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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요즘 들어 시간이 갈수록 기술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과연 하루라도 핸드폰을 잊고 살아본 기억이 있는가? 최근 들어 인터넷 검색이나 유튜브를 하지 않고 살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그건 해외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보면 나는 삶의 상당 부분을 이들 전자기기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 만약 이들이 내 삶에서 사라진다면 과연 그 공백을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렵다. 이에 비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 등장하는 잔잔한 이야기들은 자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월든>에서 자신이 손수 오두막을 지었던 그곳에서 만난 자연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그중 압권은 <겨울의 월든 호수>와 <봄이 오다>이다. 눈 덮인 월든 호수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우리를 자연의 경이로움을 엿보게 이끈다. 한겨울을 이기고 생동하는 봄이 오는 역동적인 장면을 읽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왜 이 책에 그렇게 빠져들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당연히 이 책에는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문명이나 첨단기술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흙냄새 가득한 식물이나 동물 이야기, 숲과 대지가 수시로 등장한다. 글은 때로는 애잔하고 때로 감각적이며 매력을 풀풀 풍긴다. 소로의 글이 한국에 소개된 이후 수많은 독자들이 그 낭만적이고 소박한 삶에 열광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내 주변에도 이런 삶을 사는 이가 있기는 하다. 올해 11년째 서울생활과 시골생활을 병행하는 그이가 올린 페이스북 내용을 보면 소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밤중 풀벌레가 우는 소리, 우체통에 집을 짓는 딱새 이야기부터 시시각각으로 주변이 눈부시게 변하는 시골의 봄날 이야기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물론 매번 낭만적인 이야기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골생활이라면 부러울 법한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아내가 한때 내게 도시 인근에 작업실을 만들 생각이 있는가를 물었다. 나는 공간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거절했지만 내심 그런 공간이 탐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거절한 데는 외지에 그런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 좀처럼 부지런하지 않으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아는 이들 중에도 이런 삶을 실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도심에서의 각박한 삶을 살다가 자신만의 텃밭에서 땀을 흘리거나 집필실에 들어서면 저절로 힐링이 된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공간을 그리워하며 사는지 모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아파트가 아니다. 어차피 저녁 잠자리에 누울 때는 불과 한평 남짓하면 족하지 않던가. 집이 아무리 넓어도 잠자리에 들 때는 불과 한두 평이면 충분하다. 죽을 때는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도 우리 욕심은 끝이 없다. <월든>은 책 분량이 제법 된다. 마지막 장면을 만나기 위해서는 상당 부분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책에 빠지면 어느 순간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쉬워질 것이다. 우리 모두 소로처럼 살 수는 없다. 어차피 그런 삶이 허용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로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매캐한 흙냄새 풍기는 거기로 한 번쯤 가보고 싶다. 가서 한 달 만이라도, 아니 며칠만이라도 살다 오고 싶어진다. 장창영 작가는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 와 문학이론서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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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17 17:3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아동문학가, 박상기 '백제 최후의 날'

최근 동료 작가들과 삼국유사를 다시 돌아보자는 의미로 톺아보고 있다. 고대 국가는 신비롭기도 하지만 알려진 게 많지 않아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도 있다. 특히 백제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7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백제지만 패망국이라는 오명 때문인지 백제의 강성함과 찬란한 왕조와는 무색한 기록들을 보면 씁쓸하다. 이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였을까? 《백제 최후의 날》이라는 동화가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최근에 발견된 유물을 토대로 새롭게 밝혀지거나 재조명된 역사적 자료를 충실히 반영하여 백제 멸망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주인공 ‘석솔’은 백제의 마지막 순간 660년,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열두 살 소년이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보리쌀 한 알까지 모두 군량미로 바쳐야 하는 상황에 있다. ‘석솔’은 전쟁과 역병으로 부모님을 잃고 아파 누워있는 여동생을 생각하면 임금님과 조정에 대해 불만이 많다. “차라리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 고것들이 성을 뺏고 빼앗기든 우리랑 뭔 상관이래? 이긴다고 우리한테 보리 한 됫박 나눠 줄 것도 아닌데.”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하고, 왕이 웅진성으로 피신한다는 소문에 석솔은 자신의 감정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먹을 것이 없어서 일자리를 얻으려고 하지만 어느 곳도 열두 살, 석솔이 할만한 일감을 선뜻 내주는 곳은 없었다. 결국 아픈 동생을 돌보며 굶지 않기 위해 도둑질을 일삼게 된다. 그러다 웅진성으로 피신 온 왕과 연 왕자의 만남을 계기로 궁궐에 드나들게 된 석솔은 백제 최후의 결정적인 순간을 코앞에서 맞닥뜨리고, 그 현장에 함께 하게 된다. 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마지막 여름을 뜨겁게 살아 낸 소년의 눈으로 역사적 현장을 생생히 되살린 이야기 속에서 석솔의 원망 섞인 외침이 귀에 쟁쟁하다. “우리가 쫄쫄 굶어도 곡식을 갖다 바치는 게 나라 잘 보살피라고 그러는 거잖아요. 그런데 힘들다고 하면 어째요? 걱정이 많고 힘들다고 누가 알아준대요? 백성을 굶어 죽지 않게 하고 위협을 막아주는 임금이 최고지.” 왕자 ‘연’이 나당연합군의 협공으로 웅진성마저 위험에 처한 상황에 대해 걱정하자 석솔은 외친다. 어쩌면 석솔의 외침은 당시 백성들의 아우성이었을지 모른다. 백성들은 자기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해내고 있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위정자들은 무얼 하고 있었느냐는,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였으리라. 그 외침이 백제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라 지금도 유효하기에 울림이 더 컸다. 그럼에도 석솔은 전쟁으로 인한 가까운 이들의 죽음과 나라의 멸망을 지켜보며 소중한 것은 자기 손으로 지키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그 뒤 홀로 적진에 잠입하는 임무를 수행하지만 이미 기울어버린 국운을 되돌리지는 못한다. 이 작품은 역사의 왜곡과 망국의 오명이 덧씌워진 의자왕에 관해 다른 각도로 조명한다. 소년의 시선으로 백제 최후의 모습을 풀어낸 전쟁, 적진에 잠입하는 긴장감이 감도는 이야기와 더불어 역사적 오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하지만 역사를 바로잡는 것과는 달리 책을 덮으면서 백제 멸망의 순간에 함께 한 수많은 석솔들이 아우성치는 게 들리는 듯했다. 망국의 순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이경옥 아동문학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두번 째 짝>으로 등단했다. 이후 2019년 우수출판제작지원사업과 지난해 한국예술위원회 ‘문학나눔’에 선정됐었다. 그의 저서로는 <달려라, 달구!>, <집고양이 꼭지의 우연한 외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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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10 15:4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 김헌수 '계절의 틈'

김헌수 시인은 부지런도 하게 <계절의 틈>이란 제목의 포토포엠을 펴냈다. 사계절을 사진과 시에 담았다. 겉표지에는 푸른 담쟁이넝쿨이 선명하게 벽을 덮어주고 있다. 계절의 틈 사이에 담쟁이는 계절을 익히며 자라나고 뻗어간다. ‘겨울을 익힌 담쟁이는 마른 몸으로 느리게 자라요’ (본문 중) 잎이 다 떨어지고 삭막한 벽에 붙은 담쟁이, 겨울을 익힌 후 그 틈에서도 느리게 자라고 있는 담쟁이를 시인은 보았다. ‘틈’이란 좁은 간격에서도 모든 세상이 꿈틀거리는 생동력을 읽어낸다. 남편의 애정이 듬뿍 담긴 사진에 아내인 시인은 시를 썼다. 섬세하게 사진을 읽고, 살피어 포토포엠이 탄생되었다. 남편의 세계를 들여다본 귀한 시간이었을 터이다. 사진에 열심인 남편을 위해 환갑 즈음에 사진전을 열어주겠다는 시인의 마음이 훈훈하다. 김헌수 시인은 참 착하다. 오래 오래 봐도 착할 것이다. 웬만하면 자신이 참고 만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시인의 말이 매번 소홀히 지나가지 않는다. “따져서 뭣하겄어?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는겨.” 누구를 맹비난하다가도 숙연해져 더 이상 흥분할 수 없게 만든다. 남의 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특히 채근한다. 시인의 시를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가끔 ‘잠금’, ‘봉합’, ‘밀봉’이라는 시어를 종종 발견한다. 시인에게 속으로 삭히는 의미는 무엇일까? 불현듯 시인이 보고 싶어진다. 늘 웃고 반기는 그녀의 마음속에는 애늙은이(?) 하나가 있는 것일까? "엄마를 병원에 모셔 놓고/ 빈 저녁을 돌아 수원지에 왔지/ 출렁이는 잔물결과/ 무성한 잎이 떨어지며 흘러나오면/ 숲에서 들리던/ 아버지의 낮은 가락/ 비포장도로를 돌아/ 처음으로 아버지와 나는/ 아주 떠나갈지도 모르는 엄마를 생각하면/ 굴참나무 아래 마른 입맥을 골똘히 바라보았지/ 등 뒤로 올라앉은/ 서너 번의 한숨을/ 어둠이 깔린 길에 가지런하게 부려 놓고 왔지/ 서성이는 죽음을 곁에 두고/ 천천히 돌아왔지" (시'수원지' 전문) 상실에 빠진 사람에게 위로될 말은 없다. 차라리 침묵이 나을 때가 많다. 시인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어 걸어왔다고 안 하고 ‘천천히 돌아왔지’라는 긴 여운을 전해준다. 무슨 말도, 무슨 위로도 건넬 수 없는 부녀는 굴참나무 마른 입맥을 바라보았다고 말한다. 맺힌 눈물마저도 ‘도르르’ 흘러내리지 못하고 삼켰나 보다. 이번 포토포엠 『계절의 틈』은 어찌 보면 틈새의 공허함이 아닌 꽉 채우는 위로의 글이다. ‘자꾸만 스며드는 웃음 숨지 않고 토해 내는 눈물 슬픔의 부피를 줄이며 평행선으로 나가는 우리’ 결국 시인은 울지 않는다. 눈물 슬픔의 부피를 줄이는 평행선. 언젠가 김헌수 시인에게 할 선물은 눈물일지 모른다. 마음 놓고 토해낼 슬픔⋯ 김영주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당선됐으며, 2018년 동양일보 동화부문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저서로는 2020년 장편동화 <레오와 레오 신부>, 2021년 청소년 소설 <가족이 되다>, 2023년 수필 오디오북 <구멍 난 영주 씨의 알바 보고서>,<너의 여름이 되어줄게>5人앤솔러지 청소년소설,<쉬, 비밀이야>18人 앤솔로지 동시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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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3 17:4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작가-전은희'야광귀 축구 놀이'

“너, 그 얘기 들었어? 해 질 녘에 초등학생을 잡아가는 할콩할매 귀신 얘기 말이야?” 80년대 후반, 초등학생(당시는 국민학생)들 사이에 사람 몸에 고양이 얼굴을 한 귀신이 어린이를 잡아간다는 괴담이 돌았다. 귀신의 이름은 홍콩할매. 홍콩할매는 어린이에게 접근해 이렇게 묻는다. “손톱 좀 보여 줄래?” 순진한 어린이는 손톱을 보여준다. 달리기가 빠르고 점프에 능한 홍콩할매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어린이를 잽싸게 납치한다. 누구도 만난 적 없지만 누구에게나 나타날 것 같은 홍콩할매가 무서워서 나는 해 질 녘이 되면 가지고 놀던 공기나 고무줄을 내던지고 집으로 달려갔다. 홍콩할매처럼 보이는 할머니를 만나기라도하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홍콩할매를 능가하는 K-요괴가 아주 많다. 구미호, 강철이, 달걀귀신, 어둑시니, 망태 할아버지, 처녀 귀신 등등. 전은희 작가의 그림책 「야광귀 축구 놀이/단비어린이」에 등장하는 야광귀도 K-요괴 중 하나다. 야광귀는 섣달그믐에 나타나는 귀신이다. 키는 작달막하고 몸에서 빛이 난다. 어린이 신발만 훔쳐 가는 어린이 신발 전문 절도범이다. 이 절도범의 단점은 숫자를 4까지 밖에 셀 줄 모르고 구멍만 보면 정신을 홀딱 빼앗겨 해야 할 일을 잊는다는 거다. 「야광귀 축구 놀이」의 주인공 준모는 설날에 할아버지 댁에서 야광귀를 만난다. 야광귀가 축구화를 훔쳐가자 준모는 야광귀를 쫓는다. 그렇게 야광귀 나라에 가서 야광귀들과 신나게 축구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야광귀는 귀신이다. 귀신이면 무서워야 하는데 그림책 속 야광귀는 무섭지 않다. 오히려 친근하다. 붉은 피부에 커다란 점이 온몸에 퍼져있는 노란 야광귀부터 들창코에 팔이 네 개인 야광귀까지 생김새도 다양하다. 그림 작가는 기존의 정보에 자기 상상력을 더해 다정하고 친근한 야광귀를 탄생시켰다. 잊혔던 전통 캐릭터가 생명력을 얻는 순간이다. 야광귀 캐릭터 외에도 이 책에서 깊이 들여다봐야 할 부분이 있다. 준모가 야광귀들과 축구하는 장면이다. 축구는 두 편으로 나누어 승패를 가르는 스포츠다. 하지만 진짜 목표는 승리를 향한 팀원끼리의 화합과 조화이다. 야광귀들의 축구 정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승부보다 한바탕 신나게 놀기 위해 축구를 한다. 여기에 축구 잘하는 준모가 끼면서 즐거움은 배가 된다. 야광귀들은 고마움에 보답이라도 하듯 준모를 집으로 갈 수 있게 돕는다. 세계적으로 K-문화가 대세다. 요즘은 영화와 뮤지컬의 인기가 음악이나 드라마 못지않다. 대체 한국 문화의 어떤 면이 세계인을 열광시킨 것일까? 한국인 특유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어떻게 발현된 것일까? 「야광귀 축구 놀이」를 읽어주면서 아이와 그 해답을 같이 찾아보기를 권한다. 우리의 어린 시절 그때처럼. 김근혜 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동화 <다짜고짜 맹탐정>과 <봉주르 요리 교실 실종 사건>, <유령이 된 소년>, <나는 나야!>, <제롬랜드의 비밀>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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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27 17:3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헌수 작가-윤일호'킹콩샘의 어린이 글쓰기 수업'

고등학교 시절 엄마는 내게, “헌수야, 너처럼 수학공부 안하는 녀석의 ‘수학의 정석’을 두 권 정도 가져 오니라”라고 말씀을 하셨다. 두 권의 책은 이미 확보가 되었으니 나머지 두 권만 가져오면 수평이 맞지 않는 재봉틀을 괴어놓고 쓰기에 좋겠다며, 벽돌책을 꺼내 보지도 않는 내게 말씀 하셨다. “아니야, 나도 공부 할 거야”라고 말해도 엄마는, “몇 권 더 가져와라, 아버지 낮잠 주무실 때 목침 대신 쓰기에도 좋겠다.”라며 나를 놀리곤 하셨다. 그렇다고 내가 두꺼운 책을 무조건 기피하거나 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벽돌책을 끼고 살았던 적도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 등, 세계문학전집을 꺼내 읽던 재미는 또 남달랐다. 오롯이 문과생이었던 나는 벽돌책이 주는 무게의 의미와 책의 물성에 빠져 들기를 좋아했다. 진안 장승초의 킹콩샘인 윤일호 선생님이 벽돌책을 들고 나타났다. ‘킹콩샘의 어린이 글쓰기 수업’이라는 제목에 글쓰기로 삶을 가꾸는 교실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다. “이리 긴 글을 언제 다 썼어요?” 라는 물음에 호탕한 웃음으로 받아치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 성량이 풍부한 목소리와 웃음 덕분에 막걸리 집에서 한 출간파티는 들썩들썩 했다. 아이들과 현장에서 만나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책에는 글쓰기와 글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들이 촘촘하게 이어져있다. 책은 크게 두 개의 마당으로 나뉜다. 첫째마당은 삶을 가꾸는 글쓰기, 둘째마당은 글쓰기로 가꾸는 한해살이로 나뉜다. 첫째마당은 삶과 글, 맺힌 마음 풀어내기, 나부터 드러내기 등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둘째마당은 시시하지 않은 시로 시작된다. 시와 동시, 서사문, 스토리큐브로 창의 글쓰기, 무심코 지나쳤던 것에 마음 주기 등 배움과 성장에 필요한 것들이 가득하다.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작년 한 해 초등교사 들의 죽음을 우리는 보았다. 교육공동체의 회복과 학교현장에서 교권이 보호되는 마음과 아이들이 학교 가는 것이 즐겁고 교사들도 학생들과의 모든 일이 즐겁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태보기도 했다. 각박한 삶 앞에서 삶을 바라보는 눈을 달리하고 물질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주는 행복과 소중한 가치들을 일깨우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읽다 보면 한 사람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글쓰기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어려운 시대에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도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길이 교육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길임을 알기에 그 길을 가고 싶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교실의 아이들, 마음이 아픈 아이들을 만나면서 아이들을 보듬고, 교사의 말을 따르지 않는 아이와 소통하고 나누는 일, 글쓰기를 통하여 조심스럽고 관심 있게 열어갔던 일들을 보여주고 있다. 책속에 들어있는 아이들의 말은 매우 논리적이다. 진실하고 솔직한 글쓰기와 자신의 글을 통해서 마음도 풀어지고 스스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는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때론 가슴 아픈 사연들이 펼쳐져 교실이 울음바다가 되고 서로를 치유하는 자리가 되며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일도 있다. 글쓰기로 사람과 소통하고 나누는 방법이 들어있는 책을 통해서, 저자는 글쓰기 지도나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 글쓰기의 시선을 새롭게 찾고 싶은 분에게 조금의 도움을 주고자 썼노라고 말한다. 글쓰기를 통하여 한해살이 식물이 아닌 여러해살이 식물로 거듭 피어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장승초등학교 킹콩샘의 다독임이 있는 글쓰기가 봄볕에 오래도록 머물기를 바란다. 이번 주말에는 모래재를 굽이굽이 돌아 봄꽃이 핀 진안을 둘러봐야겠다. 김헌수 시인은 2018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삼례터미널'로 등단했다. 또 그는 '작가의 눈' 작품상을 받은 이력이 있다. 그의 시집으로는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 <조금씩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있고, 시화집으로는 <오래 만난 사람처럼>, <마음의 서랍>이 있다. 오디오북으로는 <저녁 바다에서 우리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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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20 18: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시인 – 김성철 ‘풀밭이라는 말에서 달 내음이 난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은 단순해요. 검은 티와 흰 티를 입은 두 팀이 공을 주고받는 영상을 피험자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얀 팀이 패스하는 횟수를 세도록 합니다. 이제 질문을 해요. 고릴라를 보았나요?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고릴라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지나갔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잠시 멈추어 춤까지 추었죠. “짧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에게서 짧고/ 시간에 짧고/ 세금계산서에 짧다// 풀밭이란 말에서 달 내음이 난다// 나는 흔한 풀이고/ 흔한 풀이 받는 달빛이고// ……// 어느 날/ 당신의 말마다/ 독한 소주 향이 났다/ 당신도 나를 따라/ 세속적이라는 말// 쌓이는 세속이 나도/ 모르게 쌓이고 쌓인” (‘풀밭이란 말에서 달 내음이 난다’ 중). 어떤 것에 몰두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죠. 김성철 시인은 그걸 우려했는지 세속 뒤에 바로 달을 놓았군요. 당신, 시간, 세금에 집중해서 살아도 우리는 늘 거기에 닿지 못해요. 약 38만 4천 킬로미터를 날아온 달 내음을 맡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요? 풀밭에 엉덩방아까지 찧었을 텐데 말입니다. 시인은 흔한 풀에서 쏟아져 나오는 긴 달빛을 보라고 하는군요. 그러면 소주 향같이 쌓이고 쌓인 세속에도 달 내음 나는 날이 오겠죠. “보이지도 않는, 잡을 수도 없는, 맡지도 못하는/ 염병스런 열병”인 사랑에게도 “-밥이나 한 끼 하자. 우리 밥 먹은 지 오래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겠죠. “아랫목에서 피었다 윗목으로 옮아가는 말/ 저기에서 오고/ 여기에서 다시 저기로 가는/ 붉은 말/ 탄성을 짊어졌으나/ 곧 뼈대만 남을 말/ 당신이란 말에 곁을 주었다가/ 앙상한 골격만 드러나는 말/ ……” (‘결이라는 말’ 중). 아랫목에 핀 말, 여기의 붉은 말, 탄성을 짊어진 말, 당신에게 곁을 준 말에 주의를 기울이면 윗목에 핀 말, 저기의 붉은 말, 뼈대만 남을 말, 골격만 드러나는 말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물론 그 덕에 앞에 있는 말에 몰입할 순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 다른 말이 있다는 걸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걸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 때문이겠죠. 선거철입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도록 앞에 이것저것 가져다 놓는 철이죠. 경제, 민주주의, 평화, 기후같이 소중한 것들이 울면서 지나가도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그것들을 해치는 괴물들이 웃으며 지나갔다 해도 믿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왜 그리 이쁠까?/ 오구오구 궁둥이를 두드려도/ 새하얀 흰 눈꽃 사이로 금니로 웃는 당신// 이 이쁨을 모를 이가 있을까?/ 아니지, 모를 이가 더 많겠지” (‘나날들’ 중). ‘나날들’은 이뻐요. 눈부시게 웃고 있어요. 그러나 모르는 이가 더 많다네요. 우리는 눈앞을 흘러가는 ‘나날들’ 대신 무엇에 홀려 있는 걸까요? 이영종 시인은 2012년에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에 선정되어 2023년에 첫 시집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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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13 18: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정숙인 소설가 – 이영종 시인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

한 권의 시집에서 나를 사로잡는 서너 편의 시를 발견하는 것은, 독자에겐 큰 기쁨이다. 오십여 편 중 서너 편이라니 너무 소박하다 하겠지만, 아니다. 단 한 편의 시에 마음을 붙들려 다음 페이지로 넘기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잔잔한 전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영종 시인의 <노숙>이 그랬다. 믿어야만 가능해지는 그 세계를 꿈꾸는 것에 슬픔을 느낀다. 하나는 멧돼지의 모정 때문이고, 또 하나는 ‘새 신문지’ 때문이고, 어느 사내 때문이다. 믿고, 믿고. 그러다 믿기지 않는 것을 맴돌다 돌아와 구겨 넣듯 다시 믿어야만 가능해지는, 영원한 현재가 되는 어떤 세계. 그렇다. 태초의 끝없는 공간, 그 카오스, 밤이 영원해지기 위해 나의 죽음을 대신한 멧돼지. 가련한 어떤 희망으로만 이뤄질 그 세계 속으로 몸을 던지는, 투신할 수밖에 없던 멧돼지의 내막을 알고 싶은 사내는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하지만 실재(實在)의 경계를 허물고 진입한 시인이 개태사역 근방에서 멧돼지 십여 마리가 떼를 지어 서성거렸다는 것을 믿기로 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노숙’의 세계는 사라지고 만다. 불완전한 간섭무늬로만 남는다. 시는 내 맘대로 읽으면 된다. 그것이 시인이 사라진 세계로 진입하는, 독자의 길이다. “죽은 자는 눈이고 산 자는 사람이라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 (87쪽에서) 어제는 가버렸고 오늘은 삶과 죽음이 하나로 합쳐서 눈사람이 된 것. 반짝였다는 것은 생의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여러 날 비가 왔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그 이후의 비는 더 헤아리지 않았다. 그러다 오후 햇살이 화창했다. 봄이 왔다. 내가 전주에서 비로 여러 날을 헤아릴 때 강원도 산간이나 서울의 지인 몇이 마치 기다려 온 겨울의 첫 폭설인 듯 눈 속에 갇힌 사진을 보내왔고, 그 속엔 눈사람이 웃고 있었다. 눈이나 비가 오면 특히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엔 선이 사라지고 경계를 잃는다. 봄을 앞에 둔 눈은 사뭇 누구의 자유의지로 결정된 눈 같다. 이영종 시인은 그의 첫 시집에서 결정론과 자유의지, 갈등과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손금과 지문의 정체성을 생각하며 인간의 선을 알아보려 애썼지만 정작 자신에게 주어진 선은 잘 모르므로,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시 쓰기에 전념했다”라고. 사람은 수없이 많은 선을 긋는다. 시인은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에서 끊임없이 나와 너의 선을 가늠하고 세계의 규칙을 헤아리며, 생물과 무생물의 인연을 각인시킨다. ‘보이지 않는 끈’에 대한 갈증은 갈망으로 변주되어 강박적으로 찾아온다. 내가 서 있는 곳과 당신이 자리한 곳이 지구 반대편일지라도 끝내 만나고야 만다는, 결국 그를 내 곁으로 보듬어 들여 아직은 먼 무엇의 온도를 나누는 것이다. 그의 시는 모두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다. 정숙인 소설가는 201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백팩'으로 등단했다. 작품으로는 몇 편의 단편소설과 채록집 <아무도 오지 않을 곳이라는, 개복동에서>(201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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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06 17:3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김은혜 '칸과 홈의 세계로 바라본 전북'

매대에 쌓인 책들을 보면 어릴 적 서점이나 도서 매대를 지나던 기분을 떠올린다. 장난감 매대를 서성이면 곧장 불려 가야 했지만, 도서 매대는 조금 달랐다. 엄마는 급한 일이 없다면 책을 구경하고 열어보는 나를 자주 기다려줬다. 때로는 나를 책장 사이에 두고 장을 마저 보러 가기도 했다. 그렇게 고른 책을 들고 가면 10권 중 1권 정도는 구매를 허락받았는데, 주로 학습과 관련된 만화 서적이었다. 만화책만 보면 발이 묶여 코를 빠뜨리던 시절을 지나, 근래 책방에서 나의 발목을 잡는 마법의 단어는 ‘지역’이다. 책 자체가 지역성을 다루고 있어도 좋고, 전라북도나 전주를 다루고 있으면 끝내 걸음을 멈추고 목차를 떠들러 보게 된다. 고향에서 벗어나고 싶어 서울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청년에게 지역성은 언제나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은 나만의 최애 주제인 셈이다. 그렇게 불현듯 이끌려 집어 든 책을 품에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와 단숨에 읽었다. 제목탓인지 만화책을 들고 집에 들어오던 두근거림을 느낀 것도 같다. 만화 연구자 김은혜의 『칸과 홈의 세계로 바라본 전북』이다. 이 책은 전라북도의 곳곳을 배경으로 하거나 모티브로 하는 6개의 만화 리뷰가 중심이 된다. 군산을 배경으로 성 착취 역사를 풀어낸 불친의 『해망굴 도깨비』, 부안 출신의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선생을 다룬 박건웅의 『나는 공산주의자다』, 임실, 부안, 김제, 서울, 만주를 넘나들며 4대에 걸친 가족사를 담은 정용연의 『정가네 소사』, 정읍의 유소년 축구단의 실화를 담은 윤태호의 『리더스 유나이티드』, 전주의 막걸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종규·김용회의 『대작』, 전주의 마지막 권번 기생이자 화가였던 남전 허산옥의 생애를 담은 조원행의 『권번기생 비밀의 기억』 리뷰와 동시대 작품을 통해 지역을 읽으려 시도한 seri·비완의 『그녀의 심청』 리뷰까지 총 7편의 글이 실려있다. 책의 말미에는 전라북도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작가 5인의 인터뷰가 함께 실렸다. 각각의 만화가 가진 지역성과 서사를 면밀하게 설명하면서도 저마다 작품들이 가진 아쉬움에 대해서도 꼼꼼하고 냉철하게 지적하고 있다. 해당 작품들을 어떤 경로를 통해 볼 수 있는지도 함께 설명하고 있어 소개한 만화에 접근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전라북도를 배경으로 한 만화를 목록화 한 것에 반가움을 느끼고 나면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동시대 창작자들의 이야기까지 읽고 나면 서문에 등장한 필자의 마음에 십분 공감하게 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북 지역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살펴보는 것은 전북을 그린 만화 작품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를 목록화하여 이들의 성질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다. 전북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를 찾아 인터뷰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이들의 ‘존재 있음’을 확인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여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다.” (『칸과 홈의 세계로 바라본 전북』 中) 오래 내리던 비가 그쳤다. 날이 풀리고 도서관에 나들이 가기 좋은 때가 되었다. 돌아오는 3월에는 작가가 내보인 목소리의 기록을 찾아 책장 사이로 나들이를 떠나보면 어떨까. 최아현 소설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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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28 17:1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진숙 수필가- 김경희 '당신의 삶이 빛나 보일 때'

‘생명의 눈물 끓는 소리’에 귀를 적시며 뒤척이던 날, 그 눈물을 닦아줄 책을 만났다. 김경희 작가의 산문집 <당신의 삶이 빛나 보일 때>이다. 음미 되지 않은 삶의 글에는 울림과 아우라가 없다면서 “글의 생명을 깊이 인식하고 사회적 사명감과 시선으로 따뜻하고 명분이 있는 글쓰기”(「네 이름이 붓이니라」)를 중요시한 작가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특히 수필가들에게 영혼의 숲을 지켜주는 정서적 그린벨트 역할을 하라고 요구한다. 불의에는 날카롭고 단호하게, 쓰라린 상처 위에는 따스한 위로자의 시선으로 삶을 연주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문학이란 그것이 간혹 절망을 노래할지라도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행복이어야 할 것”(「박완서 선생과 트럭 아저씨」)이라며 글을 쓰는 자의 자세에 대한 일침도 잊지 않았다. 영혼을 치유하는 수필은 순정문학으로 착한 삶을 위한 성찰이 되어야 한단다. “수필은 가슴 맑은 사람의 글이다. 겸허한 사람의 정신적 유산이다. 수필은 난 같은 시적 이미지요. 내용적으로는 소설가의 상상력과 서사를 뛰어넘어 한 문장으로 소화시켜 표현할 수 있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수필의 의미화」)고 정의 내렸다. 따라서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가슴 온도를 소중하게 관리할 줄 알아야 하고 사람다운 사람의 차분한 가슴에서 시간을 두고 다듬어진 단단한 문장으로 은근하면서도 공감적인 글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작가의 삶을 담보로 재미있는 글쓰기와 울림이 큰 글쓰기, 깨우침이 있는 메타포 형식의 수필 쓰기를 권고하였다. 일흔여덟 편의 수필 중 「어머니의 마지막 커피」를 읽으며 뭉클한 빛을 발견한다. 작가는 아침 식사 후 아내와 함께 차 한 잔을 나눈다. 어머니가 생전에 쓰셨던 방에서 아내를 통해 어머니를 그리며 애틋한 풍경 하나를 만들어낸다. 매일 삶의 마지막 커피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잘 보냅시다”말하며 ‘잔키스’ 시간을 갖고 차를 마신다. 아름다운 동행의 삶이 느껴지는 의식이다. 문득 아흔여섯이란 세월을 안고 사시는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병상에서도 매일 아침 식사 후 달콤한 커피 한 잔을 즐기신다. 그 커피는 간밤을 잘 보내고 눈 뜬 것에 대한 축배요, 아직 덜 채운 듯한 배를 충족시키는 비법이며 소화되지 않는 뱃속을 평정하는 마법의 한 잔이라고 하셨다. 나도 고단한 여정을 꿋꿋하게 걸어오신 그녀와 ‘잔키스’를 하며 커피를 나누고 싶은 충동이 인다. 입춘이 지나고 우수도 보냈다. 서걱서걱 겨울 소리가 울리던 달빛도 이제 서서히 몸을 풀고 있다.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도 달빛처럼 은은하고 은근하며 빛 부시지 않으며 깊이가 있을 것”(「달빛우편엽서」)이라던 김경희 작가의 마음이 정월의 달에 비친다. ‘달빛우편엽서’를 띄운 작가는 자연에 대한 애정이 진실했고 자신도 그 안에서 풍경이 되기를 소망했다. 천천히 보고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 서서히 다가오는 느낌의 기운이 있을 거라 했다. 봄기운을 품은 바람에서 연두의 빛깔이 보인다. 우리의 삶을 채색하고도 남을 빛이다. 작가가 권하는 시를 펼치며 화사한 봄의 소리를 맞이해야겠다. “작은 개울가에 돌을 고여/ 솥뚜껑을 걸고 기름 두르고 쌀가루 얹어 참꽃을 지졌네./ 젓가락으로 집어 맛을 보니 향기가 입에 가득 / 한 해 봄빛이 배속에 전해지네.” 임제, <화전놀이>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국어교사 출신으로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됐다. 이후 최명희문학관에서 “혼불” 완독 프로그램 진행하며, <우리, 이제 다시 피어날 시간> 오디오북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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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21 18:2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작가-안성덕 '깜깜'

스트리밍 디지털 매체로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은 음악을 잠시 대여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아날로그 방식 LP는 시간개념부터가 다르다. 턴테이블 빙빙 도는 동그라미에 생채기를 내면 치어 떼처럼 싱싱한 추억이 몰려온다. 이때 추억은 소장 가치가 있는 현재의 ‘내것’이 된다. 음악 애호가 안성덕 시인은 수많은 LP를 소장하고 있다. 나는 최근에 발매된 안성덕 제작, <깜깜> 위에 바늘을 올린다. “동그라미 속 동그랗게 밀려나는 축음기판 소리골에서 옛이야기를 듣는다 낙숫물이 그리는 동그라미 속 동그랗게 갇혀 소년은 옴짝달싹 못하고”(「소년은 어디 갔나」) 시인이 수집하기로 한 시간대는 과거다. 아릿한 풍경을 소환하는, 부재와 존재의 괴리가 주는 애틋함에 뜨거워진다. 현재와도 연결, 서로에게 감응하는 방식이 인간을 넘어 자연물로 확장된다. “꽃이란 꽃 죄다 집니다 덩굴장미가 졌고 접시꽃도 집니다 시들기 위해 피어난 꽃, 열흘을 못넘고 져야 꽃입니다”(「꽃이 집니다」)에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아름다움의 절정’을 향한 궁극이라고 말한다. “기저귀에 저린 간밤처럼 애기똥풀 노랗게 번진 은빛요양원 언덕바지 개나리꽃 이미 졌고요”(「개나리꽃 이미 졌고요」)는 갓난쟁이처럼 요양원의 노인은 애기똥풀같은 것을 노랗게 지리고 사라졌다. 시간의 괴리가 주는 안타까움과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 침잠된 가운데 “철 지난 청춘처럼 흔적뿐인 철길 옆 접시꽃 시들었네 춘포역 플랫폼 소리 없이 기적이 우네”(「춘포역」)의 ‘시적 질감’은 비장미로 가득하다. 반면 “진달래 꽃망울이 영락없는 성냥알이네요 사나흘 봄볕에 그어 대면 확, 온 산을 태우겠습니다”(「꽃불」)은 정신과 육체의 불일치(균열) 속에서도 정염情炎을 드러내는 숭고미의 절정, 서정시를 한 단계 갱신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간은 죽어 태어난 직후로 순환할 수 있을까?’에 대한 명제는 회의적이지만 안성덕 시인은 사라져간 것들과의 교감을 통해 소멸이 과거의 분열이 아니라 생성의 지표임을 말하고 있다. 스크래치가 심해 좀 지직거리면 어떤가! 새삼 독자들도 과거로 역주행, 태생적 그리움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반질반질 마루가 윤나던 집 숟가락 통에 숟가락이 많던 집 내 태가 묻혀 있는 도란도란 양철 대문 집”(「양철 대문 집)」 <깜깜>은 세월의 지층이 쌓이면서 생긴 흔적들을 채집하고 보존해온 사진첩이요 가슴팍을 지직거리는 추억의 음반이다. 시간의 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매재媒材가 사유의 발화점이 되어 심연을 울리고 병증을 헤아려준다. 경험상 엘피판에 바늘을 갖다 대는 순간의 쾌락을 잊지 못한다. 죽은 자의 목소리가 부활하고 소멸하는 존재가 생생하게 되살아날 걸 알기 때문이다. 안성덕의 시집 <깜깜>은 삶과 죽음의 동시성이 갖는 모순형용,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절실한 감정들이 동그라미 속에서 흘러나온다. 그 시그널을 좇다 보면 과거와 현재가 삼투압, 생의 쓸쓸함을 견디는 이 극진한 방식이 독자의 가슴을 휘어지게 할 것이다. 기명숙 시인은 전남 목포 출신이며,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몸 밖의 안부를 묻다>가 있다. 현재 강의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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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14 18:2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작가- 김순정 '불평등을 수거해 드립니다'

오랫동안 아이들과 만나면서 성별과 관련한 불만을 듣곤 했다. 예를 들면 ‘아이돌 콘서트에 가려고 하는데 부모님이 여자애가 어딜 가냐고 반대한다.’ ‘세뱃돈 금액에도 남녀 차별이 있다.’ ‘요즘에는 여자애들이 힘도 더 세고 드세서 남자애들이 기를 못 편다.’와 같은 것들이다.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사회 곳곳에 드리워진 성 불평등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불평등을 수거해 드립니다>는 다섯 명의 작가가 다섯 가지의 성 불평등 사례를 소재로 쓴 동화책이다. 김순정 작가의 ‘남자라서 억울해’는 남자라서 역차별을 당한다는 웅이 이야기이다. 웅이는 선생님이 힘든 일은 무조건 남자만 시키고,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남자는 더 크게 혼낸다고 생각한다. 웅이는 ‘남자라서, 여자라서’가 아닌, 그냥 나로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다. 김완수 작가의 ‘내 이름은 깜상’의 주인공 소미는 “기집애가 무슨 축구냐”, “축구가 얼마나 거칠고 힘든 운동인데”, “우리나라에서 어디 남자 선수와 여자 선수 대접이 같냐”라는 걱정과 우려를 뚫고 축구부에 들어간다. 처음엔 여자라고 놀리고 따돌리던 친구들은 소미의 실력을 보고 같은 팀의 일원으로 인정해준다. 정광덕 작가의 ‘아빠는 주부 백 단 가수왕!’은 전업주부인 아빠를 둔 호겸이 이야기이다. 호겸이는 너희 아빠 백수냐고 놀리는 같은 반 친구 민호 때문에 짜증이 난다. 하지만 엄마보다 음식을 잘하고, 자전거 타기나 캐치볼을 함께 해주며, 집안일과 장보기를 잘하는 아빠가 살림하는 게 맞다는 합리적인 결론에 이른다. 아빠가 앞치마에 고무장갑을 끼고 프라이팬까지 들고 노래자랑에 나오자 호겸이는 ‘아빠는 주부 백 단 가수왕!’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열렬히 응원한다. 정유진 작가의 ‘용감한 오! 기사’에는 시내버스를 운전하는 엄마를 둔 봄이가 나온다. 봄이 엄마는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유일한 아들인 남동생을 돌봐야만 했다. 봄이는 그런 엄마가 운전하겠다고 했을 때 처음엔 찬성했지만, 손님이 엄마에게 막말하자 반대한다. 하지만 상가 화재를 막는 엄마를 보며 엄마의 삶을 응원한다. 윤형주 작가의 ‘수영선수 에리얼’은 권위적인 남편과 살면서 혼자서 육아와 교육, 살림살이에 지쳐간다. 그런데 수영왕을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대회에 참가해서 1등을 한다. 에리얼은 수영선수라는 자기 정체성을 찾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성별에 따른 차별과 억압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인식과 존중이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하고 배려해주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 책에는 각각의 작품과 관련한 성평등에 관한 생각거리를 질문하고 있다. 교실에서, 가정에서 아이들과 함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면서 성평등에 대한 인식을 바꿔보는 것도 좋겠다. 장은영 동화작가는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통일 동화 공모전과 이다 생명문화 출판 콘텐츠 공모전에서 상을 받고(공동수상),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을 수상했다. 2022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 실록 수호대>, <열 살 사기열전을 만나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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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31 18: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작가-4·19의 아이들 '초록이 끓는 점'

초등학교 고학년 때 우리 집은 시청 옆이었다. 그곳에서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시위가 격렬한 날에는 나가서 놀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날이면 애먼 엄마에게 몽니를 부리기도 했다. 그날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현북스 역사동화 공모전 제1회 심사위원 추천작 <초록이 끓는 점>은 4.19혁명을 소재로 한 동화집이다. 첫 번째 작품 이정호 작가의 ‘빛나는 검정 구두’는 박주열과 구두닦이 김성원 열사의 죽음을 다뤘다. 어린아이를 협박해 부정한 일을 저지르는 친일 경찰과 정치인의 추악함을 민주주의를 위해 온몸을 내던진 박주열, 김성원과 대비시켜서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책 깎는 소년>으로 유명한 장은영 작가의 ‘수만이의 그림 공책’은 화가가 꿈인 수만이가 주인공이다. 깡패를 동원해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아버지를 통해 수만이는 권력의 무자비와 비열, 공포를 마주한다. “감추고 있던 불만을 약하고 힘없는 아내와 자식에게 쏟아 내는 거지. 술에 취한 것처럼 권력에 취해 힘으로 국민 입을 막는 이승만처럼.” 고려대생의 말처럼 권력은 더 큰 권력을 소망한다. 그 소망에는 자비도 양심도 없다. 권력은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독약 바른 사탕이다. 성현정 작가의 ‘4월의 가짜 뉴스’는 4·19혁명 때 시위에 참여했다가 맥없이 시들어버린 어린 시위대의 죽음을 다뤘다. 실제로 4·19혁명 때 사망한 시민은 189명. 이중 초등학생(당시는 국민학생)이 8명이다. “우리나라의 주인은 우리 국민이잖아. 대통령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국민을 공산당으로 몰아 총을 쏘고 죽이기까지 하는 건 분명 잘못된 게 맞는 것 같아.” 어린 민승이도 아는 이 명백한 사실을 하물며 대통령이 모를까. 그러나 어떻게든 권력을 놓고 싶지 않았던 대통령은 가짜 뉴스로 국민을 호도하고 분열시키기에 이른다. 또 다른 한국전쟁을 연상케 하는 안타까운 현실은 푸르러야 할 어린이의 삶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박윤우 작가의 ‘거짓말하는 대통령’은 4.19 시위에 참여해 혈서를 쓴 여고생 이재영의 일기를 모티브 삼았다. 주인공 유나는 친구들과 이승만 찬가에 맞춰 고무줄놀이를 한다. 언니인 유영이 이승만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대통령이니 다시는 부르지 말 것을 당부한다. 대통령의 진실을 알게 된 유나는 개사한 가사에 맞춰 신나게 고무줄놀이를 한다. 며칠 전, 한 설문조사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이 인플루언서를 대통령과 정치인보다 신뢰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국민과 점점 멀어지는 정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따져 묻기 전에 잘못된 정치를 바꾸는 건 대통령과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것을 <초록이 끓는 점>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는 건 어떨까. 그것이 작은 혁명이다. 김근혜 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동화 <다짜고짜 맹탐정>과 <봉주르 요리 교실 실종 사건>, <유령이 된 소년>, <나는 나야!>, <제롬랜드의 비밀>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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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24 18:0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작가-배봉기 '햇빛 속으로'

청소년 시절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는 감정을 한 번쯤 가져봤을 것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 특별한 감정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다. 한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가까운 관계가 된다는 건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름다운 사랑인가. 그런데 그 사랑의 대상이 사람들의 통념과 다르다면, 동성을 사랑한다면 세상의 시선은 어떨까? <햇빛 속으로>는 십 대 퀴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수민’이가 화자가 되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담긴 어두운 자아를 발견하고, 밖으로 끄집어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퀴어 청소년의 커밍아웃, 섬세한 사랑의 감성, 자신의 진짜 모습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통해 퀴어에 대해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다. 중학생 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된 주인공 ‘수민’은 친구 ‘희수’에게 고백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이상한 놈, 더러운 새끼”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성 정체성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까 봐 공포감을 느낀다.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마음속 지하실에 가두게 된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이성과의 사랑이 아니라 동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수민’의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 그대로 전해져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수민은 고등학생이 되어 연극반 ‘목소리’에 가입한다. 그곳에서 예술 특기 강사이자 극단 배우인 ‘예쌤’을 만나면서 숨겨 두었던 감정이 다시 꿈틀거린다. 하지만 ‘수민’은 중학교 때 ‘희수’로부터 받은 경멸의 눈빛이 스치고, 결국 세상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예쌤’에 대한 감정을 숨기려고 애쓴다. 그렇다고 그 애틋한 감정이 숨겨질 리가 있겠는가. 사랑의 감정을 이성으로 누르기에는 수민의 사랑은 통제되지 않았고, ‘예쌤’이 출연하는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을 다섯 번이나 보게 된다. ‘예쌤’은 수민의 마음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숨 쉬어. 숨 쉬어야 살아. 그래야 살 수 있어.” 늘 조바심을 안고 살았던 수민에게 ‘예쌤’의 말은 알에서 깨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고,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한다. “세상, 사람, 참 무섭다. 네가 가려는 길이, 나도 모르는 길이고,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네 잘못이 아닌 것 알고, 너도 어쩔 수 없다는 것 아니까, 더 이 아빠 마음이….” 수민이가 말했을 때 아버지의 반응이다. 필자도 두 아들이 있지만 이러한 상황이라면 어떤 말이 먼저 나왔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만큼 세상의 통념과 상식의 기준을 넘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작가는 수민이를 통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지켜내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빛을 향해서 나가라고 주문한다. 수민도 다짐한다. ‘앞으로도 한순간, 한순간, 이 순간을 살아갈 것이다. 내 진실에 온 힘을 다해 응답하면서.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그래서 내 삶을 사랑하는 길일 테니까.’ 우리 사회에서 소수로 살아내는 건 모든 존엄을 내려놓으라고 강요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아직 지하에 웅크리고 있을 수많은 ‘수민’이가 이 소설을 통해 당당하게 햇빛 속으로 걸어 나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경옥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두번 째 짝>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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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17 17:5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최기우'이름을 부르는 시간'

<이름을 부르는 시간> 희곡집은 동학농민혁명에 함께 한 이름 모를 하나하나를 위해 들꽃으로 상여를 장식하며 그 이름을 불러보는「들꽃상여」, 걸인성자라 불리운 이보한의 전주 3․1운동을 이끈「거두리로다」, 「1927 옥구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의 확고한 정신으로 일제에 대항한 농민운동과 젊은 혈기에 불타는 장태성의 이야기. 「수우재에서」는 시조 시인 가람 이병기의 생가를 배경으로 조선어학회 독립운동으로 간주해 관계자들을 핍박한 조선어학회사건이 소재다. 마지막으로 전북대학교 학생 이세종이란 5․18민주화운동 첫째 희생자의 비극적인 죽음인 「아! 다시 살아…」를 끝으로 다섯 편의 희곡이 담긴 희곡집이다. 최기우 극작가의 문장은 때론 젊은 패기가 넘쳤다가 밑바탕에는 오랜 연륜이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그는 젊다. 오랜 역사물이 소재인 이유는 아니고, 그는 시시때때로 문장을 가지고 논다. 내가 처음 일제의 잔인함을 목격한 것은 연속극 ‘여로’였다. 온갖 고문으로 고통스러운 비명에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TV에서 고문당하는 사람이 실제로 느껴져 끔찍해 하던 옛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섯 편의 희곡을 읽으며 그때처럼 긴장감을 놓지 못했다. 선봉자들 뒤를 따랐던 이름 모를 사람들 하나, 하나가 쉽게 지나가지지 않았다. 「들꽃상여」에서 ‘아무 것도 아닌게 힘을 보태제, 있는 놈이믄 허긋어?’라고 한 등록개의 말이 가슴 먹먹하게 만들었다. 누구나 똑같은 사람이란 말만 들었을 뿐인데 기뻐하는 모습은 깊은 억눌림이었다. ‘같다’는 말에 딴 세상을 맛보게 된 등록개의 탄성이 경이롭다. ‘같을 동’ 이름으로 힘이 실어지는 순간에는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전봉준이 “우리 모두 등록개다.”’라고 외치는 말이 얼마나 절실하던지 가슴이 뭉근하다. 김서방에게 언년이 등록개를 찾을 때, 조선 팔도 쌔고 쌘 이름이 개똥이 아니믄 소똥, 말똥, 된똥인데 어찌 찾으려 하냐며 반문한다. 같은 이름 개똥일지라도 소중함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름 없는 혼들을 태운 들꽃상여는 어디에도 없는 보상이다. 「들꽃상여」만으로도 가슴 벅차 다른 희곡의 서평은 지면이 모자라다. 「거두리로다」의 기인 이보한이 말하는 애국은 독특하기 그지없다. 배려, 존중, 희생과 배풂 이보한이 말하는 애국이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1927 옥구 사람들」젊은 혈기 장태성은 매질도, 봉변도, 징역도 두렵지만, 피하지 않을 거란 다짐이 굳건하다. 일본 앞잡이 백승일에게 ‘밤이 어둡다고 백 년 가도 날이 안 샐 줄 아느냐?’는 일침은 번쩍이는 칼날이었다. 「아! 다시 살아…」이세종! 외치고 싶을 정도로 5․18항쟁이 일어난 줄 모르고 안 오는 버스를 목을 빼고 기다리던 여중생이었다. 이한열, 박종열 열사에 눈물 흘렸었다. 모르고 지났을 그 이름, 이세종을 불러본다. 일제의 압박에 눌린 사람이 전봉준, 등록개, 소리쇠, 언년이, 이보한, 장태성, 이병기…만 있을까마는 희곡집『이름을 부르는 시간』을 통해 이름 하나하나 진심으로 불러본 시간이었다. 김영주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됐으며, 같은 해 동양일보 동화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저서로는 장편동화 <레오와 레오 신부>, 청소년 소설 <가족이 되다>, 2023년 수필 오디오북 <구멍 난 영주 씨의 알바 보고서>, <너의 여름이 되어줄게>, 5人앤솔러지 청소년소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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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10 16:5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지안 '오늘부터 배프! 베프!'

요즘처럼 한 끼 식사가 무서운 적이 있었을까. 마트에서 물건을 사거나 밖에서 외식을 할 때마다 부쩍 오른 가격을 보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웬만한 식사가 거의 만 원에 육박하거나 훌쩍 넘는다. 이런 상황이니 동화에 나오는 아동행복나눔카드로 아이들이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의문이 들었다. 어른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한 끼를 넘겨야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돌아서면 배고픈 나이의 아이들에게 어김없이 돌아오는 식사시간은 무섭다. 그래도 아동급식카드가 없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는 항변도 있을 수 있으나 당사자의 입장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턱없이 부족한 식비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 편의점밖에 없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부모의 몫이고 당연한 의무지만 그 삶의 무게가 조금 덜어진다고 해도 좋지 않겠는가. 매번 밖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같은 음식 먹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식당이나 편의점 밥이라고 어디 다르겠는가. 주인공 서진이가 편의점에서 만난 남자아이나 소리의 이야기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공원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그 마음은 또 어떠한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밥을 먹어야 하는가에 이르면 마음은 더 착잡해진다. 그런 점에서 아동급식카드로 편의점 음식을 사 먹어야 하는 두 아이와 들고양이의 접점은 자연스럽다. 그들은 너무 이른 나이에 이미 세상의 냉혹함을 알아버렸다. 배려가 없는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처지는 삭막하기 그지없다. 세상의 쓴맛을 알지 않아도 되는 나이에 이미 맛본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땅의 수많은 아이들이 지금보다 좀 더 사랑받고 행복해지기를 기원한다. 그들이 아직도 이 세상 어딘가에 자신들을 응원하고 지켜주고자 하는 이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란다. 그들의 꿈이 꿈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로 변하고, 그들이 만나고 싶은 미래가 더 멋진 모습으로 후다닥 다가오기를 바란다. 아쉽게도 <오늘부터 배프! 베프!>에는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서진이와 엄마의 지나가는 이야기 틈에 희미하게 한 줄로만 등장할 뿐이다. 발을 동동거리며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모습도 안타깝지만 설령 그게 아빠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저출산을 탓하기에 앞서 오늘 이 시간에도 애를 태우며 아이를 키우고 있을 수많은 한부모 가정, 그리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시스템과 사람들의 따뜻한 배려가 그리워진다. 우리 시대는 예전처럼 이웃이 부모의 빈자리를 메워주거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내내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도 일주일, 길게는 한 달 후에나 발견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절박할 때는 작은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주는 울림이 더 크게 느껴진다. 임계점을 넘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이다. 하지만 그 고비만 넘기고 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오늘 누군가가 이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힘든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될 거라고, 이 또한 금방 지나갈 거라고, 장창영 작가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 와 문학이론서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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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03 18: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헌수 시인-진봉초등학교 어린이들'보리밭에 피는 꿈'

한 해를 돌아보면서 여러 수업 중에서 기억에 남는 수업은 김제 진봉초등학교 아이들과의 만남이다. 코스모스가 줄 지어 서있는 가을의 넉넉한 모습, 추수가 끝난 들녘을 돌아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풍경의 깊이를 더 해 주었다. 새만금의 중심도시인 진봉면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보리밭이 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김제의 끝없는 황금들녘은 북쪽으로 만경강과 남쪽으로 동진강 사이에 펼쳐진다. 진봉들녘은 쌀과 보리를 생산해 내며 징게맹개의 지평선을 감상하기에도 좋다. 추운 겨울에 자라는 찰쌀보리는 병해충이 심하지 않고 수분흡수율이 좋아 찰지고 촉촉한 감이 있다. 어린 시절 쌀밥에 섞인 보리를 골라내며 먹던 추억이 떠오른다. 미끌미끌하고 까끌거리는 식감이 싫었던 기억이 난다. 추수를 끝낸 들판에 새떼들이 오르내리고 곤포사일리지가 마시멜로처럼 여기저기 뒹굴고 농기계들 사이로 길고양이가 보인다. 진봉면에 있는 관기, 종야, 상수내, 하수내, 석교, 상궐, 정동, 해망의 마을이야기를 소재로 그림책을 만드는 수업을 했다. 먼저 아이들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경로당과 마을회관을 찾아가 어르신들을 인터뷰 하며 글감을 뽑아내었다. 진봉면에 관한 자료조사를 시작하면서 너른 보리밭, 심포항, 망해사, 어른들의 유년 시절, 일제강점기 이야기 등을 알아보았다.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고, 구성진 사투리로 말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워했다.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면서 진봉 보리밭에 푹 빠져 지냈다. 아이들은 살고 있는 마을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지역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며 이해하는 마음도 커졌다. <보리밭에 피는 꿈>은 왕오색나비와 현지가 등장하며 파도처럼 일렁이는 보리밭으로 시작한다. 보리밭에서 보리도 구워먹고 잠자리를 잡고 나비 떼를 쫓으며 놀던 추억, 어른들의 가난했던 시절, 일제 강점기의 생활이 들어있다. 심포항에서 뭉그적거리던 물범과 갯지렁이와 조개를 잡아서 생활했던 이야기, 할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흰 고무신을 들고 따라간 할머니, 일제강점기에 농사지은 곡식을 가져가는 일본군과 고되고 힘든 시절 이야기가 들어있다. 동네잔치와도 같았던 가을운동회, 망해사까지 걸어서 소풍을 다녀왔던 일과 보리의 자생력과 푸른 생명력을 노래한다. 아이들의 꿈이 보리처럼 단단해지기를 바라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건강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새기며 마무리 된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고, 거칠고 삐뚤빼뚤한 선으로 그림을 그렸다.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사인펜을 두르고 색연필과 사인펜으로 칠하는 작업을 하고 노래도 흥얼거리면서, 집중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손대지 않은 아이들만의 정서가 드러난 그림이 주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논물을 보러 다니는 아버지와 바다낚시를 가는 일이 재미있다는 우영이, 고양이 사육사가 되고 싶은 수호, 편의점 사장님이 되어 멘토스와 더블더블을 몽땅 먹고 싶다는 민석이, 환경미화원이 되어 더럽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치우겠다는 정후, 로제떡볶이와 짜장면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머리를 잘라주는 미용사가 꿈인 세린이, 유튜브에서 만나는 무한한 세상이 놀랍고 신기하다는 지성이, 돼지고기의 비곗살을 좋아하고 사랑을 전하는 목사님이 되고 싶은 예담이, 무한의 계단 게임에 빠져 지내는 요즘이 행복하다는 환이, 손흥민 같은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 태영이, 눈망울이 유난히 맑고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 서로 믿고 도우며 건강하게 자라는 학교, 김제 진봉초등학교 오태정 교장선생님과 심민욱 선생님, 진봉초등학교 교육공동체의 친밀함과 다정함을 잊을 수 없다. 진봉 들판을 오가며 소풍가듯 갔던 수업이 새록새록하다. 진봉초등학교 어린이 작가 탄생을 축하하며 아이들의 꿈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을 듬뿍 보낸다. 김헌수 시인은 2018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삼례터미널'로 등단했다. 또 그는 '작가의 눈' 작품상을 받은 이력이 있다. 그의 시집으로는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 <조금씩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있고, 시화집으로는 <오래 만난 사람처럼>, <마음의 서랍>이 있다. 오디오북으로는 <저녁 바다에서 우리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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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20 17:0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정경 시인-페터 춤토르 '분위기'

나의 근무지는 팔복예술공장이다. 2019년의 첫 출근길에 나를 태운 택시 기사는 “여기는 뭘 만드는 공장이에요?”라고 물었고, 그 뒤로도 더러 그런 일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 폐업하기 전까지 카세트테이프 공장이었던 이곳은 이후 16년 동안 방치되다가 이제는 전시와 예술교육,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기획되고 실행되는 현장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팔복예술공장에 방문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기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단순히 오래되고 낡은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 공간이 고유의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겠다. 페터 춤토르의 『분위기』에 매료된 것은 그야말로 ‘분위기’ 때문이다. 그의 건축물이 간직한 분위기. 이 책은 2003년에 ‘독일 문학·음악축제’에서 <분위기. 건축적 환경. 주변의 사물>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춤토르의 강연을 바탕으로 한다고 밝혀두고 있다. ‘분위기’는 춤토르가 오랫동안 관심을 두고 생각해온 주제이며, 그에게 분위기는 미학적 범주에 속한다. 이 책의 첫 장에 인용한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가 1844년에 비평가 존 러스킨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분위기는 나의 스타일이다” 스위스의 건축가 춤토르는 2009년에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그의 수상은 당시만 해도 의외로운 결정이라고들 했다. 이전 수상자들은 국가 차원의 대규모 프로젝트로 이름을 세계에 알린 건축가들이었던 반면 춤토르는 스위스 알프스의 작은 마을에서 일하는 은둔형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축의 본질을 끈질기게 탐구한 구도자와 같은 그의 건축 철학을 인정한 건축계에서는 이미 ‘건축가들의 건축가’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분위기』는 춤토르가 건물을 설계하면서 깨달은 아홉 가지 사실에 대해 다룬다. 그는 건축물의 분위기는 시각적인 부분 외에도 소리나 몸이 감지하는 온도, 습도, 주변 사물과의 조화 등 여러 측면이 공간의 분위기를 인지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말한다. “건축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시간예술이다. 건물 내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식을 떠올리면 된다. 나는 작업할 때 여러 지점들을 고려한다. 온천 프로젝트로 설명하겠다. 우리에게는 편안하게 거닐 수 있는 환경, 지시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유혹하는 분위기,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병원의 복도는 사람들에게 지시한다. 그와 달리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느긋하게 걷게 만드는, 부드럽게 유혹하는 기술은 건축가의 몫이다.” - 『분위기』 41쪽 그가 언급한 온천 프로젝트는 스위스 그라우뷘덴주 발스에 있는 온천이다. 그는 알프스산맥에서 나는 편마암 6만여 개와 콘크리트, 그리고 빛을 활용해 ‘테르메 발스(Therme Vals)’를 완성했다. 알프스의 자연경관, 천장과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 물의 온도와 소리 등을 섬세하게 계산해 설계했다. 스위스 작은 마을에 세운 나뭇잎 모양의 ‘성 베네딕트 교회(Saint Benedict Chapel)’와 독일 바렌도르프 들판에 있는 클라우스 형제 예배당(Bruder Klaus Field Chapel)도 감탄을 넘어선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클라우스 형제 예배당은 천장의 작은 구멍을 통해 빛이 내려오는데 내부를 지지하던 나무 거푸집을 3주 동안 태워 만든 검은 벽과 대비되어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킨다. 그 어떤 화려한 장식 없이 놀랍도록 아름답다. “아무리 고심해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으면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한다.”라고 건축이 ‘아름다운 형태’를 간직해야 함을 춤토르는 강조한다. 그는 성상이나 정물에서 아름다운 형태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평범한 일상의 도구들, 하나의 문학작품, 한 곡의 음악에서도 아름다운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라고 이 책을 맺는다. 당신은 어떤 분위기를 사랑하는가? 그곳에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거기에 머무는 동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느끼게 되리라. 김정경 시인은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검은 줄'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다. 자칭 ‘산책중독자’. 오래된 골목을 유람하며 채집한 이야기로 시도 쓰고, 산문도 쓰며 살고 있다. 현재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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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13 17:4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시인 – 안도현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

안도현의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를 읽다가, 해밀턴의 법칙이 떠올랐습니다. rB > C. 유전적으로 가까운 정도(genetic relatedness)에 이타적 행동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Benefit)을 곱합니다. 값이 그 행동을 하는 데 드는 비용(Cost)보다 크기만 하면 이타적 행동은 진화한다는 것입니다. “초록 풀잎 하나가/ 옆에 있는 풀잎에게 말을 건다/ 뭐라 뭐라 말을 거니까/ 그 옆에 선 풀잎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풀잎이/ 또 앞에 선 풀잎의 몸을 건드리니까/ 또 그 앞에 선 풀잎의 몸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들끼리/ 한꺼번에 흔들린다/ 초록 풀잎 하나가/ 뭐라 뭐라 말 한 번 했을 뿐인데/ 한꺼번에 말이 번진다/ 들판의 풀잎들에게 말이 번져/ 들판은 모두/ 초록이 된다” (‘초록 풀잎 하나가’ 전문). 옆과 앞에 있는 풀잎은 가까운 사이입니다. 땅속을 벋어 가는 뿌리를 잠시 멈추고 물과 양분을 나눌 수 있는 사이죠. 이롭고 보탬이 되는 일은 무엇일까요? 들판이 모두 초록이 되는 것. 초록은 젊음, 순수, 발달, 평화, 휴식, 여유 등을 상징해요. 말을 거는데 비용은 얼마나 들까요? 흔들림을 지불해야 한다고 하는군요. 흔들림은 슬픔과 아픔으로 흔들릴 뿐,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어지러울 연(䜌)과 마음 심(心)이 합해져 그리워할 연(戀)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나는 좋은 느낌과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겠어요.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겠습니다. 내게도 초록 들판 하나 무연히 흘러들어 오겠지요. 로드 킬을 당한 족제비를 지나치지 않고 차를 세웁니다. 그와 가까워져요. “털가죽으로 노란 목도리를 만들어 팔던 때”의 소리를 듣습니다, 생태계를 지탱해 준 족제비를 “산머루 같은 까만 눈으로” 바라봅니다. “지금은 길가에 누워 있는 족제비/ 아스팔트의 목을 감싸고 있는 목도리”는 숭엄함을 가만히 건네줍니다. “흉측한 걸 왜 보느냐”라는 말은 한 손으로 받아도 가볍지만 말이죠 (‘아무도 주워 가지 않는 목도리’ 중).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는/ 할아버지의 유품 중에는/ 씨앗이 든 낡은 자루가 있다”로 시작되는 ‘할아버지의 시드볼트’는 “올해 화분에 한번 심어 보자”라고 말하는 아빠로 끝납니다. 유전적으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타적 행동이 진화할 현실성이 높은 것이지요. “먼 훗날 열어 보라고/ 할아버지가 시드볼트를 만들어” 놓았겠지요. 덕분에 화자는 “이 작고 여린 것들이/ 힘이 정말 세다”라는 것과 “손끝에도 잡히지 않는 씨앗 중에서/ 채송화와 상추씨가 제일 작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지요. 물론 “씨앗을 담아/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 놓은” 할아버지의 노고는 봉투처럼 작죠.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고/ 귀뚜라미와 대화를” 나누면, “혼자 지낼 줄 알아야 어른이 된다” (‘귀뚜라미와의 대화’ 중)라는 진실을 살릴 수 있겠지요. 이영종 시인은 2012년에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에 선정되어 2023년에 첫 시집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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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06 17: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작가, 김여화 '운암강'

섬진강은 물줄기가 지나는 마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진안 백운에서는 백운강, 임실 관촌은 오원강, 순창은 적성강, 곡성은 순자강·압록강이다. 임실 운암을 흐르는 물은 지금 ‘옥정호’라고 불리는 호수 같은 강이 되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운암강이라고 부른다. 옥정호는 1928년 섬진강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운암댐을 만들며 생긴 인공호수다. 1965년 대한민국 최초의 다목적댐인 섬진강댐이 완공되면서 호수는 더 넓어졌지만, 기존 운암댐과 함께 마을·농경지가 물에 잠기면서 수몰민들의 슬픈 사연은 깊어졌다. 옥정호 물은 더 서럽고 애틋해졌다. 김여화(1954∼2023)의 장편소설 『운암강』(유월의나무·2015)은 강이 품은 숱한 곡절을 담았다. 작가는 섬진강댐 건설로 통째로 물에 잠겨야 했던 입석리 잿말(嶺村)을 배경으로 마을 사람들이 겪었던 사연을 구절구절 풀어 놓는다.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던 이야기,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았던 이야기, 강물에 묻어 버린 이야기들이다. "갑진년이 저무는 섣달그믐 그 밤이 지나면 을사년이 시작되는 정월의 초하루다. 때는 65년 2월 1일 일진은 정해를 맞는다. 잿말 사람들은 섣달에 한전 사무소로 삼삼오오 몰려가 그곳의 휴게실을 점령하고 하룻밤 묵어 연일 농성을 벌이고 열두 가지의 조건을 붙여 데모하였더니 경찰관들을 동원 강제 해산시키니 주모자를 색출한답시고 조사를 벌이고 뒤숭숭한 상태에서 새해를 맞는 감회는 남다르고. 이제 이곳 잿말에서 차례를 올리는 것으로는 마지막이다. 실로 500여 년 잿말이 생기고 나서부터 평화롭고 정말로 아름다운 국사봉과 강과 넓은 들이 있어 풍요로웠던 구성물 앞 마당벌 구름이 이번 설을 쇠고 나면 미구에 해가 가기 전에 수장되리라. 저 멀리 묵방산 넘어 자시라지는 해는 잿말 구성물 사람들의 이렇듯 의미 깊은, 아쉬운, 쓰리고 애리는 가슴을 알고나 있는지 무장무장 저 홀로 묵방산을 넘고 있다." (김여화의 소설 「운암강」 중에서) 잿말은 수몰되기 전까지 면사무소·파출소·초등학교가 있는 운암면 소재지였으며, 임실군의 동학농민혁명과 3·1독립만세운동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었다. 전주최씨 집성촌으로 양요정을 지은 최응숙이 여생을 보낸 곳이며, 조선 시대에 진사를 12명이나 배출할 정도로 바르고 곧은 기운이 가득한 곳이었다. 마을 뒤에 있는 작고 낮은 산이 국사봉(475m)이라는 큰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섬진강댐 20년사』에 따르면 임실군 운암면·강진면·신평면·신덕면과 정읍시 산내면 5개 면 24개 마을 93㎢가 수몰됐고, 2,786세대 1만 9,851명의 이주민이 생겼다. 정부는 수몰민을 부안군 계화도와 경기도 반월로 이주했지만, 이주지 조성이 제때 되지 않아서 상당수 주민이 고향 가까운 곳으로 돌아왔다. 슬픔은 반복되었고 아우성은 커졌다. 그 소리를 놓치지 않은 이는 작가 김여화뿐이었다. 올봄, 작가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수필집 『임실, 우리 마을 옛이야기』, 『그림이 있는 임실 이야기』, 『임실의 먹거리 이야기』, 어휘사전 『임실 사투리 어휘록』 등 그가 남긴 흔적은 온통 임실이다. 작가가 수몰민의 아픔을 잊지 않았던 것처럼 임실도 작가 김여화의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최기우 극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다. 희곡집 <상봉>,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은행나무꽃>, <달릉개>, <이름을 부르는 시간>, 어린이희곡 <뽕뽕뽕 방귀쟁이 뽕 함마니>,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 <쿵푸 아니고 똥푸>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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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29 17:4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작가, 이윤학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

이 시집은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 같았다. 하여 이윤학 시인을 만난 적 없지만 먼 곳에서 보내온 연인의 편지처럼 은밀한 ‘나만의 것’이어야 했다. 서평(왈가왈부) 대신 그동안 마음속 하나쯤 품고 있을 ‘풍경’과 숙성된 ‘그리움’을 아껴먹고 있었다. 40줄에 들어서 시를 알게(배우게) 된 즈음 나는 지도교수가 권한 시집 100권 정도를 읽었던 것 같다. 시에 대한 감흥이 아니라 신춘문예 도전용인 ‘한 수 배우기’ 위함이었다. 그때 길들인 삿된 시 독서법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현재 내 정서의 평야에 시란! 낙과(落果) 같은 것, 농부가 서너 번 실패 본 작물처럼 돌이켜보기 싫은 것이 되었다. 침잠해있는 열패감이나 외부적인 충격을 흡수할 만큼 시가 그렇게 대단치 않다. 시라는 뮤즈 앞에 순종적이지도 그렇다고 버릴 수 있는 용기도 없는 겁쟁이에게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은 시가 효능이 아닌 詩로 읽혔다. 그것이면 된 것 아니겠는가! "지금은 눈물이 번지지 않는 혹한의 시간 글썽이며 흩어진 별들의 파편을 / 그 사람 눈동자로 돌려주기 적당한 시기/ 수평의 별들이 수직의 별들로 바뀐 시간을 / 거슬러 그 사람에게 돌아가기 적당한 시기 / 이 세상에서 살기 불가능 한 별들을 / 그 사람을 닮은 새벽별들을 / 그 사람의 눈동자에 파종한 적이 있었다" ('별들의 시간' 일부) 시인은 흩어진 별들의 파편을 그 사람 눈동자로 돌려주기 적당한 시기를 가늠하고 있다. ‘눈물이 번지지 않는 혹한의 시간’ 그 절박함을 고요히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에게 그 행위는 정언명령과 같다.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또 산문집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을 읽었을 때도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났다. 아들이 죽었을 때나 모든 것이 파멸에 이르렀을 때도 조르바는 미친 듯 춤을 춘다. “두목,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반쯤 악마가 되지 않고 어떻게 악마를 다룰 수 있겠어요?”라던 원기 왕성한 야수(野獸)를 지나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구현한 ‘자유인 조르바’. 우리가 저지른 일을 이해하는 과정이 삶이라면 이윤학 시인은 지나온 삶의 파편들을 시의 뼈에 새기면서 이해하고 용서하려 한다. 그 행위는 다시 한번 상처를 복원시켜야만 가능한 것이다. 독자에게는 상처를 치유할 절호의 찬스가 되는 셈이지만 갈등과 단절, 결핍과 혼란을 재료 삼는 이 방식이 작가에게는 또 한 번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검지를 잘라버린’ 조르바처럼 시인은 자신을 엄혹하게 닦아 세운다. 이를 일컬어 박형준은 표사(表辭)에서 “절실한 이미지를 얻지 못하면 죽어도 쓰지 않는 태도” “독사처럼 머리 치켜든 비애와 늘 맞서고 있지만 그 머리를 베어버리지 못”하고 “가난한 모든 것들의 흔적을 지독하리만치 끈질긴 응시의 미학으로 복각해 낸다”고 했다. 이윤학 시인의 이런 태도를 시인의 말에서 방증한다. “부리와 발톱들을 쭉 뻗은 자세로 최후를 맞이한 새를 보았다(중략)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엔 나머지 체중을 비우지 못해 바닥에 의지한 자세로 더이상 어찌할 수 없어 눈을 감고 말았다 최대한 부리와 발톱들을 떼어놓으려는 의지의 마침표였다 자신과 끝까지 타협하지 않은 정신의 길이었다” "꽃을 보지 않은 열매를 자꾸 먹어봐야 아린 맛에 홀리지 않는단다 눕혀 박힌 술병들의 꽃밭엔 꽃이 없고 아려서 남 겨진 때꼴들만 그늘을 오물거렸다 서리 맞기 전에 풋고추 몇 부대 따와 바깥마당 마루에 펼쳐 너는 어머니"「('때꼴(까마중)' 일부) 어렸을 때 나는 우물가에 있던 까마중을 맛있게 따먹었다. 시인의 체험과 더불어 내(독자)가 체험된 서사에서 시간은 직선적이지 않다. 불가역적 성질인 시간이 유기적으로 결합 돼 의미망이 환원된다. 그리하여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이 현재의 나를 따숩게 하는 것이다. 특히 사춘기 시절 외로움과 결핍이 쓸쓸하되 이윤학 시인의 키보드를 적셨을 활자의 열매, 까마중을 혓바닥으로 음미 내 과거의 불완전함과 미숙함을 이해하는 것이다. "살러 들어와 죽어나간 자의 집에 당도했다 / 탱자나무를 전지하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 바닥을 뒹구는 탱자들이 쭈글탱이가 되어 있었다(중략) / 폐암을 앓는 그의 신음을 재생하고 있었다 / 토해낸 매연 찌꺼기를 바람이 채가고 있었다(중략) / 노간주나무 그림자로 창고 벽에 재현하고 있었다 / 마당의 전깃줄에서 질끈 눈을 감았다 뜬 / 그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밤의 밀레' 일부) 우리 모두 가지가지의 삶이지만 최종은 죽음(고독)일 게 분명하다. 죽음에 대한 인식과 잃어버린 박동을 되살리는 작업을 통해 이윤학 시인은 그것이 결코 소멸과 상실이라고 말하지 않는 듯하다. 홍용희는 해설에서 “비관적 감정의 과잉 분출 대신 관조의 거리를 견지”한다고 했다. 덧붙이자면 화자 자신의 내적 세계까지도 관찰자적인 관조의 거리를 유지한다. 그리하여 과거의 정지된 이미지가 아니라 현재와 교감하는 서사적 상황을 끌어내 ‘시의 문법이나 효능’따위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저절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온기 가득한 얼굴로, 나보다 더 오래 다가와서 말이다. 기명숙 시인은 전남 목포 출신이며,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몸 밖의 안부를 묻다>가 있다. 현재 강의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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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2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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