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바라보기' 통한 작품 실험 / 동양화·사진에 소리까지 접목해
미술가 유기종(45)씨와의 첫 만남은 역설적이었다. 날렵한 몸과 얼굴.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겉모습. 이와는 대조적으로 행동과 말은 느렸다.
군산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사진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그의 작품세계도 그를 빼닮았다. 역동성 속에 숨어 있는 느림의 미학이 있다. 그의 작업은 돌이나 나무 등을 두드려 자연의 음색을 만들어 내는 것과 비슷하다. 자연에서 나오는 울림은 역동적이다. 하지만 자연을 두드리기까지의 과정 속에는 그가 세상을 천천히 바라보고자 하는 생각이 담겨 있다.
그가 자연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어렸을 적 겪었던 '원형체험'과 맞닿아 있다. 유년시절 시골에서 생활했던 그는 밭과 논을 걸으며 사색을 즐겼다. 자신을 발효작가, 몽상가라고 소개한 그는 이때부터 생각을 많이 하는 습관이 생겼단다. 그는 이런 '바라보기'를 통해 끝없이 새로운 조형언어를 창출한다.
"나도 꿈을 꾸듯이 자연도 꿈을 꾼다. 모든 생명체는 고리와 고리로 이어져 있고 내가 바라본 세상도 그렇다."
그는 첫 번째 개인전 '이중의 꿈'에서 비록 거칠지만 자신의 작업세계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꽃, 나무 등 자연의 이미지 일부분을 확대하고 재조립해 조형적인 실험을 감행했다. 그가 이미지를 해체하고 다시 이어 붙이는 행위를 반복한 것은 자연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관찰의 결과다. 사진평론가 진동선씨는 '이중의 꿈' 에 대해 "인간이 꾸는 꿈, 자연이 꾸는 꿈, 작은 씨앗 같은 꿈을 통해서 그는 세상 천천히 바라보기를 시도하고 있다"면서 "그는 암실이라는 또 다른 재현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꿈을 꾼다"라고 평했다.
그는 두 번째 개인전 '꿈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을 통해 동양화와 사진을 접목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관객들에게 조금 더 친절한 작업을 하고 싶었다"고 말한 그의 말처럼 전작에서 보여준 다소 난해한 해체나 재조립은 없다. 대신 인화지에 위에 동양화적인 붓 터치를 가미해 자연의 울림을 담았다.
전시를 연 뒤 주변의 반응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그는 두 번째 개인전 후 전시제의, 인터뷰 요청 등의 반응이 없자 한동안 슬럼프를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택한 방식은 여전히 느리게 걷기였다. 그는 "당시 어두운 터널 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터널 끝에 있는 빛을 향해 가는 길이 멀게만 보였지만 '터널 밖 세상은 어떨까'라는 호기심에 걷고 또 걸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빛을 찾아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는 마침내 새로운 조형적 실험을 통해 돌파구를 찾아냈다. 세 번째 전시 '보여지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소리와 사진을 결합한 영상설치 작품을 선보이면서다. 차분하게 재현된 자연과 역동적인 소리의 조합으로 이전까지 없었던 공감각적인 느낌을 자아낸 것.
새로운 조형언어에 대한 그의 열망은 집요했다. 네 번째 개인전 '존재의 무게'에서 또 다른 실험에 나섰다. 그는 한 컷의 이미지를 얻기 위해 하늘에 풀, 나뭇가지, 광목을 던지는 행위를 수천 번 반복했다. 그는 "이전 작업은 결과를 중심으로 진행했지만 이번 작업은 이미지를 얻는 과정에 적극 개입했다. 하지만 이런 행위도 자연에 대해 끝없는 관찰을 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말씀 언' 프로젝트를 통해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조형언어를 창조하는 데 집중했던 태도에서 벗어나 식당, 목욕탕, 이발소 등 공간에서 지역민과 소통하며 그들의 일상을 기록했다. 그는 "예술의 근원은 멀리 있지 않고 항상 가까이 있다. 예술가가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공유하는 것"이라며 작업의 배경을 설명했다.
달콤한 '외도'를 마친 덕분일까. 그는 씨앗의 발아 과정을 삶의 여정에 비유한 'Seed-점의 기록'을 내놓았다. 이전까지 실재하는 대상을 촬영해 왔던 그는 이 작업에서 대상을 지웠다. 씨앗의 실제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지를 이용해 개화부터 결실까지 과정을 만들어냈다. 씨앗-싹-꽃-결실까지 모든 순간순간이 하나의 점이라고 보고 이 점들의 연결 과정을 삶의 여정과 연결했다.
그의 조형적 실험을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미술의 3요소는 점, 선, 면으로 현재까지 조형언어로 시도한 것은 점과 선으로 된 작업밖에 없다"며 "내가 생각하는 면작업은 입체와 평면이 결합해 또 다른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작업들은 상호보완적이어서 평생 연구하고 작업해도 다 알기에는 부족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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