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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이준관(李準冠)편】맑은 공기처럼 신선한 동심의 시인

▲ 이준관 시인
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둑길에는

 

새떼들도 밟지 않은 저녁놀이 아름답구나.

 

사과 속에서, 여름의 촌락들은,

 

마지막 햇볕을 즐기며 천천히 익어간다.

 

연한 풀만 가려 뜯어먹던 암소는 새끼를 뱄을까.

 

암소가 울자

 

온 들녘이 다정다감한 어머니로 그득하다.

 

(…)

 

게를 잡으러 갔던 아이들은

 

버얼겋게 발톱까지 게새끼가 되어 돌아오고,

 

목책이 낮아,

 

목책 밖으로 자꾸 뛰쳐나가기만 하던 하늘은

 

조금씩, 조금씩 어두워져 돌아온다.

 

- '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둑길에는'에서

 

'연한 풀', '암소', '새끼', '어머니', '아이들'…, 한결같이 부드럽고, 여리고, 모성적인 시어들이다. '새끼- 아이들', '암소- 어머니'가 그렇고 '들녘'의 이미지 또한 '자연지향의 삶'과 동맥(同脈)으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퍽이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는 어디에선가 이 시를 해설하는 과정에서 "나의 관심사는 여전히 인간, 자연, 사랑이다. 인간, 자연, 사랑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다. 인간의 비극은 모든 것을 분리하고 경계를 짓는 데 있다. 시는 인간이 만든 이 모든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나는 떡갈나무 잎에서 노루 발자국을 찾아본다.

 

그러나 벌써 노루는 더 깊은 골짜기를 찾아

 

겨울에도 얼지 않는 파릇한 산울림이 떠내려 오는

 

골짜기를 찾아 떠나갔다.

 

(…)

 

나는 떡갈나무에게 외롭다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떡갈나무는 슬픔으로 부은 내 발등에

 

잎을 떨군다. 내 마지막 손이야. 뺨에 대 봐

 

조금 따뜻해 질거야, 잎을 떨군다.

 

- '가을 떡갈나무숲'에서, 1991

 

그가 찾아가 안착한 곳은 '내 발등에/ 잎을 떨군' 따뜻한 자연의 품이다. 삶의 터전인 자연을 도구적 기능으로 전락시킨 각박한 현실 앞에 맑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애써 찾아 안착한 유토피아는 사람들이 발자국을 찾기 힘든 '깊은 산 속에 숨어 있음'이 유감이다. 이는 세상과의 단절해소가 근본적으로 치유되지 못한 일시적 도피 혹은 외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터전을 서울로 옮기고부터 그의 작품세계는, 마을과 골목으로 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내려와 있다. 외진 산 속이 아니라 이젠 도심의 아파트 속에서도 '수돗물을 틀면 / 쏴아 불빛이 쏟아진다.//부엌의 불빛 아래 엎드려/ 아이는 오늘의 숙제를 끝내고/ 때로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의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을 꺼지지 않게'.('부엌의 불빛')에서처럼 그의 상상은 보다 현실적 공간으로 변모하여 존재와 사물에 대한 가없는 사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전히 아름다운 동심을 잃지 않으려는 '사무사(思無邪)'의 세계를 지향하면서 이러한 동심으로 혼탁한 세상에 신선한 공기와 같은 '신자연의 시'를 선사하고 싶어한다. 이준관 시인은 전북 정읍 출신으로 전주교대와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어 서울에서 중등 교사와 한국동시문학회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시는 신비 자연으로의 순례를 거쳐 원시적 상상력과 생명감으로 도시문명에 지친 현대인들을 친근하고 사실적인 구어체 화법으로 감싸면서, 이성만이 우리의 답이 아니라, 자연의 신비 속에 생의 원리와 아름다운 꿈이 있음을 조용히 일깨워 주고 있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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