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부안기생 37세로 요절 / 아전들 구송 작품 58수 문집 펴내
매창(1573- 1610)은 선조대에 태어난 부안기생으로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에서 쌍벽을 이룰 만큼 시재가 출중한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호가 매창(梅窓)이며 본명은 향금(香今)인데 계유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계생, 계랑이라고도 했다. 아전 이양종의 딸로 거문고와 시문, 노래에 뛰어나 허균, 유희경, 이귀 등 당대 유명한 문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그들과도 매우 깊은 교분을 맺었다. 유희경(1545-1636)은 을사사화가 일어난 때에 강화에서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병자호란이 날 때까지 92세의 장수를 누린 당대 이름난 시객이었다.
그가 남긴 문집 <촌은집> 에는 ‘천얼(賤孼)’ 출신이라 명기되어 있는데, 불행히도 이는 평생 벼슬할 수 없는 문객의 일생을 운명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천얼이란 첩 소생인 서자도 아니고 비첩(婢妾)과의 사이에서 낳은 천한 얼자란 뜻으로 계급사회인 조선조에서 살아가기 어려운 계층이다. 그러한 유희경이 당대 이름 있는 사대부들과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조가 성리학을 기본으로 한 문치주의의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또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사회적인 대변혁의 시기를 거치면서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촌은집>
유희경은 1591년 46세 때 남도를 방랑 유람하다가 부안에서 처음으로 매창과 운명적인 조우를 하였다. 말로만 전해 듣던 18세 꽃다운 매창을 비로소 만나게 되자 만남의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벅차오르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시로서 읊었다.
일찍이 남국의 계랑 이름 들어 알고 있었네(曾聞南國癸娘名)
시 재주와 노래솜씨 장안까지 울려 퍼졌는데(詩韻歌詞動洛城)
오늘에야 그 진면목 서로 마주하고 보니 (今日相着眞面目)
마치 선녀가 천상에서 내려온 것 같구나(却疑神女下三淸) ·- 증계랑(贈癸娘)
유희경과 매창은 이 때 처음 서로 만나게 되었지만, 이미 서로 상대방의 시세계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다가 꿈에 그리던 매창을 만나게 된 유희경은 천상세계의 선녀가 하강한 듯 이내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천민출신과 기생이라는 유유상종의 조화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그들은 곧바로 깊은 사랑에 빠져들었다. 매창은 유희경의 ‘증계랑’이라는 증시(贈詩)에 아래와 같이 화답을 했다.
내게는 오래전 연주하는 거문고 있어(我有古奏箏)
한번 타면 온갖 정감들이 일어나네(一彈百感生)
세상에선 이곡을 알아줄 이가 없더니(世無知此曲)
비로소 임의 피리소리에 맞추어 보네(遙和俱山笙)
이 두 사람은 28년이란 많은 나이 차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밤이 이슥하도록 시에 화답하며 술잔이 오고 갈수록 정분이 깊어가면서 이내 두 사람은 원앙금침에 들어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었다. 그러나 한 쌍의 원앙같이 아름답던 이들의 사랑도 그리 오래가질 못하였다. 꿈결 같던 매창과의 1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이래 처음으로 조선사회에 엄청난 국가사회적 대변화를 가져오면서 민중들의 의식을 일깨운 개안(開眼)의 혁신을 불러온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위기에 처한 왕과 지배계급들은 민중의 힘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민중들은 분연히 앞장서서 의병 봉기를 함으로써 왜병들을 물리치는 전공을 크게 세웠고, 승병들까지도 이에 합세하면서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다. 조선조의 사대부들도 정의가 도전을 받고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의연히 구국의 길에 들어서서 헌신하는 그런 선민적 의리나 정신이 투철한 이들이 많았고, 일반 평민이나 천민들까지도 이에 동참하여 앞장을 선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왜란이 평정되자 선조는 전공(戰功)에 따라 비복들에게도 면천을 해주었고, 사대부들에게도 통정대부 같은 정 3품의 벼슬을 내려 신분상승의 기회를 주어 보상해 주었다. 유희경도 매창과 1년여의 밀월의 단꿈을 박차고 나가 왜놈들에게 짓밟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활동에 앞장을 섰다. 배꽃이 봄비처럼 흩날리던 어느 봄날, 유희경이 구국을 길을 가기 위해 매창의 곁을 떠나가게 되자, 매창은 단장(斷腸)의 이별의 아픔을 ‘이화우(梨花雨)’의 시조 한 수에 담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라
매창의 대표적인 시조 ‘이화우’는 당대문사이자 천민시인이었던 촌은(村隱) 유희경을 이별한 뒤 그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조라는 주가 붙어 시조집인 <가곡원류> 에 실려 전해온다. 봄비마냥 배꽃이 비에 젖어 흩날리는 모습을 흡사 임과 이별하며 함빡 젖은 화자의 눈물에 비겨 노래한 이 시조는 우리나라 별리(別離)의 연가 가운데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이별한 임과 봄비의 배꽃낙화로부터 가을 추풍낙엽으로 이어지는 별리의 시공을 초월한 이러한 시심은 오로지 유희경으로만 향하는 그리움과 사랑의 절정을 이룬다. 가곡원류>
예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임과의 이별은 인간사에 있어 가장 슬프고 안타까운 극한상황이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의 전장터로 출정하는 마당에 서게 되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절망으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고려조 시인 정지상도 7언절구 ‘송인(送人)’에서 떠나는 사람 고이 보내는 사람이 흘린 눈물로 하여 대동강 물이 언제 마르겠냐는 발성을 토해 냈을까 싶다.
유희경이 사랑하던 매창의 곁을 떠나간 지 1년 후에 간단한 편지 한 장과 동봉한 시 한 편이 바람처럼 전해왔다. ‘헤어진 그대는 아득히 멀기만 하고/ 떠도는 나그네는 그리움에 잠 못 이루네/ 소식조차 끊겨 애가 타는데/ 오동잎 찬비소리는 나를 울리네.’ 매창은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보내온 편지와 동봉된 시를 밤새워 눈물로 읽고 또 읽으며 임께로 향한 이 같은 그리움을 수많은 시로 남겼다.
봄날이어도 추워서 엷은 옷을 깁는데(春冷補寒衣)
따스한 햇볕이 임 마냥 사창을 비치네(紗窓日照時)
손길 가는 데로 머리 숙인 채 놓아두니(低頭信手處)
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만 적시우네(珠淚滴針絲)
유희경이 매창에게 보낸 시가 10여수가 넘듯이 매창도 유희경을 그리워하여 읊은 시가 당대의 문사들 가운데 가장 많다.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 에도 허균이 계생과 주고받은 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을뿐더러 매창이 37세로 요절하자, 허균이 곡을 하며 몹시 애도했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계랑의 문집 「매창집」엔 그리움과 보고픔이 응결된 상사지정의 유려한 여성적 정서가 형상화된 <추사(秋思)> , <춘원(春怨)> , <증취객(贈醉客)> , <견회(遣懷)> , <부안회고(扶安懷古)> , <자한(自恨)> 등이 실려 전한다. 자한(自恨)> 부안회고(扶安懷古)> 견회(遣懷)> 증취객(贈醉客)> 춘원(春怨)> 추사(秋思)> 성소부부고>
이 문집은 현종 9년(1668년) 부안 변산 개암사에서 부안현의 아전들이 대대로 이어 암송해 오던 매창의 한시 수백 수 가운데 5언절구 20수, 7언절구 28수, 5언율시 6수, 7언율시 4수 총 58수를 모아 목판본 2권 1책으로 펴낸 것이다. 실전된 매창의 주옥같은 수백수의 한시를 대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그래도 뜻있는 아전들에 의해 구송되어 오던 작품들을 모아 <매창집> 으로 발간되었기 때문에 이 정도만이라도 유전되어서 매창의 시세계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은 천행이 아닐 수 없다. 매창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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