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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작가 - 김근혜 저 ‘유령이 된 소년’

우리는 살아가면서 간혹 자신의 신념을 버리거나 의도하지 않게 왜곡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때때로 불안하고 흔들리는 경우가 있다. 특히나 청소년기의 불안에 대한 농도는 성인의 그것보다 더 아프게 다가온다. 이러한 불안으로 흔들리는 신념과 가치관을 다잡기 위해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얼마 전, 김근혜 동화작가가 청소년 소설 <유령이 된 소년>을 출간했다. 전주 한옥마을을 따라가다 보면 곤지산에 위치한 초록바위가 있다. 이곳은 천주교 신자들의 참수 터였다. 작가는 참수 터에 세워진 소년 조형물을 보고 소설을 구상했다고 했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은 아버지와 신념을 버리고도 목숨을 잃은 홍이를 통해 단우의 성장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주인공 단우에게는 등반가인 아버지가 히말라야로 등반하러 가서 실종되는 일이 발생한다. 엄마와 단우의 일상은 깨지고, 방황하는 단우를 데리고 결국 엄마 고향인 전주로 내려오게 된다. 전학을 왔지만 단우아버지의 실종 사건은 꼬리표처럼 다시 단우의 상처를 건드는 사건에 휘말린다. 이일로 국회의원 아들인 경준이와의 갈등은 학교폭력위원회에까지 불려가게 된다. 폭력의 결과는 봉사활동으로 이어졌고, 그러다 초록바위진혼제를 우연히 보게 된다. 진혼제를 보고 곤지산으로 발길을 돌려 천주교 신자들의 참수 터였던 곳까지 귀신에 홀린 듯 올라간다. 그곳에서 이상한 차림으로 서 있는 아이 홍이를 만나게 되고, 그 아이가 천주교 신자였지만 신념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배교한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가족의 만류에도 산으로 간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뒤섞여 반항과 일탈을 일삼던 단우에게 홍이와의 만남은 아버지의 산에 대한 신념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아빠는 가족을 버리고 자기 목숨을 멋대로 내던졌고, 엄마는 우울증에 빠져 하나밖에 없는 자식은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나도 내 멋대로 사는 거다. -작품 중에서 단우는 아빠가 그리웠고 엄마의 위로가 필요했다. 혼자서 아버지의 부재를 이겨내기에는 어렸다. 그 아픔을 일탈과 폭력으로 채웠지만, 주변의 선생님과 성당 아저씨, 엄마의 사랑으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일상으로 데려온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나만을 위한 선택이었어도 그게 다른 부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선택이 늘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선택의 결과가 대부분 시행착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행착오는 삶을 더 단단해지도록 한다. 어른들의 기준으로 평가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 힘겨운 과정을 문학과 함께 한다면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문학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책을 읽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자신과 사회에 묻고 싶은 부조리와 불합리한 것에 대한 끊임없는 대화가 가능하다. 따라서 《유령이 된 소년》을 통해 청소년 독자들이 스스로에게 수많은 질문을 떠올리고 성장의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단우와 홍이에게 이 책을 권한다. /동화작가 이경옥

  • 문화
  • 기고
  • 2021.07.28 16:4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아현 작가 - 시시 벨 저, 고정아 역 '엘 데포'

언제인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믿었다. 어느 날은 학교의 지붕이 열리고 로봇을 조종하며 세계를 구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표지가 귀여워 집어 든 『엘 데포』에서 어린 시절 나의 슈퍼 파워를 다시 찾아냈다. 후천적으로 청각장애를 얻은 시시는 학교에 가기 위해 고성능 보청기를 착용해야 했다. 가슴께가 불룩 튀어나오는 기계를 매달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선생님에게 다가가 마이크를 건네야 했다. 종일 마이크를 목에 걸고 다니는 담임 선생님 덕에 시시는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게 됐다. 시시는 남몰래 이걸 슈퍼 파워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아이들과의 관계를 쌓는데도 이 보청기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엘 데포(시시의 영웅 이름)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슈퍼 파워를 사용했습니다. 보청기를 들고 싱클맨 선생님이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알아내는 일이었지요.(엘 데포 中)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자습시간, 반 아이들이 모두 떠들 때도 시시는 선생님이 교실로 돌아오는 타이밍을 맞출 수 있었다. 아마 아이들에게는 영웅이나 다름없는 재능처럼 보이기도 했을 테다. 나는 오래도록 아토피를 앓고 있다. 어릴 때는 팔과 다리에만 일어나던 피부 습진이 성장기를 지나면서 손과 발에 자리 잡았다. 손에 힘을 주는 대부분의 일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고등학생이 되도록 양손의 악력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에 머물렀다. 덕분에 나는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많았다. 특히 혼자서는 캔이나 페트병 음료를 열 수 없는 상황을 자주 마주쳐야 했다. 집에 혼자 남아 생수병을 열기 위해 시도하다 마음처럼 되지 않아 소리를 지르며 잔뜩 성을 냈던 적도 있다. 하지만 매번 혼자 남을 때마다 물을 마시지 않을 수도, 계속 화를 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지렛대의 원리를 정확하게 활용하는 아이가 되었다. 지렛대는 어디에서든, 무엇으로든 재료만 있다면 만들어낼 수 있었다. 영수증도, 작게 찢은 조각도, 여러 번 덧댄 실도, 가위도! 남들과 다른 것?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 되었습니다. 약간의 창의력과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 어떤 다름도 놀라운 것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과 다른 것이 우리의 슈퍼 파워 입니다.(엘 데포 中) 손이 불편해 별수 없이 무엇이든 지렛대로 만들던 상상력은 나의 특별한 능력이자 슈퍼 파워가 됐다. 이제는 손에 힘이 없는 것은 큰 어려움이 되지 않는다. 나에게는 수많은 도구가 있으니 말이다. 몇 달 사이 10년이 넘도록 유일하게 멀쩡하던 엄지손가락에도 피부염이 번졌다. 엄지손가락이 편안하지 않은 삶에 또다시 적응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엘 데포』를 만나 꽤 많은 불안이 정돈됐다. 나는 도구를 무척이나 잘 쓰는 사람이니까 또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는 상상력이 있잖아! 하고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07.21 16:3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헌수 작가 - 찰리맥커시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여름은 울창하게 뻗어간다. 마음의 구멍들은 저녁거리를 헤매기도 하고 밤하늘에 수많은 별을 세기 바쁘다. 유쾌하지 않은 나른한 삶, 살다보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과 마음이 축 처지는 날이 있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괜시리 심통이 나고 힘들다는 생각에 주저앉을 때가 많다. 팍팍한 삶 앞에서 부족한 나를 발견하고, 완벽함을 쫓느라 마음이 불편할 때면 오롯이 집중하며 그림을 그리고 그림책 보는 걸 즐긴다. 수많은 선들이 교차하는 해칭연습을 하면서 그 안에 무거운 짐도 풀어놓고 스트레스를 날리곤 한다. 책상위에 놓인 그림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찰리맥커시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이다. 논리적인 설명도 없고 미사여구도 없고 삽화도 화려하지 않았다. 어디서나 펼쳐보기 좋은 얇은 두께, 글밥이 적고 드로잉이 맘에 들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선문답처럼 주고받는 대화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그림에 빠져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소년은 두더지, 여우, 말을 만난다. 삶의 궁금한 점이 많은 소년과 케이크를 좋아하는 두더지, 상처받아 말 수가 적은 여우,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지닌 말이 나온다. 서로가 견고한 유대와 사랑을 나누며 삶의 문제를 대화하며 나아간다. 주인공 소년이 동물에게 질문하고 그 동물이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것으로 전개되는 그림책이다. 네 명의 친구들이 주고받는 소박하면서도 애틋한 대화와 우정, 그리고 반려견이 밟고 지나가 그림에 그대로 남은 강아지 발자국까지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각각 그대로 완결된 작품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짧은 글과 그림, 좋은 글귀들이 가득했다. 네 컵은 반이 빈 거니, 반이 찬 거니? 두더지가 물었어요. 난 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은데. 소년이 말했습니다. 난 아주 작아. 두더지가 말했어요. 그러네. 소년이 말했어요. 그렇지만 네가 이 세상에 있고 없고는 엄청난 차이야. 살면서 얻는 가장 멋진 깨달음은 뭐니? 두더지가 물었어요.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는 것.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어떤 것도 친절함을 이길 수 없어 말이 말했어요. 친절함은 조용히 모든 것을 압도해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어. 소년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도 뒤돌아 봐. 말이 말했습니다. 멀찍이 걷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은 서로에게 기대어 토닥여주며 힘든 길을 걸어간다. 덤덤한 말투로 대화하는 장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128페이지 분량의 서정적인 그림체와 짧은 글귀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내 안의 답을 찾기에 충분했다. 말없는 여우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와 듬직한 말의 위로의 문장들까지 마음에 큰 자유를 줬다. 짧지만 담백하게 풀어나가는 대화 속에서 진정한 나는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것을 느꼈다. 삶의 여러 단면이 이들의 대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찰리맥커시는 사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림은 언어의 바다를 통과해야 닿을 수 있는 섬과 같다라고 말하며 글과 그림에 서사를 따라 가지 않고 무언가 따뜻하고 편안한 긍정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힘들어도 버틸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며, 모든 살아가는 힘의 근원이며 원천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때론 무척이나 포괄적인 사랑 앞에서 나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삶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타인에 대한 미움과 의심은 우리 주변의 아름다움에 집중해 보면 보잘 것 없어 보인다. 서로에게 기댈 수 있다면 어떤 큰 문제가 닥쳐도 호젓하게 지나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한다면 폭풍우도 무사히 넘길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며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존재로 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존재를 인정하는 소년의 말에 깊은 성찰을 갖게 된다. 코로나19의 끝이 보이지 않아 참담하다. 묵묵히 자기자리에서 일상을 지켜내고, 어려운 상황을 잘 대처하고 있는 모두를 토닥토닥 해주고 싶다. 가볍게 읽어도 좋고 깊게 읽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책, 내면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 한 자락을 잡고 싶을 때 꺼내보면 좋은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지치고 힘든 어른들에게 위로가 되고 삶에 대한 고찰이 녹아있는 그림책, 두고두고 아껴 읽고 싶은 책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07.14 17:1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이영종 시인 -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우리는 던져진다. 태양계 끝에서 바라보면 해쓱한 푸른 점에 맡겨진다. 첫 울음은 이 땅에서 수행해야 할 미션을 말하고 있지만 들을 수 없다. 가보지 못한 곳이 수두룩하다. 언제든 아픔이 끓는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세포에 감겨있는 디엔에이를 풀면 명왕성(소행성 134340)까지 다다른다. 그 속에 해야 할 일과 잘 하는 일이 담겨있다. 어떤 에이아이도 모퉁이를 돌아가는 사랑의 아련한 그림자에 가슴 뛰지 않는다. 1922년 6월 21일,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 내무 인민위원회 소속 긴급 위원회에 출두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에이모 토울스의 두 번째 장편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름을 말하라는 비신스키 검사에게 백작은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 경마 클럽 회원, 사냥의 명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 쓸데 없는 그런 작위와 칭호들은 얼마든지 가져도 좋소라고 말하는 검사에게서 백작의 나락을 읽을 수 있다. 백작은 죽을 때까지 메트로폴 호텔을 나올 수 없다. 한 걸음이라도 호텔 밖으로 나간다면 총살될 것이다. 백작은 학문과 사회생활로 다져진 품격을 지니고 있고, 문학를 사랑하며,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진 그야말로 신사다. 자유로움을 가지려면 자유롭지 않은 상태를 겪어봐야 한다는 듯 그곳은 쓰라린 일로 가득하다.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가려면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해야 일어날 수 있을까. 우리는 자신의 날개로 난다.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 입에 갈대를 물고 나는 기러기처럼 지혜를 다해 허허로운 들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우고, 꽃을 피운다. 백작은 호텔에서 만나게 될 니나와 그녀의 딸 소피아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경제적 숙명, 문화, 지식, 심리, 사회, 신체, 언어의 감옥을 넘는다. 깃펜으로 펜싱을 하는 백작은 우리 모두에게서 장점만을 찾아내고자 하는 사나이다. 소피야가 달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다 하더라도 음 하나하나를 다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으므로, 현명한 지혜를 긍정적인 자세에서 찾으려 한다. 백작은 똑바른 자세는 침착성과 참여 정신의 소유자라는 느낌을 준다며, 6미터 되는 방에서 50킬로미터를 걷는다.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의 궁정 만찬 모임에 갔을 때 그를 헬레네 옆에 앉히지 않았더라면 트로이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며, 자리 배치의 중요성을 말한다. 백작은 소량의 후추가 스튜를 변화시키듯, 온도계의 미세한 변화에 의해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는 한 번도 일정을 정해놓고 살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고, 점심 식사 전에 온전히 충실한 시간을 보냈으므로 오후에는 현명한 자유로움을 누려야 한다고 믿었으며, 시작과 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들에 몰입해야 한다라고 생각한 신사였다. 사람을 보는 그의 눈은 버들가지의 눈을 닮았다. 서성거리는 경향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첫인상은 하나의 붓 터치가 우리에게 보티첼리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칵테일의 재료는 각자의 농담에 웃어줄 수 있고 각자의 실수를 눈감아줄 수 있는, 그리고 대화 중에 서로에게 소리 지르지 않는 두 가지로 한정되어야 한다. 부모는 아이를 안전하게 키움으로써 목적 있는 삶을, 그리고 신이 허락한다면 만족스러운 삶을 경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해야 하고, 우려를 표명한 다음에는 세 발짝 물러서야 한다. 우정이나 유무 보존의 법칙을 말하기도 한다. 우정의 지속 기간은 결코 시간의 흐름에 좌우되는 게 아니다. 베토벤을 귀먹게 만들고 모네를 눈멀게 만든 바로 그 신이 우리에게 준 것을 나중에 와서 반드시 회수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경제와 심리에 우레를 친다. 백작이 속삭인다. 목욕부터 해. 뭘 좀 먹고 와인도 한잔하라고. 그리고 밤새 푹 자도록 해.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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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16 16:3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작가 - 전은희 ‘웃음 찾는 겁깨비’

춤추고 노래하고 장난을 좋아하는 도깨비는 옛날부터 우리에게 친근한 존재이다. 때로는 무섭고 심술궂기도 하지만 순박하고 어리숙한 모습으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도깨비. 어렸을 때 우리는 도깨비를 상상하며 신기하고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곤 했다. 전은희 작가는 옛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도깨비를 요즘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새롭게 탄생시켰다. <웃음 찾는 겁깨비>의 주인공 겁깨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겁이 많은 어린 도깨비이다. 인간을 골탕 먹여야 도깨비 방망이의 에너지를 채울 수 있어, 대장깨비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온다. 그런데 도깨비 방망이를 잃어버려 그걸 주운 건호를 따라가 한바탕 소동을 겪는다. 건호는 도깨비 방망이를 주는 대신 하루만 학교에 같이 가달라고 부탁한다. 겁깨비는 아이들을 골려주고 겁을 주고 교실을 엉망진창을 만든다. 하지만 나중에는 교실에 눈을 내리게 하고 바닥을 매끈한 얼음판으로 만들어 함께 신나게 논다. 그 과정에서 인간을 골탕 먹일 때보다 인간에게 웃음을 줄 때 방망이의 에너지가 더 강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기로 핸드폰을 충전하듯이 인간을 골탕 먹여야 도깨비 방망이의 에너지를 채울 수 있다는 설정과 겁이 많은 도깨비라는 새로운 캐릭터는 이 작품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고리타분하고 낡은 이미지의 도깨비가 우리 반 친구처럼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은 생동감을 준다. 천둥 같은 소리로 방귀를 뀌는 아빠와 큰소리로 건호를 야단치는 엄마를 보며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겁깨비의 모습에 아이들은 마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동질감을 느낄 것 같다. 아이들은 이 작품을 읽으며 겁깨비라는 새로운 친구를 만나 즐겁게 웃고 즐기는 경험을 할 것이다. 세련되고 멋진 모습의 전은희 작가가 옛 이야기나 우리 신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 의외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간 써온 작품들을 보면서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소재지만 새롭고 낯설게 접근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반짝임을 만들어 내는 작가라는 걸 알았다. 앞으로도 우리 아이들이 책 속에 푹 빠져서 신나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멋진 작품들을 순풍순풍 써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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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09 16:3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 - 박상재 ‘아바타 나영일’

선배동화작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조언이 있다. 많이 읽어라. 아마 이 말은 동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박상재 작가 또한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보는 일을 꾸준히 실천해야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박상재 작가는 전북 장수 출신으로, 순창군에서 처음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작품 천방지축 오찰방은 그가 자라난 곳, 장수군 계북 초등학교가 동화 속 참샘 초등학교가 그 모델이 되었다. 그렇다면 작가가 되기 위한 조건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야 할까보다. 많이 경험하는 것, 작가의 경험이 좋은 배경이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는 곳간에 모아둔 귀한 씨앗과도 같다. 박상재 작가의 많은 작품 중에는 아바타 나영일이란 저학년 인성동화가 있다. 동화 속 나영일은 집에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학교나 소풍을 가서도 엄마의 지시를 받는다. 나영일, 스스로 결정해 능동적으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영일은 일기를 쓰고, 엄마가 그것을 읽는다. 그리고 어이없게 잘 썼다고 칭찬을 해준다. 누구의 일기인지 알 수 없다. 나의 첫 동화 레오와 레오 신부의 주인공 레오는 나영일과 비교하면 혁명을 일으켰다. 내 길은 내가 갈 거야.라고. 어느 날 영일이네 반은 실내 스케이트장에 가게 된다. 엄마는 전에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준다는 아빠를 위험하다는 이유로 포기시킨 적이 있었다. 막상 느닷없이 스케이트를 타려니 두려운 영일에게 민수가 다가와 스케이트 신는 것을 도와주며 말한다. 영일아, 무서워하지 마. 엉덩방아 몇 번 찧을 생각하면 돼. 넘어져도 아프지 않아. 아이가 어른보다 낫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체험을 말리는 엄마 탓으로 엄마가 없으면 모든 게 두려워지는 영일이다. 그런 순간 영일아! 두려워하지 마.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 겪어봐!라며 친구 곁에 지켜준다. 그럼에도 벌벌 떠는 영일이를 보고 민수는 야, 나영일. 네가 스스로 해 봐. 난 몰라!하며 영일이 손을 뿌리치고 가버린다. 민수는 볼모지에 친구를 버리고 간 것이 아니다. 스스로 부딪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 스스로 해 봐!라고. 그때부터 영일이는 한 발, 한 발 스스로 내딛기 시작하고, 나의 결정이란 의미를 찾아간다. 자신의 과오를 너무 빨리 깨닫는 엄마를 보며 급속결말에 웃음이 나오지만 요즘 아이들이 반드시 직면해야 할 소재를 다룬 동화다. 이밖에 박상재 작가는 도깨비, 장승, 솟대, 허수아비, 고무신, 도자기 등을 문화를 소재로 한 동화를 많이 썼다. 틈만 나면 동화의 글감이 될 만한 소재를 찾기 위해 각종 매체에 관심을 갖고,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글감을 찾기 위한 노력은 작가들 모두의 공통과제다. 동화의 독자는 어린이다. 하지만 아바타 나영일은 읽을 필요가 있는 어른들이 많다. 아이들을 조정하려는 부모, 어쩌면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을 수 있다는 동화의 이점을 볼 수 있다. 박상재 작가의 아바타 나영일을 통해 세상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사유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지길 바란다.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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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02 18:2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시인 - 이충렬 ‘간송 전형필’

작년에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품을 경매로 내놓는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비록 상속세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간송미술관을 아끼던 이들이 우려를 표명했고,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매입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최근에는 이건희 회장이 평생 모았던 예술품 기증 또한 사람들의 뜨거운 화젯거리였다. 이처럼 특별한 예술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많은 관심이 쏠리고 사람들의 뜨거운 주목을 받곤 한다. 우리 문화재를 이야기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간송 전형필이다. 어쩌면 문화재에 대해 무관심한 이라도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보지 않았을까? 나 역시 일제 강점기 시절 그가 일본에 뺏길 위기에 처한 우리의 문화재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오세창의 가르침을 받고 이후에 한국 문화의 지킴이로 거듭 나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다룬 책을 접하기는 처음이다. 이 책은 단순한 인간 전형필의 일대기를 넘어선다. <간송 전형필>은 우리 문화의 자존심을 지키고 우리 문화의 숨결을 지켜내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던 한 인간의 일대기이자 살아 있는 역사이다. 문화에 대한 인식이나 개념이 희미하던 때, 그 가치를 모르고 귀한 서화들이 불쏘시개로 전락하거나 헐값으로 고물상에 팔리던 시절이 있었다. 덩달아 우리 문화재에 대한 가치 역시 한없이 추락하던 시절이었다. 그 자리에서 묵묵히 우리의 문화재를 굳건히 지켜낸 이가 바로 전형필이다. 일부 허구적인 내용이 곁들여졌지만 그래도 간송의 생애 전반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그가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우리 곁으로 다시 돌리기 위해 일본인 수집가들과 벌였던 협상과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1930년대의 박진감 넘치는 당시가 떠오른다. 자칫하면 일본인의 개인 수장품으로 또는 일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을 수도 있었던 수많은 귀중한 우리의 문화재들이 간송의 도움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조상 대대로 살아온 것처럼 만석꾼으로 그냥 편하게 살아도 되는 삶이었다. 물려받은 재산을 흥청망청 쓴다고 해도 누가 무어라 했겠는가.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개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만약 그가 우리 문화재에 대해 무관심하고 개인의 향락에만 취했더라면 우리 문화의 한 부분은 지금쯤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글의 제작 경위를 알려주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그렇고, 국보로 지정된 청자와 백자, 그리고 수많은 서화가 그렇다. 이 책은 간송의 일대기를 다룬 이야기이지만 우리 문화재에 무관심했던 우리 조상에 대한 반성을 떠올리게 한다. 책을 읽는 내내 왜 그때 우리는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던가. 그 시절 우리는 왜 우리 문화재를 그렇게 다룰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회의가 무수히 들었다. 비록 지금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지만 당시 간송이 안타까워했던 것처럼 우리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지는 않을까. 그게 꼭 문화재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05.26 18:0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정경 시인 - 타탸나 루바쇼바, 인드르지흐 야니체크 ‘ROBOT’

지난 2월, 서울에서 지인과 만나 점심을 같이 먹을 때의 일이다. 밀린 안부를 나누는 우리 등 뒤에서 고객님께 맛있는 음식을 가져가는 중입니다라는 음성이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돌아보니 로봇이었다. 서빙하는 로봇이라니! 지인과 나는 음식을 나르는 로봇의 뒤꽁무니를 눈으로 졸졸 쫓았다. 지난 주말에 광주비엔날레에 다녀온 회사 동료는 전시 안내를 로봇이 하더라는 얘기를 했다. 코로나-19의 장기화가 첨단기술의 발전을 가속화한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지만, 나와는 먼 얘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치 누군가 명령어를 입력한 것처럼 나는 책장에서 『ROBOT』을 꺼내 들었다. 『ROBOT』은 체코의 시나리오 작가 타탸나 루바쇼바와 일러스트레이터 인드르지흐 야니체크가 협업하여 만든 책. 이 그래픽노블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인류가 사라진 지구에서 인간의 흔적을 탐사하는 로봇들의 탐험기쯤 되려나. 비옷을 입고 다니는 과학자 로봇 윌리엄과 모자를 쓴 탐험가 로봇 메리웨더는 자원을 찾고 그들 종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새로운 영토를 탐사한다. 오래전에 인류는 사라졌고, 인간 없는 세상은 산과 강, 광활한 자연으로 가득하다. 그들의 도시를 둘러싼 성벽 바깥세상은 온통 처음 보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것이 경이롭다. 윌리엄과 메리웨더는 숲을 헤치고, 절벽을 오르고, 동굴 속을 걸으며 발견한 인류의 유물들을 엉뚱하게 해석해 낸다. 인류와 로봇 종족의 비밀을 밝혀낼 귀중한 증거로 수집한 표본은 선이 꼬인 이어폰, 리모컨, 알람 시계 같은 것들. 프로그래밍된 기계답지 않게 천진난만하고 수다스러운 두 로봇과 함께하는 모험은 유머와 재치가 윤활유가 되어 고단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해준다. 호기심도 많고 겁도 많은 윌리엄과 용감하지만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메리웨더의 조합도 흥미롭다.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두 로봇의 여정을 실크 스크린 기법을 응용해 시원시원하게 표현한 장면들도 탐험의 즐거움을 더한다. 『ROBOT』의 한국어판을 담당한 편집자는 우연히 체코 프라하를 여행하다가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고, 얼마 후 다시 우연히도 프라하에 살게 되었으며, 또 다른 우연이 겹쳐 책을 샀던 서점의 주인이자, 일러스트 작가인 인드리히의 작품 『ROBOT』을 국내에 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 세계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혼란과 위기에 빠져 있었던 2020년도에 그는 프라하의 작은 아파트에 격리되어 한국어판 로봇 탐험기를 만들었다. 그는 불길한 예감과 불안이 오히려 이 책을 통해 옅어졌노라고 소회를 밝혔는데, 나 역시도 그랬다. 세계 곳곳에서 생태주의적 가치를 일깨우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멀리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그들을 지지하는 시를 쓰는 전주의 시인들이 있고, 구호물품을 보내는 시민들이 있다. 살기 위해 우리가 버린 것들과 끝내 지켜내고자 한 것들의 총합이 인류의 내일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어둡고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구체적이고 단단한 희망을 발명해 내는 존재라는 믿음을 간직하기로 한다. 문득 궁금해졌다. 오월의 아찔한 아까시 향기와 붉은 덩굴장미, 붕붕거리는 벌들과 연약한 듯 한없이 가벼운 나비의 날갯짓을 윌리엄과 메리웨더는 어떻게 명명할까? △김정경 시인은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검은 줄」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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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19 18:2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경종호 시인 - 박성우 ‘마음 곁에 두는 마음’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시적인 것들을 만나곤 한다. 그 순간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과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시로 빚어내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후자를 시인이라고 한다. 그래도 난 시적인 것들을 찾아내는 눈 맑은 사람이면 모두 시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시를 쓰는 사람도, 시적인 것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도 참 좋아한다. 오늘은 시인이고, 시적인 것을 항상 곁에 두는 시인의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박성우 시인의 산문집 마음 곁에 두는 마음]이다. 희노애락. 우리는 어떤 것들을 더 많이 기억할까? 기쁨, 화, 슬픔, 아니면 즐거움. 모두 기억하고 살 수는 없겠지. 그래도 기억이라는 것은 사람의 일인지라 잊혀질 것은 적당히 잊혀질 것이고, 남는 것은 또한 남을 것이다. 그들의 인생에서 꽤 중요했던 어떤 순간들이. 권영상 시인의 누가 지우개를 주면서 라는 동시가 생각난다. 지우고 싶은 날이 있으면 지우라는. 그리고 시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아이는 선뜻 지워버려도 좋은 날은 내게는 없었습니다 하고 말한다. 박성우 시인의 마음 같다. 이 책에는 80편의 이야기가 있다. 작가는 80여 개의 기억들을 꺼낸다. 오후 3시에 찾아오는 고양이, 녹색 어머니회 아침 봉사, 상추를 문 앞에 놓고 가신 할머니, 모교의 학교에서 청소부 일을 하신 어머니, 봉제공장에서의 20대, 밥 한 끼 같이 먹은 사람의 이야기까지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얘기하듯, 나른한 오후 커피숍에 앉아 식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중얼거리듯 풀어낸다. 몇 년째 나는 1년에 한 번씩 어느 단체에서 주관하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라는 주제로 처음 글쓰기를 접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 있다. 이분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대단하고, 중요한 것만이 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년 동안 나는 그것이 아닌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가 더 재밌다, 다른 사람에게 없는 내 사소한 이야기가 최고의 글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곤 한다. 이 책을 만난다는 것은 이에 대한 좋은 경험이 될 것이고, 또한 읽는 것을 즐기는 누구나에게도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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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12 18:1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지호 소설가 - 오주석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입춘 며칠 전 이웃 할아버지께서 허드렛물 흘려보내는 도랑을 정리하고 계셨습니다. 장마를 염두하고 도랑의 살얼음 낀 진흙을 힘겹게 퍼내고 계셨습니다. 여름이 아직 멀었는데 어찌 서두르시냐 여쭈니 지금이 도랑을 정비해야 할 그때라고 무던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불편하지만, 마음은 정정하신 분이니 이치에 닿는 말이라 믿고 돕기는 했으나 그 말씀을 온전히 믿지는 못했습니다. 잡초가 자라지 않은 살짝 얼어있는 진흙을 퍼내는 일은 입춘을 앞두고 몸을 풀기에 맞춤한 일이었습니다. 일에 신명이 붙을 때쯤 마실 다녀오시던 이웃 할머니께서 이때가 그때라며 좋은 날을 골라 도랑을 정비한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때서야 할아버지에게 남은 믿음을 내어 주며 늙은 농부처럼 몇 계절 너머를 보는 이도 없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이도 드물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씨앗 안에 담겨 있는 우주, 오묘한 세상살이의 이치 등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경험과 연륜, 혜안이 있어야 하고, 보는 방법도 조금 배워야 하지요.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유추 할 수 있다는 것, 마음을 열고 애정을 가지면 시간과 공간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감각의 전이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런 것이 있다는 것,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고 배운 책이 「오주석의 한국의 美(미) 특강」 입니다. 잘 가르쳐 주셨으나 저는 좋은 제자가 아니어서 아직도 이 책을 옆에 끼고 읽고 또 읽습니다. 이 책은 한국화를 보는 방법을 설명하는 책입니다. 옛사람의 마음으로, 그림의 대각선 길이를 고려해서, 우상에서 좌하로 시선을 이동하며, 선과 여백을 따라 찬찬히, 논리와 이성,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서 등 그림 감상의 여러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방법도 방법이지만 대상을 보고 대하는 작가의 그 곡진한 마음을 배운 것을 저는 더 고맙고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도 스무 살을 갓 넘은 나이에 눈은 도구일 뿐이며 마음이 읽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함의를 헤아릴 수 있으며 객관적 사실을 전제한 실체적 감동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만져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배워 퍽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배운 그 방법과 마음은 글을 읽고 쓸 때, 사람과 세상, 예술 작품을 마주할 때 등 여러 곳에서 요긴한 도구가 되어 저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글을 읽을 때 마음이 아니라 눈으로만 읽을 때가 많습니다. 배운 것을 잊고 오만방자한 학생이 된 것이지요. 특히 시가 그렇습니다. 제가 오독 하고선 이미지를 통해 에둘러 말하는 시의 의미 전달 방식 때문이라고, 시인이 절제하고 덜어내는 과정에 너무 충실했다고 핑계를 댑니다. 문제는 조리개를 조절하지 못했던 제 마음의 눈과 함부로 셔터를 눌렀던 제 이성이었는데요. 시의 향기는 맡지 못하고 표현의 화려함만 찾았던 제 오감 때문이었는데요. 그래서 이 책은 당신도 당신이지만 저에게 추천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밀려가 그것들에 닿게 하는 방법을 다시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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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05 18:0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정숙인 소설가 - 박병윤 채록시집 ‘홍시 먹고 뱉은 말이 시詩가 되다’

하늘의 별이 그대로 쏟아지는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 사봉리, 수만리, 신월리, 만경강 발원 샘으로부터 시작된 시인의 마을에는 누가 살까? 다섯 살부터 백 세까지, 어머니는 눈물이 죽죽 흘러 자운영꽃을 적시고, 곶감 박사는 야생 고욤나무에 접을 붙여 고종시를 만들고, 밤티마을 다섯 살 채언이는 강아지 미오와 딸기와 놀고. 반딧불이가 마당을 밝혀주면 시인의 이름을 낱낱이 호명하며 고향을 가슴에 담는다. 강영옥, 구만옥, 국승구, 국중하, 권구연, 길영숙, 김금석, 김기화, 김명옥, 김미애, 김영두, 김영미, 김용만, 김정환, 김종환, 故 김진갑, 김초엽, 김형순, 김호성, 나동현, 박나윤, 박문수, 박영환, 박인현, 박종린, 박지현, 박채언, 방순임, 배창렬, 배학기, 백남인, 백성례, 설유정, 송남희, 송은영, 수만댁, 심옥수, 오경표, 오영만, 오정현, 유경태, 유승정, 유재룡, 이강현, 이계옥, 이귀례, 이기성, 이기순, 이노성, 이덕범, 이보영, 이승철, 이인구, 이형순, 인정식, 장영선, 전영안, 정영천, 정정순, 조인식, 조인철, 최경자, 최귀호, 황에스더, 경로당 분들.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마을 하나가 사라진다고 한다. 노인의 토막말은, 8대 오지奧地였다는 동상면 산골이 일제 강점기를 지나고 한국전쟁을 지나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 팬데믹을 거치는 동안 자신의 이름을 내걸지 않는 동상면 시인 면장에 의해 구술시로 태어난다. 동상면 주민의 삶은 그들의 것이고, 그들의 언어는 구술채록 시인에 의해 시가 되었다. 과거와 미래가 겹쳐진 현재의 기억을 수평적으로 흐르게 두고, 안전한 회상의 방법을 통해 한 개인의 삶이 생애사적으로 기록되고 저장되는 것이다. 1부 홍시 먹고 뱉은 말이 시詩가 되다 2부 호랭이 물어가네 3부 다시 호미를 들다 4부 문필봉에 뜬 달 5부 고향에 그린 수채화 6부 마을이 시詩시柿로 물들다 이렇게 6부로 이뤄진 드라마는 어떤 고향, 어느 마을, 누구의 이야기가 된다. 동상면의 다섯 손가락의 보물은 시의 모티브가 되고, 다시 동상골 삶터는 그림으로 재현된다. 동상 최고령 어르신의 삶터와 감칼/ 동상주조장과 막걸리 술항아리/ 시골살이 젊은 가족 꿈나무체험관찰학습장 이야기/ 장군봉이 지켜온 고종시 감나무/ 시인의 방이 된 어머니의 손때 묻은 옛 물건들 (동상골 삶터를 그리다, 부분) 감 깎기가 한창일 때 동상면 사람들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이 아니라 東上二夢, 동상 100년 역사 찾기와 동상주민 예술가 만들기, 동상면의 두 가지 꿈을 꾼다. 완주군은 비매품인 이 시집을 동상면의 동상이몽 시인의 마을공동체 육성 프로그램 교육과 홍보 자료로 활용하고, 독자들을 위해 곧 전국 서점에서 판매할 계획이다. 윤흥길 소설가의 서평처럼 깊은 산골 작은 고장 동상면에서 왜배기 대짜 물건이 돌출했다. 별다른 존재감 없이 살아온 촌로와 촌부들 중심으로 갑자기 시인집단이 출현한 것이다. 손수 글로 옮기지 못해 구술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그 무명 시인들의 가슴 속 통나무 안에 당초 누가 그토록 영롱한 시심을 심어놓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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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28 18:0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작가 - 최명희 소설 ‘혼불’

소리 내 읽으면 귀에 익은 억양이 감미로우나 새삼스럽다. 잊고 지내온 아득한 말들. 우리 유전자 어딘가에 숨어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쩍쩍, 입맛이 당긴다. 전라북도 곳곳에서 너나없이 쓰는 독특한 말이 숱하게 녹아 있는 최명희(19471998)의 대하소설 「혼불」. 작가는 첫 문장을 쓸 때부터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운율을 타고 가슴에 척 안겨드는 문장이 되도록 노력했다고 한다. 우리말 고유의 리듬과 울림을 고려해 쓴 최명희의 문장. 독자들은 이것을 혼불체라고 부른다. 「혼불」은 어둡고 암울한 1930년대, 전주와 남원, 만주를 배경으로 한다. 국권을 잃었지만, 여전히 조선말의 정신구조와 문화를 지탱하던 이중적인 시대에 처참하게 부서지고, 상처받고, 뒤집히고, 고뇌하며, 한없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삶을 그렸다. 작가가 선사한 문학의 혼은 그가 쓴 원고지 칸칸이 불꽃처럼 피어났다. 꽃심으로 전라도 정신을 되살렸고, 작품에 담긴 우리의 생활사와 풍속사, 의례와 속신 등은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콘텐츠로 성장하며 새로운 생명을 얻고 있다. 전라도의 역사와 삶을, 겉과 속내를 빠짐없이 담은 「혼불」이 있어 이 땅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 깊은 맛을 내는 도시가 되고 있다. 작가 최명희는 「혼불」을 통해 순결한 모국어를 다시 살리고 싶었다. 수천 년 동안 우리의 삶이 스며들고 우러난 모국어. 풍요로우나 피폐해 있는 현대인들의 정서에 본질적인 고향의 불빛 한 점을 전할 수 있다면,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근원적인 삶의 생명소가 있다면, 그것을 찾아서 한 시대의 인간과 문화와 자연을 언어로 건져 나의 모국에 한 소쿠리 모국어로 가득 바치고 싶은 간절한 소망. 언어는 정신의 지문(指紋)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자신을 사로잡는 명제는 전아하고, 흐드러지면서, 아름답고, 정확한 우리 모국어의 뼈와 살, 그리고 미묘한 우리말, 우리 혼의 무늬를 어떻게 하면 복원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말의 씨앗으로 「춘향전」「심청전」과 같은 우리 고유의 이야기 형태를 살리면서 서구의 것이 아닌 이 땅의 서술방식을 소설로 형상화하는 일. 기승전결의 줄거리 위주가 아니라, 낱낱의 단위로도 충분히 독립된 작품을 이룰 수 있는 장과 문장과 낱말을 쓰고 싶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그저 그런 이야기, 무심코 지나치는 이야기, 한 맺힌 이야기, 깊고 낮은 한숨, 꽃잎 피고 지는 소리, 골목 어귀 낮은 꽃들의 일렁임. 골짜기에 물이 모이듯이 그렇게 많은 이야기가 작가의 가슴 저 밑바닥으로 들어와 헤아릴 수 없이 쌓였다. 그것들이 뭉치고 어우러진 것들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불덩이를 이뤄, 결국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새긴 작품이 「혼불」이다. 「혼불」의 흔전만전한 언어의 잔치를 누리면 오히려 독자 스스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게 된다. 쓸쓸하고 마음 상하는 일이 유달리 많은 지금, 최명희의 소설 「혼불」을 다시 펼쳐야 하는 이유다. 마음 닿고 싶은 이에게 먼저 전하고 싶은 문장과 따뜻한 위로가 「혼불」에 있다. △최기우 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됐다. 희곡집 『상봉』과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인문서 『전주, 느리게 걷기』와 『꽃심 전주』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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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21 18:1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문신 시인 - 최기우 희곡 ‘조선의 여자’

역사는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압축할 수 있지만, 기억은 한 줄의 문장으로 추려 쓸 수 없다. 역사는 과거형으로 마침표 찍어도 되지만, 기억은 쉼표를 찍어가며 거듭 살아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삶은 역사의 문장으로 기록되지 않고 영혼의 노래로 기억된다. 이것이 극작가 최기우의 희곡집 <조선의 여자>를 읽고 난 대체의 감회다. 작가 최기우가 기억해 낸 일은 일제강점기 후반 조선 사람들의 심연이지만, 그가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막이 시작하면 가난이야 가난이야. 웬수녀르 가난이야라고 송동심이 부르는 노래는 우리 시대에도 유효한 탄식이다. 그러나 최기우의 손끝에서 야무지게 기록되는 것들은 진부한 가난 서사가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발생하는 인간적 윤리와 역사적 성찰의 부재야말로 뼈아픈 인간적 실책이라는 것이 <조선의 여자>에 기록된 기억이다. <조선의 여자>는 1943년 봄부터 1946년 겨울까지를 담고 있다. 기본 서사는 송순자, 송동심 두 이복자매가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서사의 본질은 제국화되어 있는 남성적 폭력의 허위성을 폭로하는데 있다. 가족 서사를 바탕에 둔 <조선의 여자>는 제국주의적 폭력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폭로하기 위해 가족 내 남녀의 권력 역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버지 송막동은 도박중독자로 반월댁, 세내댁 두 여성을 거느린다. 이 구도는 본부인과 첩을 공공연하게 거느렸던 전근대적 관계이다. 그러나 개화된 시대에도 이 구도는 아들 송종복과 두 딸의 관계 속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카피(copy)되어 있다. 이러한 상징 권력은 폭력으로 지탱된다. 송막동이 반월댁, 세내댁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일, 위안부 징발을 피해 부랴부랴 시집 간 송순자가 남편에게 당하는 폭력, 송동심이 헌병에게 당하는 폭력은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제국주의의 상징이다. 그러나 주목하고 싶은 것은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파멸시킨다는 작가의 관점이다. 위안부로 끌려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송순자와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고 자신의 손목을 도끼로 찍어버리는 아버지 송막동 모두 제국주의의 폭력에 희생되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상징폭력이 건재하며, 새로운 희생자를 찾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최기우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작가는 1945년 당시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문 낭독과 현재 일본 정부의 위안부 망언 관련 뉴스를 효과음으로 들려준다. 이렇게 반성할 줄 모르는 유령들이 환청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이 역사의 현장이다. 방심하는 순간 우리 역사는 왜곡된 기억으로 떠도는 사람 가죽 뒤집어쓴 승냥이들에게 처참하게 물어뜯길 것이다.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과 함께 희미해지다가 종국에는 사라지고 만다. 이것이 기억을 기록해야만 하는 이유다. 중요한 것은 기억을 기록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누락되는 진실을 얼마나 간절하게 지켜내느냐이다. 기록하는 사람의 양심과 기록하고자 하는 의도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여자>는 작가 최기우가 기록한 우리 시대의 진심이고자 한다. 그 진심 속에 역사와 시대의 양심이 뜨겁게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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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14 17:5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진숙 수필가 - 은유 ‘다가오는 말들’

새봄이 연둣빛 향기로 문을 열면 노랑턱멧새는 높은 울림으로 숲의 고요를 깨운다. 박새, 콩새, 딱새들도 봄의 노래를 부르느라 부산스럽다. 그 소리에 놀란 벚꽃은 하얀 나비 되어 날아간다. 학산, 고덕산, 경각산과 모악산, 모든 산들은 온통 산벚꽃들이 쏟아놓은 언어들로 가득하다. 그 말랑말랑한 봄 언어들을 엿듣는 이들에게 넌지시 건네고 싶은 책이 있다. 5부, 81개의 꼭지로 구성된 에세이집, 은유 작가의 〈다가오는 말들〉이다. 작가는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에 무지하고 자기와 서먹하기에, 글을 쓰면서 나를 알아가는 쾌감도 크다. 그렇게 마음을 다 쏟는 태도로 삶을 기록할 때라야 신체에 닿는 언어를 낳고 그런 언어만이 타자에게 전해진다(39쪽)며 최선의 나를 찾기 위해 글을 쓰라 한다. 나와 친밀해지고 앎의 작용이 일어난 후라야 타인에게 다가갈 언어가 피어날 수 있으리라. 한편 앎은 몸을 이기지 못한다(29쪽)며 관습적이고 현재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길 권한다.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서 어리석은 확신을 가질 때 초래되는 위험성도 또 하나의 폭력임을 알게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켜켜이 쌓여진 잘못된 관습과 편견에 사로잡혀서, 우물 안의 세상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허덕이는 인생의 가벼움에 대한 일침이다. 은유 작가처럼 사람들의 말들이 내게로 온다.(5쪽)고 고백하려면 먼저 내 마음의 창문을 열어놓는 밑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리라. 마음의 조리개를 열어 투명해진 눈이 되어야 당신의 삶에 밑줄(85쪽)을 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를 들여다볼 수 있을 때, 그에게 내 귀를 오롯이 심어놓을 때라야 그의 말들이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다가온 사람들의 말을 통해 이웃을, 내가 속한 세상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릴 때, 마음이 뜨거워 질 때, 국가 폭력, 가정폭력 및 성폭력, 일상의 폭력, 편견과 차별의 언어폭력(50쪽)을 알아챌 수 있다고 한다. 불의에 침묵하지 말고, 관습으로 처리하지 말고, 방치하지 말라한다. 맞서 싸우라한다. 삶을 담아낼 어휘는 항상 모자라고 삶은 언제나 말보다 크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작가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아집과 낡은 신념에 사로잡혀 있지 않나? 이웃의 별이 빛날 수 있도록 스스로 어둠으로 내려앉아 배경이 되어 줄 수 있는가? 내가 속한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묻고 답을 찾아갈 수 있다.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이란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가 소개한 많은 일화를 통해 먼저 이웃에 대한 몰이해와 선입견, 편견과 차별이 있었음을 반성하게 된다. 나아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당연한 것들을 빼앗기고 잘못한 것 없이 외면당하며 상처 받았을 아픈 영혼들, 아직도 울고 있을 그들의 삶에 나의 무관심과 무지도 한 몫 했음을 깨닫게 한다. 책임을 묻는다. 내가 먼저 옳은 방향으로 돌아서고 이웃에게 손 내밀어 함께 나아갈 수 있을 때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제보다 한 치라도 더 밝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얘기한다. 비록 어제는 연약한 어른이었으나 오늘은 진정한 어른이 되어 인생을 보는 눈이 한층 깊고 넓어지게 된다. 벚꽃 꽃말은 중간고사(293쪽)라는 중고등학생들 사이의 유행어가 아프게 다가오는 현실, 거기에서 길어 올린 겪은 일, 들은 말, 읽은 말들로 엮은 에세이 모음집,〈다가오는 말들〉. 작가는 봄 산에 충만한 새들의 소리와 난만한 봄빛 향기로 말을 건넨다. 이 이야기들이 내게 그랬듯이 다른 이들에게도 일상의 쉼, 생각의 틈을 열어주기를, 공감의 힘을 길러주는 말들로 다가오기를 바라.(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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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07 18: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시인 - 도혜숙 ‘고요를 끓이다’

자신에게 망명하는 순간이 있다.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급류에 휩쓸리다가 자신을 읽은 눈동자 하나가 날개를 휘저어 구름을 찢고 등고선 밖으로 날아간다. 길이 눕는 곳을 찾아 헤매던 중 늑골에 갇혀있던 비밀이 열리면서 그이는 기꺼이 자상(自傷)을 입고 객창(客窓)에 젖는다. 나는 그이를 시인이라 부르련다. 도혜숙 시인의 발화(發話)는 고요하다. 시인의 절대음감인 침묵은 격정적이거나 격앙되지 않지만 최대의 울림통을 만들어 낸다. 그 속에 휘발되지 않은 것들의 서사가 있고 서정의 지류에서 건져 올린 진실의 실루엣 같은 것들이 보인다. 어떤 진실은 연약해서 또는 너무나 강력해서 도사리기만 할 뿐 말해지지 않는다. 시인은 고요해져야 떠오르는 진실의 방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너와 당신의 진실이 함부로 발설되지 않고 온전하게 기거할 곳을 마련한다. 거기는 시인 자신의 공간이요 시간의 축적이기도 하다. 도혜숙 시인은 발설한 순간 훼손된 진실이라면, 내놓을 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오랜 시간 고민했을 것이다. 너무 쉽게 발설하는 진실들에는 고통의 패러독스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고요 속에는 이율배반적이게도 탈주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소용돌이친다. 낭창한 바이올린 소리, 피아노 연주음악, 러시아 민요가수의 노래와 먹먹한 빗소리. 그 시그널을 따라가다 보면 도처에 존재와 관계에 대한 페이소스가 짙다. 따라서 소리의 이미지를 침묵의 또 다른 버전으로 표현해내는데 시집 <고요를 끓이다>는 탁월하다. 그녀를 상념에 젖게 하는 것은 늙어가는 육체가 아니라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생긴 기억들의 역류다. 정신과 육체가 교섭하는 또는 그 불일치 속에서 균열을 드러내는 육체의 시간이 한결 가벼워진 몸이 되어 춘삼월 눈발처럼 내린다. 그리고 욕망의 끝에 다다른 성자처럼 폐기처분하지 못하고 오래 품어온 이야기를 정갈하고 기품 있게 풀어놓는 것이다. 누구의 삶이든 너무 많이 말해지는 것들은 경계해야 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사건건의 발화는 시의 길이 아니므로 시인은 침묵 사이사이 여백을 견지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이 고요를 끓이는 그녀의 방식이다. 너무 뻔하지도 야박하지도 않는 우아한 균형을 갖추고 있는 시인이 앞으로 길어 올릴 생성 값에 대해 모르지만 고요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어차피 아는 것을 쓰는 것은 시가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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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31 18:1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보윤 소설가 - 이시은 소설집 ‘고래 365’

이시은 작가의 소설집은 핫하다. 핫하다의 사전적 의미처럼 매력이 넘치고, 섹시하고, 열정적이다. hot한 문제적 인간들이 매 작품마다 등장한다. 그래서일까, 같은 주제나 같은 인물로 작품을 잇달아 지은 연작소설처럼 읽힌다. 이시은 작가는 교도소 안 곳곳을 돋보기로 들여다본다. 미셀 푸코는 개인이 처벌받는 것은 법률 위반 때문이 아니라 전체 사회와 대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근대 이후 교도소는 이런 개인을 처벌하거나 교정하는 공간이 되었다. 삭막한 시멘트 담장으로 둘러싸인 교도소는 세상과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작가는 굳게 닫힌 철문 안에서 벌어질 법한 일들, 처벌받는 개인과 교정하는 개인의 길항을 그려 낸다. <도어>의 상습절도 전과자 산들은 모범적인 수용 생활로 사소 자리를 꿰찬다. 야무지고 눈치가 빠르고 입이 무거운 그녀는 덜렁이로 통하는 유니폼의 빈틈을 노려 문어와 쪽지로 통방한다. 문어는 그녀에게 정치범 5가 병원에 실려 갈 정도로만 찌르라고 한다. 그에 대한 보상은 산들이 남의 집을 털며 평생 꿈꾸어온 집이다. <고래 365>의 나는 식품위생법 위반, 같은 방의 365번은 보건위생법 위반으로 수감된다. 나는 고래를 보러 갈 날을 앞당기기 위해 성실히 조리장으로 일한다. 그러나 출소는 요원해 보인다. 타투 일인자를 꿈꾸는 365번은 도구함 속의 칼을 양잿물 항아리에 깊이 숨겨 놓는다. 칼을 찾지 못한 담당은 문책을 당한다. 깊은 밤 나는 365번을 깨워 고래 문신을 부탁하고, 365번은 장미 가시로 땀을 뜬 자리에 칼날로 선명하게 선을 그려나간다. <층>의 유니폼 나는 교도관이다. 교정교화를 신뢰하지 않는 나와 달리 팀장은 수감자들과 끊임없이 소통한다. 유해화학물질 흡입으로 교도소를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조진자를 두고도 의견이 엇갈린다. 진자의 동거남이 사망하자, 팀장은 도리를 앞세워 휴가를 건의하고, 나는 믿을 수 없는 종이라며 반대한다. 진자의 귀휴는 나의 의견으로 불허된다. 순찰을 돌던 나는 진자에게 고무장갑으로 목이 졸린다. <달팽이 행로>에는 한때 연인이었으나 사형수와 사형집행인으로 만난 두 남자가 나온다. 사형제가 국회를 통과하면서 오랫동안 집행이 미뤄진 사형수들은 사형집행장이 설치된 곳으로 이송된다. 나는 순번제에 의해 석기의 형 집행자가 된다. 나와 헤어진 뒤 나와 닮은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연쇄 살인자가 된 석기에게 나는 석기가 좋아하던 흰색 운동화를 선물한다. 석기는 내게 편지를 남긴다. 운동화는 너무 깨끗해 신을 수 없었다. 운동화를 받는 순간 놀랍게도 내 모든 얽힌 감정들이 녹아내리더구나. 그들은 왜 교도소로 갔을까? 작가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핍진한 묘사로 복원한다. 고아로 마리아집에서 태어나 소녀원과 교도소, 갱생보호소를 거쳐 시립공동묘지에 묻히는 인생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인생의 문을 잘못 연 대가로 평생 미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연민한다. 미덕이 하나 더 있다. 작가는 작품 곳곳에 나무를 식재한다. 산수유나무 감나무 장미 소철 라일락 철쭉 층층나무 엄나무 굴참나무 왕버들 사이프러스. 땅을 가리지 않는 식물들은 어디서든 뿌리를 내린다. 소설 속 인물들의 욕망은 해를 향해 가지를 뻗는 나무들처럼 담박하다. 어쩌면 그들은 문제적 인간이 아니라 문제를 해체하는 사람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강렬하고 핫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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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24 17:5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길상 시인 - 코맥 매카시 ‘모두 다 예쁜 말들’

언제부터인가 교양소설 또는 성장소설을 멀리했다. 다른 말들은 술술 나오는데 이상하게 내면의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성장소설의 중요 문구가 눈에 띌 때마다 이 나이에 무슨 내면의 성장과 아름다움을 찾지라고 익살스럽게 말하면서도 괴롭지 않은 그 뻔뻔함에 괴로웠다. 성장소설 『모두 다 예쁜 말들』에서 그래디는 사물의 본질적 가치보다 교환가치를 우선시하면서도 교양인의 삶을 강조하는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의 속물적 근성에 환멸을 느낀다. 아버지와 이혼한 엄마는 수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목장을 팔려고 했다. 그래디는 그 세계에서 속물로 사는 것을 거부하며 방랑의 삶을 선택한다. 그런 방랑과 좌절을 통한 인간의 존엄성 회복이 바로 이 소설의 주제이면서 코맥 매카시 대부분의 소설의 핵심적 주제다. 이 작품은 함께 멕시코로 떠나는 그래디와 롤린스의 끈끈한 우정, 블레빈스의 무모한 살인으로 인한 시련, 목장주의 딸 알레한드라와의 사랑 및 그녀의 보수적인 아버지와 도덕적으로 타락한 멕시코 경찰서장의 음모와 협박 등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인물들의 행동 이면의 심리다. 경찰서장에 의해 낭패스런 곤경에 처할 때마다 그래디는 도덕적 순결과 정신력으로 그 난관을 극복하는 반면 목장주와 그의 누나는 그래디가 왜 알레한드라를 사랑하는지, 갑자기 왜 말도둑으로 몰려 감옥에 갔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래디의 진의를 의심한다. 혹시 말썽이 생기면 묵인하거나 그때그때 타협하면 해결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삶의 진실은 황폐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만 다가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블레빈스의 범죄를 구실 삼아 일행의 말을 뺏으려고 음모를 꾸미는 경찰서장과 그 패거리들은 권력자나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며 부를 누리는 속물적인 인간들이었다. 약자에게 몰인정한 법률의 위력을 실감한 그래디는 다시 고심한다. 이곳은 나의 땅이 아니야라고 고백하며 메마른 황무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고향에 돌아와서도 그래디의 정신적 방황은 계속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데는 사회적 원인이 크겠지만 무엇보다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가 곳곳에 잔존해 있는 사회에서 그 극복방법은 당장 주어질 수 없고 시련과 고뇌 속에서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면적으로 성장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꾸준히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흡한 점에 대해 실존적 위기감을 느끼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일 것이다. 교양인의 길은 인격의 도달점이나 자기완성이 아니다. 자기모순을 회피하지 않고 참된 삶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런 삶이 아닐까. 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린 메말라 가는 사회에 지금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 이길상 시인은 2001년 전북일보와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으며, 시와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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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17 18:2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동화작가 - 임정자 ‘물이, 길 떠나는 아이’

책이 많지 않던 시기에는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할머니의 입을 통해 옛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옛이야기는 이처럼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개연성이 부족하기도 하고 영웅소설처럼 하늘 신이 불쑥 끼어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이야기 속에 현실을 그려내면서 소망이 얹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다는 이분법적인 단순한 플롯에도 쉽게 빠져들기 일쑤다. 《물이, 길 떠나는 아이》는 2005년에 처음 출판되었던 동화이다. 그러다가 2020년에 새롭게 출간된 개정판이다. 이 작품은 옛이야기에서 소재를 가져왔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동안 마치 할머니가 옆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흡입력이 있다. 주인공 물이는 자식이 없는 부모님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맑은 물을 떠 놓고 삼신 할매한테 기도하면서 얻은 귀한 아이였다. 하지만 삼신 할매 옆에 있던 선녀의 잘못으로 아이의 옷 솔기를 터지게 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삼신 할매가 부모님의 기도와 정성에 대한 보답으로 물이를 보내주었는데도 어머니는 아들이 아닌 것에 서운함을 드러낸다. 이렇게 어머니의 말은 독이 되어 새로 태어난 아이는 영혼의 한 조각을 잃고 만다. 영혼의 한 조각은 구렁이가 되어 주인공과 삶을 같이 하게 된다. 어릴 때부터 물이 곁에는 늘 구렁이가 함께 하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결국 부모와도 함께 살 수 없게 된다. 구렁이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사람들의 편견과 허위와 욕망에 부딪친다. 그럼에도 물이는 끊임없이 자기완성을 위해 삶을 개척해 나간다. 비록 옛이야기라는 옷을 입었지만 물이를 통해 인간은 누구나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다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들의 결함을 통해 성찰의 기회를 얻게 되고, 서로 의지하며 삶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이 책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수많은 길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삶은 먼 길을 돌아가야 할 때도 있고, 평탄한 길을 걷듯 편안하기도 하고, 견딜 수 없는 힘겨운 날도 있다. 때론 자기완성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기여해야 할 때도 있고, 기여했음에도 이해받지 못할 때도 있다. 이렇듯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 살아가며 겪게 되는 많은 어려움도 자기완성의 일부분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되새기게 하는 책이다.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예측할 수 없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준비 없이 맞이하는 시간들이 많지만, 인간만이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세상과 관계를 맺기 위한 방식을 스스로 검토하고 결정해 나간다. 어느덧 살갗에 닿는 기온이 달라지고 있다. 날씨보다 마음이 얼어붙었던 한 해가 지났다. 이제 우리에게 수시로 다가오는 변화와 시련들을 감내하는 시지프스로 하루를 열어야 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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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10 18:2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아현 소설가 - 정만춘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하나요?’

몇몇 사람들과 길거나 짧게 살다 완전한 독립을 시작한 지 6개월에 접어들었다. 혼자도 잘사는 나는 다시 친구들과 함께 살 궁리를 한다. 결혼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은 만들고 싶다. 소담스러운 주거 공동체를 꿈꾼다. 하지만 본격적인 실천으로 이어진 적은 없다. 어딘가 복잡할 것 같고, 왜인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미래는 나를 불안하게 한다. 다수의 사람이 인정하고 상상하는 방식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어진 단어 이외의 선택을 말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여기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하나요?』에서도 선택지의 바깥, 동거를 말한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면, 굳이 사회가 인정하는 가족의 테두리 안에 들어있지 않아도 서로를 가족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다. (중략) 가족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욱여넣는 대신 가족의 범위를 넓히는 게 현명한 방법이리라.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하나요? 中) 제도권 밖 가족의 모습은 우산 밖으로 튀어나온 어깨와 같을지 모른다. 우산이 작아 비죽 튀어나온 어깨가 줄곧 거센 비를 맞듯, 가족이나 식구라는 일상적인 단어로 서로를 묶고 있지만 실상 아무런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이 책은 축축해진 어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깨를 구겨 넣는 대신에 더 큰 우산을 들자고 말한다. 선택지에 고르고 싶은 것이 없어 고민하던 내게 선택하지 않는 방법, 선택지를 만드는 방법을 상상하게 했다. 각각의 세계를 가진 두 사람이 한 집에 모여 살며 다름을 발견하는 이야기부터 제도와 서류에 관한 이야기까지. 누군가와 함께 살고 싶지만, 나만의 방은 갖고 싶은 이야기. 일상을 나누지만, 명절에는 내 집에 가고 싶은 이야기. 여자 둘이 사랑하며 사는 이야기. 나의 고민과 걱정에 대한 모종의 대답을 호쾌한 작가의 목소리로 듣는다. 책의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장거리 마라톤을 함께 하는 페이스메이커가 된 기분이 든다. 이 긴 레이스의 끝이 보이지는 않지만, 왜인지 작가와 나란히 뛰는 것 같은 상상에 사로잡힌다. 레이스의 끝을 알 수 없어도 괜찮다. 내가 뛰고 싶은 트랙이 없다며 슬퍼할 필요도 없다. 대신 내가 가고 싶은 길로 방향을 틀어 뛰더라도 두려움 대신 용기를 낼 수 있을 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옆에서 함께 뛰어줄지도, 앞에서 뛰고 있던 누군가를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곁에서 새로운 길을 환영하는 기쁨의 춤을 출지도. 빈칸과 빈칸 사이에 억지로 자신을 욱여넣을 필요는 없다. 그 시간에 차라리 트로트를 틀고 막춤을 춰보자. 연자 언니의 말대로.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하나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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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3 17:5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헌수 시인 - 경종호 디카시집 <그늘을 새긴다는 것>

자꾸만 멀어지는 기억의 흔적을 붙잡아두는 일은 매력적이다. 글로 남기고 사진으로 저장하는 일은 풍경 밖에서 마음의 정서를 기록하는 재미와 발견의 기쁨을 준다. 눈웃음이 선하고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경종호 시인의 디카시집을 펼쳐보았다. 디카시는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순간의 시적형상을 디지털카메라나 휴대폰카메라로 찍어 문자로 재현하는 영상과 문자예술이다. 활자와 이미지라는 두 개의 대상을 하나의 의미적 텍스트로 완성하는 표현양식이다. 사물에 닿는 눈빛의 한계를 순간적으로 받아 적은 것 일까? 스쳐 지나가는 의미를 예민한 감각으로 기억해 낸 것일까? 손닿을 듯 낚아채는 시인의 눈매가 절묘하다.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물을 시인의 깊은 사유로 담은 디카시집은, 그의 생태적인 감각이 견고하게 들어있는 기록장치이며 시인의 사진과 결합된 시는 농익은 듯 때론 낯설게 다가서기에 좋다. 그가 내어놓은 이미지에는 일관된 의미와 구체적인 원형의 구도가 들어있다. 자연과 사물이 환기시켜주는 언어를 발견하며 시인의 촉수는 더욱 밝아졌으리라 믿는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라고 프랑스 시인 랭보는 말했다. 상처받은 영혼이 정밀하게 바라보며 자연의 풍경과 삶을 구성하며 나가는 일, 티끌 같은 삶의 얼룩을 온전하게 바라보는 일, <상처>라는 시에서 여린 것들을 품은 시인의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파리 떨어진 자리는 좀 더 굵었습니다 나비가 닿지 못하는 계절엔 좀 더 딱딱하게 비틀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도 꽃이 환장하게 피어대는 날들은 곧 올 것입니다 -상처 전문 삶의 중요한 배경이나 찰나로 번져가는 흔적, 조형물을 통해서 시인이 지향하는 풍부한 프레임이 가득하다. 관찰자적 시선으로 사물을 더듬어보고 받아 적는 일을 시인은 촘촘하게 그려내었다. 자연이 남긴 다양한 문양은 시인의 문장 속에서 친밀하게 생명력을 보여준다. 때론 사물을 통해 자신이 경험해 온 시간을 드러내고, 흐릿하고 맹숭한 기억은 머문 자리에 선명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생이 다 한 어느 날 내 안에도 커다란 구멍이 있어 그 사람 살아 있었으면 합니다 -사람 하나 전문 나무옹이를 보고서 사람 하나를 이미지와 일치시킨 시, 살아온 내력이 박혀있는 나무옹이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과 사람 하나가 들어가 있다. 삶과 사랑의 면면을 묻고 답하며 일상이 말하는 자연의 섭리와 사람과 사람사이의 무언의 의미가 다가왔다. 안쓰럽고 작은 것, 덜 여문 것에게 시선을 돌리며, 드러내지 않고 배경이 되어주는 일, 그늘을 새긴다는 것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았다. 짧은 시편들의 행간을 드나들며 새기고 돋는 일로 시샘달을 건너가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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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2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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