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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나이 들수록 그리운 이름,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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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미양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

젊을 때는 고향이 그저 '떠나온 곳'이었다.

서울의 빠른 공기 속에서 살다 보면, 정읍의 느린 걸음과 흙냄새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상하게도 그 느림이 그리워지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더 따뜻하게 다가온다. 고향은 어느새 내 마음의 쉼표가 되어 있었다.

몇 년 전, 서울의 한 모임에서 우연히 정읍 출신 선배님 한 분을 만났다. 첫인상은 아주 세련되고 도시적인 분이었다. 어딘가 거리를 두는 듯한 차분한 눈빛. 옷차림도 깔끔하고 말투도 또렷했다.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조금 까다로울지도,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좀 도도해 보이기까지 했다.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내 이름 앞에 '정읍 후배'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그분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이고, 우리 정읍 후배야?"

그 한마디와 함께 도도해 보이던 얼굴이 환하게 펴지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로 그분은 나를 챙겨주셨다. 행사장에서 멀리서라도 나를 보면 환한 미소로 다가와 "잘 지냈지, 난 항상 우리 후배 응원하고 있네" 하고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처음 만났을 때의 도회적인 말투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나를 만나면 같은 고향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억양과 어투로 말을 하셨다. 표준어 같지만 표준어가 아닌, 그 미묘한 억양 속에는 서울에서 오랜 세월 감춰왔던 고향의 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돌아보면, 고향이란 그런 것 같다. 특별한 이유 없이도 서로 마음이 닿는 사람들, 그리고 말 한마디에 마음이 풀어지는 공간 말이다. 서울에서 살아온 세월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고향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꾸밈없는 정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선배님처럼, 고향 사람 앞에서는 오랫동안 숨겨왔던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고향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가끔 주말 아침, 유난히 푸르고 맑았던 고향 하늘이 떠오르는 날이면 그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고향 사람은 만나면 그냥 반가운 거야. 이유가 없어."

그 말 속에는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정과 믿음이 담겨 있었다. 학벌도, 직장도, 지위도 중요하지 않았다. 같은 땅을 밟고 자랐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삶이 점점 복잡해질수록,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에는 계산 없는 정이 있고, 서툴지만 진심이 있으며, 말보다 눈빛으로 마음을 전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오직 같은 고향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미묘한 억양과 어투로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편안함이 있다. 요즘처럼 각박한 시대에, 고향은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마음의 안식처다.

나이가 들어가며 깨닫는다. 고향은 단지 내가 태어난 장소가 아니라, 여전히 나를 품어주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은 세월이 흘러도, 내가 어디에 있든,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 앞에서는 서울에서 쌓아온 겉모습을 벗어던지고, 편안하게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조용히 불러본다.

정읍, 그리고 나의 고향 사람들.

왕미양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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