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도 '한성정부' 발족 회합
1919년 3·1운동 후, 맨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서두른 것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의 고포들이었다. 그들은 3월 17일 명칭을 대한국민의회 (회장·문창범)은 이날 독립선언서와 5개항 목에 달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결의 내용은 민족자결, 한일합방 무효, 파리강화회의 참가 등을 주장하고 이를 각국 영사관에 배포했다.
또한 대한국민의회에서 3월 21일엔 임시정부 각료명단을 발표했는데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총리 이승만 △탁지총장 윤현진 △군무 이동휘 △내무 안창호 △산업 남형우 △참모 유동열 △강화대사 김규식 등이었다. 이들은 그 후 상해임시정부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3월 17일 서울에서도 이교헌, 윤이병, 윤용주, 이규갑, 한남수, 홍진 등이 내수동에 있는 당시의 검사 한성오의 집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논의를 했다. 이날 결의된 내용을 보면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전국 13도 대표가 회의를 소집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공포하기로 했다. 명칭을 ‘한성정부’라고 결정하는 한편 각료로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외무총장 박용만 △군무 노백린 △재무 이시영 △법무 신규식 ▲학무 김규식 ▲교통 문창범 ▲참모총장 유동열 ▲노동국 총판 안창호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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