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 가족같이 생각해야 주인의식 갖고 일해"
그의 성공담은 낯설지 않다. 온갖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고 역경을 극복해 끝내 성공한 사람들의 인생스토리가 우리 주위에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 사장의 성공담은 좀 다른 면이 있다. 고난의 강도나 시련의 깊이 때문이 아니다. 마음먹은 일은 실천하고야 마는 도전정신은 그렇다하더라도, 멀리 내다보는 일에만 마음 맡기지 않고 '오늘'에 더 충실하고, 늘 '내 주위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쏟는 삶의 태도가 그의 오늘을 있게 한 바탕이었다면 어떤가.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일상적인 삶의 태도만으로도 역경에 처한 자신을 온전히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면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추석을 하루 앞둔 연휴, 고향을 찾은 그를 전북대 안 카페에서 만났다. 80년대 후반부터 10여 년 동안 전북대 앞에서 중국음식점을 운영했던 그에게 전북대와 인근의 풍경은 각별한 의미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성공했으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했던 이 공간은 추억이 되었지만, 언제나 그의 존재를 다시 확인시켜주는 바탕과도 같은 곳이다. 그래서인지 바쁜 일정에서도 그는 여유로워보였다. 고단한 일상을 짐작하기 어려운 편안함이 그의 삶, 뒤편을 더 궁금하게 했다.
-일정이 바쁘시더군요. 내일 중국에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긴 시간 나와 있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한국에 나온 김에 중국 들어가면서 아이들이 있는 북경에 잠깐 들러 하얼빈으로 갑니다. 애들이 학교 다니느라 북경에 가 있는 5년 동안 한 번도 못 갔거든요."
-중국은 언제 가셨습니까.
"2003년 4월이니까 10년이 조금 넘었군요. 그보다 앞서 98년에도 중국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아 1년 3개월 만에 다시 돌아왔지요. 전북대 인근에 다시 음식점을 열었는데, 장사가 잘 안되었어요. 4년 동안 고생하다 빚을 지고 부끄럽지만 거의 야반도주하듯이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실패의 경험이 있는 곳에 다시 돌아가 도전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인연이었던 것 같아요. 다시 하얼빈에 갔을 때 바로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아이들 교육이 제일 큰 문제였는데, 그 당시에는 한 달 동안 있어보면서 애들이 잘 적응할 수 있다 싶으면 우리 부부는 한국에 다시 들어올 요량이었습니다. 우선 돈을 벌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내가 먼저 한국에 들어간 뒤의 상황을 보니 중국에 애들만 남겨놓는 것만큼 나쁜 선택이 없더군요. 제가 남았죠. 그때부터 2005년 9월 식당을 열기까지 오로지 애들 교육에만 전념했습니다."
-전업주부 일을 하신 셈이군요.(웃음)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나요.
"두 번째 간 것이 4월이었는데, 그곳 학교는 9월에 학기가 시작하니 애들이 집에 있어야 했어요. 애들이 넷이나 되니 생활비가 만만치 않았죠. 한국에서 아내가 남의 식당일 해주고 보낸 돈이 전부였는데, 그래서 돈을 벌 요량으로 대련에 가서'보따리 무역'도 잠시 해보았어요. 기대만큼 벌이가 안 되더군요. 대련은 살기 좋은 도시였지만 생활비가 많이 들어가고 할일은 마땅치 않았어요. 그래서 지인이 추천해준 진황도로 갔는데 우선 작은 도시인데다 인천에서 직항 뱃길이 열린다고 하고,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죠. 1년 쯤 살았습니다."
-한국 사람이 있어야 외로움도 나누고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없는 곳을 선호하셨군요.
"한국 사람과 교류하면 아무래도 그것이 편하니까 중국 적응하는 시간이 늦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잠깐 다니러 간 것이 아니고 살려고 간 곳인데……. 하얼빈에서도 아이들이 한국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가능하면 못하게 했습니다. 제가 중국에서 빨리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도 중국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적응하기 위해 교민사회와 떨어져 있었던 덕분이었죠."
-기대한 만큼 중국 사회에 적응은 빨리 되었습니까.
"물론입니다. 아직 중국말이 서툴 때였지만 많은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제가 만난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호의적이고 아주 친절했습니다. 도움을 요청했을 때 거절하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 없습니다."
-특별한 비결이 있었을까요.
"우선 내 자신이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늘 인식했습니다. 중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만만한 나라가 아닙니다. 중국 사람들은 배타적이지 않아요. 경계를 하지 않죠. 그런데 주위 사람들을 보면 중국과 중국인들에 대해 왜곡된 편견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낯선 나라에 가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쉽게 해결하신 것 같습니다.
"외국에 가서 살게 되었을 때, 어떤 태도로 그 나라 문화에 적응하려고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겸손한 태도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예의가 없습니다. 중국의 경우는 더 그런 것 같아요. 오히려 폄하하는 듯 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중국이 잠시 세계의 중심에서 밀려나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보이는 것만이 중국의 모든 것이 아니거든요."
-식당이 길지 않은 시간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중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짜장면 이야기 해보죠.
"87년에 중국음식점을 열었으니까 25년이나 되었군요. 처음 2년은 철가방 배달도 했습니다. 그 후에는 주방에 들어가 직접 요리를 하기 시작했죠. 어깨너머로 배웠지만 수많은 요리책과 자료들을 보고 좋은 재료로 좋은 음식을 만드는 것이 성공 비결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원칙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음식점을 열기 전에는 대학에서 학과 조교로 일하셨다면서요. 어떻게 삶을 한꺼번에 바꾸셨는지 궁금합니다.
"당초부터 학문과는 잘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석사과정까지 마쳤지만 그 이상의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당시 개인적인 상황도 힘들었고, 그래서 마음을 접었지요. 별 갈등 없이 중국음식점을 학교 앞에 열었습니다."
-왜 꼭 식당이었습니까.
"돈을 벌고 싶었어요. 몸이 성하니 배달이라도 할 수 있겠다 싶었고, 학교 인근에서 가장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음식점은 해볼만하다고 생각 했죠."
-그 음식점이 이 일대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도 여러 번 갔었거든요.(웃음)
"장사가 아주 잘되었죠. 짧은 시간에 돈을 벌어 인근에 건물을 살 정도였으니까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제 인생에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랄 수 있지요."
-그런데 왜 빈손이 되어 중국으로 가게 되었습니까.
"다른 일에 마음을 팔았어요. 욕심을 낸 것이죠. 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넘어 사채에 제 2금융권까지 활용하면서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지요. 첫 번째 중국행도 그랬고, 다시 돌아와 4년 동안 버티다가 두 번째 떠날 때는 더 절박한 상황이었어요."
-그래도 '순풍'이라는 음식점을 열고 8년 만에 하얼빈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짜장면' 식당이 되었으니 오히려 그때의 실패가 오늘을 있게 한 바탕이 된 셈이군요.
"그런 셈인데, 그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시간이 언제였습니까.
"가족이 떨어져 살았던 5년 여 동안이에요. 아이들은 엄마와 떨어져 3년 동안 얼굴을 못보고 지내기도 했지요. 개인적으로는 아내가 2005년 9월에 식당 문을 열면서 잠시 다녀간 적이 있는데, 개업을 앞두고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들었어요. 아내에게 미안함이 컸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싸한 아픔이 몰려오더군요."
-그런 아픔이 더 의지를 강하게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경제적 빈곤도 벗어나야 했지만 가장 절박한 것은 가족이 함께 사는 일이었으니까요. 지금도 가족
이 흩어져 살고 있지만 그때와는 동기가 전혀 다르죠."(웃음)
-듣기로는 식당의 매출이 놀랍던데요.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겠지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지요. 처음 하얼빈에 식당을 열었을 때 하루에 한국 돈으로 10만원 매출이었다면 지금은 수십 배 늘었어요. 처음에는 주방장과 두 명 직원까지 네 명이었는데 지금은 주방만 25명, 서빙 관리 등 모두 합하면 50명 직원입니다. 연 매출이 40억 원이 넘습니다."
-기업이군요. 그렇게 성공하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다면서요.
"메뉴에서부터 쓰린 경험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몇 가지 한국음식을 정해놓고 이중에서 골라라는 방식이었죠. 그런데 중국인들이 오면 다른 메뉴를 찾는 거예요. 고집을 꺾지 않다가 결국은 내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한국 손님들은 많이 왔지만 그들이 다른 손님을 데리고 오는 파급효과는 적거든요. 중국인들이 많아야 고객이 늘지 않겠어요."
-짜장면 말고 다른 특별한 메뉴도 필요했나요.
"전체 매출의 가장 큰 부분을 짜장면이 차지하지만 지금은 고추장삽겹살이 인기 있습니다. 한국음식을 중국인들의 입맛과 문화적 특성을 고려해 개발한 것이죠.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니 재미도 있고, 또 찾아오는 손님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내놓을 수 있으니 보람도 있고요."
-'한국짜장면'을 중국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한 비결이 궁금하군요.
"짜장면은 중국식 작장면과는 전혀 다릅니다. 재료도 만드는 방식도 다르지요. 한국식 짜장면은 고소하고 단맛, 그리고 쫄깃한 면발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곳 재료만으로는 그 맛을 내기 어렵더라고요. 온갖 재료를 다 동원해서 그 맛을 살려낸 것이 주효했죠.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요."
-중국인 직원들과는 신뢰가 중요할텐데요.
"저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낯선 나라에서는 더 그렇죠. 한 가족이 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50명 직원들을 모두 내 가족같이 생각해야 그들도 주인의식으로 일할 수 있게 되죠. 입장을 바꾸어, 저 한국인 사장이 돈만 벌 목적으로 식당을 운영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으면 신뢰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온전히 중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외롭긴 했지만 그 대가는 큰 선물이 되었죠. 우리 직원들은 저에게 '한국사장'이라고 절대 부르지 않습니다. 그냥 '사장님'이죠. 저를 거의 교주로 대합니다.(웃음)"
-친 가족처럼 대해주신 덕분이겠군요.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돈을 벌기 위해 중국 진출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우선은 그곳 주민이 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한발만 딛고 돈 벌어 가겠다는 생각으로는 십중팔구 실패합니다. 저는 중국인이 되기 위해 언어를 열심히 익혔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배우겠다는 자세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그것을 직원들과 손님들이 먼저 알아주었습니다. 우선 언어부터 익히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남의 나라 언어를 습득하는 일이 당연히 어려웠지만 지루함과 기쁨과 보람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어를 바탕으로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뢰를 쌓는 일이죠. 중국은 법치국가라기보다는 이치국가로서의 특성이 강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해결되는 일들이 많죠. 법과 규정이 엄격한 사회는 그것에 적응하면 되지만, 사람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사회는 소통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날, 그는 하얀 셔츠에 검정바지를 입고 나왔다. 식당에서도 이 옷을 입고 일한다고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지 끝은 다 닳아 헤져있고 구두는 금세 터질 것처럼 낡았다. 눈길을 의식했는지 안 사장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이 바지 하나로 사니 빨리 낡는다"고 말했다. 짐작하기 어려운 검약의 일상이 드러나 보였다.
사실 그는 중국인 종업원들을 1년에 두 번 가족과 함께 초청한다. 경비만도 수천만 원이 드는 이 일을 안사장은 '가족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내가 더 행복한 기쁜 선물'이라고 했다.
궁금했던 그의 성공비결, 그 답을 따로 묻지 않아도 됐다.
■ 우여곡절 중국 이민…한국식 짜장면으로 성공신화
1956년 김제에서 태어났다. 열 세살때 농사를 지었던 아버지가 전주시청의 말단직 공무원이 되어 전주로 이사했다. 중고등학교시절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에만 얽매이지 않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았다.
고2때는 상록수가 되겠다며 울릉도까지 가출을 감행한 경험도 있다. 다시 돌아와 복학하는 바람에 전주고 1년 후배들이 그의 동기가 됐다. 서울대 미대를 지원했으나 실패하고 이듬해 특별한 목표 없이 전북대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학문에는 뜻이 없었으나 대학 2학년 때 스승의 권유로 연구실에 있게 되면서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대학원(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해 석사과정을 마쳤으나 아무래도 학문은 길이 아니라는 생각에 개인 사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거창한 미래보다는 현실 속에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1987년 2월, 전북대 정문 근처에 열었던 중화요리집 '사천성'이었다. 성실함으로 무장(?)한 그의 사업은 기대 이상으로 번창해 10년만에 건물주가 되었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 아파트개발지구의 상가부지에 눈을 돌린 것이 화근이었다. 은행대출을 받아 건물을 매입한지 한 달이 채 안 돼 IMF가 터졌다. 그의 운명이 바뀌는 계기였다. 그 뒤 두 번의 중국 이민에 도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지금은 하얼빈의 이름난 식당 사장이 됐다. 한국식 짜장면과 새롭게 개발한 한국식 요리로 중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덕분이었다.
그의 이민사는 길지 않지만 그 안을 펼쳐보면 중국이민사의 교과서가 될 만하다. 그는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인들과 소통하며 중국인들의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들의 일상을 존중하며 스스로 중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쉽지 않았을 그 과정 덕분에 중국의 지인들에게 그는 '신뢰할 수 있는 한국사람'이 될 수 있었다. 동토의 도시 하얼빈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는 곧 한국에 돌아올 생각이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함께 일해준 중국인 종업원들의 인생을 바꾸어주진 못하지만 최소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기반을 준비해주는 일'이다. 얻은 만큼 돌려주는 일, 주위사람을 배려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일, 멀리보지 말고 내 앞과 주위를 소중하게 여기는 일을 일상의 철학으로 지켜온 그에게는 '꼭 지켜내야만' 하는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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