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된 신분상승 소원 성취 노래
‘삼국유사’ 무왕조에는 향가 서동요(薯童謠)를 창작하게 된 배경설화와 함께 그 작품이 오롯이 전해오고 있다.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인데 그의 어머니는 과부로 서울 남지(南池)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연못의 용과 관계(池龍交通)하여 아들을 낳았다. 어릴 때는 서동이라 불렀는데 그릇의 크기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器量難測)로 뛰어났다. 항상 마(薯)를 캐어서 팔아가지고 어렵게 살았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마동’, 혹은 ‘서동’(薯童)이라고 하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빼어나게 아름답다(美艶無雙)는 말을 듣고 서울로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면서 친하게 지내고 자신을 따르게 한 후에 서동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한 동요는 다음과 같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얼려(嫁)두고
마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신라로 건너간 마동은 자신이 지은 참요(讖謠) ‘서동요’를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는데, ‘선화공주가 밤마다 마동과 놀아난다’는 이 노래가사는 순식간에 온 나라에 퍼졌다. 결국 선화공주는 유배형이 내려지게 되었고, 유배 도중에 나타난 마동과 눈이 맞아(遇爾信悅) 익산 금마로 가서 왕이 된 무왕과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미륵산 사자사(師子寺)에 불공을 드리러 가던 어느 날, 길가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선화공주가 이는 필시 불사(佛事)를 일으키라는 부처의 뜻이라고 무왕에게 말하고 지명(知命)법사의 신력(神力)을 빌어 하루 만에 연못을 메우고 그 위에 미륵사를 창건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선화공주와 무왕의 낭만적인 사랑이야기에 묻어 고려조까지 이어졌고, 끝내는 ‘삼국유사’에 실려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삼국유사’에 전해오는 향가 24수 모두가 월명사나 충담사, 영재 같은 신라의 승려나 신충과 같은 관료, 또는 어떤 노인 등 그 배경설화와 더불어 작위(作爲)적인 인물로 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유일하게 서동요의 작자만은 백제 무왕이라는 역사적 인물로 전해진다는 사실이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보 온달이 산 속에서 홀어머니와 외로이 살다가 선녀 같은 고구려의 평강공주와 혼인하여 대장군이 된 역사적인 사랑이야기의 구조와도 유사한 형태다. 이는 평민도 왕족과 혼인할 수 있다는 본디 인간에게 내재된 신분상승욕구의 잠재소원심리가 성취되어 나타난 결과에 다름 아니다.
서동요와 그 배경설화도 백제와 신라 양국의 왕들이 세력이 막강한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자국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나제동맹(羅濟同盟)의 일환으로 맺게 된 정략적 혼인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동맹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두 나라가 위협을 받자, 백제 24대 동성왕이 AD.493년 신라 소지왕에게 사신을 보내 왕족인 비지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 것을 시작으로 출발되었다. 하지만 신라 진흥왕 때 백제 26대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면서 양국간의 화해와 협력관계가 결렬된 정책이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무왕조에서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왕이라 했으나 백제에는 그런 왕이 없으므로 이는 잘못이다’라는 주(註)를 달았다. 그러므로 ‘삼국유사’는 고본이라는 역사서를 바탕으로 하여 쓴 것으로 무강왕이 아니라 무왕이라고 했다. 그리고 ‘선화(善花)를 혹은 선화(善化)’라고도 한다는 주(註)를 달거나, 미륵사를 국사에서는 왕흥사라 했고, 삼국사에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과부의 아들이라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라고 하는 등 네 번씩이나 주를 단 것을 보면 일연(一然)은 역사에 대해서도 해박한 승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측면에서 무왕은 나제동맹이 이어졌던 25대 무녕왕이라는 사학자들의 견해도 있었다. 강(康)과 녕(寧)은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도 또한 역사적인 사실이나 연대상으로 보아도 무왕과 일치하지 않는다. 무녕왕은 25대왕이요, 무왕은 30대왕이며 100년이란 시간적 간극도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무왕조의 역사적 기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삼국유사’는 ‘고본’이라는 사서(史書)에 의지해서 썼다는 주(註)를 보아도 다른 어떤 역사서보다 신뢰도가 높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래도 아니라면 유전해 오는 유물, 유적이 남긴 자취를 더듬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수 십 년간 이어져온 미륵사지 발굴과 복원과정에서 2009년에는 세상이 놀랄만한 역사적 유물이 나왔다. 전북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 미륵산 남쪽 기슭에 있는 국보 11호인 미륵사 서탑 기단층 아래에서 ‘금제사리봉안기’ 1장(전면 음각 금석문 99자, 후면 94자 총 193자) 이 1370년이란 아주 까마득한 천사백년 꿈을 깨고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 봉안기엔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닌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명기돼 있었고, 미륵사를 창건한 후 무왕 40년(서기 639년)에 우리나라 최고(最古) 최대의 서탑을 세웠다는 ‘기해년 정월 29일’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국문학계나 역사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하지만 고조선의 단군설화까지 기록되어 반만년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엄연한 조선의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허황된 것이었다고 단언키는 더욱 어려운 문제이다. 더구나 풍요, 헌화가, 도솔가와 더불어 원시고시가 4구체 향가인 서동요의 정체성(正體性)을 흔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때마침 사학자인 이도학과 노중국 교수는 선화공주는 31대 의자왕의 생모이며, 30대 무왕의 왕후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제기하고 나섰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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