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은 왕도마케팅 열풍 / 전주, 전라감영에만 매몰 / 견훤대왕 재조명 확대를
요즘 '왕도(王都)' 마케팅이 유행이다. 서울은 6백년 조선시대 왕도를 뽐내며 도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들려 한다. 김수로왕이 가야를 세운 김해는 '왕도 김해 스탬프 투어'로 관광지 알리기에 열중이다. 대가야가 들어섰던 경북 고령군은 '대가야 왕도 고령' 알리기가 한창이다. 부여군은 '왕도 부여' 홍보를 위해 부여 8경을 역사스토리와 엮어내고 있다. '왕도 전주'는 왕도의 위엄을 내팽개친 채 감영에 매달리고 있다. 참으로 딱하다.
견훤대왕은 백제 멸망 237년만인 900년에 백제부활과 국토 재통일의 열정을 호소하며 전주를 후백제의 왕도로 삼았다. 곧 바로 도성(都城)도 축조했다. 동서남북 사방에 견고한 진지도 구축했다. 남고산성과 동고산성이 그 흔적이다. 아울러 4개의 견고한 진지(固鎭)안에 사찰이 하나씩 들어서게 되는데 동고사, 서고사, 남고사, 북고사(현재의 진북사)가 바로 그곳이다. 견훤대왕의 웅대한 꿈은 올곧은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정개(正開)'라는 연호에 실렸다. 독자적인 연호 사용과 더불어 '대왕(大王)' 호칭도 시작됐다. 견훤대왕은 중국의 오월국과 후당, 거란과도 외교관계를 맺었다.
'...내가 원하는 바는 평양의 문루에 활을 걸고 대동강 물로 말의 목을 축이게 하는데 있다' 이는 견훤대왕이 삼국 재통일을 놓고 일전을 벌이던 왕건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견훤대왕의 자신만만한 편지와 당시 군사력을 보면 국토의 재통일은 견훤대왕에게 쏠렸다. 견훤대왕과 왕건의 맞대결은 서로를 남군과 북군으로, 남왕과 북왕으로 부른데서 알 수 있듯이 팽팽했다. 견훤대왕은 경주를 공략해 왕건과 밀착했던 경애왕을 제거했다. 신라를 구원하려고 달려온 왕건의 군사들은 현재의 대구 공산전투에서 완패했다. 왕건은 간신히 포위망을 빠져나와 목숨만은 건졌다. 특히 왕건의 최정예 병력인 5천 기병부대는 거의 몰살당했다. 견훤대왕은 그 이후의 전투에서도 연전연승하며 통일의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지금의 안동 부근인 고창 병산전투와 개성으로 향하는 예성강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후백제는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견훤대왕이 거처한 왕궁터인 전주시 서노송동 물왕멀 일대는 궁터임을 알리는 주춧돌이 집집마다 즐비하다. 기린봉 동고산성내 왕궁도 잡초에 뒤 덮힌 주춧돌이 처연히 놓여 있다. 궁터가 아직도 정확히 어디인지 조차도 모르는게 왕도 전주의 현주소다.
혹자는 견훤대왕의 치세 40년이 짧다고 말한다. 혹시 아는가? 중국의 첫 통일왕조인 진시황이 세운 진나라 수명이 15년인 사실을, 진시황 이후 22세기동안 26개 왕조가 사라져갔다는 사실을, 임시정부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역사가 94년임을, 이승만 대통령부터 대한민국은 65년 불과하다는 사실을…
왕도 전주는 감사 따위가 머물며 큰소리친 동네가 아니다. 전북은 엄연히 왕도의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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