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를 알아야겠구나
해방이 되어 나라를 되찾았다는 기쁨과 동시에 건국을 둘러싼 대립이 격화되는 와중에서 농지개혁의 실시는 농촌에 큰 변혁을 일으켰다. 초등학생인 나는 이러한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더욱이 서울의 종조부가 제헌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우리 집은 정치바람에 휘말리게 되었다. 낙선과 전쟁과 납북 등은 우리 가문에 많은 타격을 주었다.
설상가상 격으로 해방 후와 전쟁 전·후기에 사상적인 대립이 심화되는 와중에서 일제 때부터 친척들이 학교·금융계 등 요소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정치적으로 휘말리게 되었다. 북한 치하에서도 계속 근무한 것이 협력세력으로 연좌되는 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20년 후 내가 유학길에 오르는 데도 애를 먹였다.
어린 나로서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다만 어린 소견으로 정치를 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과 농민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는 농지를 분배해야 한다는데, 왜 땅을 내놓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경제를 알아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훗날 경제학을 공부하게 한 것 같다.
해방과 전쟁과 가정의 혼란을 겪으면서 집안이 사상문제에 휘말리게 되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사회와 공부에 대한 회의를 갖게도 되었고, 원래 성격도 내성적이었지만 어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매진하겠다는 생각을 갖지도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증조부모가 돌아가셨다.
6년제였던 이리농림학교에 입학했지만, 농업학교이기 때문에 또는 전쟁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못했다고 핑계를 댈 정도로 나는 유능하지 못한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생각하지도 아니한 하숙생활로 그럭저럭 3학년을 마치게 되었는데, 때 마침 고등학교제도가 신설되었으므로 나는 자연스럽게 집에서 가까운 군산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실은 집안의 오촌들이 전부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나도 은근히 서울에서 학교 다니기를 바랐는데, 용기와 의지가 약해서 어른들이 이끄시는 대로 농업학교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자 서울에서 공부하던 오촌 당고모들이 모두 걸어서 일주일 만에 시골집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는 어린 소견으로 ‘내가 서울서 학교 다니지 않기를 잘했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고교입시 때는 전쟁중이라 서울로 갈 수도 없어 집에서 가까운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또 다시 3년 간 군산으로 기차통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였고, 기차통학을 하기가 힘들어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핑계가 또 생겼다.
하도 불편하여 증조부께 ‘왜 우리 집은 군산시내가 아닌 이러한 변두리 시골에 있습니까?’ 하고 항의한 적이 있다. 이때 증조부 말씀이 ‘우리 집을 지을 때는 군산시가 생기지도 않았다’고 하셨다.
군산항 개항이 약 11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일본이 식민지농업개발의 전진기지로 군산시를 새로 만들었고, 호남평야 역시 그때 갯벌을 개발하여 오늘의 곡창지대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특히 군산시와 전군도로가 서울시보다 먼저 아스팔트도로로 만들어졌었다는 자료를 보고는 일제의 식민지개발전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120년에 가까운 낡은 옛날 전통가옥인 우리 집이 그렇게도 싫고 불편하여 양옥집을 좋아했는데, 집사람은 오히려 옛집을 좋아하고, 지금은 군산에서 몇 채 안 된다는 고가옥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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