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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칼럼] 갈릴리해와 사해

 

팔레스타인에는 두 개의 바다가 있다. 하나는 맑아서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 햇빛을 받은 바다가 환하게 미소짓는다. 사람들이 그 근처에 집을 짓고 살며 새들도 둥지를 틀고 산다. 그 바다가 있기에 모든 생명체들은 더없이 행복하다.

 

요단강은 남쪽으로 흐르다가 다른 바다를 만난다. 이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튀어 오르지도 않고, 나뭇잎의 펄럭임도, 새들의 지저귐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없다. 물위로는 무거운 공기가 감돌고 있으며, 사람도, 짐승도, 새도 그 물을 마시지 않는다.

 

무엇이 인접해있는 두 바다를 그토록 다르게 만들었을까? 요단강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다. 요단강은 두 바다에 똑같이 좋은 물을 공급한다. 차이는 다름 아닌 이것이다. 갈릴리해는 요단강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가두어 두지는 않는다. 한 방울의 물을 받아들이면 한 방울의 물은 흘려 보낸다. 다른 바다는 얌체처럼 욕심껏 받아들이기만 한다. 그리고는 조금도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흘러 들어오는 족족 가져버린다.

 

갈릴리해는 내어주고 살아있다. 다른 바다는 아무 것도 내어놓지 않는다. 그래서 이 바다는 '사해(死海)'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팔레스타인에는 두 종류의 바다가 있다.

 

이상은 브루스 바턴(Bruce Barton)이 쓴 『아무도 모르는 사람(The Man Nobody Knows)』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갈릴리해와 사해는 사실은 호수다. 너무 크다 보니 옛날부터 사람들이 바다라고 불러서 그렇게 이름지어졌다. 사해는 요단강의 물을 받아들이려고만 했지 내어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수 안에 물이 고이고 증발되어 점점 염분의 농도만 높아졌고, 결국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호수로 변하고 말았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재산은 퇴비와 같다'고 말했다. 퇴비는 적당히 묵힌 다음 제 때 논이나 밭에 뿌려주면 농작물을 잘 자라게 하는 좋은 거름이 된다. 그러나 퇴비를 쌓아놓고 오래 묵히고만 있으면 고약한 냄새만 진동할 뿐 아무 쓸모가 없는 쓰레기가 되고 만다.

 

이제는 '가진 자'의 개념도 달라져야 한다. 베풀지 못하고 갖고만 있으면 진정으로 가진 사람이 아니다. 단지 많이 소유하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서 '천민자본주의'적인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늘 가난한 사람들이다. 선진국은 돈 많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나라가 아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 베풀어줄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분명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갈릴리해처럼 늘 내어주고 베풀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움과 싱그러움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봉사하고, 기여하며, 헌신하고, 공헌하기 때문에 아무리 퍼내도 결코 마르지 않는 깊은 산 속 옹달샘처럼 향기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다른 하나는 사해처럼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 탐욕과 과욕의 화신이 되어 육신은 기름지지만 영혼은 갈수록 메말라 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서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며 영혼이 썩어가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갈릴리해처럼 살고 있는가, 사해처럼 살고 있는가?

 

/임해정(군산대학교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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