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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미등재 기록물] 김낙철 역사(金洛喆歷史)·김낙봉 이력(金洛鳳履歷)

△김낙철 역사(金洛喆歷史) 전라도 부안의 접주 김낙철(1858∼1917)이 1890년 6월 7일(이하 음력) 동생 김낙봉과 함께 동학에 입도한 이래 1917년 12월 14일까지 일기 형식으로 남긴 자전적 기록이다. 국한문 혼용체로 쓰여있으며, 일기 형식이기는 하지만, 매일의 일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동학이나 천도교와 관련하여 중요한 상황이 있을 경우에만 기록하고 있다. 분량은 모두 38면이다. 김낙철·김낙봉 형제의 본관은 부안이다. <김낙봉 이력>의 1890년 기록에 따르면 김낙철의 집안은 1,000년이 넘게 부안에서 대대로 살아온 명문고족[盛門高族]이었다. 이전 시기의 집안 내력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5대 동안 독자로 내려오다가 그의 부친 대에서 형제가 출생하였으며, 이 형제가 맨손으로 집안을 이루어 몸소 수만 환(圜)의 재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김낙철역사>에도 역시 자신이 부자였음을 밝히고 있다. <김낙철 역사>에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다른 자료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중 눈에 띄는 몇 가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낙철은 1890년 6월 7일 동생 낙봉과 함께 동학에 입도하였다. 열흘 뒤인 6월 17일에는 동생 낙주(洛柱)가 종제(從弟)인 낙정(洛貞)·낙용(洛庸)과 함께 입도하였다. 김낙철 등은 1890년 7월부터 포덕(布德)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891년 3월에는 포교한 신도가 몇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숫자의 신빙성 여부를 떠나 김낙철 형제 휘하 동학교도들의 규모가 적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정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낙철 형제가 부안 일대에서 전봉준과 손화중이 이끌던 동학농민군 주력부대와 부안 군수 사이에서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낙철과 낙봉 형제는 입도 초기부터 제2세 교조 최시형을 자주 찾아보고 직접 모시기도 하는 등 교단 내에서도 만만찮은 위상을 확보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1893년 2월 광화문 복합상소 때는 동생 낙봉만 참여하였으며, 이때 김낙철은 전라도 도도집(都都執=도집강)을 맡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각 지역에서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본격적으로 일어났지만, 김낙철은 큰 문제 없이 포교를 이어갔다고 한다. <김낙철 역사>에는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교단 측의 대응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김낙철은 동학농민혁명의 발발 당시 전봉준에 대해 “고부 전봉준이 민요(民擾)의 장두(將頭)로서 고부 경내의 인민을 선동한다는 말이 들리므로, 은밀히 그 속을 탐문해 보았더니 외면은 민요의 장두이나 내면은 스스로 동학의 두목이라 부르며 다른 사상을 품고 있었다.”고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생 낙봉을 최시형에게 보내는데, 최시형은 “저 봉준은 교인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니, 절대 상관하지 말고, 몰래 각 접(接)에 기별해서 모두 지휘에 따라 봄을 기다리라.”고 비밀리에 분부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김낙철은 이러한 분부 내용을 은밀히 각 접에 알리고 수도(修道)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봉준이 고부성을 무너뜨린 뒤 각 처의 “무뢰배”가 전봉준과 김개남의 포(包)에 몰려들었고, 부안까지도 위태롭게 되었다. 이때 부안 군수 이철화(李哲和)가 김낙철에게 “부안성을 지켜 외적(外敵)을 막아 달라”고 요청하자 4월 1일에 교인 수백 명과 함께 서도(西道) 송정리(松亭里) 신씨(辛氏)네 재각(齋閣)에 도소(都所)를 설치하였다. 동생 낙봉도 신소능(申少能)과 함께 부안 줄포(茁蒲)에 도소를 설치하여 타 지역 농민군을 방어하였으며, 이에 대해 온 고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월 12일 김낙철과 낙봉 형제 모두 나주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의 지시를 받은 부안군수에 의해 체포되었다. 12월 23일 경군(京軍)과 일본군 30여명에 의해 압송되어 1895년 1월 3일에 나주 초토영(招討營)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김낙철 형제는 함께 구금된 농민군 32명과 함께 엄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1월 6일 다른 농민군 대신 잡혀 온 3명은 석방되었고, 나머지 29명 가운데 김낙철 형제를 제외한 27명은 모두 포살되었다. 이 무렵 나주 초토영에는 보성군수 유원규(柳遠奎)과 장흥의 이방언(李方彦)이 갇혀 있었으며, 전봉준과 손화중은 그 전날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사실 등을 기록해두고 있다. 김낙철 형제도 그로부터 6∼7일 뒤 서울로 압송되어 진고개[泥峴] 일본인 순사청(巡査廳)에 갇혀 조사를 받은 뒤 다음 날 감옥소에 들어갔다. 이때 서울 감옥소에는 성두한(成斗漢)이 수 백명의 농민군과 함께 옥에 갇힌 지 여러 날이 되었다고 했고, 손화중·전봉준·최경선(崔景善) 등이 갇혀 있었으며, 전봉준은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김낙철 형제는 김방서(金芳瑞)·이방언 등과 함께 3월 21일에 풀려나 3월 29일 한밤중에 몰래 부안(扶安) 인근의 갈촌(葛村)에 도착, 4월 4일 한밤중에 동생 낙봉(洛鳳)과 함께 낙봉 집으로 가서 곁방에 숨었다. 전봉준·손화중·최경원·김덕명 등이 체포된 뒤 나주에 구금되고 서울로 압송된 사정과 전봉준이 다리를 다쳤다는 사실, 성두한이 구금되어 있던 사실, 장흥 동학농민군 지도자 이방언이 체포되어 나주 초토영에 구금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된 뒤 이듬해 3월 21일 석방되기까지의 경과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후에도 부안 동도면 신월리의 친족 집에 토굴을 파고 고초를 겪으며 10개월 간 은신하여 생활한 내용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 각지로 피신한 농민군들의 참상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김낙철 역사>의 원본은 익산에 거주하던 김낙철의 외손녀가 보관해 왔으며 천도교 중앙총부 자료실에는 그 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김낙봉 이력(金洛鳳履歷) <김낙봉 이력>은 1890년 부안에서 형 낙철과 함께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직접 체험한 김낙봉(1860~1937)이 1937년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회고 형식으로 남긴 자전적 기록이다. 표지는 없으며, 본문 첫 장에 “金洛鳳履歷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는 이 자료는 한지에 국한문 혼용으로 쓰여 있고, 모두 127면이다. <김낙봉 이력>의 내용은 대부분이 앞에 소개한 <김낙철 역사>와 중복되지만,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우선 김낙봉은 1893년 2월 교조 최제우에 대한 포교의 자유를 요구한 광화문 복합상소 때는 소수인 박광호(朴光浩), 제소(製疏) 손천민(孫天民) 등과 함께 참여하였고,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다가 해산하라는 명령을 듣고 집에 돌아왔음을 기록해두고 있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데 대해서는 형 김낙철과 마찬가지로 부정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곧 “전봉준이 자신의 아버지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손에 죽은 일을 보복하기 위하여 민란을 일으켰다가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무장군(茂長郡)에 사는 손화중을 움직여서 큰 난리를 일으키려는 기미를 보고 마음과 정신이 두려웠다.”고 하였다. 또 형 김낙철의 편지를 들고 청산(靑山)의 문암리(文岩里)에 있던 대신사 최시형을 찾아 그로부터 “이것도 시운(時運)이어서 금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너는 형과 상의하여 접의 내부를 정중히 단속하고 숨어지내는 것을 위주로 하라‘”는 답신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때 최시형으로부터 동학 교단의 간부인 6임의 첩지(牒紙) 4,000여 장을 받았다고도 하였다. 한편 김낙봉은 돌아가려는 최시형이 “서장옥(徐章玉)이 진산군(珍山郡)의 방축점(坊築店)에 회소(會所)를 마련하고 전봉준과 호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날이 저물기 전에 해산을 안 하면 큰 재앙이 대두할 것이다. 건장한 심부름꾼을 시켜 빨리 전하라”고 한 지시를 받고 진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김낙봉은 진산 농민군의 기세에 눌려 최시형으로부터 받은 지시를 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최시형이 “시운이라 어찌 할 수가 없으니 너도 빨리 내려가서 뒤에서 호응하라 했다"고 거짓말을 전달한 후 도망하듯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음을 기록해 두고 있다. 진산의 농민군이 김낙봉이 떠난 다음날 금산군의 포군(砲軍)에게[이때 방축점의 농민군은 행상 김치홍(金致洪), 임한석(任漢錫) 등이 이끄는 행상과 읍민 1,000명에 의해 114명이 죽고 나머지는 해산하였다-필자]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도 기록해두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초기 동학교단의 대응과 진산 농민군의 활동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또한 4월 3일 전봉준과 손화중 등이 포병 4,000여 명을 인솔하여 부안으로 들이닥쳐 군수 이철화를 잡아 꿇어앉히고 칼을 빼어 목을 쳐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 이때 김낙철이 손화중과 협의하여 이철화가 참혹한 화를 면하게 된 점 등을 기록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에는 전체 내용 가운데 김낙봉이 동학에 입도하는 1890년부터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체포되는 1898년까지의 내용이 실려 있다. <김낙봉 이력>의 원본은 전주에 거주하는 증손자 김문철(金文哲)씨가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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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3.10 11:00

[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미등재 기록물] <동비토론(東匪討論)>과 <임영토비소록(臨瀛討匪小錄)>

<동비토론(東匪討論)>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있던 이회원(李會源)이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군 진압 문서를 모아 놓은 것이다. 동학농민군 진압과 관련한 감영(監營), 순영(巡營), 의정부(議政府) 등의 상급 기관의 관문(關文) 및 전령(傳令), 이들에게 올리는 강릉부의 첩보(牒報), 그리고 주변 관아를 상대로 보낸 관문(關文) 및 전령(傳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문서들을 <동비토론(東匪討論)>으로 묶은이는 이회원으로 추정된다. 그의 생몰년대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선원속보(璿源續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권39(卷之三十九)에 따르면 1830년(순조 경인) 4월 19일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효령대군파 15대손이다. 족보에 따르면 생원(生員)에 급제하고 음승지(蔭承旨)를 거쳐 소모사(召募使)를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회원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관동소모사(關東召募使)를 역임하였으므로 이 족보에 나온 인물임이 확실하다. 이회원은 그의 조상인 효령대군 11대손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 1703∼1781)이 강원도 강릉에 정착하여 선교장(船橋莊)을 건립한 이래 1830년 출생하여 1844년(헌종 10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83년(고종 20년) 순창원(順昌園) 수봉관(守奉官)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886년 사헌부 감찰, 이듬해에 의금부 도사와 공조좌랑을 지냈으며, 이후 상서원(尙瑞院) 별제(別提) 등의 관직을 거쳤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에는 당상관인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회원을 일컬어 ‘전승지(前承旨)’라고 하는 것이다. <임영토비소록(臨瀛討匪小錄)> 또한 동학농민군 토벌을 지휘했던 이회원의 관련 기록이다. 여기서 임영(臨瀛)은 강릉의 별칭이다. 그런데 작성자가 불분명하다. 작성자가 선교장 주인 이회원이라는 설과 이회원이 아니라 그의 지인일 것이라는 설로 엇갈렸다. 실제로 <임영토비소록>을 읽어보면 이회원을 ‘본읍(本邑) 정동면(丁洞面) 선교(仙橋)의 이(李) 승지(承旨)’로 지칭하여 작성자 본인과 이회원을 구분짓고 있어 이회원이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자료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이회원이 본인을 3인칭으로 설정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자료의 모두(冒頭)에는 이단의 성행을 개탄하고, 동학을 두고 요망한 술수이며 재물을 갈취하려는 방도로 규정하는 사설이 길게 실려 있다. 아무래도 강릉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의 총 책임을 맡았던 이회원 본인이 아니면 작성하기 어려운 사설로 보인다. 다음으로 1894년 8월 20일 이래 강릉 및 주변 지역에서의 동학농민군 활동 및 토벌에 대한 서술이 보이는데 11월 차기석(車箕錫)과 박학조(朴學祚)를 처형하고 수급을 원주 순무영에 보내어 관동 일대의 동비(東匪) 평정을 마무리 짓는 내용이 길게 이어진다. 여기서도 이회원은 ‘전승지(前承旨)’, ‘강릉부사(江陵府使)’만으로 지칭되고 이회원 본인이라고 서술되지 않는다. 그런 다음에 “어떤 객(客)이 돈천재(沌泉齋)를 지나다 주인(主人)이 쓴 토비소록(討匪小錄)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실록입니다’라고 말하니 주인이 쳐다보고 탄식하여 말하는” 문답이 이어진다. 여기서 돈천재(沌泉齋)는 이회원이 기거하는 선교장에 있는 활래정(活來亭)의 별호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미 토비소록(討匪小錄)을 언급하였다는 것은 문답 이전의 동학농민군 토벌 내용이 바로 <임영토비소록(臨瀛討匪小錄)>임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의 문답은 “토비소록(討匪小錄)”, 즉 <임영토비소록(臨瀛討匪小錄)>의 사족이라고 할 수 있다. 문답을 보면 문답의 돈천재 주인이 “내가 수령의 지팡이를 짚고서”라고 말하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돈천재 주인은 수령, 즉 강릉부사의 지팡이를 짚은 이회원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임영토비소록>의 작성자는 이회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통비토론(東匪討論)>이 강릉부사로 재직하던 이회원이 순영(巡營) 등 상급 기관 및 주변 관아와 주고받은 공문서를 엮은 것이라면, <임영토비소록(臨瀛討匪小錄)>은 그가 동학농민군 진압 과정에서 스스로 느낀 감정과 토벌 과정에 대한 자신의 서술, 그리고 객(客)과의 문답을 통한 자기 정당화를 담은 개인적인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자료를 동시에 검토하면 강원도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의 활동 상황과 토벌 과정에 대하여 공문서를 통하여 드러나는 공식 기록과 당시 토벌의 책임을 맡았던강릉부사 이회원의 개인적 인식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두 자료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강원도 강릉 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 및 이에 대한 진압 상황은 다음과 같다. 1894년 8월 20일부터 동학교도들이 강릉 대관령 서쪽 대화면(大和面)을 침범하여 대관령을 넘어간다고 큰소리쳤다. 이들은 “강릉의 어떤 부잣집은 우리들을 위해 술을 빚고 소를 잡아 저장하여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선교의 이 아무개는 우리를 해치려고 창검을 점고하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선교의 이 아무개’는 이회원을 지칭한다. 9월 4일에는 영월과 평창, 정선 등 5개 고을의 동학의 무리 수천 명이 강릉부사가 바뀌는 때를 엿보아 일제히 강릉 읍내에 들어와서 삼정(三政)을 바로잡을 것을 칭하고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다만 이들은 다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운데 10월 1일 이회원이 강릉부사에 제수되고 이후 관동소모사를 겸직하게 되었다. 이제 강릉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은 더 이상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11월 2일 강릉 영서의 봉평(蓬坪) 등에 있던 동학농민군도 이미 토벌당하여 동학농민군 지도자 7명이 체포당하고 나머지 무리들도 모두 체포되었다. 더 이상 강릉을 공략할 수 없었던 동학농민군은 정선과 평창에 집결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이회원는 양양(襄陽)과 삼척(三陟)에서 군정(軍丁)을 모집하였다. 지금은 강원도 평창(平昌)에 속해 있는 봉평에서의 전투는 11월 4일에서 5일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 동학농민군이 패배하여 9명이 참수되었다. 한편 내면(內面)에는 강원도 중부 영서 내륙 동학교단의 중심지였던 홍천(洪川)에서 도소(都所)를 꾸리고 홍천 서석 풍암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쫓겨온 차기석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린(麒獜), 인제(麟蹄), 양양(襄陽), 간성(杆城) 등에 통문을 보내고 군호(軍號)로 동학농민군을 모아 봉평을 공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1월 9일 순영중군행진소(巡營中軍行陣所)가 정선(旌善)까지 진출하였다. 일본군도 정선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정선의 동학농민군은 도망가서 흩어졌다. 이미 11월 7일 강릉에서 나온 포군이 순영 중군과 함께 정선읍으로 가서 동서로 나누어 동학농민군을 물리쳤다. 한편 차기석은 정선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내면에 있다가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11월 16일 무렵 관군이 내면 동학농민군 지도자 차기석과 오덕현(吳德玄), 그리고 집강 박석원(朴碩元) 등 3명을 사로잡은 보고가 도착하였다. 결국 11월 22일 차기석은 박학조와 함께 교장(敎場)에서 참수당하였고, 수급은 원주 순무영으로 보내졌다. 이로써 <임영토비소록>에 따르면 강원도 강릉 지역의 동학농민군 토벌은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임영토비소록> 말미에 있는 주인과 객(客)의 문답에 따르면 주인의 활동으로 인하여 “일본군이 동쪽으로 오는 형세를 모면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영동의 주민들이 안도할 수 있었다”는 객(客)의 질의가 나온다. 이는 이회원의 ‘밝은’ 지휘가 일본군의 영동 진입을 막은 점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행위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사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한다는 점에서 강릉부사 이회원과 일본군은 같은 입장이었고, 일본군의 영동 진입을 막기 위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였다는 것은 나름 본인은 일본군도 막았다고 하는 군색한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일본군을 경계한 점은 조선의 고을 수령으로서 최소한의 중심은 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임영토비소록>은 “상(上)의 32년 을미(乙未) 국월(菊月) 하한(下澣) 돈천재(沌泉齋)에서 짓다”로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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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2.24 19:12

[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미등재 기록물] 홍재일기(鴻齋日記)

홍재일기.hwp<홍재일기(鴻齋日記)>는 1책(19.5cm×22cm), 2책(23×19), 3책(21.5×19.5), 4책(20×20), 5책(19.5×20), 6책(21×21), 7책(21×19.5)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 부안군 남하면(현재의 주산면)에서 활동했던 유생 기행현(奇幸鉉, 1843∼?)이 1866년 3월 10일부터 1911년 12월 30일까지 45년간 농촌 지식인 기행현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 장기간에 걸쳐 직접 경험하거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탐문한 내용을 일기로 작성하였다. 그가 살던 시기는 개항 이후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기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치사회의 변동 양상은 어떤 시기보다도 급격하게 전개되었다. 일기의 최종 부분은 그의 중년과 만년에 해당하는 근대화와 정치 사회적 격변과 이후 식민지로의 진행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보고들은 내용과 주민들의 사정과 생활 형편, 조세 부과, 날씨와 자연재해, 호구조사, 물가와 시세 변동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일기에서 서술하고 있는 시기는 병인양요 무렵부터 시작해서 경술국치로 인한 대한제국 멸망 무렵까지이다. 기행현의 일기는 근대 이행기 정치사회 변동은 물론 경제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자료로, 동학농민혁명을 전후로 한 부안과 고부지역 사람들의 삶의 내용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내용은 1893년과 1894년의 기록으로 금구 원평의 동학집회, 고부농민항쟁과 안핵사 이용태의 작폐, 백산대회 등과 관련한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특히 1894년 4월 9일 자 일기에 “동학인이 지나간 곳은 풀 한 포기 밟히지 않고 벌레 한 마리 죽지 않았다”라고 하여 동학농민군의 생명 존중 사상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1894년 6월 17일 자 일기에 “곳곳의 동학인들이 당당하게 횡행하면서 나쁜 짓을 하고 폐해를 끼치며 거리낌 없이 살인을 하니 대소 인민들이 그 기세에 두려워하였다”라고 적고 있듯이 농민군에 대한 기행현의 인식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뒤늦게 홍재일기의 존재가 알려진 이후 전북대학교 이재연구소에서 부안군의 지원을 받아 이를 탈초하고 2권의 책으로 번역 발간하였다. 이 책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부안지역의 새로운 사례를 전해주는 귀중한 사료이자 1894년 전후의 국내 상황을 폭넓게 볼 수 있는 것으로, 최근 발견된 국내 자료 중에서 매우 가치 있는 사료로 판단된다. 기행현은 1866년부터 1911년까지 일기를 썼는데. 특히 1894년 동학농민혁명 중심지에 거주하면서 동학농민군⋅관군⋅일반백성⋅장사꾼⋅민보군⋅유생 등 다양한 사람들의 활동 내역을 기록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홍재일기는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하는 데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것이다. 홍재일기에서 담고 있는 주요 사건과 내용을 간략히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에도 동학농민군 잔여 세력의 활동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들의 색출과 토벌을 위해 부안지역에도 유회소(儒會所)가 설치되었고 농민군 체포와 처단은 1895년부터 1904년 러일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기행현은 이들도 ‘구 동학도’와 ‘신 동학도로’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동학농민군 색출을 위해 전라도 각 군과 읍에는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와 사상통제를 위한 향약(鄕約)이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는데, 특히 개항 이후 일상화되었던 오가작통제는 러일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도 부안지역에서 계속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작통제는 각 마을에서 매달 2회에 걸쳐 시행하였는데 주민들은 각기 호신용 무기를 소지하고 훈집소에 모여 점검하는 형식인데 그 내용을 두 권의 책으로 작성하여 비치해 두었다. 그는 동학농민군 외에도 여타 변혁운동에 대해서도 일기에 언급하였다. 고산 등지에서 활동하다 이후 대둔산으로 근거지를 옮겨 활동한 동학농민군 최후항쟁과 전봉준⋅손화중이 서울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사실도 들었다. 기행현은 이후 경주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민란소식을 들었고, 대한제국 시기 초반 제1⋅2차 제주민란과 서울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과 함께 특히 전라도 정읍과 고창⋅흥덕⋅김제 등 주변 지역에서 크게 활동하던 영학당(英學黨) 관련 내용도 일기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정부에서는 영학당을 ‘서양 종교를 빙자하여 침학하고 폐단을 일으키는 무리’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는 영학을 동학의 변형으로 평가하면서도 영학⋅동학⋅서학 등으로 엄밀하게 구분하여 이해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거주지인 부안지역은 영학이 없어 태평하다며 안도하고 있었다. 홍재일기는 을미사변 이후부터 시작되어 남한대토벌 작전까지 이어지는 호남의병에 대해서도 많은 기록을 남겼다. 국망 직전의 일기에서 그는 “‘무신 난리는 웬 난리? 기유 생난리에 큰 개 작은 개가 시냇가에 드러누워 임자를 기다리네’”라는 당시 회자되던 동요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일본인의 왕궁 매입과 철거 등을 통해 무너지는 조선 왕실과 망국적 사태를 우려하면서 일본에게 대한제국의 권리를 양위하는 조칙 번역문과 칙령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한편 호남의 곡창지대인 부안지역은 일본인들의 토지 점탈과 식민지 농업기반의 거점이 되었다. 일기에 그는 일본인의 부안지역 토지 점탈과 그들의 소작인과 마름 고용의 사례를 적고 있다. 그의 아들도 일본인의 논을, 그 역시 후지모토 합자회사의 논을 소작하였다. 부안지역의 일본인 토지매입과 그로 인한 소작권 변경은 일제의 대한제국 병합 직후부터 본격화되었고 그 여파는 기행현 자신에게도 피부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자료는 그의 후손 기곤 씨가 소장하고 있으며, 2024년 국가유산청에 의해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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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2.10 09:13

[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미등재 기록물] 이병춘의 ‘이풍암공실행록’

지난해 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185건을 소개하는 긴 여정이 마무리되었다. 지면을 통해 소개된 기록물들은 130여년 전 이 땅을 뜨겁게 달구었던 혁명의 증거이자,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소중한 자산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 185건이 동학농민혁명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등재 당시의 절차적 이유나 소장처의 사정, 혹은 뒤늦게 발굴되어 미처 그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수많은 기록물이 여전히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다. 이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전북일보와 함께 <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미등재 기록물>이라는 새로운 연재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 연재에는 신영우(충북대 명예교수), 배항섭(성균관대 교수), 왕현종(연세대 교수), 조재곤(서강대 연구교수), 유바다(고려대 교수), 김양식(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 이병규(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가 필진으로 참여한다. 이번 연재를 통해 비록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목록에는 아직 오르지 못했지만, 역사적 가치만큼은 등재 기록물 못지않은 ‘숨겨진 기록’들을 세상에 내보일 계획이다. 역사는 기록을 먹고 자란다. 특히 격변기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주류를 이루기 마련이어서, 그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낸 민초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학농민혁명 역시 마찬가지다. 관변 기록이나 훗날 정리된 회고록들이 존재하지만,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사를 넘나들고 이후의 삶까지 일관되게 기록한 당사자의 육성 자료는 매우 드물다. 이러한 갈증을 해소해 줄 귀중한 사료가 세상에 나왔다. 바로 풍암(灃菴) 이병춘(李炳春, 1864~1933) 선생의 활동을 기록한 《이풍암공실행록(李灃菴公實行錄)》이다. 이 자료는 이병춘 선생의 손자인 이길호 천도교 전주교구장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기탁함으로써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선생이 구술하고 문하생 김재홍이 정리하여 1915년에 완성된 이 기록은, 동학 입도부터 동학농민혁명 참여, 도피 생활, 갑진개화운동, 그리고 천도교 활동에 이르기까지 한 개인의 삶을 통해 한국 근대사의 격랑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이병춘은 1864년 전라도 임실 상동면 왕방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지극한 효심으로 마을의 칭송을 받던 인물이었다. 엄동설한에 병든 어머니를 위해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구했다는 일화나, 위독한 어머니를 위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넣었다는 이야기는 그가 지닌 성실함과 간절함을 대변한다. 이러한 ‘성력(誠力)’은 1888년 동학에 입도한 후, 개인의 효(孝)를 넘어 광제창생(廣濟蒼生)이라는 사회적 실천으로 확장되었다. 《이풍암공실행록》이 갖는 가장 큰 가치는 그동안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역사적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준다는 점이다. 역사학계의 오랜 쟁점 중 하나였던 1893년 전봉준 장군의 행적이 명확히 드러났다. 기록은 “四月에 更會于忠淸道報恩郡帳內)하야 始設倡義所하니 其時에 古阜郡全琫準은 亦會于全羅道金溝郡院坪이라”, 즉 4월에 충청도 보은 장내에 모여 창의소를 설치하니, 이때 고부군 전봉준은 전라도 금구군 원평에 모였는데 내응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라고 적고 있다. 이는 보은집회와 대칭되는 원평집회를 전봉준이 주도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그동안 정황상으로만 추정되던 사실이 당사자의 기록을 통해 입증된 셈이다. 또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교단의 최고 지도자였던 해월 최시형의 구체적인 동선이 밝혀진 점도 놀랍다. 우금치 전투 패배 이전인 1894년 10월부터 11월 사이, 최시형이 남원과 임실 등지를 순행하며 겪었던 일들이 날짜와 장소, 동행인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패퇴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임실 갈담까지 내려온 손병희가 최시형을 만나 다시 북상하는 과정은 혁명 지도부의 최후 항전과 도피 과정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퍼즐 조각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과 최시형의 동학교단이 어떻게 연결되고 소통했는지를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역사적 사실의 나열을 넘어, 이 기록은 당시 혁명에 참여했던 이들이 겪어야 했던 처절한 생존의 기록이기도 하다. 진산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 민보군(내부의 적)의 추적을 피해 산속에서 솔잎과 나무껍질로 연명했던 도피 생활의 참상은 활자로 읽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특히 필자의 눈길을 끈 대목은 1895년 3월의 일화다. 잠시 집에 들렀던 이병춘이 다시 도피를 결심하며 아내와 짜고 벌인 ‘위장 부부싸움’ 장면이다. “아무 까닭 없이 떠나면 마을 사람들이 동학 때문에 떠난다고 의심할 테니, 우리가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척합시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고 살림살이를 집어 던지며 아내와 싸우는 시늉을 하고는 집을 나섰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가족을 지키고 자신의 신념을 이어가기 위해 연극을 해야 했던 한 혁명가의 인간적인 고뇌와 기지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후 이병춘은 “해월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면 집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전국을 떠돌고 있다. 상주에서 꿈속의 계시처럼 최시형을 만나고, 최시형 사후에는 다시 강원도 산골을 뒤져 손병희를 찾아내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그는 단순한 추종자가 아니었다. 스승을 잃고 방향을 잃은 교도들을 다시 규합하고, 손병희를 중심으로 교단을 재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자료는 갑진개화운동과 천도교 성립 과정에서의 비화도 풍부하게 담고 있다. 1904년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단발을 단행하고 흑의를 입으며 개화운동을 이끌던 모습, 이에 대한 관의 탄압과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은 동학이 어떻게 근대 종교인 천도교로 탈바꿈하며 민족운동의 구심점으로 성장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병춘은 이후 3·1운동을 주도하고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대는 등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풍암공실행록》은 단순한 개인의 회고록이 아니다. 이것은 구조와 제도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소외되었던 ‘행위자’의 복권이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혁명가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던, 효자이자 남편, 그리고 신실한 구도자였던 이병춘을 만난다. 그리고 그가 겪어낸 고난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동학농민혁명이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피와 눈물,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 쓰인 살아있는 역사임을 깨닫게 된다. 이토록 귀중한 자료가 130여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 우리 앞에 도착하였다. 이제 남은 과제는 연구자들의 몫이다. 이 자료에 담긴 풍부한 사실들을 기존 사료들과 교차 검증하고 분석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더욱 온전하게 복원해야 한다. 특히 최시형 사후 교단의 분열과 재편 과정, 손병희와 김연국의 갈등 등 교단 내부의 내밀한 사정에 대한 기록은 심도 있는 후속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끝으로 소중한 집안의 보물을 기꺼이 내어주신 이길호 교구장님께 깊은 경의를 표한다. 《이풍암공실행록》의 발굴이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지평을 넓히고, 그 정신을 현대에 되살리는 새로운 불씨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빛바랜 책 속에 담긴 치열했던 삶의 기록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최진욱, 「이풍암공실행록」의 내용 검토와 사료적 가치 분석」, 『기록과 자료로 본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연구소 학술총서 5, 2025.12, 이병규, 「자료소개 이풍암공실행록」, 『동학농민혁명 연구』 3,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연구소, 2024.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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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2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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