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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
[신간]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
  • 김세희
  • 승인 2021.03.03 2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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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저서
2차 동학농민혁명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 촉구
국가보훈처 현재까지 2차 동학농민혁명 서훈 대상 배제
독립유공 서훈에서 항일 농민 양반에 비해 차별이 이유
전봉준(왼쪽) / 최시형
전봉준(왼쪽) / 최시형

2차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인 전봉준과 최시형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국가보훈처에서 서훈을 받은 갑오·을미의병에 참여한 인물과 마찬가지로 전봉준과 최시형도 국권을 침탈한 일본군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박용규 연구위원은 최근 출간한 저서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인간과 자연사)에서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의 태두인 고(故) 조동걸(1932~2017)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의 주장을 이어 받아 “갑오의병(1894)과 을미의병(1895)사이에 있는 2차 동학농민혁명(1894)도 독립운동사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2차 동학농민혁명에서 일본군에 희생당한 명단도 정리했다. 일본군에 총살, 사살, 사살, 작두형, 화형을 당해 서거한 순국자 11명과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거나 체포돼 총살을 당한 순국자 6명, 자결한 순국자 2명 등 총 119명이다.

특히 총사령관이었던 전봉준이 일본군 미나미 고시로 소좌가 취조한 공술서의 내용을 통해 2차 동학농민혁명이 항일 독립운동의 성격을 가진다고 부각한다. 당시 전봉준은 “7월 일본군이 경성에 들어가 왕궁을 포위했다는 것을 듣고 크게 놀라 동지를 모아 이를 쳐서 없애려고 다시 군대를 일으켰다”고 진술했다.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에 대한 기록도 있다. 책에서는 “최시형은 1894년 10월 충청도 보은에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의 명교(名敎)를 내린 뒤 1898년 (일본에) 체포돼 처형됨”이라고 나와 있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독립유공자법)을 인용해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 대한 서훈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법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자는 순국선열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저자는 이들이 서훈을 받지 못한 이유를 투쟁의 주체에 두고 있다. 양반이냐, 농민이냐이다. 실제 일본군을 몰아내다가 순국한 을미(1895)·을사(1905)·병오(1906)·정미의병(1907) 참여한 양반유생 2671명은 정부에서 1962부터 독립운동 서훈을 받기 시작한 반면,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항일 농민(전봉준 등)은 지금까지 단 한명도 서훈이 이루지지 않았다.

저자는 “2차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운동의 공통점은 일본의 침탈에 맞선 반침략·반외세 민족운동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며“양반 유생이 주도한 의병운동은 서훈하고, 항일 농민이 주도한 2차 동학농민혁명은 서훈하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불공평한 처사”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국가보훈처가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해서도 ‘독립유공 훈장’을 추서해 진정한 명예회복을 해주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박용규는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사학과 박사로, 한글학회 연구위원과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2012), <우리말 우리역사 보급의 거목 이윤재>(2013), <조선어학회 33인>(201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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