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이복(전주 우아성당 주임신부)
“신부님! 제 병 좀 낫게 해 주세요.”
미사를 마치고 성당 마당에서 교우들을 배웅하고 있는데 한 할머님이 찾아와 애절하게 청하였다.
“어디가 아프신데요?”
“아이고, 안 아픈데가 없어요, 다리 어깨 허리.....젤로 기억력이 없어 못 살겠어요.”
“그래요! 000씨 연세가 어떻게 되셨는데요?”
“나이? 아직 팔십도 안되었어...”
순간 내 방정맞은 입술 사이로 내뱉지 말아야 할 말이 튀 쳐 나왔다.
“에이 000자매님 때가 됐구만...”
“예! 신부님! 제가 죽을 때가 다 됐다구요? 나보다 더 나이든 사람들이 얼마나 정정 한데요!”
아차!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아니 000씨! 돌아가실 때가 됐다는 말이 아니고요....” 하고 얼버무리면서도 이 기회에 꼭 해야할 말을 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000씨! 이젠 받아 들여야 할 때가 왔어요. 이렇게 저렇게 아픈 곳을 낫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젠 다리 아픈 것, 허리 아픈 것, 기억력 사라지는 것... 등등 다 받아들이고 살아야 해요.”
그러나 할머니는 쓸쓸히 등을 돌려 돌아 가셨다.
힘없이 돌아가시는 할머님의 뒷모습은 너무도 애처롭고 고독해 보였다.
“할머님! 힘내세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세요 그렇게 우리는 다시 태어난답니다. 나이를 먹는 다는 것... 참 행복한 일이잖아요? 그렇게 우리는 묶은 다리, 묶은 허리, 녹 슬은 머리 벗어 버리고 새로운 몸, 새로운 영혼, 새로운 ”나“ 로 다시 태어나잖아요? 아! 늙고 죽어 다시 태어난다는 것! 얼마나 황홀한 꿈 인가요!”
유난히도 무더웠던 지난 여름! 몇 십년 만에 처음이었다는 더위와 장마. 광란의 날들이 지나니 저토록 찬란한 황금빛 들녘이 넘실거린다.
세월이 간다는 것! 그래서 나이를 먹는 다는 것!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운 일인가!
그렇다! 때가 되면, 떠나야 할 때가 오면 진정 가장 소중한 것, 한평생 가꾸어온 한 가지 그것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버려야 한다.
그것 하나 얻기 위해 그 모진 생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나락 한 톨 거두려고 몸통 썩혀 새 순 되고, “모”가 되어 뿌리 내려 무성한 잎 강직한 줄기들 키워 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때가 되니 나락 되어 통통히 여물었으니 이제 그 싱싱했던 잎과 줄기는 버려야 한다.
나락은 영글어 고개를 숙이는데 아직도 파란 잎 과 긴 줄기를 고집할 수는 없지 않는가! 자신의 역이 끝나면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거늘!
때가 되면 기쁘게 갈 곳으로 가야 한다.
황홀한 가을 들녘!
이는 한 생 열심히 살다 때가 되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생명들이 발하는 광채들의 아름다움이다.
늙고 병들어 죽어 간다는 것.
참! 아름다운 일이다.
황혼녘에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노라면 충만함에 가슴이 벅 차 오른다.
/권이복(전주 우아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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