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몽 항쟁기 외교가 명성 애국적 사대부 / 만년 변산서 서당 짓고 많은 후학 길러내
사뿐히 춤추며 날아가다 도로 되돌아와서는
거꾸로 나부껴 다시 가지에 올라 꽃 피우려다
무단히 꽃잎 하나 거미줄 그물에 걸리니
거미 때마침 나비인줄 알고 잡으러 오네
문정공 김구(1211- 1278년)의 시 가운데 가장 서정적이고 심미적인 시로 ‘떨어지는 배꽃 낙이화(落梨花)’라는 시제의 7언절구를 꼽을 수 있다. 이 시는 화사한 봄날, 불어오는 바람에 떨어지는 배꽃 잎이 윤무를 그리다가 거미줄에 걸려 흔들거리는 것을 보다가, 마치 나비가 걸린 것으로 착각한 거미가 먹이인줄 알고 엉금엉금 기어오는 곤충들의 먹이사슬을 섬세하고도 희화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희짓는 봄바람과 무수히 떨어지는 배꽃잎, 거미줄과 거미를 소재로 낙이화가 다시 개이화(開梨花)하려는 역리(逆理)성을 꼬집는 지포(止浦)의 시작법이 놀랍다.
그러기에 고려대의 문장가인 문충공 이제현은 이 시를 ‘아름답기가 둘도 없는 작품’이라 극찬하였고, 고종대의 문청공 최자는 ‘시부의 표준이요, 모범’이라 칭송하였다. 당대의 문호로 추앙받는 문순공 이규보(1168- 1241)는 ‘고려의 문장을 저울질 할 사람’이라 경탄을 하였고, 고려의 국왕인 고종도 ‘동쪽 우리나라 대신의 정기를 타고나 서쪽 중국의 문장가들을 자유로이 주무르는 사람’이라 칭찬했던 당대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와의 외교에도 능한 정치가였다.
김구는 이규보나 이제현처럼 고려대의 다른 문장가들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요, 외교가였다. 고려 고종조 대몽 항쟁기의 한 복판에 서서 민중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몽고를 오가며 감동적인 외교문서를 만들어서 그들을 설득하고 고려와의 관계를 회복시켰던 애국적인 사대부였다. 이는 당 희종 8년(881)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24세의 젊은 나이로 토벌장수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에게 격문을 써서 반란을 평정함으로써 이름이 천하에 높아진 신라의 최치원과도 비교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최치원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7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선주표수현위를 거쳐 승무랑시어사내공봉의 벼슬에 올라 중국에 문명을 떨친 문장가였다.
김구도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시와 문을 잘 지어 칭송이 자자하였고, 여름에 절에 들어가 50일 동안 고문과 율시, 당송시를 공부하고 시와 부를 짓는 ‘하과(夏課)’에서는 여러 동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모두들 과거에 나가면 장원을 할 것이라 평판이 높았다는 기록이 지포의 행장에 나와 있다. 하지만 나이 20살에 문과에서 2등으로 뽑히자, 지공거(知貢擧)인 정숙공 김인경이 장원으로 뽑히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겨 자신도 제 2등으로 뽑혔다고 위로하니 김구도 장문의 병려체 계문(啓文)를 지어 사례를 하였다.
문정공 김구는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40여년이 지난 희종 7년(1211) 비교적 정치가 안정기에 접어든 최충헌 집권기에 태어났다. 〈고려사〉 열전에는 부녕현(현 부안)인이라 되어 있지만 역사가들은 부안에서 태어났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부친인 김의(金宜)가 중앙관료로 개경에 거주했으므로 부안이 아닌 개경에서 출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 숙종 2년(1836)에 발간된 〈부령김씨족보〉에 의하면 김구의 선대가 부안에 거주하게 된 것은 경순왕의 후손인 김경수가 고려 문종 때 과거에 올라 이부상서 우복야에 이르고 아들 김춘이 부녕부원군에 봉해지면서 부녕을 식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본관이 된 것으로 보인다.
김구의 아버지 김의는 고려 신종 7년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당시 최씨무단정권을 장악한 최충헌에 의해 발탁됨으로써 중앙관료로 진출하였고, 최충헌은 이규보, 최자, 진화, 김극기 등 당대 문신들을 우대하여 무신정권과 학문의 세계를 조화롭게 이끌어간 것으로 보인다. 김구는 당시 제일의 문호인 이규보의 천거에 의해 집권자 최우에게 발탁되어 관직에 올랐음을 〈고려사절요〉에서 엿볼 수 있다.
고종 21년(1234)부터 6년간 제주판관으로 있을 때 제주의 땅은 돌이 많고 메말라서 논농사를 지을 수 없고, 밀, 보리, 콩, 조 등 밭곡식만 재배하는데 소와 말, 노루, 사슴들 때문에 수확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다 땅의 경계도 없어 포악한 무리들이 남의 땅을 잠식하는 일이 많은지라 지포가 부임하자마자 많은 돌을 모아 담을 쌓게 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한 관리로서 제주에서 이름을 날렸다는 사실이 〈동문선〉과 〈탐라지〉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6년간 제주판관을 마치고 내직으로 자리를 옮겨 한림원에 들어가 문사로 활동하면서 나이 30세에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을 때 〈북정록(北征錄)〉이란 기행록을 남겼다. 그리고 가는 행로에 〈과철주(過鐵州)〉, 〈과서경(過西京)〉, 〈출새(出塞)〉, 〈분수령도중(分水嶺途中)〉 등 여러 수의 시를 지었는데 그들 작품 속에는 약소국의 한과 원나라에 대한 강렬한 항몽의식이 작품의 내면에 오롯이 담겨 전한다.
당년에 성난 오랑캐들이 국경문을 막으니
40여성이 불타오르는 요원같구나
산에 기댄 외로운 성 오랑캐길목이구려
일만군의 북과 함성 단 한 번에 삼키려 해도
백면서생이 이 성곽을 굳게 지켜내어
나라에 몸 바치길 기러기 털처럼 가벼이 하였네.
(중략)
하룻밤 관아의 창고 붉은 화염 타오르니
처자와 함께 기꺼이 불 속에 사라져갔네.
충성스런 장한 혼백 가는 곳 어디 멘가.
천고에 고을 이름만 철(鐵)이라 허공에 쓰네.
〈철주를 지니며〉
〈과철주〉의 시제 아래에 지포는 ‘고종 18년 신묘 8월에 몽고 장수 산례탑이 함신진을 포위하고 철주성을 도륙했다. 이 때 그 고을 수령인 이원정이 성을 지키다가 결국 창고를 불사르고 처자와 함께 불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주를 붙여 이 작품의 서사적인 창작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밝혀놓았다. 그러므로 이 시는 1231년 몽고의 침략에 보름동안 항거하다 장렬하게 산화한 고을 수령 이원정과 그 처자에 대한 역사적 전쟁서사시임을 알 수 있다. 장수도 아닌 백면서생인 이원정이 인(仁)과 신(信)을 바탕으로 인심을 결속하여 몽고 장수 산례탑과 항전을 할 때 뼈를 태워 밥을 지어먹으며 싸웠던 전장의 참담한 극한상황이 떠오른다. 김구는 이런 용맹한 군사들을 용호(龍虎)로 비유하며 그들의 함성에 천지가 기울었고, 마지막 궁지에 몰린 이원정은 결국 처자와 더불어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서 산화했다는 비장미를 이 시에 담아내었다.
김구는 원종조 몽고와 강화가 성립된 이후, 대몽관계에서 중요한 외교문서를 전적으로 담당하여 몽고의 무도한 요구와 압박을 해결했던 표전문의 대문장가였다. 원종도 ‘지난번 몽주(蒙主)의 조서에 올린 글의 뜻이 간절하고 관곡하였다는 말까지 했으니, 그대가 지어올린 표문의 사연과 문장이 곡진하여 몽주를 감동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러한 칭찬이 있었겠느냐’고 기뻐할 정도였다. 확실히 지포는 대몽관계에서 외교관계의 훌륭한 표문을 작성하여 고려를 구함과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다짐으로써 재상의 반열인 평장사에 오른 문장가였다.
18대손 동호가 동문선과 고려사에에서 김구의 유문(遺文)을 뽑고, 16대손 홍철이 편찬한 연보를 추가 편찬하여 3권 2책의 〈지포집(止浦集)〉을 순조 1년(1801)에 발간했는데, 7언고시 2수, 7언절구 4수, 7언율시 6수, 계 1, 소 5, 서 3, 비명 2, 표전 69 등이 실려 전한다.
만년에 부안 변산 지지포(知止浦)에 지지재(知止齋)란 서당을 짓고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부안군 산내면 운산리에 묘소가 있고, 도동서원에 배향되어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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