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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칼럼] 4월의 바람

다시 4월이다. 어김없이 서해를 건너 온 황사는 삼천리 화려강산을 검은 먼지로 뒤덮고 있다. 천식환자는 기침을 하느라 잠을 못 이루고, 눈병환자는 눈을 비비느라 고통스럽다. 4월은 우리에게 그런 달이다.

 

1960년도의 4월과 2004년의 4월을 대비해 본다. 그 해 4월에도 황사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4. 19혁명이 일어났다.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민의가 거리에 넘쳐 흘렀고, 민의를 향해 총을 쏘아대던 독재자는 결국 국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마흔 네 해가 지난 2004년의 사월에도 거리에는 의회구데타를 규탄하는 촛불의 민의가 거리를 화려하게 밝히고 있다. 아니, 촛불시위를 중단하겠다고 했으니, 서울의 광화문을 비롯한 도시의 광장을 대낮처럼 밝히던 촛불은 이제 만행을 규탄하던 국민들의 가슴을 밝히고 있을 것이다. 두 눈 부릎 뜨고, 의회구데타를 일으킨 한심한 선량들을 심판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올해의 4월은 그래서 희망이 있다. 4월의 얘기를 꺼내놓고 보니 그 해의 4월과 올해의 4월에서 닮은 꼴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해 4월, 독재자에 항거하는 민의에는 질서가 있었다. 두 주먹 불끈쥐고 독재자는 물러나라고, 부정선거는 다시 하라고, 총칼 앞에 목숨을 내놓고 소리소리를 질렀지만, 그 함성에는 질서가 있었다. 의사는 가운을 입고, 학생은 교복을 입고 질서정연하게 거리를 행진했다. 그리고 올해의 촛불시위 역시 질서가 있었다. 수만 명이 모여 밝힌 수만 개의 촛불 속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래서 희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희망 속에는 흥겨움까지 있었다. 의회구데타를 일으켜 국민들의 가슴에 절망을 심어 준 선량들을 향해 분노를 내뿜으면서도 욕지거리 한 마디 없었다. 욕지거리 대신 노래를 불렀고, 돌멩이를 던지는 대신에 춤을 추었다. 그만큼 불의에 맞서 싸울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이 땅에 다시는 불의가 판을 치는 어두움의 그늘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었던 것이다. 불의에 이길 자신이 있기에 흥겨울 수가 있었다. 그래서 2004년에 밝히는 촛불은 희망의 한 마당 잔치판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는 나라이다.

 

황사바람같은, 그 바람에 실려 온 먼지같은 선거바람이 다시 거리를 휩쓸고 있어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은 그 해의 국민의식과 올 해의 국민 의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해의 선거바람은 참으로 음습했다. 고무신과 막걸리가 판을 쳤으며, 제복의 공무원들이 은근히 국민들을 협박하고 돌아다녔다. 어디 그 뿐이었던가? 차마 필설로 다 못할 부정이 국민의 의사를 짓밟아 버렸다. 그래서 4월 혁명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올해의 선거판은 분명 다르다. 선량이 되겠다고 나선 후보자들 가운데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 줄을 유권자들은 알고 있다. 밥 한 끼 사 주는 후보가 국회의원이 되면 또 다시 의회구데타를 일으킬 가짜 선량 후보인 줄을 현명한 유권자는 알고 있다. 아줌마들을 동원하여 거리에 서서 열심히 절을 해대는 후보일수록 가짜라는 것을 유권자는 알고 있다. 돈을 많이 쓰는 후보일수록, 돈 쓰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후보일수록 당선만 되면 인면수심이 될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유권자인 것이다. 그래서 2004년의 4월은 희망이 있다. 거리를 밝히던 촛불같은 희망이 있다.

 

/윤영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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