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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적 상상력서 건져 올린 햇살의 진경

거미줄은아침 이슬아기바람새소리까지 모두 걸었습니다거미는 몇 번이나하늘을 내다봅니다처마 끝 새 하늘이 걸렸습니다부신 해가 철렁 걸렸습니다발자국 소리도지껄임 소리도아이들은하늘을 도르르 말아해를 가져갔습니다거미는 구멍 난 하늘을 다시 깁고온 마을은 햇살의 나라가 됩니다.- '아침 아이들' 전문'거미줄'이 '아침 이슬'이 되고, 그 '아침 이슬'이 다시; '아기 바람'으로 되었다가, '새소리' 가 되었다가, 그것이 다시 '해'로 점차 시상이 반전되어 가면서 해맑은 아침 거미줄 마을의 풍경이 신비롭게 펼쳐지고 있다.'거미줄'에 '아침 이슬'이 총총히 맺혀 있는데, '아기 바람'과 '새소리'가 그 거미줄에 걸려 살랑거리고 지저귀더니, 급기야는 '아침 '해가 철렁 ( 그 거미줄에) 걸려' 출렁거리고 있다는 발상이다. 참으로 신기하고 산뜻한 순수 직관의 은유적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돌연 개구쟁이들이 나타나 그 거미줄을 '도르르 말아' '구멍 난 하늘을 다시 깁'는 거미줄 나라'의 아침 풍경이다. '거미줄'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다시 '햇살'로 의미 전이를 거듭하면서 그의 시는 경이롭고 낯설은 치환 은유의 진경 속에 사물에 대한 인식의 폭과 자성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말갛게 익어가는 산열매 속엔맑은 물소리가 알알이 박혀 있다그 물소리 하나 똑 따서입에 넣으면아! 새콤한 산의 향기말갛게 익어가는 산열매 속엔맑은 햇살이 알알이 박혀 있다그 햇살 하나 똑 따서입에 넣으면아! 사르르 녹는 빨간 해. - '산열매' 전문이 시에서도 '햇살'이 등장하여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분별과 차별이 없는 '물소리'가 '산열매'가 되고, 또 '햇살'이 그 열매 속에 '알알이 박혀' '빨간 해'가 되어 사르르 내 몸속에서 녹는다는 초월적 동심의 발상. 이처럼 어린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물소리와 산열매, 나무와 동물, 사물과 자연도 우리와 같이 감정을 가진 정령의 존재로 인지한다. 이것이 천진한 동심이다. 한사코 분별하고 차별하는 성인들의 미시적 분류(classification)에서 벗어나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사유의 통찰력, 곧 동일화의 정신으로 삼라만상이 서로 소통하고 어울리는 낙원의 정신이 그의 시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진안 출신 허호석(1937~) 시인은 서울문리사범대학을 졸업(1962)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퇴임하였다. 1977년 '아동문예'와 198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그의 동심은 자연과 사물이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은유 속에 우주에 대한 인식의 폭과 자성의 영역을 신비롭게 넓혀가고 있다. 예술의 대 명제는 '새로워야' 한다. 새로움은 예술의 생명이다. 시도 예외일 수 없다.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낯선 데서 온다. '낯설다'는 것은 익숙함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신선하고 낯설다. 이러한 낯설음이 우리의 무딘 감성에 충격과 신선한 감동을 주면서 그가 천명한 '동시도 시다'란 그의 시관(詩觀)을 입증하고 있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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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24 23:02

【29. 윤이현(尹伊鉉)편】무위 자연의 천진과 자발적 직관의 동심

"톡-"튕겨보고 싶은"죽-"그어보고 싶은"와-"외쳐보고 싶은"풍-덩"뛰어들고 싶은그러나머언, 먼가을하늘. - '가을 하늘 2' 전문, 1987가을 하늘을 한 번 '톡 / 튕겨보고' 또 '죽-/ 그어보고 싶은' 어린 아이들의 무한한 호기심, 그것은 곧 '해 보고 싶은' 생명감의 분출이요 인간 본성의 욕망이다. 그 어떤 체면과 이데올로기도 없는, 인간 본성의 자발적 감성에 충실한 생명감의 발로, 그것은 인간 그 자체의 본성에서 기인한 극히 자연스럽고 천진한 동심과 순수의 낭만적 세계가 아닌가 한다. 어머 나비는 꽃잎나래 접으면 한 잎나래 펴면 두 잎이 꽃에서 저 꽃으로사뿐사뿐 날아 앉는노오란 꽃잎 두 장 - '노랑 나비 한 마리' 전문, 2003'나비'를 '꽃잎'으로 보다니..., 어떤 관념이나 이념이 제거된 순수 직관의 영지, 그가 지향하는 호기심의 세계를 어떤 지식이나 추상이 아닌 구체적 사실(fact)로서 전달하고 있다. 그것도 간결·명료한 이미지로써 일체의 설명을 배제하고 있다. 위에서 제시된 '가을 하늘'과 '노랑나비'가 그것인데, 그의 시가 이처럼 산뜻하고 간결한 데에는 아마도 한학자였던 조부와 부친의 슬하에서 일찍이 체득된 한시풍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새벽 두 시어둠은 가로등에게 맡기고길도 길게 누워 잠이 들었나 봐요.[…]한 여름 긴긴 해짓누르던 피곤을 내려놓고곤히 잠드신 아버지처럼저 길도잠을 좀 자야겠지요. - '길도 잠을 좀 자야겠지요' 일부'새벽 두시'는 깊은 밤이다. 그때까지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느라 잠이 들지 못했나 보다. 이런 '골목길'의 노고를 그 옆에 서 있던 '가로등'이 염려하고 있다. '이제 그만 눈이라도 좀 부쳐보라며' 가로등이 대신 밤길을 지키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염려하는 모습이다. 그러다 종장에 가서 시상이 반전된다. 마치 '한 여름 긴긴 해/ 짓누르던 피곤을 내려놓고/ 곤히 잠드신 아버지처럼/ 저 길도/ 잠을 좀 자야겠지요.'라고…, 새벽 두 시에야 잠이 드는 골목길이 어느새 새벽에야 일터에서 돌아와 잠이 드는 아버지의 고단한 모습으로 환치되어 있다.윤이현 시인(1941~)은 남원 출신으로 전주사범학교와 전주대, 원광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2003년 전주 양지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는데, 그의 시는 이처럼 자연과 사물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 사물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서로 어울리고 교감하는 천진한 자연성의 발로 속에 온정적 휴머니즘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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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10 23:02

【28. 이준관(李準冠)편】맑은 공기처럼 신선한 동심의 시인

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둑길에는 새떼들도 밟지 않은 저녁놀이 아름답구나. 사과 속에서, 여름의 촌락들은, 마지막 햇볕을 즐기며 천천히 익어간다. 연한 풀만 가려 뜯어먹던 암소는 새끼를 뱄을까. 암소가 울자 온 들녘이 다정다감한 어머니로 그득하다. (…)게를 잡으러 갔던 아이들은 버얼겋게 발톱까지 게새끼가 되어 돌아오고, 목책이 낮아, 목책 밖으로 자꾸 뛰쳐나가기만 하던 하늘은 조금씩, 조금씩 어두워져 돌아온다. - '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둑길에는'에서'연한 풀', '암소', '새끼', '어머니', '아이들'…, 한결같이 부드럽고, 여리고, 모성적인 시어들이다. '새끼- 아이들', '암소- 어머니'가 그렇고 '들녘'의 이미지 또한 '자연지향의 삶'과 동맥(同脈)으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퍽이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는 어디에선가 이 시를 해설하는 과정에서 "나의 관심사는 여전히 인간, 자연, 사랑이다. 인간, 자연, 사랑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다. 인간의 비극은 모든 것을 분리하고 경계를 짓는 데 있다. 시는 인간이 만든 이 모든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나는 떡갈나무 잎에서 노루 발자국을 찾아본다. 그러나 벌써 노루는 더 깊은 골짜기를 찾아겨울에도 얼지 않는 파릇한 산울림이 떠내려 오는골짜기를 찾아 떠나갔다.(…) 나는 떡갈나무에게 외롭다고중얼거린다.그러자 떡갈나무는 슬픔으로 부은 내 발등에잎을 떨군다. 내 마지막 손이야. 뺨에 대 봐조금 따뜻해 질거야, 잎을 떨군다. - '가을 떡갈나무숲'에서, 1991그가 찾아가 안착한 곳은 '내 발등에/ 잎을 떨군' 따뜻한 자연의 품이다. 삶의 터전인 자연을 도구적 기능으로 전락시킨 각박한 현실 앞에 맑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애써 찾아 안착한 유토피아는 사람들이 발자국을 찾기 힘든 '깊은 산 속에 숨어 있음'이 유감이다. 이는 세상과의 단절해소가 근본적으로 치유되지 못한 일시적 도피 혹은 외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터전을 서울로 옮기고부터 그의 작품세계는, 마을과 골목으로 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내려와 있다. 외진 산 속이 아니라 이젠 도심의 아파트 속에서도 '수돗물을 틀면 / 쏴아 불빛이 쏟아진다.//부엌의 불빛 아래 엎드려/ 아이는 오늘의 숙제를 끝내고/ 때로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의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을 꺼지지 않게'.('부엌의 불빛')에서처럼 그의 상상은 보다 현실적 공간으로 변모하여 존재와 사물에 대한 가없는 사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전히 아름다운 동심을 잃지 않으려는 '사무사(思無邪)'의 세계를 지향하면서 이러한 동심으로 혼탁한 세상에 신선한 공기와 같은 '신자연의 시'를 선사하고 싶어한다. 이준관 시인은 전북 정읍 출신으로 전주교대와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어 서울에서 중등 교사와 한국동시문학회장을 역임하였다.그의 시는 신비 자연으로의 순례를 거쳐 원시적 상상력과 생명감으로 도시문명에 지친 현대인들을 친근하고 사실적인 구어체 화법으로 감싸면서, 이성만이 우리의 답이 아니라, 자연의 신비 속에 생의 원리와 아름다운 꿈이 있음을 조용히 일깨워 주고 있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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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03 23:02

【27. 황송문(黃松文)편】인욕 보살행을 닦는 수도승의 모습

소복(素服)의 달 아래다듬이질 소리 한창이다.고부(姑婦)의 방망이 딱뚝 똑딱학(鶴) 울음도 한 밤에 천리를 난다.참기름 불은 죽창가에 조을고오동꽃 그늘엔 봉황이 난다.다듬잇돌 명주 올에 선(線)을 그리며설움을 두들기는 오롯한 그림자떼 지어 날아가는 철새 울음은대야 하늘에 산월(産月)이 떴다. - '섣달' 전문임실 오수 출생 황송문 시인(1941~)은 전주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71년 '문학'지로 등단했다. 선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역임하고 현재 계간지 '문학사계' 주간으로 있다.섣달 하늘의 차가움과 그 하늘을 '떼 지어 날아가는 철새(들)'의 서늘한 모습들이 한폭의 수묵화를 보듯 선명하다. 특히 '소복- 달빛- 은대야 하늘'이 주는 하얀 색감의 시각적 이미지와, '다듬이질 소리- 학(鶴) 울음- 철새 울음' 소리에서 환기되는 청각적 이미지와의 결합에서 오는 공감각적 이미지는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서 한 겨울을 나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마치 정지용의 '향수'를 보듯 그 시절 고향 마을의 풍경과 그 안에서 다정했던 식솔들과 일가친척들의 모습까지도 떠오르면서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가 들려온 듯 그립다. 우리 조용히 썩기로 해요.우리 기꺼이 죽기로 해요.토속의 항아리 가득히 고여삭아 내린 뒤에맛으로 살아나는 삶우리 익어서 살기로 해요...정겹게 익어가자면꽃답게 썩어 가자면속맛이 우러날 때까지는속 삭는 아픔도 크겠지오.잦아드는 짠맛이 일어나는 단맛으로우러날 때까지우리 곱게 곱게 썩기로 해요우리 깊이 깊이 익기로 해요죽음보다 깊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부활의 윤회 - '간장' 일부시집 '메시아의 손' 후기에서 황송문 시인은 '요즈음 곱게 썩는 인생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시란, 근원으로부터 뽑아 올린 진액의 이파리라면 나의 영혼, 나의 인생은 그 뿌리요 줄기임에 틀림이 없다.' 며 절대자나 대 자연의 순리 앞에서 겸허하게 옷깃을 여미고 좀더 겸손의 옷을 입고 구름 저쪽 보이지 않는 무한의 세계와 교신하고 싶어한다. 그는 '죽(익)어서 살기'를 희망한다. 죽어서 죽고, 살아서 사는 삶의 철학이 아니라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끈질긴 생명의 철학론을 펼치고 있다. 그것은 나서지 말고 죽은 듯이 살자는 은인자중의 의미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자는 재생의 이중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잦아드는 짠맛이/ 일어나는 단맛으로/ 우러날 때까지/ 우리 곱게 곱게 썩기로 해요'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죽음보다 깊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부활의 윤회'는 후자에 해당된다 하겠다. 그러나 '죽어 살자'는 의미와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나 살자', 이 둘을 동시에 수행하기 위해서는, 마치 니체의 '네 운명을 사랑하라' 하듯이 눈앞의 고난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의 업보로 받아들여 업장을 먼저 소멸하여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미 이러한 깨침과 수행 의지를 바탕으로 이 시가 탄생하였으리라고 보기에 우리는 다만 그의 값진 결실을 지켜볼 따름이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 문화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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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27 23:02

【26. 송하선(宋河璇) 편】순명(順命)의 휴머니스트

김제 출생 송하선(1938~) 시인은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63)하고 익산 원광여고와 남성고 교사를 거쳐 1971년 '현대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 1980년부터 우석대 국문과 교수로 근무하다 정년퇴임하였다. 시집 '다시 長江처럼'('70)외 7권이 있고, 저서로 '미당 서정주 연구', '한국 명시 해설', '미당평전'등 13권의 역저를 발간하여 주목을 받으며 자연과 사물을 달관의 자세로 성찰하면서 자연주의적 순명順命의 선미禪味가 깃든 서정의 세계를 보이고 있다. 멀리 두고 이쯤에서외로운 황홀 속에 있고 싶네.그리하여 나의 혼이 밝아오고 나의 혼이 깊어지고나의 혼이 넓어지는그 오상五相의 얼굴을이 만큼의 거리에서 눈여겨 보리니사랑이여 잔잔한 호수의 마음이여그대 열반의 한 세계에 이르르면날 어느 목소리로 불러주려나.그 부르는 소리 은은히 들리면그 때엔 서서히몸에 밴 먼지를 털으리다.흔들리는 물결 위에 흔들리지 않는 심지로 솟은 나의 수녀여먼 데서도 가까운 미소는가장 큰 하늘 아래비인 그 자리에서 보고 싶네. - '연꽃 1'전문수행자의 모습이 엿보인다. '연꽃'제목도 그러려니와 '오상(五相)', '열반'등의 불교적 용어가 그렇다. 시인은 '외로운 황홀'을 지향하고 있다. '황홀'하기는 '황홀'하되 '외로운 황홀'이다. 그것은 '멀리 두고 이쯤에서' 담담하게 흐름을 관(觀)할 뿐, 개입하여 동화되거나, 그렇다고 외면이나 방관도 아닌 관조(觀照)의 세계다. 양쪽에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가 아니라, 고정적인 실체가 없는 무자성(無自性)의 세계 곧, 불이(不二)의 중도계(中道界)다.늙은 소 한 마리가 도축장으로 갑니다.어디로 가는 길인지그것이 마지막 가는 길인지도모르는 채주인의 손에 이끌리어 가고 있습니다. 한 평생 노동의 시간을 뒤로 하고오직 주인만을 위해 살아온한 평생 희생의 시간을 뒤로 하고[...]가는 곳을 모르는 채늙은 소는 성자聖者처럼 순교자처럼한 발 한 발 묵묵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 '늙은 소가 가는 길'에서, 2002'도축장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소', 이는 불안한 존재자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이 '묵묵히' '늙은 소가 가고 있는 도축장'을 바라보면서 고독하고 불안한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어디로 가는 길인지/ 그것이 마지막 길인지도/ 모르는 채/ 주인의 손에 이끌리어 가고 있는' 늙은 소의 운명, 아니 우리들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그의 시가 전반적으로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그의 시를 보다 차분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로 이끌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앞의 '연꽃 1'과, 위의 '늙은 소가 가는 길'에서도 그러한 '관조의 거리'가 여전히 보이는데 아무튼 '저만치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객관적·심미적 거리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러한 관조의 미학(美學)이 그의 시에 도교적 선미禪味를 더하게 한다. 때때로 그의 시는 '중도' 혹은 그것은 영원 지향의 도(道)를 추구하면서 인간의 근원적 고독과 허무에 대한 실존 인식으로 생生의 한계와 존재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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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20 23:02

25. 정양(鄭洋)편 - 고독한 까마귀의 선회

김제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와 원광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수료하고 (1977) 전주 신흥고를 거쳐 2007년 우석대 국문과에서 정년퇴직함.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천정을 보며'가 당선되었고, 1977년 윤동주의 시에 관한 글 '童心의 神話'를 정교영이라는 가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 문학평론부문에 이어 당선되었다. 참새떼가 요란스럽게 지저귀고 있었다아이들이 모여들고감꽃들이새소리처럼 깔려 있었다아이들의 손가락질 사이로숨죽이는 환성들이 부딪치고감나무 가지 끝에서 구렁이가햇빛을 감고 있었다아이들의 팔매질이 날고새소리가 감꽃처럼털리고 있었다햇빛이 치잉칭 풀리고 있었다햇살 같은 환성들이 비늘마다 부서지고 있었다아아, 그때 나는 두근거리며팔매질당하는 한 마리구렁이가 되고 싶었던가.꿈자리마다 사나운몰매 내리던 내 청춘을몰매 속 몰매 속 눈감은 틈을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햇살이, 빛나는 머언실개울이 함성들이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햇빛이 익은 흙담을 끼고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가뭄 타는 보리밭 둔덕길을 허물며팔매질하며 아이들이 따라가고 있었다.감나무 푸른 잎새 사이로두근거리며 감꽃들이 피어 있었다. - '내 살던 뒤안에',전문, 1980년정양은 어린 시절부터 상처 받은 영혼이었다. 그것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좌우익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부친이 정치적 사상범으로 몰려 실종되었고, 그로인해 이후 그 일가(一家)에 주홍글씨처럼 내린 가혹한 형벌은, '몰매 속에서 구렁이처럼 눈을 감고 / - 가뭄이 타는 보리밭 둔덕길을 허물며' 어디론가 사라져야만 했던 어린 시절 시인의 개인사가 시의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년 시절의 고향, 그것은 그에게 핍박과 불신만을 안겨준 가해의 대상었다. 그러나 외면할 수도 없는 그것은 '내 기억 목숨의 기슭에/ 불을 지르는'('난로 앞에서') 트라우마가 되어 이후 그의 시에 짙은 음영을 드리우게 된다. 형무소에 끌려가서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육이오를 맞았고 구사일생 목숨을 건져냈다는 그럴듯한 풍문도 아랑곳없이 인공 난리 다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 휴전선이 생기던 해부터 어머니는 아버지 제사를 지내오다가 몸져눕기 한 해 전에 팔아먹다 남은 산자락에 빈 무덤 하나 지었습니다. - '빈 무덤'중에서, 1997년'보고 싶어도 / 소용없는 사람', 그리고 '내려도 내려도 다 녹아내리는 / 저 첫눈' 처럼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 폭폭한 빛더미'가 되어, 그래서 그의 고향은 이희중의 말마따나 '못 떠나는 혼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우리 민족사의 恨, 아니 개인사의 한이 되어 고스란히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겨울과 고향'은 대부분 찬비가 되어 내리거나 눈보라가 친다. 그것은 그리움의 눈, 쓸쓸함의 눈이다. 그리고 눈 그친 그 하늘에는 항용 까마귀 떼가 날고 있다. 그것 또한 외롭고 을씨년스럽고, 또 일찍이 저 세상으로 가거나 행방조차 알 수 없는 그리운 이들의 영혼이 아닐까 한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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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13 23:02

24. 문효치(文孝治)편 - 상상력의 견인으로 존재론적 초월·치유

군산 옥구 출생 문효치(1943~) 시인은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신문'과 '한국일보'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장,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장을 역임하고 '시문학상', '펜문학상', '정지용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군산 동중, 서울 배재중·고 교사를 거쳐 동국대, 추계예대 등에 출강하면서 현재 계간 '미네르바'주간으로 있다.새는 어디론지 날아가한 줌 흙으로 잠자는데울음소리는 가지에 빨갛게 달려서더욱 큰 소리로 울고 있다. -'감나무'에서사랑이여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허공에 태어나수많은 촉수를 뻗어 휘젓는사랑이여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에서초기 시는 위와 같이 '울음', '한 줌 흙', '허공' 등 어둡고 아픈 상처로부터 시작된다. '새'는 이미 죽고 없건만, 그가 남긴 울음소리는 아직도 가지에 빨갛게 남아 울고 있다. 닿을래야 닿을 수도, 뿌리를 내릴 수도 없는 허공의 절망감, 그것은 시인이며 만석군 집안의 종손이었던 아버지가 6.25 때, 공산당으로부터 형제들을 지키고자 인민군에 입대하면서부터 그에게 들이닥친 시련과 핍박의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어둠과 불안의 상처가 이후 그의 시의 기저를 이루면서 '맹수의 우리처럼/ 고독이 포효하는 창고에 갇혀'(「病中」에서) 젊은 날을 앓게 된다. 이때 그가 찾게 된 것이 비운의 왕국 백제에 대한 탐구이다. 여기에서 그는 오랜 세월 치유되지 않는 상처에 대한 자기 확인과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그의 가슴에서 아직도 불타고 있는 현재형의 폭력기제에 대한 자구적 방어책이기도 하다. 내소사 대숲싸락눈 내리는 소리를오늘은 한 가마니 지고 와야겠다어서내소사 대숲찬 기운에 영근 푸른 달빛을한 동이 이고 와야겠다 -「바다의 문6」부분그러나 위의 제5시집 '바다의 문'에 와서는 이전의 시집들과는 다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개인사의 비극을 서늘한 서정의 깊이로 잠재우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우리네 영혼의 오두막에 등불을 밝힌다. '사랑이여/ 알을 깨고 나오라.// 이제는 굳게 여문/ 부리를 내두르며/ 알을 깨고 나오라 - 티 한 점 없는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라.'('너에게')와 같이 이전의 어둡고 무거운 이미지에서 벗어나 세상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바닷물에 젖은어둠이내 살 속에 들어와 있던물새 한 마리 지우고 있다. - '바다 어둠'에서바다는 그에게 부활의 성소다. 그러기에 '검은 보자기를 -바다에 날리면서', 혹은 '내 살 속에 살고 있던 물새 한 마리를 지우면서' 그는 이제 새롭게 부활한다. 민족적 정한과 향토정서로부터 시작된 그의 시가 점차 보이지 않는 그러나 어디엔가 남아 있을 어릴 적의 신화를 찾아 그의 시는 끊임없이 존재론적 초월을 꾀하고 있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 문학·출판
  • 기고
  • 2013.03.06 23:02

23. 채규판(蔡奎判) 편 - 비정(非情)의 서정 꿈꾸는 이미지스트

군산 옥구 출생으로 원광대학교 국문과(1964년)와 동 대학원을 수료함. 196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1967년 시집 '바람에 서서' 이후 20여 권의 시와 시조집, 그리고 '한국현대 비교시인론' 외 7권의 논저를 발간하면서 1963년 부안 삼남중학교 교사, 군산 동고교를 거쳐 1988년부터 원광대 국문과 교수로 봉직하다 정년퇴직을 하였다.배암 한 마리 아까샤 숲에 있네.빼문 혀로 휘휘 바람을 젓네. 산, 산새 섧히 울고꽃, 꽃잎이 지고오월 하늘, 배암, 꽃잎에 노네. 노을 빛이 배암이네.배암은 노을의 출구를 아네.꿈의 울밑에 찍-찍, 배암 우는 소리- 듣는가들리네.꽃이네. 먼 능선을 휘어잡는 아까샤 꽃이네. 아아, 배암이 아까시아꽃숲에 지네. -「배암 詩抄」전문, 1969'숲에 든 뱀'과 그 '뱀의 - 울음소리'가 간결하면서도 퍽 인상적이다. '배암이 아까샤 숲'에서 '혀를 빼물고' 그것도 '휘휘 바람을 젓고' 있다는 돌연한 발상은 참으로 낯설고 이색적인 -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 비쥬얼 이미지(visual image)로서 이는 '언어를 감각화'하는 그의 남다른 이미지스트다운 상상력과 재능의 소산이 아닌가 한다. 제가 가면 어디까지 갈까.소롯이 피는밤꽃들아우성인데훠어이 훠어이내두르며산을 때린다 해서꿈쩍이나 할까.머루랑 으깨어 풀어 놓듯검푸른강.달이탱자만 하구나. -「여창旅窓」에서, 2009달(月)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무슨 사연 그리 많아 '훠어이 훠어이/ 내두르며/ 산을 때린다.'했다. 그리고 '머루랑 으깨어 풀어 놓듯/ 검푸른/ 강'같이 어두운 밤인데, 멀리 '탱자'만한 달이 '제가 가면 어디까지 가겠' 다고 '잘도 가는구나.' 하고 나그네는 말한다. 캄캄한 '어둠의 밤'을 '머루를 으깨어 풀어 놓듯 / 검푸른 / 강'으로, 그리고 그 캄캄한 하늘에 '샛노랗게 떠 있는 조그마한 달'을 '탱자'에 비유하여 간결하면서도 산뜻한 이미지를 여전히 선보이고 있다. 이미지스트다운 이러한 그의 시풍, 그리하여 순간 순간,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튕겨오는 미묘한 움직임과 그 직관적 감각의 편린들을 '날(生) 이미지' 그대로의 직조 하는 브르통의 자동기술법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시법(詩法)이 그의 말마따나 '구성에 특별한 신경을 쓰지 않고, 내용이 단계적이지 못하며, (그럼에도) 추상적 의미나 가치를 긍정하고자'하는 채규판 시의 자위적(自衛的) 개성이 아닐까 한다.그의 시는 이처럼 낯설고 이질적인 언어 결합에서 오는 싱싱한 이미지적 조어(造語), 그러나 그러한 이미지와 이미지의 무리한 결합 과정에서 파생되는 난해한 구문 또한 그의 시에 서로 다른 평가를 불러들이게 되는 또 다른 측면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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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2.27 23:02

22. 이운룡(李雲龍) 편 - 형이상학적 본질 탐구로 서정미학 추구

이운룡(1938~) 시인은 진안 출생이다.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남대 대학원(문학석사)과 조선대 대학원(문학박사)을 수료하였다. 1964년 '현대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이래 1983년 '월간문학'지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시와 문학평론을 겸하면서 현재 전라북도 문학관장으로 있다. 1960년대 그의 초기 시는 '가을의 어휘'처럼 자연 서정에서 출발하였으나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서는 왜곡되고 억압된 현실과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 및 민중의식으로 전환, 리얼리즘의 성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를 팔 때 나는 울었다.아버지를 따라 읍내 쇠전에 갔을 때 젖이 불어 새끼를 찾는 소들이젖이 그리워 어미를 부르는 소들이말뚝에 매여그 무엇보다도 길게 울음을 보내고 있을 때나는 소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중략 -나는 소가 불쌍했다. 제가 지닌 노동력을 다 주었고밑거름을 빚어 제공했으며제가 숙일 수 있는 머리를 끝까지 숙여 마지막엔 제 살 뼈 가죽까지 바쳤어도소가 소 이상일 수 없는 소 ―「쇠전의 애가」 부분, 1982소는 순박하고 친근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소는 '소'라는 운명의 고삐에 얽매여 일생을 주인을 위해 고된 노동만을 일삼다 끝내는 무참하게 도살당하고 만다. 이러한 소의 운명 앞에서 소에 대한 시인의 연민과 분노는 뜨겁다. 그것은 소가 끝내 소일 수밖에 없는 '운명에 순종하는 소'가 아니라, 그 '운명에 도전'하여 보다 넓은 세계로의 탈출을 꿈꾸는 '무서운 뚝심'이 시의 내면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 시는 '소의 운명처럼 고삐에 얽매여'억압된 현실을 벗어나 보다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열망한다. 눈물은 꽃이다. 눈물이 없으면 별은 반짝이지 않고 눈물이 없으면 마음꽃은 향기를 품지 못한다. 눈물은 반짝이며 흐르는 향기이고 내가 당신에게로 흘러가는 사랑이다. 눈물은 만나서 바다가 되는 큰사랑이다. 눈물을 마음껏 흘리자. 흘려서 가슴속에 퍼담자. 눈물이 마른 가슴은 돌이고 어둔 허공이다. 그래, 가슴이 예쁜 사람은 눈물도 아름답다. 아름다운 눈물을 퍼 담는 일은 나와 당신이 만날 수 있는 희망이다. 가슴이 넓은 사람에게는 눈물과 사랑도 많다. 그러므로 눈물은 일평생 길눈 뜨고 손잡고 갈 발을 따뜻이 적셔준다. ― 「눈물」 전문, 2010논리적이고 명쾌한 은유로 엮어져 있다. 여기에서도 남다른 형이상학적 인식의 깊이와 통찰로 그의 시는 보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생명 미학, 곧 휴머니티를 추구하고 있다. '눈물'은 인간 본연의 순수와 진정성 그 자체로서 공자가 일찍이 말한 '사무사思無邪'의 세계와 동맥을 이루고 있는 시적 뮤즈Muse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눈물'이야말로 메마른 우리의 가슴에 '꽃'을 피우게 하고, '반짝이게' 하는 '별'이 되어 '당신의 바다'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랑'이라고 그는 말한다.굴절된 역사와 사회적 모순에 대한 인간적 갈등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치열한 리얼리즘은 차츰 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명상을 거쳐 삶의 궁극과 존재의 본질 탐구에 보다 핍진逼眞하게 다가가는 새로운 서정미학의 구축으로 생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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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2.20 23:02

21. 최종규(崔宗奎) 편 - 절대지향의 고독한 행보

김제 출생 최종규(1938~) 시인은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4년 '현대문학(現代文學)'으로 등단하였다. 평생을 체신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초설(初雪)'(1968)외 9권의 시집을 펴냈는데, 초기 그의 시는 생명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현대문명을 통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구원과 상실된 고향 의식 및 인간성의 회복이 시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난삽한 어법이나 트릭으로 위장되어 있지 않고 친근한 소재와 소박한 문체, 그리고 사물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정관적(靜觀的) 자세로 엮어져 있다.나는한 무리 극명(克明)한 가을 햇볕. 한 움큼의 차고 시원한 청정한 물. 숲에서 발산하는 신선한 한 줌의 맑은 바람. 혼탁한 열기(熱氣) 법석이는 저자거리 너머, 흔들리는 가지 반짝이는 잎새 위에 해맑은 한 떨기 푸르름. 짙푸름 끝에 너울대는 눈부신 한 줄기 빛의 이랑. - '한 줄기 빛의 이랑' 전문 '햇볕- 물- 바람- 푸르름- 빛'으로 이어지는 시상은 한 마디로 만물제동, 곧 노장의 물화계에 다름이 아니다. 이 시야말로 '진실한 나의 자화상'이라고 한 최 시인의 말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한 편의 시 속에서, 그가 얼마나 자연에 귀화(歸化)하여 그것들과 합일되기를 꿈꾸고 있는가 하는 그의 자연 지향적 정신세계의 정점을 엿보게 된다. 내 어릴 적 장독대엔 커다란 항아리가 많았습니다.어떤 항아리 하나는 그냥 빈 채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그 안을 보고 싶은 충동에 닿지 않은 키 늘리려고깨금발 딛고 서서항아리 속을 들여다보곤 하였습니다.혼자 조용히 들여보다가휑하니 빈 것을 알고 나선 아하!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내 소리 되받아항아리도 아아 ! 울렸습니다. 지금 텅 빈 그 항아리가 되어내 속을 드려다 볼 누군가를지금 것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빈 항아리'일부 2006 '삼라만상은 꽉 차 있으면서도 실은 빈 항아리처럼 텅 비어 있다. 그래서 우주는 곧 공(空)이요 태허(太虛)이다. 이 몸 또한 그와 다르지 않으니, 누군가 이러한 '내 안을 들여다보며/ 불러 줄 설렘을 안고' 오늘을 살아간다. 몸이 내가 아니고…… 생각이 내가 아니고…… 내 직책과 내 재산과, 내 명예, 내 감정, 곧 색신(色身)의 내가 아니라, 내 안에서 진정 나를 이끌어 가고 있는 보다 크고 거시적인 나. 그리하여 이 몸뚱어리, 지금의 이 생각과 느낌을 움직이고 있는 나의 참주인을 만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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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2.13 23:02

20. 정병렬(鄭炳烈) 편 - 산(山)에 드는 시의 선객(禪客)

순창 출생 정병렬(1937-) 시인은 전북대 법학과에 휴학 중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엄동의 계절」이 당선(1961) 되었다. 이후 중등 영어 교사로 30여 년간 봉직하다가 1991년 『표현』 작품신인문학상을 받고, 2000년 시집 『등불 하나가 지나가네』 외 2권의 시집을 연달아 내면서 최근에는 동양적 선취(禪趣)가 깃든 정갈한 서정시를 쓰고 있다. 도시 무관심한 계절은 빙점 이하에서 눈보라를 친다.갈증난 상채기를 콜록이며오늘은 엄동 가설극장에서마저 남은 피 한 점을 후후 모닥불 피우고내일을 방문하는 거랑뱅이들.빵 한 조각에 혹사되어이제는 차라리 잠자는 기도가 폭력으로 거리를 질주하고未遂의 의욕들이 죽음으로 시위하는 흉참한 내력 속에내일을 방문하는 오솔길에핏방울 뿌리는 오늘의 풍속이다.차라리 역도의 악명으로 이름을 팔고 싶었다. - 「엄동의 계절」에서, 1961그의 데뷔작인데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남다르다. '눈보라친 빙점의 계절', '남은 피 한 점 후후 모닥불'을 피우며 내일을 기약하는 '거렁뱅이'들의 모습, 이는 젊은 날 시인이 느끼는 자신의 모습이다.'남은 피 한 점', '흉참한 내력', '핏방울 뿌리는 오늘의 풍속' '차라리 역도의 악명'등, 4.19 전후 독재와 맞서 피를 흘린 대학생들의 울분과 육성적 몸부림이 절절하다. 산에 드는 순간, 길은 사람의 길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발자국, 하느님의 발자국 냄새가 난다. 그같은 하늘의 냄새에 젖어서 새들은 지저귀고, 푸나무들은 우거져서 산 정상 너머 하늘 쪽으로 낙락장송 뻗어 오르고, 어디선가 물소리 어느새 하늘을 만나고 기뻐서 저리 졸졸거리며 귀갓길 내려닫고 있질 않는가. - 목천의 인생론집 『희망시 인내동 사랑가』에서, 2012년'신(神)'을 찾고 '하느님'을 찾아 산(山)에 드는 시이의 모습, 그것은 '침묵은 산의 얼굴이니라/ 숭고는 산의 마음이니라/ 나 또한 산을 닮아보리라'하던 지난 날 신석정 선생의 모습을 어느새 닮아 있었다. 대학 시절 〈신영토〉 동인이었던 송하선 시인도 '이전 그의 시에서는 젊은 객기? 같은 것이라고 할까. 하여간 아직 정리되지 않은 거칠거칠한 무엇이 그의 내부로부터 꿈틀대고 있는데 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그는, 이제 젊은 시절 가슴 속에 끓어오르던 '피'의 분출은 볼 수 없고, 세월의 윤회와 자연의 이법에 따르는 순명의 몸짓을 보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돌멩이들이 저렇게 돌아오다니아지랑이 피던 봄날에끓는 나의 피 공중으로 돌팔매질하던 그 돌멩이들이저렇듯 고목 한 가지에 죄다 걸려서햇볕 바스러지는 나날허공에서 익은 피 주렁주렁저렇게도 환하게 돌아와 인사를 하다니 -「홍시」에서, 2005년'젊은 날의 돌멩이'들이 저렇게 '홍시'가 되어, '환하게 돌아와 인사를 하다니'......, 이 또한 순명(順命)의 모습이다. 그 사이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시고 떫던 봄날의 '땡감'이 말랑말랑한 '홍시'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불면의 가을밤이 오갔으리오. 시선일여(詩禪一如)요 도(道)를 닦는 수행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오늘도 시인은 산에 들어 침묵 속에 마음을 합장하고 진정 나를 비워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선객(禪客)의 길을 걷고 있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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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2.06 23:02

19. 김민성(金民星) 편 - 가을 햇살과 바다 사랑했던 부안 시인

부안여중고 교장과 이사장을 역임한 김민성(1927-2003) 시인은 부안 출신으로 1960년 신석정 시인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이후 부안문화 원장과 『석정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부안의 역사와 문화 특히 이매창 문학 발굴과 신석정 시비 건립에 남다른 관심으로 지역문화 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대자연이라고 하는 절대적 존재 앞에서 서 있는 자신의 왜소한 존재에 대한 골똘한 인식으로 구도자적인 자세를 보인 시인이었다. 낮게 낮게 발을 쳐놓고태양은 이제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참새 한 마리 바삐 돌아 간 뒤 바람이 인다 바람에 날리어 내가 파리똥만큼이나 작아지는 시간. 황토길 비포장도로를 운전수는 미친듯이 차를 몰고 어둠이 쓸어오는 가로수 정밀이 덮어 가는 논둑길아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고고즈너기설레는 가슴을 챙긴다. - 「석양」, 전문'태양이 이제 / 뒤도 돌아보지 않는' 석양 앞에 서 있다. 이어 사라져버리고 없는 '태양'과 '날리는 바람' 앞에서 시인은 '파리똥만큼이나 작아진다'고 하였다. 태양도 '사라져 버리고' 참새도 '날아가 버린', 이처럼 그의 초기 시는 '사라져 버리고', '날아가 버린', 그리하여 붙잡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무상감(無常感) 그리고 그 앞에 속수무책으로 서 있을 수밖에 실존적 자아에 대한 골똘한 인식에서 그의 시는 시작되고 있다.갈매기는 매칼없이 바다가 좋았다바다도 갈매기가 그저 좋았다 아홉물 큰 사리 바다가 긴 잠을 깬 용트림을 하면 물씬 갯 내음 갈매기는 파도를 알 것 같다. 해조음 속에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갈매기는 파도를 모를 것 같다.바다의 깊은 의미를 네가 알까 내가 알까. 매칼없이 좋은 바다에 하루를 앉았는데 갈매기는 기어히 빈 봄을 몰고 온다. - 「바다」전문절대의 '바다'가 등장하고, 그 앞에 서 있는 왜소한 존재, 곧 시적 자아의 상관물로서 '갈매기'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 '갈매기'에게 안겨오는 것은 언제나 '빈 봄'뿐이라는 허무의식이 그 배면에 깔려 있다. 그러면서도 바다를 떠나 존재할 수 없는 갈매기, 그래서 '매칼없이 좋아한 바다.'에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기에 '갈매기는 파도를 알 것 같'지만 끝내 '파도를 모를 것 같다'고 한다. 이것이 절대 무한의 바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비어 있고(空) 그러면서도 끝내 그 근원을 알 수 없는(不可解) 시적 자아의 모습, 아니 우리들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누구보다도 고향을 사랑하고 고향의 바다를 사랑하다 잔잔한 여운만을 남긴 채 바다로 되돌아간 시인. '맨발로 걸어오는 / 낙낙한 가을 햇살 따라', (「맨발로」에서) 바다와 하나가 되어 맨몸으로 우리 곁을 떠난 그는 진정 부안의 시인이었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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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30 23:02

18. 허소라 (許素羅) 편 - 시대의 흑점을 응시한 고독한 순례

눈이 하얗게 내린 그날어느 운동장에선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했지만어느 비탈에선 한 소년이겨울 토끼보다 시시하게 숨을 거두고 있었다.육중한 〈캐터필러〉 소리를 자장가로 나면서 철조망을 보았고죽으면서 철조망을 본 雲川里의 소년.나면서 깡통을 보았고죽으면서 깡통을 본 雲川里의 소년.- 미안하다언어는 밑창으로 貯炭되고내일은 흑인 병사의 얼굴처럼 불길하던雲川里의 철망가누가 여기에 꿈과 사랑을 주었고누가 여기에 휴식과 錢票를 주었는가? [...]오늘도 雲川里엔 요란한 八軍車의 엔진소리깡통소리, 껌 씹는 소리그리고 비오는 날의 찢어진 우산처럼독버섯처럼삼류극단의 셋트처럼펼쳐진 판자집[...]단 한 번 상학종의 의미를 갈구하던 소년은 갔다.마호니군의 사랑을 따라간宋仁子양의 고향- 雲川里에서〈책임전가〉의 상표를 또 한 번 확인한 채 그리고는 조용하였다.그것은 안으로 안으로만 피를 새기는 木鐘이었기에...... -「목종」(1964,2)에서이 시는 미군부대로 통조림 몇 개를 훔치러 들어간 소년이 무참하게 사살된 사건, 그러나 그것을 안으로만 삼켜야만 했던 1960년대 한반도의 현실을 고발한 시다. 〈육중한 캐터필러/하얀 눈〉, 〈철조망/토끼〉 등, 〈미군/남한〉이라는 '점령자/ 현지인' 관계에서 빚어진 민족적 비애와 분노를 강자와 약자, 폭력과 순수의 대비적 이미지로 클로즈업시켜주고 있다. 당시, 이 사건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1960년대 초, 주한미군에 대한 민족적 자각과 비판을 최초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분명 한국의 문학사, 곧 한민족 저항시사(詩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겠다. 아직 푸르름이라 말하지 말자분단이 분단을 낳고 또 분단이 분단을 부르려는 지금아직 푸르름이라 하지 말자끊어진 칡뿌리에 토막 난 무쪽에 새 움이 돋기 전엔아직 푸르름이라 하지 말자넋두리라 하지 말자그러나 지금 기쁠 것도 서럴 것도 없는 전라도 허허 벌판에 봄이 오고 있다.당당한 진군처럼 봄이 오고 있다.- 「봄날 전라도」에서, 1995소외와 단절의 역사에서 통합과 복원 그리고 소생의 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순리이고 진리이기에 그에 대한 그의 열망은 이 고장, 아니 이 민족, 이 시대의 보편적 명제요 시대선(時代善)이 아닌가 한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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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23 23:02

17.황길현(黃吉顯) 편 - 빛과 순결의 아웃사이더

남원 출생인 황길현 시인(1933~ 2002)은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0년부터 전남북 고등학교에서 국어과 교사로 교편생활을 하면서 1959년 신석정 시인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으로 등단, 이후 『전북문학』과 『석정문학회』동인으로 활동하면서『앙가바리의 반항』외 5권의 시집과 제1회 '백양촌문학상'(1989)을 수상하면서 어둠 속에서도 빛과 순결 지향의 순박한 시인이었다. 울다울다생각하는 의미는 차라리 가슴을 찢긴상흔의 언저리를 기루어 흘린 피에 목이 젖어 외롭게 몸부림치는 노래여 낙엽지는 눈물의 선회빛을 부르는 대화 속에 밋밋한 연륜에의 바람을 키운다. -「만종」에서, 1959625는 그의 가족과 주변에 참혹한 참상의 흔적을 남기고 갔다. 어처구니없는 동족간의 살육과 모함 그리고 반목과 질시. 그리하여 억울하게 먼저 간 이들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울다/ 울다', '가슴을 찢긴/ 상흔의 언저리를' '외롭게 노래(하거나)/ 낙엽지는 눈물' 뿐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평지의 길과 오름길 그리고 내림 길 이 세 길을 사람들은 다 걷고 있지만, 어느 쪽에 초점이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러나 내 생각은 오름길에 매력이 있다. 그러나 다리가 짧다. 그렇다고 뒤돌아 설 수는 없다. 맨 뒤에라도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제2시집 『앙가바리의 반항』 「序에서」, 1974년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불만. 아무리 오르려 해도 다리가 짧아 뒤쳐질 수밖에 없다. '앙가바리'는 다리가 짧고 굽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경쟁의 대열에서 항시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자포적 인식에서 세상과 맞서 있다. 이런 속에서도 그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 산골에서 산국(山菊)을 만나, '이슬의 힘으로/ 몸을 닦고', '싸늘한 체온을 / 부비어 땀흘리'(「山菊」일부)기를 꿈꾼다. '이슬로 몸을 닦는 - 산속의 국화'가 시인이 지향하는 고결한 정신주의라 한다면, '식어버린 이웃들의 체온을 부비'고 싶어함은 그의 따뜻한 인도주의에 다름 아니다. 그 몸부림 앞에얼마나 값진 지구의 아픔을 노래할 수 있을까 그리고다시사나운체온 앞에 떳떳할 수 있는 거울그 앞에 세워 놓을 거울일 수 있을까 -시집 『그리고 다시』의 「서시」에서, 1979년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오염되지 않으려는 그의 도덕적 순결과 인도주의, 곧 '지구의 아픔- 노래'하고, '떳떳할 수 있는 - 거울'이 되어 '어느 날 만만치 않게 - 무르익은 존재'로 서 있고 싶어함이 그것이다. 왜곡되고 굴절된 시대의 아픔을 때로는 술로, 때로는 조용한 내출혈로 삭이면서 '순결'과 '저항'의 길을 지성적 서정으로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다 미완된 숙제를 남긴 채 우리 곁을 떠난 시대의 아웃사이더, 그러면서도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고 본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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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정
  • 2013.01.16 23:02

16. 고은(高銀) 편 - 한 줄의 시가 곧 시대가 되는 노벨상 후보

고은(1933-)은 군산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였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여 마을 사람들이 좌우로 갈리면서 보복 학살을 일삼는 와중에 4학년을 마치고 중퇴하게 된다. 그후 입산, 효봉 스님의 상좌가 되어 11년간 승려생활을 하다 1958년 조지훈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1970년 전태일 노동자의 분신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게 된다.임이여, 나는 서방정토에 가지 않으렵니다죽어서 죽어도 이 나라에 한 점으로 있으렵니다죽어서 몸이야 흙이 되건만내 넋은 흉흉한 귀신이 되어서 이 나라 이 강산에 있으렵니다그동안 살아오면서 집 없이 떠돌기도 했습니다만죽어서는 이 나라가 온통 집입니다영산강 기슭에도 떠돌고갈 수 없던 대동강 모란봉 위에도 떠돌면서 대동강깊은 밤 술이 되어우리 억압자의 배 안에 들어가렵니다. -「임종」에서"출가하여 방랑생활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름답지만 현실에 대한 무책임이 아닌가? 자기 한 사람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중생의 괴로움과는 함께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군중과 함께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모습이야말로 성스러운 것이 아닐까"라고 자문하며, "아무리 세상이 허무하고 그림자이고 잠시 쉬어가는 집이라 할지라도 여기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중생을 위하여 뭔가를 해야 할 게 아닌가. 법도 법이지만 밥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최근 조국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단언한다.시인은, 모든 중생의 괴로움이 구제될 때까지는 결코 성불할 수 없음을 깨달으면서 몸소 지옥에 떨어졌다는 지장보살에 자기 자신을 비유하고 있는 듯하다. "임이여! 나는 서방정토에 가지 않으렵니다. '죽어도 이 나라에 한 점 흙'이 되렵니다."가 그것이다. 외세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조국현실과 그에 기생해온 수구적 기득권자들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된 그의 시는 '물 얼고 모진 바람 불어도/ 함께 얼음 밑의 물이 되고/ 함께 태백산맥 바람의 아픔으로 바람소리가 되렵니다.'로 이어지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한 몸 바치고자 하는 그의 순교 정신이 뜨겁다.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온 몸으로 가자.허공을 뚫고온 몸으로 가자.가서는 돌아오지 말자.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화살」전문,『새벽길』 창작과비평사 19781970년대, 암담한 그 시절에 우리 모두가 독재 정권을 향해 '화살'이 되어 날아가자'고,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고 외친다. 죽음을 각오한 결사 항전이다. 이로써 그는 당시 허무적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보수적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안고 있던 매너리즘적 도그마로부터 벗어나 소위 실천적 해방시학의 새 장을 열어주게 된다.뿐만 아니다. '시로 쓴 한국사 인물 대사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만인보』를 통해 그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민중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다양한 모습을 폭넓게 형상화한 세계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역작이요 한국현대 한국 민중사의 자랑스런 얼굴이 아닐 수 없다. '시(詩) 한 줄이 혁명이 되고', '시 한 줄이 곧, 시대가 되는 시'를 찾아 헤매면서도 최근에는『겨레말 큰사전』남북 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직도 맡아 "내 운명을 여기 다 바쳐야겠다."며 민족혼을 불태우고 있는 또다시 뜨거운 시인. 그리하여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고 있는 우리의 유일한 민중시인이다./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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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09 23:02

15. 최진성(崔辰聖)편 - 초현실적 영원 추구하던 순정의 시인

풀잎도 숨을 죽인 듯따뜻한 햇빛이 꽃밭을 굽어보던 한 낮光이는 왜 잠자리를 잡았을까그리고 또 놓아주었을까.채 말도 못한 두 살짜리가꽃가지에 앉아 있는 잠자리를 잡았다가 놓아준다.아직 둔한 손가락을 살그머니 내밀면잠자리는 날아갔다가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다.몇 번인가 되풀이하다가점점 가까이 날다가힘을 알아보다가마음을 놓았는지날지 않고 손가락을 흘겨보면서뱅뱅 제자리를 돈다.잡힐 듯 말 듯제법 光이를 놀린다. 그러다가 잡히고 만다.정말 신비가 흐른다.光이와 잠자리잠자리와 光이문득조공(祖公)의 고사(故事)가 말이다.......눈 앞 꿈이 다 이러한가.-「光이와 잠자리」 전문 장자(莊子)의 제물편에 나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연상케 한다.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다가 깨어 보니,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되었다는 것이다.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도대체 장자가 나비이고, 나비가 곧 장자인지 알 수 없는 물아일체의 경지, 아니 우주의 절대경지에서 보면, 장자도 나비도, 꿈도 현실도 구별이 없는 태허(太虛)의 세계런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보이는 것은 만물의 변화에 불과할 뿐이다. 그의 시는 『光이와 잠자리』에서처럼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는 어린 아이와 나비의 이야기, 곧 그 어떤 두려움과 경계심도 없는 선계(仙界)의 한 풍경이 그려지면서 현실과는 좀 거리가 있는 듯한 선취(仙趣)의 세계를 보이고 있다. '최진성 시인은 옛 선비의 먹 맛을 아는 시인'이라는 이동주의 말마따나 그는 평생을 평교사로 떠돌면서 오로지 학생들을 가르치고 후배 문인들을 이끌어 주면서 틈이 나면 바둑과 술을 즐기고, 산에 오르기를 좋아한 동양적 선비풍의 시인이었다. 『방장부方丈賦』 란 시집 후기에서 '자연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구도자처럼 환상어린 나의 체험은 마침내 시를 쓰고자 산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산에 살고 싶어 시를 썼는지도 모르겠다.'할 정도로 현실에서 흔들리고 상처받은 본래적 자아의 심혼, 곧 시도(詩道)를 산에서 되찾고 싶어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마을과 산과의 거리만큼이나 항상 무언가 그립고 아쉽고 서러운 데가 있는 순정의 서정이 그의 시의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전북 장수읍 개정리에서 출생한 최진성 시인(1928-2003)은 1953년 『신조』란 시조집에 「풍년」을 발표하여 데뷔하면서 전주여고와 남원농고 등에서 국어과 교사로 근무하였다. 특히 한국문인협회 전북지부장을 맡아 『전북문단』 창간호를 ('87,12)를 발행하면서 지역 문인들의 양성과 이 고장 문학의 활성화에 남다른 애정과 적극성을 보였다. 순수한 자연 관조 정신을 바탕으로 무위(無爲)의 노장사상과 불교의 연기에 인생의 본질을 교직하였으며, 초현실적인 영원주의를 추구하면서, 인생의 참모습을 부단히 탐구한 순정의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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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02 23:02

14.정열(鄭烈)편 - 소쩍새 울음 남기고 간 정읍 향토시인

한 여름 어머니가 밭을 매신다.살다 가신 3분의 2는 궂은비가 아니면 진눈깨비가 내리고 남은 3분의 1은 불붙는 땡볕 아래 잡풀을 매신다. 625 사변 때 큰 아들 잃고 얻은 열병으로 해마다 여름이면 왼통 무르신 입술오늘도 뜯어온 문풍지 조각으로연신 갈아 바르시며제초제도 모르는 성한 세월을땡볕 아래 앞잔등 밭을 매시다가 중개 넌출 만나 혼자 웃으신다. -「중개」에서정읍에서 태어난 정렬 시인(1932-1994)의 시의 출발은, 625가 남긴 처참한 유산을 고통스럽게 고발하고 증언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정렬에 의하면 '형님이 죽음을 맞게 된 여름, 그 여름만 되면 어머니는 열병을 앓으신다.' 고 했다. 그래서 그의 필명도 이름 석자(鄭夏烈) 중에서 여름 '夏'자를 빼서 '정열'이란 이름이 된 모양이다. "나의 시는 어머니의 피응어리를, 그 속 울음을 꽃으로 쪼아내는 아픔들이다.- 해서 쉰이 넘은 지금도 나는 시를 쓸 땐 어린애가 되어 꼭 어머니를 떠올리며 시를 쓴다. 가슴 속 피를 쥐어짜서......"(시집 『어느 흉년에』중에서) 그만큼 그의 시는 어머니의 가슴 속에서 영영 풀리지 못한 채 응어리진 어머니의 핏덩이요, 속울음이다. '잎새 하나 없는 / 즐비한 가로수를 보고 가면 / 625사변 때 / 제가 꼰 새끼줄에 제 손들 묶여 / 진눈개비 설치는 저문 들길을 / 묶인 손들고 邑內로 끌려가던 / 마을 사람들 생각이 난다. /- / 더러는 살아서 돌아오고 / 몇은 30년이 되어도 / 병신들 병신들 같이 / 제 고향도 모르는가 / 돌아오지 않는다.'(「진눈깨비」에서)며 전쟁통에 억울하게 끌려간 고향 사람들의 원혼과 아직도 남북대치로 맞서 있는 현실을 안타까와 한다. 달팽아 달팽아 눈 있는 달팽아 집도 발도 없는 너는 왜 풀 한포기 없는한길에 나와 짓밟히는 全身을 귀로 쭝깃거리며 피흘리는 全身을 눈으로 껌벅거리며世上事 끝까지 다 다아 보고 할 말은 끝내 이 땅에 묻어 두고살아남은 귀먹고 눈먼 것들을 위하여 성난 구두발에 스스로 짓이겨져 할 말로 할 말로 달게 죽은 달팽아. -「할말」에서구둣발에 짓밟혀 '할 말은 끝내 이 땅에 묻어 둔 채 죽어 가는 달팽이' 이는 열강들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꼭두각시처럼 희생된 우리들의 모습이다. 영문도 모른 채, 서로가 서로를 원수처럼 죽일 뿐, 진실은 끝내 점령군과 위정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채 묻혀 있어야 하는 민족적 분노와 울분이 이 시에 담겨 있다. '6.25 난리 통에/ 3형제와 고숙을 다 잃고 / 집도 주소도 성명도 다 잃고 / 반쯤 실성하여 떠돌다가/ 번지 없는 바람받이 언덕에서 / 10年 세월 질갱이같이 살던' (「고모)에서) 고모의 처참한 삶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의 시는 온통 이처럼 625의 희생양들에게 바치는 헌시와 씻김굿으로 이어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대를 이은 속울음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고쳐질 기미가 없다. 전쟁의 상흔이 가시고 반백년이 흘렀건만 남북은 여전히 아군과 적군으로 '내일' 이 없는 '가도 가도 어둠뿐'이다. '살기서린 포승줄로 일어서서 / 첫새벽 / 맨 처음 오는 來日의 사지를 얽어 묶고/ 내년을 또 서서히 동여 맬' (「내년」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끝내, '할 말을 이 땅에 묻어두고' 떠나야만 했던 시인의 비통한 심사가 아직도 절절하다./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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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26 23:02

13. 장순하(張諄河)편 - 현대 시조의 영역 새롭게 개척한 선구자

눈보라 비껴 나는 ─ 全 ─ 群 ─ 街 ─ 道 ─퍼뜩 차창(車窓)으로 스쳐 가는 인정(人情)아!외딴집 섬돌에 놓인 하 나 둘 세 켤 레 -「고무신」 전문, 1966년시각적 효과와 입체감을 회화적으로 시도한 새로운 형태의 구별배행 시조이다. 특히 진행감, 속도감, 직선감을 주기 위한 초장의 '── 全 ── 群 ── 街 ── 道 ──'라는 시각적인 효과와 종장에서 외딴 집 사각형의 섬돌에 놓인 아버지와 아이 그리고 어머니의 세 신발을 글자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시골 생활의 단란한 정경을 따뜻하게 형상화한 파격적인 시조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종래 시조의 형식과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 평면적 묘사나 감상적 서정을 배격하면서 제재나 대상에 대한 인식의 깊이, 표현 기법 등 가히 시조문학사에 일대 혁신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사설시조를 현대화 하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겨울 저녁 궂은비가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비는 중학 모자 챙만한 처마조차 인색한 거리에다 나를 버려둔 채 행인들의 목을 외투 깃에 눌러 박아 하나 둘씩 등 밀어 골목 안에 몰아 놓곤 어둠으로 봉해 버렸다. 비는 핏발 선 눈 을 하고 날뛰는 자동차 궁둥이에 불침을 놓고, 불빛 새는 창문을 차례로 닫아 걸고, 가로수 손에 살아남은 부채 들려 감기약이나 다리라 했다. 이윽고 한숨 돌린 비는 비로소 날 돌아봤다. 비는 한참 나를 우체통 곁에 세워놓고먼 숲 속에서 외톨밤을 줍게 하다가, 굽이쳐 흐르는 옛 성을 돌게 하다가, 그 성터의 여울목 에 날 불러 세우더니, 흙 속에 반만 묻힌 천 조각을 줍게 하고, 그리고 들여다보게 했다. 그건 참 오랜만에 찾은 나의 명찰이었다. -「 고속도로」, 1980년실험적인 시도가 엿보인, 중장이 길어진, 사설시조이다. 초장·종장은 각각 두 구절을 기본구조로 갖추고 있으나, 중장만은 변형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겨울 저녁 어느 처마 밑에서 비를 개면서 일상에 쫓겨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조용하게 뒤돌아보는 삶의 관조와 성찰의 심리 상태를 서사적 서정으로 충실하게 표현하는 새로운 시조이다. 끝물 고추 붉히느라 / 수선피던 가을 해가/ 어둠 속 둥지에 들어 / 알을 품고 졸을 제면농가의 창틀에서도/ 하나 둘씩 등불진다. -「해는 져 둥지에 들고」에서, 1997년배경이 한낮 - 석양 - 저녁으로 바뀌어 가면서 그것들이 서로 하나가 되어 화목한 세계, 곧 '햇살'이 '붉은 고추'가 되고 그것이 다시 어둠 속 둥지 속에 들어 '알을 품는 어미 새'가 되기도 하는 자연친화적 초월세계를 보이고 있다. 전북 정읍 출신으로 1948년 세종 중등 국어 교사 양성소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가람 선생을 만나 시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57년 '제1회 개천절 기념 전국백일장 시조부 예선'에서 장원, 그의 작품은 전통 시조의 작품을 탈피, 새로운 리듬과 현실 의식을 작품에 투영함으로써 현대시조의 형식과 내용면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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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19 23:02

12. 이기반(李基班)편 - 사랑을 기도하는 순백의 박애주의자

가을은소리가 난다.갈잎 서걱이는바람 소리짙은옥색 비단 자락에은하수 흐르는 소리[...]내 가슴에 영롱한 점 하나 찍어 놓고팔랑이는 옷자락옥양목 스치는 소리가을은 떠나면서도소리가 난다. -「가을 소리」일부, 1977년퍽 감각적이다. 스산한 가을의 정념을 청각적 이미지로 감지하고 있다. '갈잎에 서걱이는 소리', '옥색 비단 자락에 흔하수 흐르는 소리', '바람결에 팔랑이며 옥양목 스치는 소리'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서늘한 하강(下降)의 이미지들로서 그것들이 '내 가슴에/ 점 하나 찍어 놓고/ 돌아서'서 가을 소리로 떠나가고 있다니..., 맑고 투명한 가을 하늘처럼 청량한 가을날의 심상이 아닐 수 없다. 꺾고 싶은 꽃이거들랑차라리 멀리서 보아라감미로운 미소가향기로 번지다가피보다 진한 사랑으로 피어나게 꽃을 바라보는 마음으로이웃을 보고 세상을 보아라이파리로 돋아나듯순수의 나비가 춤을 추다가장미 빛 사랑으로 영글어지게사랑하고 싶거들랑뜨거운 눈물부터 배워라영혼이 녹아 흐르는 그 자리에 가득 부어질-「십자가의 연가」에서, 1983년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삶의 철학과, 생활 자세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꽃을 꺾지 말고 그대로 두고 보라' 고 한다.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는 물리적 독점의 이기(利己)가 아니라, 상대의 존재 의의와 가치를 그대로 존중하면서 그 향기를 이웃과 함께 그대로 공유하고자 하는 평화공존과 박애의 정신을 엿보게 한다. 2연에선, 꽃과 나비가 공존공생하며 아름다운 삶을 서로 영위하듯, 이웃과 이웃, 세상과 세상의 관계 또한 서로 돕고 돕는 상생과 화해의 세계, 그런가 하면 '사랑=눈물'이라고 하는 순수와 자기 헌신을 통해 보다 깊은 사랑과 구원을 노래한 3연, 그리고 자신을 태워 이웃을 밝히는 촛불의 순교자적 희생정신들이 그의 삶 속에서 아름답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십자가의 연가」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모질도록 짓밟히는 아픔에못 견디는 슬픔일랑모두 삼켜 버리고 어둔 밤 별빛 밝히는 한 포기 들풀로 거기 서 있거라- 「한 포기 들풀로」에서, 1987년짓밟히고 '짓밟히는 아픔'과 '슬픔'도 '모두 삼키고' 굳건히 일어선 '한 포기 들풀'이기를 소망한다. 이처럼 고난 속에서도 '일어서고', '어두운 밤'에도 맑은 영혼의 기도로써 어둠을 미학으로 승화시켜 가는 모습에서, 일찍이 '시를 종교로, 시작을 신앙으로 여기며' 일생을 구도자적인 모습으로 일관되게 살아온 시인의 한 생을 본다./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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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12 23:02

11. 최승범 (崔勝範)편 - 선비풍의 정갈한 서정 미학

비가 나린다비가 온다비가 또 비가사뭇 쏟힌다잣게 친 피아노의 音階말발굽이튄다뚝 덜컥멈춘 구름 새로트인 하늘내 가슴 -「소낙비」전문, 1958년시행이 간결하고 탄력적이다. 정형 시조의 전통적 구속성에서 벗어나 연과 행의 자유로운 배치를 통하여 시조에서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 여름 거세게 내리치는 빗방울 속에서 '빠른 템포의 피아노 건반 소리'를 연상한다거나, 튕겨 오른 빗방울의 형상을 마치 '말발굽이 튄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그의 초기 시는 감각적 이미지즘을 지향하고 있다. 이우는 국화 향기 출렁이는 뜨락에 입동 철 심는 구근 숨소리도 죽이고 지붕을 넘어다보는 허탈한 은행나무해질녘 드는 바람 갈잎만 서걱이고 서릿병아리도 으시시 세운 깃털엊그제 웅성이던 가을 이내 자릴 뜨는구나. -「정원소묘」전문, 1968년늦가을 스산한 정원의 풍경이 선연(鮮姸)하다. 이우는 '국화 '와 잎을 떨군 '은행나무' 그리고 으스스 깃털 세운 '서리병아리'와 서걱이는 '갈잎' 등의 병치 효과가 늦가을 황량한 뜨락에 질감을 더한다. 시인의 주요 관심은 한국적 선비 정신과 멋 그리고 품격이다. 그러한 관심은 우리의 소리, 빛깔 그리고 고유 음식과 풍물에 이르기까지 간결한 문장과 운치 있는 문체로 우리 곁에서 점차 사라져 가는 민족 고유정서와 풍경 복원으로 이어지게 된다. 가는 대발마다/ 새벽빛이 트여들고/ 옛 어른 / 정갈한 서안(書案)머리/ 먹 향기도 /번져온다.두루마리 한 자락을 / 자르르 펼쳐들면/ 그냥 그대로도/ 고운 선 무늬 이룬/ 우리네 /옛 어른들의 / 마음결이 읽힌다. -「태지苔紙」에서, 1980년태지(苔紙)는 한지의 일종으로, 이는 합죽선과 더불어 전주 특산품의 하나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 종이를 아껴 쓰시기도 했다. 이 종이를 대하면 그때엔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움이 돋는다."면서, 옛 어른들의 향기를 그대로 좇고 싶은 선비의 모습이 그려진다.늙은 감나무 쳐다보며지어미가 이르는 말 - 야속도 하지단 두 개 홍시라니뒷짐 진 지아빈 하늘 바라다- 나무 위해 뭘 했는데. - 「홍시」전문, 1998년부부가 감나무 아래서 단 한 번 서로 주고받는 말투이지만 그 속에서 옛 어른들의 삶의 모습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단 두 개 홍시라니' 하며 아쉬워하는 지어미와 느긋이 뒷짐진 채 '-나무 위해 / 뭘 했는데' 하며 오히려 그것마저도 감사해하는 지아비, 이들의 삶 속에서 우리는 자연의 이법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의 순박한 모습을 엿보게 된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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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0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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