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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지방선거 전북도지사 후보 인물탐구 ① 새정치민주연합 강봉균

국가 경제정책 수립·실행…기획·분석력 뛰어나

   
 

6·4 지방선거 전북도지사 선거에 출사표를 낸 후보는 새정치민주연합 강봉균·송하진 예비후보와 유성엽 국회의원, 새누리당 박철곤 예비후보 등 4명이다. 후보들마다 자신이 전북도지사로 적격이라며 표심을 잡는데 올인하고 있다. 앞으로 선거까지는 50일, 새정치민주연합 도지사 후보경선은 열흘 가량 남았다. 유권자들의 선택을 돕기 위해 도지사 후보들의 인간적인 면면과 삶의 행적, 가치관 등 한 인물을 들여다보는 인물탐구를 연재한다.

 

“장관도 해보고 국회의원도 하면서 많은 면접을 해보았지만, 누군가에게 평가받는다는 것은 역시 어렵네요.”

 

새정치민주연합 강봉균(70) 예비후보가 도지사후보 면접을 보고 미니홈피에 올린 글이다. 43년 동안 경제관료와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했던 그가 “마지막으로 봉사하겠다”며 전북도민앞에 섰다. 가장 어려운 면접을 앞두고 있는 셈이다.

 

△“힘있는 경제도지사와 전북발전을”

 

강 후보가 표방하는 것은 ‘경제도지사’. 그의 전공분야다. 1969년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공직에 입문해 1999년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내기까지, 30년 동안 정통 경제관료로 우리나라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발전의 기틀이 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무적으로 주도했고, 서울지하철 건설계획도 이끌었다. IMF 외환위기때는 금융부문과 재벌·공공부문·노동시장 개혁도 주도했으며,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도 제안했다. 강 후보는 한 인터뷰에서“한국 경제운용의 골격을 짰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초등학교 교사에서 경제관료로

 

서울대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1943년 군산시 구암동에서 태어난 강 후보는 그 시절 ‘공부좀 한다’는 이들이 들어가는 군산사범학교에 진학했다. 가정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어서 졸업후 교사가 되는 사범학교를 택한 것이다. 첫 부임지는 고창군 고수면 예지초등학교. ‘실개천이 흐르고 산비둘기가 지저귀는’ 아름다운 곳에서의 생활이었지만,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호롱불 아래서 주경야독으로 노력한 끝에 서울대 상과대학에 들어간다. 두 차례의 공과대학 낙마 후 세번째 도전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강 후보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낭만적인 생활을 한 곳이 바로 고창에서 교단에 설 때였다고 회고한다. 제 2의 고향으로 생각할 만큼 애틋한 감정이 있다.

 

대학 합격통지서와 함께 군대 영장도 날아왔는데, 자서전에서는 폐결핵 진단으로 훈련소에서 돌아와야 했다고 밝히고 있다.

 

△별명‘꾀주머니’…IMF극복 선봉에

 

대학 4학년 때 제6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고시 동기. 경제기획원 기획담당 사무관으로 출발해 경제기획국장, 기획담당 차관보를 지내고, 노동부 차관, 기획원 차관, 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을 지낸후 김영삼 정부 때 정보통신부장관에 발탁됐다. IMF 외환위기 때 김대중 대통령의 부름으로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정경제부장관까지 지낸다. YS와 DJ 두 정부에서 대통령 임명장을 일곱번이나 받은 기록을 세웠다.

 

강 후보는 다른 경제기획원 출신 관료보다 출세가 늦었다는 평가도 듣는데, 한 책에서는 출신지역이 보이지 않는 차별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그래도 전윤철 전 감사원장, 진념 전 경제부총리와 함께 호남이 배출한 경제관련 3인방으로 유명했다.

 

기획력과 분석능력이 뛰어나고 판단력도 빨라 ‘꾀주머니’라는 별명도 있다.

 

△“도민 위한 통합정치 보여주겠다”

 

정계에는 2002년 16대 보궐선거를 통해 입문했다. 2000년 경기도 분당에서 한차례 고배를 마신 후 였다. 이후 내리 3선을 했다.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과 중도통합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냈다. 2002년 대선때는 노무현 대통령후보의 경제공약도 주도했다. 민주당내에서는 중도보수성향 온건파, 무계파로 평가받는데, 경제정책과 국가비전에 대한 소신은 뚜렷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현역 물갈이가 대폭 이뤄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면서 정계를 은퇴했다. 그는 한-미FTA 비준문제와 보편적복지공약 등에서 당과 다른 입장을 보인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당시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었다.

 

강후보는 물러나면서 “불합리한 시스템으로 정치를 하면서 한계를 많이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또 “유권자들과 좀 더 스킨십을 갖지 못한 것도 아쉽다”고 밝혔다.

 

그런 그가 재도전을 선언했다. “정치권의 파당정치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통합정치를 해보이겠다”는 믿음에서라는데, 지켜 볼 일이다.

 

● 강봉균 후보는

 

△1943년 전북 군산 △군산사범학교 졸업 △서울대 상대 졸업 △미국 윌리엄스칼리지 개발경제학 석사 △한양대 대학원 경제학박사 △행시 6회 △노동부·경제기획원 차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정보통신부 장관 △청와대 경제수석 △재정경제부 장관 △KDI 원장 △16·17·18대 국회의원 △현 재경회 회장

 

■ [내가 본 강봉균 후보는] 부인 서혜원 여사 "대한민국과 결혼한 남자, 이젠 고향에 마지막 봉사"

   

“공직자와 살면 평생 남에게 폐 끼칠 일도, 아쉬울 일도 없이 그저 청렴하고 검소하게 살면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어서 후보님을 만났지요.”

 

강봉균 새정치민주연합 전북도지사 예비후보 부인인 서혜원(68)여사는 결혼 전 ‘목민심서(牧民心書)’까지 정독하며 공직자의 ‘소신있는’ 아내가 되기로 다짐했었다. 주말은 물론 휴가까지 반납하며 일에 파묻혀 지낼 때도 ‘나랏일’이라 생각하며 묵묵히 뒷바라지했다.

 

그러나, 지난 2000년 재정경제부 장관 퇴직 후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겠다는 말을 듣고 “정치 할 사람은 아니다”며 강하게 만류했다. “합리주의자에 원칙주의자인데, 정치판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공직자로 마무리 하는 게 좋겠다며 반대했지요.”

 

예상했던 대로 공직과 정계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일을 대하는 강 후보의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집에서 별명이 ‘강 사무관’이예요. 장관시절에도 서류를 직접 만들고, 글도 썼어요. 퇴근해오면 아이들과 제가 “강 사무관님 오셨어요” 그렇게 맞이할 정도였죠.”

 

국회의원이 돼서도 여전했다. “평생을 나라 걱정만 했는데, 그 판만 달라진 거죠. 대한민국과 결혼했어야 할 사람이예요.” 서 여사는 가정에서는 ‘0점’이었지만 일터에서는 ‘100점’이라고 자신했다. “아이디어도 풍부하고, 합리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지혜가 대단해요. 존경스러운 부분입니다.”

 

서 여사는 강 후보가 “아군(我軍)이 아니라 적군(敵軍)”이라고 할 정도로 가장 엄격한 유권자다. 쓴소리는 도맡아 하기 때문이다.“매사에 자신만만하죠. 그 자신감이 장관도 되게 하고, 국회의원도 되게 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그 점이 단점으로 비춰지는데, 도민들에게도 그렇게 느껴질까 봐 우려됩니다.”

 

선거를 여러 번 치르면서도 “수고했다”는 말을 안 할 정도로 무뚝뚝하지만, 일에 대한 열정과 소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추천했다.

 

“정치인의 아내로 내조를 하는데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래도 제 고향이고, 또 후보님 고향이니,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며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보다는 훨씬 더 잘 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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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정 euns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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