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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칼럼] 타인의 고통 앞에서 - 이영호

이영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2007년 1월 23일, 이날은 소위 ‘인혁당 재건위’가 32년 만에 모든 혐의사실에 대해 무죄 선고를 내린 날이었다. 이 선고가 알려진 저녁 TV방송 톱뉴스와 다음날 신문지상 첫 면에는 천주교 전주교구의 문정현 신부의 모습이 보였다. ‘선고공판에서 무죄가 확정되자 부등켜안은 채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가족들을 얼싸안고 있는 문신부를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우리들의 문정현 신부는 무고하게 죽어간 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희생자 가족들과 32년 동안 살아 온 것이 아니다. 이들을 무고하게 희생시킨 악마적 집단과 싸우며 살아왔다. 그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살았다. 그가 박정희 시절 수차례 옥고를 치룬 것도 그들과의 일치된 삶의 하나이었다.

 

무고하게 사형당한 이들이 얼마나 고문을 당했었나는 이번 판결문에도 뚜렷하다. 유신 집단은 살해된 이들의 눈뜨고 차마 볼 수 없게 된 시신을 곧장 화장하려했고 문신부는 이를 저지하려고 장례차 앞에 누워 온 몸으로 가로막았던 일을 우리는 안다. 그 때의 문신부는 30대의 푸른 청년이었다. 얼마 후 ‘민청학련’에 연루되어 10년, 20년 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하던 이들의 석방 환영식이 있던날 희생자들을 고문하며 수사하던 이들을 고발하며 격노하던 모습이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분노로 붉어진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는 고통을 가하는 폭력집단에 사생결단으로 대항해 왔다. 모두가 죄 없이 죽어간 이들에게 돌을 던지며 비웃든 시대, 그 폭력과 싸웠다.

 

엄청난 희생이 정권의 야욕으로 저질러지던 암흑의 시대를 지나오고 있는 이상하리만큼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무디다. 타인의 고통의 현실에 민감하지 못하다. 이라크, 레바논 아프리카 부족간의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의 모습을 TV화면이나 사진으로 보는 일이 일상화되면서 남의 고통은 구경꺼리가 되지만 고통이 재생산되는 일을 막아낼 생각을 못한다.

 

한 인간이 당하는 고통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죽음일 것이요 그 죽음을 당한 이들의 가까운 가족들이 당하는 고통일 것이다. 소중한 인간의 생명을 희생 시키며 자신들의 부당한 정권을 유지하려했던 범죄적 집단의 발상이나 행위가 다시는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려면 여러 가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번의 무죄 선고와 함께 정의를 저버렸던 사법역사와 과거의 그릇된 역사를 바르게 해야 할 일이 산적되어있다. 참으로 무감각한 시대이지만 또한 삶의 갖가지 영역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연민만이 아니라 그들이 당하는 고통의 현실을 제거하려는 실천이 요구된다.

 

오늘도 우리들의 문신부는 익산지역의 ‘작은 자매의 집’에서 가난한 농촌의 약하고 어린 아이들의 벗으로 함께 돌보며 섬기며 사제의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지역의 어린 아이들은 부모가 일터에 나간 사이에 돌볼 이들이 없어 줄에 묶여 놀고있어야 안전한 어린이들이라고 한다. 우리들의 문신부는 농촌 지역의 부모들과 어린이들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하나의 희망을 본다. 그의 흰 수염 속에 숨겨진 얼굴에서 고통의 역사를 보기 때문이다.

 

/이영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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