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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가람 이병기(李秉岐)의 현대시조와 국문학] 청정·고아한 서정, 전북이 낳은 영롱한 별

조선조 시조장르 현대시조로 계승 발전

가람 이병기(1891- 1968)는 전통적인 조선조의 시조장르를 현대시조로 계승 발전시킨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다. 가람은 변호사(이 채)의 장자로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익히다가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읽은 후, 신학문에 뜻을 두고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1913년 관립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시절인 1912년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고, 이듬해부터 전주 제2, 여산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며 국어국문학과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고 시조를 중심으로 우리 국문학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1921년에 권덕규, 임경재 등과 더불어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여 우리 어문연구에 심혈을 기울였고, 이듬해부터 동광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1926년 ‘시조회’를 발기하고 시조혁신을 제창하는 논문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 11. 28- 12. 13), 〈율격과 시조〉(동아일보 195811.28- 12.1), 〈시조원류론〉(新生 1929. 1-5), 〈시조는 唱이냐 作이냐〉(新民 1930. 1), 〈시조를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 1. 23- 2. 4), 〈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 11) 등 20 여 편을 발표하면서 시조의 본질적 연구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 가람 이병기는 시조의 명칭은 본디 시절을 노래한다는 ‘시절가’로서 ‘시절가조(時節歌調)’를 줄인 말인 ‘시조’에서 나왔으며, 신광수(숙종38년 1712년 -영조51년 1775년)의 〈석북집〉 관서악부 15장에 수록된 ‘일반적으로 시조는 장음과 단음을 늘어놓은 것으로 장안의 가객 이세춘으로부터 나왔다’라고 했던 가장 오래된 시조의 명칭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즉 시조는 당시에 유행했던 민요 창조(唱調)의 유행가였으며, 당대 유명한 대중가수였던 이세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시조는 민요에서 파생하여 시조장르가 나왔다는 향가연원설을 주장하였고, 처음으로 시조를 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 등 세 종류로 분류하여 시조의 장르와 형태연구에 심혈을 기울여서 우리 국문학을 정립한 국문학자로 양주동과 더불어 국문학의 태두로 불리고 있다.

 

1930년에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보성전문, 연희전문 강사를 겸하면서 1942년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국어사전 원고를 안고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출옥한 후 익산 여산으로 귀향했다가 광복을 맞아 상경한 이후 군정청 편수관을 지냈고, 1946년 서울대학교 교수와 여러 대학의 강사를 역임했다. 6.25동란 때인 1951년에는 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장을 역임하다가 1956년에 정년을 하고 1957년 학술원 추천위원,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다.

 

가람은 그의 〈국문학개론〉(1965년)에서 ‘시조는 가곡의 창조(唱調)로 민요에서 파생하여 향가와 병행하다가 고려 초에 향가가 소멸하면서 향가의 장점을 섭취하여 그 형태를 이루었다는 것’과 향가체인 백제의 〈정읍사〉가 시조의 원형이라고 처음으로 주장한 국문학자의 학술적 공과는 이후 학계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다음으로 현대시조는 첫째, 실감실정(實感實情)을 표현하자, 둘째, 취재의 범위를 확장하자, 셋째, 용어의 수삼(數三; 선택), 넷째, 격조의 변화, 다섯째, 연작(連作)을 쓰자, 여섯째, 쓰는 법, 읽는 법 등 6종의 혁신론을 주장하여 전통적인 옛 관점에서 벗어난 새로운 현대시조의 정체성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가사장르와 달리 지금까지도 현대시조시로서 향유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그러므로 현대시조는 정형시이면서 자유시이고 자유시이면서 정형시가 되어야 하며, 전통적인 시조와 다른 점이 정형이라는 틀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자유시가 되지 않는 점이 묘미라 했다. 그런 점에서 시조가 정형(定型)이 아니라 정형(整形)이라고 역설한 가람 이병기는 현대시조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좌표를 정립 제시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가람은 1939년부터 〈문장〉지에 김상옥, 이호우, 장응두, 조남령, 오신혜 등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여 시조중흥의 기틀을 마련하는 한편,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적인 것으로 보고 시조창으로부터 분리하여 시어의 조탁(彫琢)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며 시조혁신을 선도하였다. 1939년에는 이러한 정신에 입각하여 창작한 작품들을 엮어 〈가람 시조〉를 발간한 이후 〈국문학개론〉, 〈국문학전사〉, 〈가람문선〉 등 한국문학의 새 지평을 여는 역저를 출간하기도 했다.

 

가람의 대표적인 시조는 연시조로서 〈가람시조〉와 〈가람문선〉에 실려 전하는데 ‘별’, ‘난초’, ‘냉이꽃’, ‘송별’ 등이 유명하다. 그중 ‘별’의 연시조는 국정국어교과서에 실려져 소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곡으로도 작곡되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바람이 서슬도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별은 뉘별이며 내별 또한 어느게오

 

잠자코 호올로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별)-

 

한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별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새로 난 난 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든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중략)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淨)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받아 사느니라

 

-(난초)-

 

연시조 ‘별’은 가람의 고향땅 익산 여산에서 늑대 눈 마냥 시퍼렇게 쏟아져 내리는 별밤하늘을 머리에 이고 보면서 읊은 시조다. 저녁밥을 먹고 바람을 쐬러 뜰 앞에 나서니 산바람 싸늘하게 옷깃에 젖어드는 정경을 ‘바람이 서슬도 하여’라 그린 것을 보면 시상도 그러려니와 맑고 청정한 가람의 서정이 흠뻑 베어난다. 초저녁 초사흘 달이 서산을 넘어가고 별들만 총총히 깊어가는 밤에 별을 헤어보면서 저별은 누구의 별이며 내별 또한 어느 것이냐는 동심같은 청징한 시상에 멎으면 가람의 청초하고 담담하며 고아한 우아미가 온 몸으로 번져온다.

 

이러한 가람의 미학은 7연시조 ‘난초’에 수정처럼 알알이 맺혀 영롱한 빛을 더욱 발한다. 가람의 난은 술복, 글복, 제자복이라는 ‘삼복(三福)’에 버금가는 가람의 재산이며 제 2의 가람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 돋아난 난 잎을 거센 광풍이 꺾어버릴 듯 휘젓고 지나가는 순간 혹여 난 잎이 꺾이면 어찌할까 가슴 조아림은 가람만이 지니고 있는 천진성이다. 마치 어린 아이 손처럼 여린 난 잎이 바람에 흩날리다 꺾여버리는 아픔을 차마 눈뜨고 어찌 보아 넘길 수 있냐는 사려 깊은 통찰력과 완벽한 시상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티끌 한 점 없는 깨끗한 공기와 영양가 하나 없는 비나 이슬 같은 맑은 물을 머금고 태양을 향하지 않고 살아가는 청징무구한 난초처럼 오로지 책과 제자와 술만을 가까이 하며 국문학을 연구해온 가람은 그가 노래한 난초 7연시에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리고 전주 교동 한옥 마을에는 말년에 그가 기거했던 양사재(養士齋)가 있고, 다가공원엔 말년에 병고의 삶을 반추한 연시조 3수가 담긴 가람시비가 공자의 ‘천상탄(川上嘆)’을 되 뇌이듯 흘러가는 전주천을 굽어다 보고 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은 우리 전북이 낳은 영롱한 별로, 청정한 한 포기 난초로 길이 남아 우리 한국국문학의 지남(指南)이 되고도 남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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