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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서의 향기]조선시대의 호적(1)

1882년에 長水縣에서 韓世周에게 발급한 준호구. 준호구는 오늘날의 호적등본이나 주민등록등본과 같은 문서이다. 아들 내외와 함께 살았던 노부부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desk@jjan.kr)

 

누구든지 한번쯤은 이런 저런 일로 자신의 호적등본이나 초본을 떼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대개는 어떤 곳에 제출할 요량으로 발급받는 것이어서 한번 흘낏 쳐다보고 지나쳐버리기가 일쑤이지만, 골똘히 살펴보면 우리 가족의 역사와 관련된 소중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 필자도 호적과 관련해 남다른 기억이 있다. 사십이 넘어 늦장가를 가는 바람에 오랫동안 큰 형의 호적에서 형님네 식구들 틈새에 끼어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결혼과 동시에 법정 분가를 하게 됐다. 그때 비로소 독립된 호적을 갖게 되었는데 그런 사실이 기재된 호적이 매우 신기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호적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1849년 당시, 전라도 무장현 오리면 목동리에 사는 호주 金道彦(46)은 홀아비로써 열 살 어린 동갑내기 동생 부부와 함께 살고 있었다. 동생은 결혼했지만 오늘날처럼 분가 하지 않고 혼자된 형님네 집에 그대로 눌러 앉아 살았던 셈이다. 그런가 하면 결혼한 자식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사는 경우도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1876년 당시 정읍현 아면 운월리에 사는 姜在基(74)는 두 살 위의 늙은 처 말고도 결혼한 두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벌써 짐작했겠지만, 이것은 조선시대의 호적이 오늘날의 주민등록제를 겸하고 있었다는 것을 가리켜 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호적은 오늘날의 호적보다도 훨씬 다양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출생과 사망에서 결혼 생활의 이모저모에 이르기까지 알콩달콩한 삶의 속내를 가까이에서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지역과 가문에 따라서는 3년마다 작성되었던 호적들의 상당 부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경우도 있어서 한 가족의 변천사를 일별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의 호적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호적에 그 신분을 알 수 있는 표식이 첨가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위의 김도언과 강재기는 호적에 모두 유학(幼學)으로 나온다. 호적 상의 유학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가 필요하지만, 쉽게 말해서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했고, 따라서 관직을 지낸 적도 없는 양반을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호적에는 이름뿐만 아니라, 그 신분을 알려 주는 표식, 곧 직역(職役)이 기재되었다. 호주를 포함하여 호적에 기재된 사람들이 양반인지, 평민인지, 아니면 노비인지 알아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조선시대의 사회가 양반을 정점으로 하는 신분제 사회였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그 신분을 철저히 따지고 들었던 사실은 호적에서 호주와 그 처의 사조(四祖)까지 낱낱이 밝혔다는 점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조는 부(父) 조(祖) 증조(曾祖) 외조(外祖) 등 가까운 직계 선조를 가리킨다.

 

그러나 노비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서 그 사조가 밝혀진 경우는 전혀 없다. 기껏해야 그 부모가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상전(上典)은 분명히 기록하여 소유관계를 명시하였고 부모가 노비라는 것을 밝혀 그들의 신분이 노비라는 것을 명시하였지만,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까지 기재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유호석(고문서팀 연구원, 전북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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