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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단체연합 김금옥 상임대표 "사회변혁 위해 젊음 불태우는 세대에게서 희망 발견"

맑은정치 네트워크 활동 여성 국회 진출 확대 성과 / 군산 윤락업소 화재 충격 성매매방지법 제정 기쁨 / 한국여연 30주년 앞두고 의제 발굴 대안 모색 고민

   
▲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 한국여성단체연합 집무실에서 만난 김금옥 상임대표가 30년 세월 그가 펼쳐온 여성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인터넷 검색어에 그의 이름 석 자를 쳐보았다. 크고 작은 기사와 블로그 글이 적잖이 쏟아졌다. 모두가 여성인권과 여성평등을 향한 치열한 분투의 현장기록. 2000년대의 치열했던 여성운동 현장에 그의 삶이 촘촘히 놓여있었다. 절망과 분노, 기대와 희망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20대와 30대의 아름다운 청춘과 40대를 가로질러온 30년 세월을 온전히 ‘여성운동’에 바친 그에게 세상은 얼마큼 변했을까.

한국여성단체연합 김금옥 상임대표(50)를 만났다.

사회의 고질적 병폐와 견고한 장벽을 허무는 싸움이 쉬울 리 없지만 그는 고단함 대신 패기가 넘쳐보였다.

1990년대 전주에서 여성운동을 시작했던 그는 2000년대 초반, 한국여성운동연합 정책국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대학시절 학생운동 동지로 만나 결혼한 남편과 10년째 주말 부부로 지내며 전주와 서울을 오가고 있다.

짧지 않은 세월, 사회변혁을 위해 현장을 지켜온 그 힘의 근원은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그는 “내가 기꺼이 선택한 길이니 어떤 일이 주어지든 피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들여다보니 그를 길 위로 부른 분명한 주체가 있었다. 인권을 유린당한 여성들의 절규,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의 소명이었다.   

인터뷰는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의 여성미래센터 한국여성단체연합 그의 집무실에서 있었다.   

        

-사무실이 아주 좋습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이 마련한 건물이라는데 재력이 탄탄한 모양입니다.

“세 들어 살다가 그것도 단체의 자력으로 내 집을 얻었으니 자랑스럽긴 하죠.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좀 버겁습니다.(웃음)”  

 

-그래도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은 여성운동 관련 단체와 활동가들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미래여성센터라는 이름도 상징적이고요. 재원은 어떻게 마련했습니까.

“여연 사무실이 있던 장충동 건물을 팔아 기본 재원을 만들었어요. 당시 여성 단체들의 전세금과 독일 재단의 지원금으로 마련했던 ‘여성평화의 집’ 이었는데, 건물이 너무 낡아 정비가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아예 새 건물을 마련하자고 뜻을 모아 추진했죠. 2005년에 간신히 팔려 임시 사무실을 얻어 지내다 모금으로 재원을 보태 이 건물을 얻었습니다.”

 

-김 대표가 서울로 올라온 직후겠군요.

“그렇죠. 처음엔 정책국장으로 있다가 2005년에 사무처장을 맡게 되었어요. 그때 새로운 사옥 마련 사업이 막 시작되어 제가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건물을 얻느라 서울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는데, 그렇다보니 부동산 용어에 익숙해져서 부동산 투기꾼으로 오해받기도 했어요.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니 자력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서 건축설계에 조경까지 공부하며 예산을 절감했습니다.”

 

-서울로 옮겨온 것이 2004년인데, 그동안 쉴 새 없이 일하셨더군요. 성매매방지법을 비롯해 김 대표가 일했던 지난 10년 동안 여성인권과 관련해 성과가 많았습니다. 

“돌아보니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군요. 한국여연과 인연이 된 것이 2004년 1월인데, 정책국장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가 마침 선거를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어요. 와서 보니 그 전해 말에 여연에서 ‘맑은정치 여성네트워크’ 운동을 진행하고 있더군요. 호주제 폐지를 위한 민법 개정안도 국회에 내놓고 있었고, 성매매방지법 제정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어 전문가들이 각국의 선진법을 검토하면서 우리나라의 윤락행위방지법을 전면 개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그런 사업 모두 한국여연이 중심에 서야할 일이었습니다.”

 

-당시‘맑은정치 여성네트워크’의 성과 또한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성들의 국회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워낙 여성 국회의원이 적었으니까요. 여성 국회의원 100인보내기 운동을 내세워 한국여성단체협의회와 통합선거 여성연대를 만들어 운동을 벌였는데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법제도를 개선하고 국회의원 30% 할당 등 기본적 방향은 함께 추진했지만, 단체의 지향성은 서로 다르니 여연은 ‘맑은 정치네트워크’를 따로 만들어 후보 선정기준으로 삼았어요.”

 

-어쨌든 성과도 좋았고 반향도 컸지요.  

“물론이죠. 17대 때 여성의원들이 가장 많이 들어갔어요. 13%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기초의원까지 합하면 비로소 아시아 평준이 됐다고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여성연합의 맑은 네트워크 정당이 가장 많은 여성 의원을 당선시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때는 정당도 여야 구분하지 않았어요. 오로지 여성으로만 승부했지요.(웃음)”

 

-그해에 성매매방지법도 만들어졌죠.

“성매매방지법은 2004년 3월에 통과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일이었는데 그 법이 통과하는 현장을 저 혼자 보았어요. 당초 2월 말일엔가 국회에 상정되어 우리 단체에서도 방청을 하러 갔는데, 안건이 밀리면서 처리 되지 못해 다음 회기로 넘어갔거든요. 그 날은 또 안 될 수도 있겠다 싶어 혼자 갔는데 통과된 거예요. 그때의 기쁨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성매매방지법 제정의 기쁨은 김 대표께 특히 각별할 것 같습니다. 그 법의 동인이 된 것이 군산 윤락업소 집결지 화재사건이지 않습니까.

“사실 성매매방지법은 사회적 논쟁의 지점도 많고 합의하기 쉽지 않은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군산 화재사건이 우리 사회에 아주 강한 메시지를 던졌고, 그에 대해 누구도 이견을 제기하기 어려웠거든요. 전문가들이 소신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성매매방지법에 반하는 입장을 취하기 어려운 사회적 조건이 형성되었던 셈이에요. 그때 내용을 보면 처벌법과 보호법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만장일치, 하나는 기권이 나왔어요.” 

 

군산 개복동 윤락업소 집결지 화재사건은 2002년 1월 29일, 그곳에서 일하는 20대 여성 14명이 화재로 숨진 사건이다. 그에 앞서 2000년 9월, 군산시 대명동에서도 20대 여성 5명이 숨지는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모두가 매매춘 여성들이었다. 당시 전기누전으로 밝혀진 이 화재는 20여분 만에 진화됐지만 희생된 매매춘 여성들의 일기와 수첩이 발견되면서 인권을 유린당한 채 감금된 일상을 살아야 했던 성매매여성들의 삶이 낱낱이 밝혀졌다.

 

-군산 개복동 화재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 피해 여성들의 국가대상 소송을 비롯해 성매매방지법 제정을 위한 토대를 이루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했었죠.  

“대명동 화재사건도 그렇지만 연이은 개복동 화재는 정말 큰 충격이었어요. 사실 그 사건은 어쩌면 단순 화재 사건으로 묻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곳에 성매매여성들을 지원하는 ‘새움터’가 있어 실상이 밝혀질 수 있었죠. 개복동 화재가 난 직후 저희가 갔을 때 현장은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어요.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 현장을 보며 분노가 치밀어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습니다. 인신매매와 감금상태에서 성매매와 성착취를 당하며 살고 있는 여성들이 21세기에도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정말 가슴 아팠습니다.”

 

-그런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성매매방지법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군요.

“그런 희생을 딛고서야 법을 만들 수 있었던 셈인데, 성매매방지법보다 훨씬 앞서 추진되었던 호주제 폐지법보다도 앞서 제정될 정도로 사회적 공분이 컸습니다.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고 6개월 후 시행된 첫날이 9월 23일이었는데, 바로 그날 군산화재사건 피해자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났어요. 9월 23일은 그래서 더 의미 있는 날이었습니다.”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되면서 후유증은 없었습니까.

“엄청났어요.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고 시행되면서 그 곳에서 나온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그렇게 되니 업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법제정에 반기를 들었죠. 사실 그 세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능적이고 조직적입니다. 얼마나 지능적으로 진화하는지 놀라워요. 개별범죄가 아니라 조직범죄이기 때문에 더 그렇죠. 기득권 권력과도 연결되어 있고. 규모가 큰 집결지는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인데 성매매여성들의 주소지를 옮기게 해 투표권을 갖게 하고 그것으로 세력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제정도 그렇지만 이 법이 어떻게 정착되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런데 정작 이 법이 시행되면서 엄청난 반발이 있었어요. 성매매방지법을 교묘하게 왜곡시켜 성매매여성들을 자극해 거리로 나오게 했지요. 사실 성매매라는 용어는 객관적으로 알선업자와 수요자를 말하는 겁니다. 여성은 거기서 주체가 아니거든요. 우리 쪽에서 제안했던 법안에는 성을 사는 사람과 알선업자는 처벌하되 여성들은 처벌하지 않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회에서 이견이 나오면서 조항 몇 개가 빠져 통과되었어요. 제정된 성매매방지법은 본인이 자발적인 성매매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입증을 해야 처벌을 피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어려운 일이죠. 그런 내용을 악용해 업주들이 ‘니들 생존권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거리로 내몰았어요. 여성들이 길거리로 마스크와 모자 쓰고 나와 시위를 하고, 업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항의 전화와 협박이 쏟아졌지요.”

 

-그래도 보람 있는 성과였고, 성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죠.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이 법이 시행되면서 언론도 그렇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외신들이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우리보다 앞선 나라가 스웨덴인데, 우리 법도 스웨덴에 버금가는 내용으로 만들었거든요. 사실 군산 화재 사건이후에 미국무성이 내놓는 인권보고서에 한국이 3등 국가로 찍혔었어요. 그러다가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만들어지면서 다시 1등급으로 올라갔습니다.”

 

-화제를 돌리겠습니다. 격변의 시대 상황에서 시민운동은 새로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여성운동 역시 그 흐름의 중심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2000년대는 특히 부침이 심했던 시기여서 여성운동도 큰 틀에서 보면 시민사회운동의 변화와 같은 연상에 있습니다. 그래도 여성운동은 특히 돋보이는 성과들이 있었습니다. 성매매방지법 호주제 폐지 등 법제정 성과가 나왔고. 여성들의 정계 진출도 두드러졌죠. 가시적인 성과들이 유난히 많았던 셈인데, 그래서 비판도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인권 여성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의 영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말씀이겠군요.

“맞습니다. 그런 비판들을 수용하면서 법제도를 어떻게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권리로 실현될 수 있게 할까 대중적 확산의 방식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촛불시위 이후 이런 고민은 여성운동 진영에서 더 본격적으로 하게 됐지요.”

 

-그렇게 된 시대적 환경이 있는 것 아닙니까.

“MB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여성부 존속문제까지 나오면서 그동안 일궈온 사회변화의 물결이 후퇴하는 환경에 직면했던 때문이죠. 개인적으로도 그때 당시의 상황을 목도하면서 제 그동안의 삶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습니다. 청춘을 바쳐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환경이 거꾸로 돌아가는 상황을 감당하기 어렵더군요.”

 

-그런 상황에서도 미래여성센터를 열었고 여성인권 문제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진전된 활동을 해오셨는데요.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열악한 환경을 알면서도 여성운동에 나서거나 사회변혁을 위한 일에 자기 꿈을 갖고 실현해가는 젊은 세대들을 만나면 다시 의지가 생기거든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토대가 여전히 탄탄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절망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을 보면서 확인하게 됩니다. 각자 다른 삶이 있음에도 함께 가는 방향을 바라보는 것, 그런 곳에서 희망을 보게 되요”

 

-공동대표를 거쳐 올해 상임대표를 맡았습니다. 부담이 적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어떤 부담이었습니까.

“지금까지 여성운동을 해오면서 조직 안에서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자세를 지켜왔습니다. 상임대표가 안겨졌을 때도 그런 의지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상임대표로서 갖게 되는 부담은 또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상임대표는 진보개혁적인 사회운동을 하는 시민운동 영역의 여성부문 대표성도 갖고 있는데다 그 대표성 때문에 격려도 비판도 받는 자리예요. 한편으로 한국여연은 대중적 신뢰와 한국사회의 진보적 여성운동에 기여했던 공로가 있습니다. 여성단체 연합이란 이름이 갖고 있는 명예도 있고요. 그러한 명예를 상임대표라는 이름으로 갖게 되는 것이 가장 부담스럽더군요.”

 

-가뜩이나 일을 몰고 다니시는 편인데, 앞으로 하실 일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웃음)

“여연은 중임제만 허용합니다. 공동대표와 상임대표까지 중임을 거치는 셈이니 2017년이면 제 임기가 끝납니다. 그런데 2017년은 우리 단체가 3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새로운 여성운동의 기틀을 만들어야하죠. 여성노인문제, 여성빈곤화 등 새로운 의제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의제를 발굴해 대안을 모색하고 30주년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런 저런 모색들을 올해와 내년에 해야 합니다. 올해가 그 시작인 셈입니다.”

 

● 김금옥 상임대표는 군산 출신, 여성운동 30년 외길…성매매 방지 법제화 앞장

   

김금옥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는 군산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원칙과 공정함을 생활의 기본으로 삼아온 부모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부당한 일에 늘 맞서왔으며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키우려고 이름을 ‘금옥(錦沃)’으로 지었다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난 후 평등하고 당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됐다.

 

전북대 국문과에 들어가 일찌감치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도, 여성운동의 길에 들어선 것도 그러한 의식의 영향이 컸다.

총여학생회장이 되어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눈을 떴다. 대학 졸업 후에는 전북지역 여성운동의 기틀을 다진 전북민주여성회에서 일했다.

여성인권과 여성평등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성폭행에 대한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킨 김부남 사건 대책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성폭력예방센터에서 활동했던 그는 노동운동 현장에도 관심이 높아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94년 결혼한 이후에는 위기에 놓였던 전북여성단체연합에 들어가 제 2의 창립을 도왔다.

전북지역 여성운동의 토대를 만들고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발굴해 정책과 사업으로 이끌어낸 보람은 있었지만 대학원 진학의 꿈은 꺾였다. 

 

20대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운 여성운동의 궤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로 꼽는 것은 성매매방지법 제정을 이끌어낸 군산 개복동 화재 피해자 지원과 성매매여성 지원 대책 활동이다.

2000년 대명동화재의 악몽이 가시기도 전에 2002년 개복동 화재가 일어나자 그는 현장으로 달려가 인신매매와 강압적인 성착취의 삶을 살았던 여성들의 현실을 사회에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관성적으로 일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새로운 운동영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조적 아이디어와 에너지를 위해 2003년 전북여연에서 나와 필리핀에 갔다. 국제적인 시민운동단체 활동가들과 연대하며 운동의 새로운 영역을 모색하고 싶었다.

1년 남짓 NGO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길을 찾았지만,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제안을 받고 서울로 갔다.

2004년 1월이었다. 정책국장으로 시작해 사무처장과 공동대표를 거치는 동안 늘 일을 몰고 다녔다. 성매매방지 호주제폐지 법제화로 여성평등 여성인권의 사회적 장치를 마련한 것도, 한국여연의 번듯한 거점을 마련한 것도 그가 중심에서 일구어놓은 성과다.

여성운동의 대중화를 늘 고민해온 그는 최근 여연 상근 활동가 출신 동료들과 함께 협동조합 형식의 연구소를 만들었다.

2017년 임기가 끝나면 그곳에서 새로운 열정으로 일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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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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