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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마이산을 노래한 이산구곡가(하) - 마이산 경치 묘사속 망국 恨·구국 의지 노래

서곡 1수·본곡 9수로 10연 형식 연장체 구조 특이

 

8곡은 옥 같은 물이 소(沼)를 이루어 마치 거문고 소리처럼 아름답게 흐른다 하여 금탄(琴灘)이라 한 것을 노래한 것이다. 옥으로 만든 진(軫)과 금박으로 박은 휘(徽)가 좋은 거문고로 몇 곡을 부르면서 진락(眞樂)에 젖어듦을 읊고 있다. ‘고조(古調)를 알 이 없으니 혼자 즐겨 하노라’는 조선조 사대부들이 흔히 즐겨 쓰는 일종의 관형구이다.

 

이는 춘추전국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가 자신을 알아주었던 유일한 벗인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이를 한탄하고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고사를 용사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정조는 고산 윤선도의 산중신곡 고금영(古琴詠)에서도 ‘이 곡조 알 이 없으니 집겨 놓아 두어라’로 이어졌고, 전술했던 현종대 장복겸의 <고산별곡> 10곡 중 9곡 ‘종기(鍾期)를 못 만나니 이 곡조 게 뉘 알리’로 연결되었다.

 

<이산구곡가> 는 이이의 <고산구곡가> 나 주희의 <무이구곡가> 와 구성이나 그 내면에 흐르는 은자(隱者)들의 정조가 동질적이다. 이산천석( 山泉石)구경의 서곡 1수, 본곡 풍혈냉천, 수선루, 광대봉과 용연, 용암동천과 와룡선생, 이산묘, 나옹암의 나옹선사, 금당사, 봉두굴과 방사원, 마이산 승경 등 9수로 모두 10연의 형식을 취하였다. ‘무이구곡가’는 7언 절구의 형식이지만 ‘고산구곡가’는 연시조이며, ‘이산구곡가’는 전형적인 조선조 은일가사의 형식에 연장체의 구조가 특이하다.

 

<서곡> 어와 우리 벗님네야 젊었을 제 구경가세

 

봉래방장(蓬萊方丈) 구경 말고 이산천석 찾아가자

 

무이구곡(武夷九曲) 귀로 듣고 고산구곡(高山九曲) 가서보며

 

파곳구곡(巴串九曲) 역람(歷覽)하니 이문목도(耳聞目睹) 하던 중에

 

이런 명승도 있으랴 이 내잔 정지하고 구곡가를 들어 보소

 

서곡은 작자가 유자(儒者)로서 주자의 무이구곡과 이이의 고산구곡을 흠모하고 또 그 곳에서 노래한 작품들이 전범이 되고 있다. 그러면서 이곳 진안 마이산의 9곡이 무이구곡이나 고산구곡에 결코 뒤지지 않는 명승지임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4곡은 삼국지의 제갈량이 용바위에 새겨진 용마그림을 알아낸 뒤, 팔진도의 전법을 벌여 나라를 부흥시킨 역사적 사건을 마이산 이산정사에서 창의한 의병장 이석용 장군의 거병에 용사하여 상징적으로 노래하였다.

 

1907년 8월 이산묘에서 면암이 의병봉기를 선창함에 따라 이 고장 의병장 이석용과 전기홍을 중심으로 300여명의 우국동지들이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동맹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이산묘 앞 바위 ‘용암’에 제단을 설치하고 소를 잡아 천지신명께 제를 올린 뒤 거병하여 진안읍으로 진격한 것이 호남 의병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5곡은 이산정사를 노래하였는데 이 이산묘는 친친(親親), 현현(賢賢)의 양계(兩契)가 ‘황단치성(黃壇致誠))’의 정신을 이어가는 중심이 되는 곳으로 고종이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덕수궁주인(非禮勿動 德壽宮主人)’라 쓴 어필을 하사한 곳이기도 하다. 이산묘의 오른쪽 바위에 ‘주필대’라 음각한 글씨가 있고, 바로 옆에는 허준이 쓴 ‘마이동천(馬耳洞天)’의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주필대는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년) 7월에 왜장 아지발도를 남원운봉 황산에서 물리친 뒤, 꿈속에서 하늘로부터 금척(金尺)을 받은 산이 이 마이산과 흡사했으므로 이곳을 찾아 머문 곳이라 전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읊었다던 <속금산(束金山)> 과 <몽금척요(夢金尺謠)> 가「태조실기」에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선 개국의 꿈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일 뿐만 아니라 조선이 왜놈에게 짓밟힐 수 없는 나라임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한 민족혼은 ‘연면양옹(淵勉兩翁) 애국사상 7분상(七分像)에 나타나니’에 그대로 드러난다.

 

연면양옹은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말하는데 백범 김구가 ‘영광사(永光祠)’라 휘호한 사당에 송병선과 최익현 등 조국광복을 위해 충절을 바친 27위를 배향하였고, 해공 신익희가 ‘영모사(永慕祠)’라 쓴 사당에는 전문부, 정희계, 남재, 하연 등 역대 청백리와 충신, 효자, 열사 등 32위를 모시고 있다. 또 이산묘 뒤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한광복기념비(大韓光復記念碑)’라 친필 휘호한 비각이 있는데, 이곳엔 이렇듯 조선의 건국이나 광복과 관련된 사적들이 모두 산재해 있다.

 

<9곡> 구곡은 어데 인고 마이산 기절형상(奇絶形狀)

 

금으로 묶으고 독으로 솟은 봉이

 

말귀 같고 동불(童佛)같이 중중(重重)이 나열하니

 

채필(彩筆)로 그려내도 형용치 못 하겠다

 

이 경치를 못 다보면 평생유한(平生遺恨) 되오리라

 

9곡은 마이산의 신기한 형상을 노래한 것으로 이 산은 금강산과 같이 4계절에 따라 그 이름이 다르다. 즉 봄철엔 주위 산들이 마치 바닷물과 같이 초록빛처럼 바람에 흔들리는데 마이산은 그 위에 돛대처럼 우뚝 솟았다 해서 ‘돛대봉’, 여름엔 잡목이 우거져서 마치 녹용뿔 같다 해서 ‘용각봉’, 가을엔 말귀와 흡사하여 ‘마이봉’, 겨울엔 하얀 눈 위에 먹물을 묻힌 붓처럼 생겼다하여 ‘문필봉’이라 일컫고 있다. 또 신라 때는 솟다가 ‘섰다’라는 뜻의 한자음을 딴 ‘서다산(西多山)’이라 했고, 고려 때는 ‘솟는다’는 뜻의 ‘용출산’ 혹은 ‘솟금산’이라 했는데 이 솟금산을 태조의 ‘몽금척’과 관련하여 금척(金尺)을 묶었다는 뜻으로 ‘속금산(束金山)’이라고도 하였다.

 

즉 ‘속금산’이란 태조 이성계의 꿈에 나라 다스림의 상징인 ‘금척’ 여러 개를 묶은 것을 하늘의 신선으로부터 받았다는 의미를 지니므로 조선개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명칭인 셈이다. 또 어떤 때는 말귀와 같이 신기한 형상을 띠기도 하지만, 아기부처와 같이 소담스럽게 보이기 때문에 ‘동불(童佛)같이’라고 표현되기도 했다. ‘마이산기절형상(馬耳山奇絶形狀)’은 무이구곡을 주자가 쓴 ‘욕식개중기절처(欲識箇中奇絶處)’라는 ‘무이구곡가’ 서곡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곳 지명을 말귀의 형상으로 신령스럽다는 뜻을 가진 ‘마령(馬靈)’이라 칭하고 있는 소이연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기에 「이산구곡가」의 낙구에서 이러한 성지(聖地)를 보지 못한다면 평생에 한이 될 것이라는 기행가사의 형식을 빌어 노래하고 있다.

 

4곡에서는 삼국지의 와룡선생 제갈량을 용사(用事)하여 진안지방에서 거병한 이석용 장군의 창의를 상징적으로 노래하였다. 이러한 정조는 5곡에서 충신열사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의 애국사상으로 이어지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이 머물렀다는 주필대의 유적, 조선 개국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몽금척과 관련이 있는 속금산 기암괴석의 절승을 노래한 9곡으로 귀결된다.

 

이이의 「고산구곡가」는 주자의 「무이구곡가」를 전고용사하고 있으나, 후산 이도복의 ‘이산구곡가’는 이들 작품의 구성형식을 빌면서도 서사와 9곡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전범에서 벗어나 마이산 승경의 묘사 속에 망국의 한과 구국의 의지를 구상화하고 있다는 특성이 있다. 또한 이 작품의 서곡은 무이구곡을 귀로 듣고 고산구곡을 가서 본다고 노래한 반면 이 셋의 구곡가 5곡에서는 모두 무이정사, 수변정사, 이산정사에서 성현의 심사에 젖거나 후진들의 강학(講學)에 힘써야함을 노래했다는 공통성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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