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의 이해와 작법 도표와 해설로 엮어
이 가운데 〈산수경〉은 일제의 산맥 지리서보다 앞선 것으로 우리나라 산줄기를 백두산을 시원으로 날과 씨로 구분하여 과학적으로 그려낸 지리서로도 유명하다. 시의 창작과 이해에 관한 이론서 〈시칙〉도 서구의 이론서에 못지않은 저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시칙〉은 〈여암유고〉 권 8에 전하는데 그의 나이 23세 때 고서에서 읽은 것과 스승으로부터 들은 바를 바탕으로 한시의 이해와 작법을 5개의 도표와 그에 관한 해설로 엮은 것으로 시 창작기법을 겸한 시론서이다.
시의 근본적 기본요소를 체와 의(意), 성(聲)의 세 골격으로 나누고, 성은 다시 가(歌), 사(辭), 행(行), 곡(曲), 음(吟), 탄(歎), 원(怨), 인(引), 요(謠) 등의 장르로 분류하여 대개 5언과 7언을 기본 음수율로 하고 있다. 그리고 궁상각치우의 5음은 황종(黃鐘), 대려(大呂), 태족(太簇), 내종(來種), 고세(姑洗), 중려(中呂), 임종(林鐘), 이칙(夷則), 남려(南呂), 무사(無射), 응종(應鐘) 등 12율과 밀접한 관계를 이룬다고 했다. 의는 주의(主意)와 운의(運意)의 둘로 나누고, 다시 주의는 송미(頌美), 기자(奇字), 우애(憂哀), 희락(喜樂)으로, 운의는 점배(占排), 취사(取捨), 활축(闊蹙), 구결(口訣)로 나누어서 시의 내면적 서정의 표현방식을 구체화했다. 말하자면 여암은 시창작의 원리와 방법론에서 사(事)와 물(物), 정(情)의 문제를 제기하여 이에 대한 시창작의 상관관계를 설명했고, 전체적인 시의 짜임도 기승전결의 일반적 구조로부터 기(起), 승(承), 전(轉), 식(息), 숙(宿), 결(結), 졸(卒)로 세분화하여 풀이했다는 특성을 지닌다.
이는 시가 본디 음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시에 있어 외형률의 음악성 외에 내면적 운율성을 강조한 것으로 시의(詩意)는 5성과 12율이 가지는 정취와 조화시키려했다는 점이 남다르다. 시어마다 성을 다시 5성(五聲)으로 배분해 보려는 시도한 것을 보면 당대로서는 전례가 없는 독창적인 시도였다고 할 수가 있고, 5음과 12율의 배합 속에 시에서의 음악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시에 있어서 시의 강령(綱領), 시의 재료, 시격(詩格), 시례(詩例)의 대강, 시작법총(詩作法叢), 시의 기품, 시의 대요, 시의 형체 등 8항목으로 분류하여 그러한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하여 시의 강령은 다시 체와 의, 성과 시격 48표현방법, 시례는 14표현기교의 예증, 시의 기품은 10가지, 시의 대요엔 생각에 사악함이 없어야 한다는 〈시경〉의 사무사(思無邪)의 정신을 시창작의 표준으로 삼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시의 형체는 8가지 격식의 작시법을 금기와 바람직한 방법으로 나누어서 설명했다.
그가 남긴 「여암유고」 권 1에는 시 62제하에 145수의 시가 남아 있는데, 그가 관직에 있을 때나 일상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시세계를 구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경준의 시세계는 대개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는데, 첫째, 그가 53세 때 장현현감으로 부임한 시절 백성들의 어려운 삶 속에서 우러난 민은시(民隱詩) 10장과, 둘째, 자연의 미물 - 개구리, 개똥벌레, 개미, 매미, 귀뚜라미, 거미, 파리, 모기 -까지 현미경적인 분석관찰을 통한 야충(野蟲)과 소충(小蟲)의 10장, 셋째, 전통적인 한시의 형식을 깨뜨리면서 실질을 추구한 고체시 65수로 대별할 수 있다.
박명희 교수는 ‘여암 신경준의 생애와 학문관’에서 이러한 신경준의 시세계의 성과를 신경준 개인의 사유와 학문적 지향 및 성과와 무관치 않다고 보고 이를 ‘박(博)’과 ‘실(實)’이라 했고, 특히 시를 통해 실질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 ‘무실(務實)’이었으므로 그의 시작태도를 무실적인 시작태도라 정의했다. 신경준은 관직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강계지〉,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등의 저서 외에 〈여암유고〉에 전해지는 ‘일본증운(日本證韻)’, ‘언서음해(諺書音解)’, ‘평측운호거’, ‘거제책(車制策)’, ‘수차도설(水車圖說)’, ‘논선거비어(論船車備禦)’, ‘의표도(儀表圖)’, ‘산수고(山水考)’, ‘도로고’, ‘사연고(四沿考)’, ‘가람(伽藍)고’ 등 실로 다양하고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잡학이라고 홀대했던 천관(天官), 직방(職方), 성률(聲律), 의복(醫卜)에 이르는 학문과 기벽한 서책 등 정통 사대부들이 기피했던 분야까지 통달했던 선비였기 때문에 그의 학문의 요체를 ‘박학(博學)’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박(博)’이라고 줄여서 말한 것 같다.
신경준의 한시는 일상생활에 밀착되어 있거나 사물에 대한 사실적 관찰을 바탕으로 고전적인 한시의 기존형식을 깨뜨리면서 실질을 추구했으므로 이러한 시문학적인 자세를 ‘무실(務實)’이라는데 이의를 달수가 없다. 홍양호가 쓴 서문을 보더라도 결국 신경준의 시칙은 전 시대인들의 시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구차히 기존의 일정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정통시의 율격을 자유자재로 깨뜨리면서 나름의 개성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고, 야충이나 소충에서처럼 하찮은 미물 가운데에서 문학적 의미를 캐낸 시인으로서의 여암의 남다른 시 철학을 엿볼 수가 있다.
호미를 들고 청산에 가서(提鋤去靑山)
맑은 물 논밭에 대고(白水稻田)
달 밝은 밤 호미 들고 돌아오니(提鋤歸月明)
앞마을엔 푸른 안개 끼었어라(前邨翠烟)
하얀 호미자루 겨우 세치(白木柄强三咫)
일년 삼백육십오일(一歲三百六十五日)
내 생명 너에게 맡겼네(我命托子)
- 호미를 들고(提鋤)-
시제는 ‘제서(提鋤)’ 즉 ‘호미를 들고’이다. 4구까지는 청산에 있는 밭에 나가 달이 동산에 떠오를 때까지 일하다가 푸른 안개가 내려깔리는 달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한가로운 농촌의 정경을 노래했고, 나머지 시구에서는 비록 작은 호미로라도 농사를 지어야만 우리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노동과 농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여암의 무실의 시세계를 그대로 대변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4언과 5언, 6언, 8언 등 정격의 형식을 깨뜨리는 변칙의 운율적 효과를 실험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신경준의 ‘잡언고시’ 중 10구의 ‘우양약(雨陽若)’이나 6구의 ‘앙양(仰陽)’ 등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여암 신경준은 전북이 낳은 실용성을 중시한 선비로 관직생활과 시문학을 통해 박학(博學)과 무실(務實)의 학문과 시세계를 구축하여 국가 사회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1934년 암담한 일제하에 국학운동을 벌였던 위당 정인보가 아니었다면 자칫 실학적인 여암의 훌륭한 박학과 무실의 족적이 사라질 뻔했다. 1939년 위당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여암전서〉가 활자본으로 간행하면서 정인보는 ‘여암이 만약 국정을 담당하는 중요한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나라가 일본에 망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일본을 능가했을 것’이라고 평한 것처럼 신경준의 다양한 저술활동은 우리나라를 위해 절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여암의 학문은 사승(師承)관계가 미미해 후대에 이어지질 못했고, 자신이 스스로 자득한 학문에 그쳤지만 기술과 실용을 중시한 실질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할 수 있다.
실로 신경준의 저술 가운데는 실용적인 학문과 과학기술은 어느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독자성을 구축한 업적들, 예컨대 천문관측기구를 비롯한 도로와 강하의 연구, 독창적인 조선의 지리의 정리, 수레와 선박, 화차 등의 기술적 탐구, 탁월한 언어학적 연구 등은 모두 우리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 했던 그의 실사구시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전근대적인 성리학의 학문과 문학정신에서 의고주의적인 사고나 몰개성적인 철학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실용적인 측면을 몸소 실천궁행했던 근대지향의식을 지향한 실험자요, 선각자였다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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