저씨 사랑하는 거 아니거든요. 당연한 사실이잖아요. 지금 내가 어떻게 아저씨를 사랑하겠어요. 하지만 우리 집도 정말 지긋지긋해. 이제 만수향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요. 도망치고 싶은데 아저씨한테 도망쳐도 돼요?"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좋다, 싫다 의사 표시를 한 것이 없었다. 엄마에게 내가 결혼하겠다고 이야기하자 모든 일은 은성 아줌마 선에서 진행되었다. 그가 내게 한 말은 딱 하나 결혼을 위해서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뿐이었다.그의 부모석에는 은성 아줌마 부부가 앉았다. 나의 부모석엔 엄마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호텔 뷔페에서 몇몇 가족들만 모인 가운데 치른 결혼식은 참석한 하객이나 결혼 당사자나 모두 어색한 모습이었다. 은성 아줌마는 예물이라고 우스꽝스런 순금 세트를 잔뜩 안겨주었다. 요즘처럼 금값 비쌀 때 최고의 예물이라고 함박웃음을 짓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이것들이 곧 엄마 차지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신혼집으로 내 짐을 옮기던 날, 옷장 문을 연 그의 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아저씨 뭐해요?"내가 그의 어깨너머로 옷장 안을 들여다봤다. 그곳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교복이 걸려 있었다. 내가 가방을 챙기면서 교복을 넣지 않자 그가 상기된 얼굴로 슬그머니 교복을 내밀었다. 엄마가 열아홉에 죽은 삼촌 귀신에 씌었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그 말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대학원까지 나와 서점을 하는 멀쩡한 남자가 할 짓은 아니었다.고등학교 이 학년 때였다. 부모님이 여행간 친구의 집에서 동네 친구로 알고 지내던 남자 아이들을 불러 밤새워 논 적이 있었다. 별로 익숙하지도 않은 술과 담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 아이들 몇몇은 잠이 들고 몇몇은 무슨 짓을 하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거실 귀퉁이에 쪼그린 채 잠이 들었던 나는 이상한 기척에 눈을 떴다. 입고 있던 치마가 배 위로 들쳐져 있고 팬티가 반쯤은 내려와 엉덩이에 걸쳐져 있었다. 눈이 마주친 녀석은 그날 처음 본 이웃 동네 남학생이었다. 나는 멋쩍은 듯 웃는 녀석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그렇게 나가떨어졌으면 창피해서 도망가 버릴 텐데 그 녀석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시 덤벼들었다. 나 처음이거든 한 번만 해보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대며 매달리는 녀석에게 처음엔 웃기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소리질렀다. 안 해주면 강제로라도 해 볼 거라며 애걸복걸했다. 팬티를 잡아챈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알았지만 더는 실랑이하는 것도 지겨워 말리지 않았다. 나도 처음이었지만 어차피 그런 것에 미련을 둘 만큼 소중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남들처럼 이벤트라도 몇 번 받아본 놈이라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잠깐 했을 뿐이었다.한 번 해보겠다고 대들 때와 달리 막상 내 몸 위로 올라와서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몰라 헤매기만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삽입해야 할 곳을 찾지 못하던 녀석의 꼴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남편은 열여덟 그 녀석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손 한 번 제대로 잡지 않고 결혼한 첫날밤, 그는 오래도록 나를 보고만 있었다. 내가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고서 그가 얼마나 더 나를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입맞춤조차 없이 파고들던 그의 섹스는 고등학생의 그것처럼 거칠고 조잡했으며 서툴렀다.서점은 아침 아홉 시에 문을 열고 저녁 열 시에 닫는다. 남편은 담배를 주문하고 신간을 눈에 띄는 자리에 배치한 다음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외국 유학을 준비하던 그는 위독한 아버지 때문에 서점에 눌러앉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곧 돌아가셨지만 그는 여전히 돌아가신 분의 소망대로 건물을 지키며 살고 있다. 나는 가끔 밖에서 서점의 유리창 너머로 그를 훔쳐보곤 한다.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초조한 그의 발걸음과 한숨은 내가 곁에 있을 때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제 아무도 그를 가두려하지 않는데 그는 스스로를 시멘트 건물 안에 가두고 있다. 남편은 새장 문을 열어 주어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갇힌 새다. 자기한테 날개가 있는 것조차 잊어버린 새 말이다.내가 남편에게 대학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자 그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남학생들이 내게 치근거리거나 건물 삼 층에 있는 당구장 주인이 말을 시킬 때면 남편의 눈썹 끝이 항상 저렇게 떨렸다. 나는 그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시했다.처음 결혼하겠다고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엄마에게 못을 박았다. 정말 내가 급살을 맞을까 봐 결혼을 시키는 거라면 앞으로 아저씨에게 한 푼이라도 받아 낼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이다. 속으로는 그런 소리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가 남들에게 어린 딸 팔아먹었다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게 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쪽 경첩이 빠져서 흔들거리는 대문을 밀고 들어가려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은성 아줌마나, 남편이나 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정말 엄마한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기 때문이다.마루 앞에 낯선 남자 신발이 보였다. 그래도 손님은 있는 모양이다 싶어 안도하며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손님을 맞는 신당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러보는데 다른 방안에서 엄마의 교성이 흘러나왔다. 비스듬히 열린 문틈 안에서 허연 엄마의 엉덩이와 허리가 요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손님이 있는 줄 알고 긴장했던 나는 그럼 그렇지 싶어 허탈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엄마, 나 왔어."급하게 꿰입은 원피스는 앞섶도 여미지 못했고 뒤로 동여맨 머리카락은 반절이 빠져서 너풀거리고 있었다. 상기된 얼굴은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좀 전의 흥분 때문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아직도 백 명을 못 채웠우?""지랄 마, 저도 시집가서 알 만큼 알면서 무슨 심술이야?"엄마가 모시는 장군님은 생전에 얼마나 호색한이었는지 엄마한테 남자를 백 명은 봐야 한다고 했단다. 그 핑계로 한 번 보면 그만인 사람부터 몇 달 혹은 일 년 이상 본 사람들까지 엄마 방을 거쳐 간 남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에 하나라도 쓸 만한 인간이 있었으면 엄마가 아직 저 모양 저 꼴로 살진 않았을 것이다. 하기야 무당하고 잠이나 자는 남자 중에 쓸 만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엄마의 눈썹은 먹물로 그은 듯 짙은 검은색이다. 그 검은 눈썹 아래로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서늘한 기운이 든다. 한 때는 저 눈빛으로 손님들을 후려서 주머니를 털더니 이제는 고작 이불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엄마, 나 우리 아저씨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빠 생각이 나. 우리 아빠는 어떤 사람이야?""너, 이 서방한테 자꾸 아저씨라고 할래? 누가 남편보고 아저씨래. 그리고 조만간 이 서방하고 너 불러서 굿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상은 니 시누가 차린다고 했어.""흥, 그럼 아저씨가 아저씨지 오빤가. 누가 굿판 물어봤어. 아빠 이야기 좀 해봐.""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갑자기 웬 아빠 타령이야?"엄마가 뭉그적거리는 사이 방안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 때문에 제대로 일도 마치지 못한 남자가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이런 일 한두 번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엄마는 피해 있으라고 눈짓을 한다.내가 아는 아빠는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엄마를 임신시켜 놓고 책임지지 않은 무책임한 인간이라는 사실 뿐이다. 엄마는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처녀다. 그래도 엄마는 나를 버리지 않고 키웠다. 신당에 들어가면 벽에 붙은 칠성신이나 일월성신이 그려진 무신도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두렵다. 몸에 힘이 빠지면서 다리가 휘청거리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면 그 무신도를 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지긋지긋한 당집서 가능한 먼 곳으로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다."도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엄마를 요 모양 요 꼴로 살게 했는지 말 좀 해줘 봐."엄마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앞섶을 여미고 머리를 가다듬으며 딴전을 피웠다. 그렇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한 번 더 채근을 했다. 핑곗거리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엄마 얼굴에 체념의 기운이 스쳤다. 담배를 찾아 무는 엄마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나도 한 대 줘봐.""지랄 마, 이년아. 누가 엄마하고 맞담배질해. 느이 아빠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너무 착해서 그게 탈이었지. 얼굴에 면서기라고 쓰여 있는 샌님이었어. 아버지가 노름꾼이었는데 월급날이면 아버지 노름빚 받으러 온 사람들이 면사무소 앞에 줄을 섰었지. 학교에 다니는 어린 동생들에 정신 못 차리고 징징대며 장남한테만 의지하는 엄마는 또 어떻고. 진짜 불쌍한 사람이었다."엄마가 내뿜는 담배연기는 축축해진 실내 공기를 가르고 내 코밑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엄마 눈치도 보지 않고 담뱃갑을 열었다."내가 보기에 그 남자 거기다 놔두면 딱 말라죽겠더라고. 땅이 다 썩었는데 나무가 어떻게 살겠어. 그런데 이 남자 나무 같은 사람이라 자기 힘으로는 그 땅을 못 벗어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어떻게든 옮기려고 하니까 끝내 따라나서지 못하데. 뱃속에 든 너를 담보로 끌어내 보려고 애를 쓰다 내가 포기했다. 자기가 그렇게 떠나 버리면 노름꾼 아버지에 철없는 엄마와 어린 동생들이 어떻게 되겠냐고 울더라.""참, 그게 착한 거냐? 한심한 거지. 그리고 자기 가족만 우선이고 아이를 가진 엄마는 아무것도 아니야? 핑계도 참.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어?""죽었다더라. 결혼도 못하고 폐암 걸려 가슴이 다 썩어 문드러져 죽었다더라."엄마가 입을 다물고 산 탓에 나는 어린 시절 잠자리에서 내 출생에 비밀을 상상하며 잠들곤 했다. 그런데 고작 가족들한테 매여서 꼼짝하지 못한 무능한 말단 공무원이라니 궁금해할 건더기도 없는 아빠였다. 그럼에도 화가 났다. 아무리 한심한 사람이라도 자식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죽어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나. 엄마는 이미 껍질 속으로 깊숙이 몸을 숨긴 달팽이처럼 자기 생각에 빠져서 내가 옆에 있는 것조차 잊어버린 눈치다.남편에게는 일부러 엄마에게 들른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먼저 손 내밀지 않는다고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남편한테 비위가 상해 엄마 이야기는 잘 꺼내지 않았다. 괜한 소리를 물어보는 바람에 엄마는 신당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신당 문 손잡이를 잡았다 놓고는 그냥 돌아 나왔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건물 입구로 들어서는 나를 발견한 남편이 허겁지겁 뛰어나왔다."오늘 어디 갔었니?""왜?""전화를 다섯 통이나 했는데 왜 안 받아? 학원 끝나고 세 시간이나 어딜 돌아다녔어?"의처증 걸린 늙은 남편처럼 다짜고짜 들이대는 그의 질문에 나는 심보가 뒤틀렸다."내가 꼭 그런 거까지 아저씨한테 보고해야 해?""흥, 어린놈들하고 어울려 다니려니 재미가 좋은 모양이구나.""뭐? 어린놈들? 자기가 더 유치한 주제에. 내가 모를 줄 알아. 저녁마다 내 핸드폰 들여다보며 확인하고 있으면서. 아마 인터넷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다 알아보고 있을걸. 솔직히 말해봐 위치추적은 안 해?"내가 생각보다 거세게 나오자 남편은 처음의 태도에 비해 훨씬 누그러져 다소 비굴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윤서야, 나는 잠시라도 네가 어디 있는지 확인이 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그럼 금방이라도 네가 떠나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단 말야. 나는 여기서 꼼짝도 할 수 없는데 너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스무 살이잖아."나는 그에게 아빠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나무가 되어버린 아빠의 이야기를 말이다. 하지만 그건 잠시 스친 생각일 뿐이다."거기에 왜 나이가 나와? 공연히 나이 핑계 대지 마. 아저씨는 그저 두려울 뿐이잖아. 이 시멘트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도 두렵고, 진짜 관계를 맺는 것도 두려울 뿐이야. 다치는 게 겁나니까 돈으로 살 수 있는 어린애들에게 집착하지. 어린애들 상대하다 보면 언제까지나 안전할 것 같지. 어림없는 소리야! 아저씨도 우리 아빠도 다 멍청해."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남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결국 그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부분을 들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진짜 부부가 되려면 거쳐야 할 문 앞에 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망설여졌다. 나는 그와 감정의 속살을 모두 드러낼 준비가 된 것일까. 내가 문턱 앞에서 고민하는 사이 그가 돌아서 버렸다. 그는 내게 화를 내지 않았다.어렴풋하게 들리던 방울소리가 점점 커졌다. 방울소리가 커짐에 따라 제금소리까지 가세해서 고막이 터질 듯 울려댔다. 어디서 들리는지 알아보려 했으나 몸이 굳어서 발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옆에서 자고 있던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애를 썼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산더미 같은 쇳덩이가 가슴을 짓눌렀다. 숨을 헐떡거리다 이제는 죽는구나 싶은 순간 눈을 떴다. 며칠째 같은 꿈이다. 등이 흠뻑 젖어 자다 말고 옷을 갈아입는 날이 반복되고 있다.오늘은 엄마가 열아홉에 죽었다는 시삼촌의 지노귀굿을 하기로 한 날이다. 큰 시누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는 남편은 기꺼이 굿판에 나가 절을 할 것이다. 나는 요즘 계속되고 있는 꿈 때문에 기력이 쇠잔해져서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굿을 해야 엄마 살림에 보탬이 될 듯싶어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우리가 도착도 하기 전에 시작된 굿은 엄마의 신엄마가 주관하고 있었다. 다섯 개의 접시로 켜켜이 쌓아 올린 과일들이 상다리가 부러질 듯 차려져 있다. 오랜만에 벌어진 굿판이어서 그런지 떡도 눈이 휘둥그레지게 차려놓았다. 계면떡, 팥떡, 방망이떡, 절편, 백설기, 인절미, 편떡, 건달떡, 웃기, 약식까지 엄마가 이번 상에 들인 정성은 아무래도 도가 지나쳐 큰 시누의 눈치가 살펴졌다. 시누는 연방 손을 비비며 왔다갔다 거린다."수이라 깊다 해도 베개 넘어가 수이로다. 월직사제는 앞을 서고 일직사제는 뒤를 서고 문신은 문을 열고 신신은 신을 신겨 길신은 길을 신겨 산신은 산을 신겨 여사제 대사제 아미타불 염불 고개 넘어서서 극락세계 연화대로 선하재천 하옵소사. 이씨 가중에 일가는 친척이며 동기는 일신 조카 방성들 손주 방성들 일가는 가속을 따라가는 사제짐 젖혀가고 상문짐 젖혀가고 꿈자리 몽사를 젖혀가고 석 달 삼 년이 곱게 나기를 발원이요."청 좋기로 소문난 신엄마가 구슬프게 풀어가는 아린말명 타령소리에 시누는 눈물을 찍어내 가며 남편을 찾고 있다. 남편과 내가 엄마 손에 이끌려 무릎을 꿇자 신엄마 타령은 한층 더 힘을 받기 시작했다."오늘은 사람이 죽어 구원되면 칠칠이 사십구제 백일제 불전 장전 받아먹게 마련하고 또 무장승은 시왕 군웅치 받아먹게 마련하고 또 그애기 기르던 바리 공덕 할미 할애비 벌배 나점배 양귀비 조밥 받아먹기 마련하고 성후망 두 망제님 후세 발원 남자 천도 부처님 인도하시는 데로 가시는 날이로성이다."벌써 얼마나 뛰었는지 신엄마의 버선바닥이 새까맣다. 버선이 하늘을 향해 뛰어오를 때마다 홍철릭 자락이 휘어 감긴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남편과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무릎이 먼저 닿고 고개가 땅에 닿았다. 상체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몸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갑자기 지난밤처럼 쇳덩이가 허리 위에서 누르고 있는듯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앞을 보니 신엄마가 내려놓은 열두 방울이 저 혼자 놀고 있다. 방울은 나를 향해 흔들거리고 있는데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허리를 일으켜 세우려 애를 썼지만 이미 정신이 가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별이 총총하던 하늘이 둘로 갈라지더니 상복을 입은 상주들이 여럿 보였다. 무슨 일인가 궁금한 마음이 들 사이도 없이 상주들이 온데간데없어졌다. 곧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나를 향해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돌멩이는 가까이 다가올수록 새빨간 불덩이로 바뀌었다.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 불을 받아들이면 더는 삶이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은 맹렬한 기세로 돌진해왔다. 얼굴도 모르는 아빠는 자기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어갔다. 남편 또한 오래전부터 팔리지 않는 귀퉁이의 책처럼 자기 건물에 붙들려 꼼짝 못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한쪽 발을 떼서 몸을 돌리는 순간 불덩이는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깨가 화끈거렸다.눈을 뜨니 겁에 질린 엄마와 남편의 모습이 제일 먼저 보였다. 응급실의 요란스런 발걸음 소리가 차츰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쪽 어깨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굿판을 위해 쳐놓은 천막 기둥이 넘어지면서 내 어깨를 덮쳤다고 한다. 천막과 기둥을 연결하는 송곳 부분이 어깨에 상처를 내긴 했지만 그리 심한 것은 아니라며 천만다행이라고들 수런거렸다."거봐라. 윤서야, 할머니 말씀이 맞잖아. 이렇게 액땜하고 넘어가게 된 건 다 할머니 말씀 따른 덕분이야. 아이고, 지장보살님, 일월 선신님, 칠성님, 용할머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엄마가 손을 비비며 읊어대는 소란스런 사설을 들으며 나는 다시 깊은 잠속에 빠져들었다.나는 이제 스물한 살이다. 요즘 유행하는 하이웨스트미니스커트에 킬힐을 신어도 어색하지 않은 것이 제법 성숙해졌다. 우리 서점이 이웃해 있는 유명 대학에는 입학하지 못했지만 수도권에 있는 전문대에 다니고 있다. 수업 끝나면 조별 과제물 때문에 절절매는 것이 여느 대학생과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친구들은 저녁에 늦어지는 일이 있으면 부모님께 전화하고 나는 남편에게 전화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끔 쨍하게 울리는 제금 소리와 함께 친구들의 사고소식 따위가 환청처럼 먼저 들려 곤란을 겪지만 나는 모르는 척 입을 다물어 버린다. 어깨에 남겨진 흉터가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지는 것처럼 언젠가는 사라질 일들이라고 생각한다.엄마는 지노귀굿으로 열아홉 살에 죽은 삼촌의 원한을 풀어 보냈다고 주장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장롱 속에 깊숙이 넣어둔 내 교복을 만지작거린다. 그는 잠자는 숲 속의 왕자다. 자신의 성채에서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엄마가 아빠를 데리고 나올 수 없었듯이 나 또한 그를 깨울 수 있는 공주는 아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그의 공주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나는 겨우 스물한 살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장담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엄마는 점 손님 앞에서 매번 확신을 하고 자신 있게 굿 이야기를 꺼내다 망신을 당하곤 한다. 내 앞에 펼쳐진 날들에 기대를 하는 것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우리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자못 기대된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0.01.0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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