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만 다문화 가정 아이들 잘 키울 답 찾아야죠"
낡은 건물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높고 경사가 심했다. 안내판도 잘 눈에 띄지 않아 멈칫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간 비좁은 곳에서는 약품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외국인노동자전용병원’이란 간판을 보고서야 건물을 잘못 짚은 것을 알았다. 바로 그 옆 건물 이층에 있는 지구촌사랑나눔 사무실도 비좁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표의 업무실은 온갖 자료와 물품이 쌓인 사무실 안쪽에 있었다. 세평도 채 안되겠다 싶은 좁은 공간, 삼면을 둘러싼 책장과 책상, 몇 사람 앉을 의자가 전부인 그곳이 ‘외국인 노동자의 대부’ 김해성 대표(53)가 일하는 공간이다. 책장 안을 들여다보니 인권과 노동 관련 책자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다.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이름 앞에도 몇 개의 별칭이 놓여있다. 모두가 노동자, 이주외국인, 중국동포와 관련된 것들이고, 30여년 한 길을 걸어온 그의 궤적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지난 10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지구사랑나눔 건물 1층 이주민 무료급식소에 불이 났다. 이 사고로 건물은 새카맣게 불타버리고 10명이 부상을 당했다. 방화범은 이곳에서 잠자리와 먹을 것을 도움 받아 지내온 중국동포였다. 외국인 노동자와 중국동포들을 식구처럼 따뜻하게 안아온 김 대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충격은 분노가 되어 그를 괴롭혔다. 사흘째 되던 날 스스로를 되돌아보니 부끄러웠다. 방화범을 용서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뇌수술을 받았던 방화범은 사망했다. 김 대표는 밀렸던 병원비와 장례비, 장례까지 도맡아 치르고 그의 아들과 딸을 돌보겠다고 약속했다. 문을 닫게 된 급식소와 쉼터, 방화범을 용서하고 오히려 사랑으로 껴안은 김 대표의 나눔 정신과 실천이 알려지자 후원자들의 성금이 모여지기 시작했다. 화재현장의 복구작업이 시작되고 부상자들의 치료비 부담도 덜어졌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늘 길은 열렸다”고 그는 말했다.
도시빈민과 노동자, 어느 누구도 선뜻 손길 내주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와 중국동포의 인권을 위해 30여년 세월을 고스란히 바친 지구촌사랑나눔의 대표 김해성 목사를 만났다. 고단한 길을 만나 한눈팔지 않고 걸어온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면서 문득 루쉰의 글이 떠올랐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고향’ 중에서-
지나고 나면 짧기 만한 1년을 다시 뒤돌아보게 되는 연말, 그가 열어온 길은 더 빛나 보였다.
-정말 바쁘시군요. 어떻게 이 많은 일들을 처리하는지 궁금합니다.
“하루 시간으로 버겁긴 하지만 다 해야 할 일이니까요. 저는 인터뷰도 열심히 합니다. 다른 분들처럼 인터뷰 요청을 거절도 하고 사양도 하고 싶은데 이 또한 제가 할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매체들의 인터뷰가 사실은 우리 사업을 알리는 중요한 통로가 되거든요.”(웃음)
-지구촌사랑나눔은 언제 문을 열었습니까.
“2001년도예요. 제가 80년대부터 성남에서 도시빈민운동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한국노동자들의 인권운동을 하다가 이주외국인노동자, 중국동포들의 인권에도 관심을 갖게 되면서 사업이 확대되었습니다. 지금은 다문화가정의 한국사회 정착을 위한 활동이 중요한 사업입니다.”
-30년 전이라면 한국사회의 상황이 매우 절박했을 때 아닌가요. 민주화 운동이 봇물처럼 터졌던…….
“저도 80년 광주민중항쟁 세대예요. 한신대 신학과 2학년 때 광주항쟁이 터졌으니까요. 전두환 정권의 비상계엄령 아래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마다 거리를 메우는 엄혹한 시절이었죠. 광주가 집인 친구가 있었는데, 광주 항쟁이 터지자마자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전남도청을 사수하는 대열에 섰는데, 사살됐습니다. 망월동에 묻혔죠. 저도 시위 참여자로 지목되어 수배령이 내려졌는데 도망쳤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비겁하게 목숨을 부지했다는 죄책감이 깊어졌죠. 그 죄책감이 성남으로 가 도시빈민운동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성남의 도시빈민운동은 꽤 활발했었죠.
“당시 성남은 서울의 쓰레기를 버리는 변방 도시였어요. 그곳에서 도시빈민 선교운동을 하는 이해학 목사님을 만났어요. 도시빈민 선교활동을 하면서 노점상 철거민 도시빈민들을 돕는 활동을 열심히 했죠. 탄압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만들다 연행되어 구속되기도 했고, 경찰에 잡혀가 두들겨 맞기도 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억울하게 해고되고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가장 열악한 삶을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공장에 들어갔죠.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위장취업이라해서 1년도 안 돼 해고당했어요.”
-도시빈민선교활동도 노동운동의 좋은 통로가 아니었을까요.
“그렇긴 하지만 좀 더 그들 가까이에서 고난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해고된 후에는 개척교회(산자교회)를 열고 노동자 선교를 더 열심히 했죠. 노동상담소를 만들어 한국인 노동자를 돕는 일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성남 지역 기독교 인권위원회도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시작한 이 일이 인권문제 노동문제 전문가로 만들었습니다.”
-그즈음에 외국인노동자들이나 중국동포들이 취업을 위해 한국에 쏟아져 들어왔던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당시 중국동포들은 물론, 필리핀 베트남 스리랑카 등 각국에서 노동자들이 몰려 들어왔어요. 대부분 불법체류에 불법취업이었습니다. 당연히 임금을 못 받고, 산재를 당하거나 업주로부터 폭행을 당해도 신고조차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었어요. 그즈음 우연히 지역에서 인권운동을 하던 이재명 변호사(현재 성남시장)가 산재로 큰 부상을 당한 중국동포와 16층에서 사고로 추락사한 중국동포 사건을 의뢰했어요. 보상도 제대로 받고 사망한 동포는 장례까지 잘 치러주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는 해당 기업과 숱한 갈등과 싸움이 있었죠.”
-보상을 받은 당사자들이나 유족들에게는 큰 힘이었겠습니다. 같은 처지의 중국동포나 외국인노동자들에게도 희망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소문은 얼마나 빨리 나는지, 금세 쫙 퍼져 ‘문제가 생기면 김해성을 만나라’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였어요. 그렇다보니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사건이 뒤를 이으니 쉴 시간이 없었어요. 각국 대사관과 관련 기관들을 찾아다니며 협박도 하고 간청도 하면서 일을 해결했습니다. 얼마나 일이 많은지 끝내 쓰러져 입원 했어요. 그것을 보고 이해학 목사께서 ‘김해성이 살리려면 우리가 함께 해야 한다’고 나서 전문가들이 모였습니다. 외국인노동자의 집이 그렇게 조직되었죠.”
-일이 일을 몰고 온 셈이었네요. 길이 길을 여는 것처럼.
“ ‘외국인노동자의 집’을 열고나니 중국동포들의 항의가 들어왔어요. 우리는 한민족 한 핏줄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외국인이냐는 것이죠. 그래서 그 옆에 ‘/’를 치고 ‘중국동포 노동자의 집’을 붙였어요.”(웃음)
-스리랑카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코끼리 이야기는 대표님의 사랑 실천의 상징이 아닐까 싶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즐거움도 크고 국가에 기여도 했으니 보람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스리랑카 마한다 라제팍세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가 되었어요. 코끼리까지 선물로 받게 되었죠. 처음에는 황당한(?) 선물이어서 거절했는데, 마침 그때 국립동물원 코끼리가 수명을 다하면 혈통을 이을 수 없다는 뉴스를 보았어요. 그래서 다시 연락해 암수코끼리 한 쌍을 선물로 받아 동물원에 기증했죠.”
10여 년 전 김 대표는 경기도 광주를 다녀오는 길에 허름한 행색의 외국인 두 명이 추위에 떨며 서있는 것을 보았다. 궁금해 그냥 치지 못하고 말을 건넸는데, 취업을 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 온 스리랑카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고 자고 먹을 곳을 구해주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일요일이면 그의 교회에 스리랑카 노동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명절을 기념한 행사에 한 노동자가 자신의 작은 아버지를 초청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야당국회의원이었던 그는 노동부 장관 시절 스리랑카 노동자들의 한국진출을 도운 사람이었다. 한국을 다녀간뒤 그는 국무총리가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 얼마전 재임에도 성공한 마한다 라제팍세 스리랑카대통령이다.
-가족이 된 다문화가정 삼남매와의 인연도 궁금합니다.
“이제 제 아이들이 되었어요. 입양은 아니지만 친권과 양육권을 다 받았죠. 5년 전 쯤 아빠가 세 아이를 데리고 저를 찾아왔어요. 엄마가 사망했는데 장례를 못치렀다는거예요. 아이들 피부색이 까맣더군요. 엄마가 가나출신 흑인 여성이었어요. 10년 넘게 한국에서 살았지만 한국국적을 얻지 못했죠. 장례를 치루려니 절차가 복잡했어요. 가나대사관에서는 본국의 동의서를 받아오라고 하고.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도 안 되겠더라고요. 그때 저는 거의 장례전문가가 다 되었었는데, 영안실에서 시신을 찾아 관에 넣고 옮겨 대사관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이튿날 대사관에서 놀랐는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었어요.”
-그런 경우 경비 부담은 없습니까.
“크죠. 그런데 이때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방송에 소개되면서 모금이 많이 됐어요. 이제 잘 살면 되겠다 싶었는데 일용노동자였던 아빠가 자살을 했어요. 그것이 3년 전인데, 장례를 치루고 유족들과 논의 해보니 아이들을 맡을 사람이 없는 거예요. 제가 맡을 수밖에 없게 되었죠.”
-그래도 얼굴색이 다르고 세 명이나 되는 아이들과 가족이 되기에는 어려움이 컸을 것 같습니다.
“아빠라고 부르게 하는 데만도 1년이 걸렸지요. 힘든 고비도 있었지만 지금은 더없이 소중한 제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집에 갔더니 컴퓨터에 ‘지금 우리가 어리지만 아빠 기대하시라 짠’이라고 쓰여 있더군요. 아이들이 꿈을 갖게 된 것도 제게는 아주 기쁜 일입니다. 큰 딸은 모델이 꿈이고, 둘째 아들은 배우가 꿈입니다. 이미 ‘마이 리틀 히어로’란 영화에 조연급 아역배우로 출연했어요. 저는 그 아이의 매니저죠.(웃음) 막내는 축구선수가 꿈인데 지난 월드컵 조별 예선 쿠웨이트 전에서 볼키즈 역할을 했어요. 학교에서는 반 회장을 맡아 제가 회장님이라고 부릅니다.”
-한국사회에서 다문화가정 문제는 심각합니다. 인식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벽이 높은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20만 명이 넘는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하면 잘 키워낼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구촌학교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에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학교 이탈률은 매우 높습니다. 초등학교가 15%, 중학교 39%, 고등학교는 69%죠. 초등만 보면 그 비율이 대한민국 전체 이탈률의 220배라고 합니다. 가슴 아픈 현실이죠. 그들도 우리의 미래입니다. 작년 12월에 기획재정부장관이 국회에 다문화인 차별금지법을 제출했어요. 노동부나 법무부 여성부가 아닌 기획재정부에서 왜 그런 법안을 만들려했을까요. 그들을 대한민국의 미래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지구촌나눔사람에서 문을 연 병원은 ‘가리봉의 기적’이란 별칭이 붙어 있던데요.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하는데도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이 믿기 어렵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희도 반신반의했으니까요. 병원을 연 것은 제가 사망한 외국인노동자들의 장례를 치러주면서 병원에서 조금만 빨리 치료만 받을 수 있었어도 살 수 있었던 사례를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어요. 처음에는 직원 모두가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강행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전용병원이라는 이름을 걸고 문을 연지 10년이 지난 지금 병원은 건재합니다. 그것도 정부지원 없이 민간후원으로만 50만 명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어려움에 처하면 그만큼 후원의 손길도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적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가리봉의 기적, 외국인전용병원’이라는 이름도 얻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그래도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지구촌 사업 모두가 정부지원없이 민간 후원으로만 추진된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다. 병원도 그렇지만 학교도 민간후원으로만 운영합니다. 학생들은 학비 식비 수업준비물 교통비까지 무료입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아오면서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명제의 임상실험을 끝냈지요.(웃음)”
-정부도 하지 않는 일들을 대표님과 지구촌사랑나눔 식구들이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주노동자와 중국동포문제, 다문화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적 법적 장치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정치 분야에 진출하신다면 이런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 번 제안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태어나도 종교인으로서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그쪽으로 간다면 30년 동안 쌓아온 인권 노동운동의 빛도 한 순간에 스러질 겁니다.”
-5년이나 10년 후에도 이 길 위에 서계실까요.
“5년 후는 몰라도 10년 후는 좀 다른 길을 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인생계획으로는 아프리카에 가서 에이즈 퇴치 운동을 할 생각이거든요. 아프리카의 사망자 절반이 에이즈가 원인입니다. 아프리카가 절단 날 위기에 있는 셈이죠. 그런데 별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해온 노동 인권운동의 모험적이고 혁명적인 방법을 그 분야에도 결합해보고 싶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놓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세계적인 에이즈 퇴치운동의 불씨를 만들고 싶은 소망입니다.”
● 김해성 목사는 익산출신 노동·인권운동 전문가…실천하는 지성인 '명성'
노동과 인권운동가이자 전문가인 김해성 목사(지구촌사랑나눔 대표)는 익산시 춘포면 인수리가 고향이다. 영어교사를 지낸 그의 아버지는 교육열이 높아 자녀들을 일찍부터 서울로 유학을 보냈는데 김 목사 또한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다. 그러나 그에게 서울은 낯설고 두렵기 만한 대상이었다. 학교에 간 첫날 아이들은 그를 놀렸다. 영문도 모르고 놀림을 당했던 그는 울기 시작했다. 담임은 반장을 불러 울음을 그치지 않는 그의 뺨을 때리게 했다. 충격적인 그 경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트라우마가 되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일찍부터 약자와 가난한자들의 억울한 일을 대하면 의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의식이 트라우마로 안긴 그때의 경험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선대부터 기독교 신앙을 대물림했던 덕분에 그는 특별히 갈등하지 않고 한신대에 들어가 종교인의 길을 걷기로 했다. 엄혹했던 군부시절, 광주항쟁을 계기로 그는 자연스럽게(?) 운동권이 됐다. 광주항쟁으로 목숨을 바친 친구에게 마음 빛이 컸던 그는 사회의 첫발을 도시빈민운동으로 시작했다. 20대의 빛나는 청춘이 선택했던 노동과 인권의 길을 30대와 40대를 거쳐 50대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바꾸지 않고 걸었다.
목사가 된 후에는 ‘산자교회’를 세웠으나 이주노동자와 중국동포들의 인권문제에 뛰어들면서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아내 김현의 목사가 세습(?)했다. 정치외교와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있는 그의 두 딸은 시민운동으로 밖에서만 지내는 아빠 점수를 100점 만점에 8점 밖에 주지 않았지만 커서는 아버지의 길을 자랑스러워한다.
노동자들의 숱한 어려움을 해결하고 아픔을 함께 나누어온 그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늘 길을 개척하고 많은 사람들을 함께 걷게 한 선구자다. 지금까지 그가 이루어온 일들은 모두가 정부가 나서 해야 할 일들이다. 외국이주노동자와 중국동포의 문제가 그렇고, 다문화가정을 지원하는 사업이 그렇다. 그럼에도 그가 주도해온 모든 사업들은 최근에 이루어진 민간위탁사업 한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부지원 없이 오로지 민간후원으로만 일궈왔다. 한눈팔지 않고 대한민국의 약자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해온 그를 한 언론사는 ‘실천하는 지성인’으로 꼽았으며 여러 신문사가 선정하는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100인’에도 그의 이름은 여러해째 빠지지 않는다. 포스코청암봉사상을 비롯해 국민훈장 석류장 등 수많은 상이 그의 앞에 놓였지만 그 결실 모두는 나눔을 실천하는 일에 되돌려졌다.
많은 지식인과 지성인을 깨어나게 한 ‘전태일 평전’을 인생에 가장 감명 깊게 읽는 책으로 꼽는 그는 운명을 선취해 인류에 기여하는 길을 열어가는 일을 가치 있는 삶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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