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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② 세계유산이 된 고인돌과 전북의 청동기·철기문화 - 익산-전주지역, 선사-역사시대 잇는 거점 증명

고인돌 문화 / 익산지역 820년전 기록 존재 / 고창, 2가지 형태 공존 특색 / / 청동기·철기 문화 / 中 철기문화 수입 통로역할 / 숱한 유적 마한 중심지 입증 /

▲ 1870년경 익산 지도. 왼쪽에 지석면이란 지명에서 이규보가 본 ‘지석’이 조선 후기까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북의 고인돌, 세계유산이 되다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선사유적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 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으로 정치세력 형성과 국가성립시기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고인돌은 나라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한국에서는 고인돌(굄돌)로 부르는데 한자로는 한국과 일본에서 지석묘(支받침 지 石돌 석 墓무덤 묘), 중국에서는 석붕(石돌석 棚시렁 붕),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선사시대 무덤으로 이해되는데 조상신에게 제사지내는 제단이자 신전같은 의미로도 파악된다.

▲ 고창 도산리 고인돌(탁상식·위)과 죽림리 고인돌 군락(바둑판식·아래)

흥미로운 것은 전 세계에 존재하는 고인돌 가운데 가장 많은 고인돌이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존재하며 그중에서도 전라북도 지역이 가장 많다. 이같이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는 고인돌의 기원에 관해서는 바다를 통해 동남아시아 또는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전해졌다는 전파설과 함께 주변 지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다는 점과 축조연대가 이르다는 점에서 주변 지역과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자생설이 맞서고 있어 아직까지 뚜렷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 같은 우리나라의 고인돌 중 전라북도의 고인돌은 예로부터 꽤 유명하였다. 즉, 820여년전인 서기 1200년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전주에서 관리를 지낼 때 익산지역을 지나며 일부러 소문이 자자한 익산의 지석묘를 찾아 간 기록을 『동국이상국집』에 남겼다. 그리고 이 기록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고인돌 기록이었다.

 

다음날 금마군(현재 익산)으로 가는 중에 이른바 ‘고인돌’(支石)이란 것을 찾아가 보았다. 고인돌이란 것은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성인(聖人)께서 고여 놓은 것이라 하였는 데 과연 기이한 모습이 매우 신기하였다. 《동국이상국집》

 

고려시대에도 이미 소문이 자자했던 전라북도의 고인돌은 만주-한반도 지역에 집중 분포된 세계 고인돌을 대표하여 2000년 11월 29일, 강화, 화순의 고인돌군과 함께 고창지역의 고인돌군락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기원전 5~4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양 최대의 고인돌 집단 군락지인 고창 지석묘군(죽림리, 상갑리 고인돌군)은 고창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10㎞ 남짓한 지점에 자리한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야산의 기슭에 큰 군집을 이루고 분포되어 있다. 상갑리의 경우 야산의 남사면 기슭에 약 2.5m 거리에 600여 기의 고인돌이 산줄기 방향으로 분포되어 있다. 도산리의 탁자식 고인돌은 가장 남쪽에 분포되어 있어 그 의미가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고창의 고인돌군은 전 세계에서도 가장 밀집된 곳으로 대표적인 2가지 고인돌 형태가 공존해 청동기 시대 묘제 양상과 당시 사람들의 사상과 문화 등을 알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같은 유적은 전라북도 선사문화의 특성을 잘 반영한 것으로 이같은 문화를 토대로 마한으로 상징되는 초기 역사의 중심이 전라북도 권역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 청동기, 철기문화의 중심 만경강 유역

 

최근까지 진행된 고고학계의 발굴 성과에 의하면 기원전 3세기경 고인돌문화는 쇠퇴하고 중국 랴오닝지역 문화가 한반도지역으로 옮겨오며 새로운 철기문화가 한반도 서해안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즉, 경기, 충청, 전라의 해안을 따라 마한으로 통칭되는 세력이 형성되었는데 금강유역과 함께 만경강을 사이에 둔 익산-전주-완주지역이 새로운 중심이었음이 최근 발굴 성과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즉, 이 일대에서 석관묘나 움무덤에서 청동검과 청동거울 및 철제무기와 토기, 구슬 등이 출토되며 마한문화의 중심모습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완주 상림리에서 발견된 중국식 동검문화는 만경강으로 연결된 교통로가 선사이래로 많은 문화가 전래된 통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하여 중국 전국시대의 철기가 유입되면서 고조선 및 중국계 문화가 전래되면서 이 지역은 마한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 기원전 2세기경 완주 갈동 토광묘 유적 한국식 동검, 청동투겁창, 잔무늬거울, 쇠낫과 청동기를 만든 청동검/꺽창 거푸집/ 덧띠토기, 검은 간토기.

전라북도 권역에서 초기 목관을 쓴 토광묘의 중심 분포권은 고조선 준왕의 남래지로 알려져 있는 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만경강 유역으로 이 문화세력은 기원전 2세기경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완주 갈동, 신풍, 덕동, 전주 원장동, 중인동, 중화산동 등 만경강 남쪽의 전주·완주 일대가 중심이 된다. 이 같은 철기문화의 유입은 고조선 준왕의 남래 및 고조선 유민의 이동으로 촉발되어 마한(馬韓) 성립의 중심으로 익산과 전주지역이 자리하게 된다.

▲ 완주갈동유적, 한국식 동검, 청동 투겁창과 창자루, 동새기개, 고리모양 유리, 잔무늬 거울, 청동 화살촉, 쇠낫, 쇠새기개, 쇠도끼, 청동꺽창 거푸집 ·사진 출처=국립전주박물관

한편, 목관을 쓴 토광묘는 기원 후부터는 점차 사라져 무덤주위에 구덩이를 판 주구묘로 대체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목관)토광묘 축조를 담당하였던 세력이 준왕세력이라면 주구묘를 축조한 세력은 토착 마한인들로 볼 수 있으며 준왕세력이 약화되어 사라진 이후에 다시 마한인들에 의해 마한의 묘제인 둘레에 구덩을 파 무덤을 감싼 주구묘가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같이 익산-전주 지역은 전통시대 문헌자료와 1960년대 이래 발견된 익산의 청동, 철기유적 그리고 최근 전주-완주 혁신도시 건설과정에서 발견된 다량의 청동기, 철기유적을 함께 고려할 때 한국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잇는 중요한 거점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즉, 고조선시기 위만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준왕이 신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온 지역으로 금마지역이 구체적으로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부응하는 기원전 5~2세기경 청동기, 철기유적이 서해안 항로 가운데 만경강유역 공간인 익산-전주-완주로 연결되는 지역에 분포하고 있음이 수십 군데 유적에서 확인된다. 이같이 전라북도의 대표적 강줄기인 만경강 유역 공간은 한국사의 첫 역사를 연 고조선의 청동기, 철기문화가 한반도 중남부로 전해진 첫 공간이며 역사적 기록과 고고학적 유적, 유물을 통해 확인된 마한의 중심으로 호남지역을 대표해 성장한 곳이다.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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