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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은병수 대표 "모든 디자인, 삶에서 시작…전통공예도 산업화 가능"

▲ 한국예술종합대학에서 만난 디자이너 은병수 대표가 인터뷰를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더할 나위없는’. 2009년에 열렸던 제3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주제다. 영어로는 ‘The Clue(실마리)‘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제목이 붙었다. 명징하지 않는, 그래서 다소 불친절하게 보이는(?) 주제의 이 전시회는 앞서 치러졌던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한편의 사건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전통으로부터 새로운 디자인의 실마리를 찾는 일은 어떤 의미이고 가치인가. ‘더할 나위 없는’ 우리 디자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답을 찾는 일은 산업화된 사회, 그 중심에서 가치의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는 디자인 분야에서 절실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해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총감독을 맡아 전시회를 기획하고 진행했던 은병수 대표(56)는 답을 얻었을까.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한국의 디자인 영역에서 새로운 길을 열며 디자인 가치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고 있는 그를 만났다.

 

우리나라에서 디자인회사를 처음으로 창업해 90년대 각종 전자제품을 비롯, 기업의 브랜드 제품 디자인을 주도하며 이름을 널리 알렸던 그의 행보는 한국 디자인 발전의 노정과 맞닿아 있다. 디자인의 역할과 가치에 미처 눈뜨지 못했던 시절부터 악전고투하며 기업들의 관심을 제품디자인으로 이어냈던 그는 3년 동안의 세월을 오롯이 전통문화유산을 만나고 한국미술을 공부하는 일에 매달리면서 한국적 디자인 ‘VIUM’ 을 탄생시켰다. 그동안 개발해낸 전통문화 상품은 130여종. 장인과 디자이너가 협업으로 만들어지는 이들 ‘비움’연작은 국내는 물론 해외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해결되지 않는 궁금증이 있다. 수공예의 가치와 산업화 시대의 규모화 생산이 충돌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 공예품의 산업화 가능성이다.

 

“모든 디자인은 삶으로부터 옵니다. 일상용품의 근본에는 공예가 깃들어있어요. 전통공예를 일상으로 다시 들여와야 합니다. 과제가 많지만 수공예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폭을 조금만 넓히면 산업화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있습니다.”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2009년에 열렸던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반향이 꽤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시회를 통해 우리의 디자인이 안고 있는 문제를 제기했었는데 답을 얻었습니까.

 

“전시회 기획의도가 꼭 명확한 답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문제제기였던 셈인데 우리 전통문화로부터 디자인의 실마리를 찾자는 제안을 담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우리의 의식주부터 한글과 국악을 모티브로 한 학(學)과 락(樂)을 내세운 소주제전이 흥미로웠습니다. 최근 전통문화 자산을 콘텐츠로 활용해 우리만의 독창적인 디자인을 개발하는 작업이 부쩍 활발해진 것 같습니다.

 

“한국의 디자인은 한국적인 미와 문화적 가치를 담아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내 얼굴’을 가질 수 있어요. 우리 문화를 들여다보면 훌륭한 자산이 많습니다. 소재로서도 그렇고 정신적 가치도 우리 디자인에 꼭 담아야 할 콘텐츠입니다.”

 

-처음부터 우리문화에 천착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저 역시 서양식 관점으로 디자인을 공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제품디자인을 하는 것이 전부였지요. 디자인적 요소를 고민 하면서도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은 없었으니까요.”

 

-우리문화를 들여다보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디자인 회사를 만들어 초창기 어려움도 이겨내고 잘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영국 디자인박물관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제품 디자인에 관심을 보여 전시회에 초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포트폴리오를 제작하기 위해 작품을 고르는데 수많은 제품디자인을 들춰봐도 보낼 것이 없는 겁니다. 우리의 한계를 스스로 확인하면서 충격이 컸습니다. 결국은 전시회에도 참여하지 않았죠.”

 

-제품 디자인 대부분이 호평을 받았고 여러 기업들로부터 제품을 의뢰 받았던 회사인데, 정작 자체적인 평가가 그렇게 인색했다니 뜻밖입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저희도 궁금했습니다. 금세 답이 나오더군요. 우리만의 색깔, 우리만의 얼굴이 없었던 거예요. 우리만의 디자인을 위해 근본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가 9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그럼 사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겠군요.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들과 우리문화 공부를 시작했어요. 답사도 하고 책도 읽으면서 한국적 미의식을 공유했죠. 때마침 외환위기가 오면서 자연스럽게 일거리도 줄어들었어요. 그 기간이 딱 3년이었습니다. 우리문화에 집중한지 3년 후부터는 상품 개발에 나섰습니다. 샘플작업을 한 3년 정도 했는데,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니 비로소 우리문화 가치를 담은 상품이 만들어지더군요.”

 

-‘VIUM’이란 브랜드가 그 결실이군요.

 

“그렇습니다. 목기와 옻칠, 나전, 금속공예 등 다양한 기법의 전통공예에 디자인을 담아 현대적 상품을 개발했는데, 종류가 늘어나면서 이 상품들을 통합하는 브랜드가 필요했던 것이죠.”

 

-상품 생산 못지않게 마케팅이 중요했을 텐데요.

 

“‘VIUM’은 국내보다는 해외를 겨냥한 브랜드여서 해외 시장의 마케팅이 중요했습니다. 뉴욕에 전시판매장부터 냈던 것도 그 때문이죠.”

 

-뉴욕 전시장 개설은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아쉽게도 얼마 안 되어 문을 닫았던데요.

 

“그랬습니다. 브랜드 이름이 ‘비움’인데, 실제로 투자비를 다 없애고 원점으로 돌아왔으니 경제적으로도 다 비운 셈이 되었죠.(웃음) 뉴욕 진출 실패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전시장을 오픈하기 바로 직전에 9·11테러가 일어났는데 그 여파가 컸고요. 투자를 과도하게 했습니다. 뉴욕에서도 중심지역에 공간을 너무 크게 시작했던 것이죠. 그래도 어떻게 극복해보려고 했는데 3년 동안 유지하다보니 경제적 부담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제품 디자인으로 번 돈을 ‘비움’으로 탕진한 셈이 되었군요.

 

“그래도 큰 틀에서 보면 실패했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뉴욕에 전시장을 개설했던 덕분에 유럽에서 우리를 주목하게 되었거든요. 크고 작은 전시회에 초대되기도 하고 주문이 이어지기도 했는데, 2006년 파리 메종 오브제에 특별초청된 것은 적잖은 성과죠.”

 

-‘비움’의 상품은 대부분 장인들과 디자이너의 협업일 텐데, 대량생산까지는 아니어도 주문 생산의 수준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수공예적 가치를 살리면서 생산량을 맞추는 일이나 비용 면에서 대중화가 가능한가요.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공예를 활성화하려면 결국 산업화 차원으로 이끌어내야 하는데, 우리의 여건으로서는 힘들거든요. 생산량이 많아져야 종사자들의 삶이 윤택해지고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데 수공예로 이루어낼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하니까요.”

 

-비움은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아시아 국가와의 협업을 도입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공예의 전통적 생산 방식이 단절된 지 오래죠. 예전에는 마을 단위나 가족 단위로 공예품을 제작했지만 지금은 몇몇 기능보유자들에 의해 기법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현실이거든요. 필리핀이나 베트남은 다릅니다. 여전히 공예 인구가 많죠. ‘비움’은 장인들과의 협업으로 1차 작품을 제작한 다음 상품화시키는 단계의 제작은 필리핀이나 베트남의 인력과 협업합니다. 우리나라 장인들의 수공예적 가치를 살리는 상징적인 작품은 마스터피스(masterpiece)로 존중하면서 대량생산을 위한 협업을 진행하는 겁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공예의 산업화는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가 됩니다.”

 

-전통공예를 부활시키고 산업으로 발전시키려면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선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공예의 산업화를 내세우긴 하지만 정작 우리 일상에서도 공예는 자리를 잃어버렸는데 그 자리를 회복하는 일 또한 절실한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공예의 역사는 삶의 역사와 맞닿아 있습니다. 디자인의 역사가 오랜 북유럽을 비롯해 대부분의 국가들은 공예를 일상에서 단절시키지 않았어요. 그에 비해 한국은 60~70년대 초반, 산업화를 내세우면서 전통 공예의 가치를 놓치고 말았죠.”

 

-대학 교육과정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산업디자인과가 각 대학마다 개설되어 있고, 해마다 배출되는 디자이너들이 적지 않지만 정작 일상용품을 디자인하는 작업은 미미한 것 같거든요.

 

“실제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전자제품 디자인은 잘하는데, 주전자 같은 일상용품의 디자인은 잘못합니다. 공예 전공자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근래 들어 산업공예라는 분야가 생겨서 환경이 달라지긴 했지만 공예와 디자인이 융합되지 못하고 따로 가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진행해 오신 ‘아시아 디자인’ 작업이 궁금합니다. 아시아의 공예와 디자인을 주목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2004년 아시아 워크숍에 초청받았는데, 그때 그 나라 사람들의 놀라운 지혜와 공예 기술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들의 디자인을 꾸준히 탐색해왔지요. 그 나라들은 경제력은 우리보다 미미하지만 디자인에 대한 철학이나 자기들만의 독특한 디자인의 미학은 수준이 높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아시아디자인전을 여러 차례 기획해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연재료와 전통기술, 현대화된 상품 디자인까지 그들의 작업은 협업을 위해서도 기반이 잘 갖추어 있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형식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시리즈를 만들어낼 계획인데 이미 지난해에 베트남, 필리핀, 라오스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실험적 협력을 했습니다.”

 

-지역에서도 전통공예를 일으켜 문화산업으로 발전시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업들이 개발 단계에만 머물거나 진전된다고해도 마케팅 단계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가 있더군요.

 

“지역 뿐 아니라 공예를 산업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케팅이 중요합니다. 장인과 디자이너를 연계해 상품을 개발하는 코디네이션은 어려운 일이 아녜요. 자치단체가 이런 사업에 나선 경우라면 더구나 마케팅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사업단 같은 조직이 상설화되어 있다면 마케팅 전문가가 포함된 TFT를 꾸려 목표를 설정하고 장기계획을 세워 매출의 목표, 생산 단가는 물론 투자 규모와 수익 배분까지 구체적인 내용으로 진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례들이 있습니까.

 

“필리핀은 우리에게 저개발국가로 인식되는 나라죠. 그런데 그 나라 수공예 가구는 아주 좋습니다. 대나무 라탄 수초 같은 자연산 재료로 만드는 것들인데 그 나라에서는 판매가 잘 안됩니다. 그래서 필리핀 정부가 아이디어를 냈어요. 일종의 무역협회 같은 것을 만들어 가능성 있는 디자이너 그룹을 선정하고 그들을 지원할 수 있는 TFT를 구성했습니다. 해외마케팅과 국내마케팅, 기술지원 팀을 두었죠. 선정된 디자이너들은 서양에서 디자인을 공부했으면서도 자기나라의 전통공예 기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디자인과 전통공예를 접목해서 상품을 개발하게 한 것이죠. 3년 만에 유럽시장에 첫 수출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 그룹들의 매출이 엄청납니다.”

 

-우리나라 공예의 경쟁력이 더 걱정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아시아권 나라와의 협업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공디자인 작업은 어떻습니까. 서울시청의 상징적 공간이 된 시민청은 콘셉트를 잘 살린 공간으로 호평받고 있는데요.

 

“그 공간은 원래 홍보관 이었는데 일방적인 홍보관 보다는 시민들의 자율과 참여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 싶어 바꾼 예입니다. 밥상에 빈 그릇을 놓고 그들이 재료를 채워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하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것이 목표였는데, 실제 활용이 기대 이상으로 잘되고 있어 다행입니다.”

 

인터뷰 말미, 은 대표에게 디자인의 추구하는 본질적 가치를 물었다. “디자인은 결국 사람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위해 사람을 배려하고 사람을 나누고,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저도 과거에는 사람보다는 산업을 위해 디자인을 했어요. 부끄러운 일이죠.”

 

나눔의 철학을 담아내는 그의 디자인이 우리 사회를 위해 우리의 일상을 위해 어떻게 기여할지 더 궁금해졌다.

 

● 은병수 대표는 우리나라 최초 디자인 회사 창업…전통공예 부활 이끌어

은병수 ‘은카운슬’대표는 부안 줄포면 파산리가 고향이다. 양조장집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유학을 가 부모님 대신 형과 누나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시골에서는 제법 잘산다는 말을 들었지만 부모님이 한 달에 한 번씩 보내주시는 생활비는 열흘도 못가 바닥나는 바람에 7남매의 서울 생활은 늘 가난했다. 같은 나라 안에서 돈의 단위가 다르게 쓰인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자동차 만드는 일을 어떻게 하면 실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공과대학이 아닌 미술대를 택한 것은 순전히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서울대 응용미술학과에 들어가 공업디자인을 공부하면서는 디자인의 가치에 눈을 떴다. 현대자동차와 금성사에 취업의 문이 열렸지만, 자동차 회사가 아닌 금성사를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2년 남짓한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유학을 떠나 미국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석사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1989년에 디자인회사 ‘212디자인(당시는 212코리아)’을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디자인회사였다.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전무했던 시절, 사업 초기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안아야 했다. 그러나 웅진코웨이 정수기 등 전자제품과 굴착기, 전기자동차와 스쿠터까지 다양한 영역의 기업 제품들이 그의 손을 거쳐 옷을 입기 시작했다. 1994년,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그를 영국디자인박물관이 초대했다. 전시 포트폴리오를 위해 그동안 제작해낸 제품디자인을 정리하면서 그는 어느 것 하나 ‘내 얼굴’이라고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작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만의 것을 찾기 위한 고민과 탐색의 여정이 시작됐다. 한국 전통문화와 미술을 공부하면서 한국적인 미와 가치에 눈을 떴다. 2001년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은병수만의 얼굴, ‘VIUM-비움’은 그렇게 탄생됐다. 그해 전통공예 장인들과 현대적 디자이너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100여종의 1차 상품을 개발해 뉴욕 맨해튼에 전시 판매장을 냈다. 9·11테러의 여파가 컸지만 애초 계획대로 강행했다. 그러나 가중되는 운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2년여 만에 문을 닫았다. 회사의 경제력도 ‘비움’이 됐다. 그런데 그 실패가 기반이 되어 새로운 길이 열렸다. 아시아권 국가의 공예·디자인과의 만남이었다. 그가 고민해온 전통과 현대, 장인과 디자이너의 협업은 비로소 날개를 달았다. 한국 전통을 더욱 부각시키는 디자인 작업은 아시아 디자인 프로젝트와 이어져 다양한 전시회에 초대됐다. 우리나라 공예의 부활을 위해 아시아권 국가와의 협업을 확대해나가고 있는 그는 2009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예술총감독을 맡아 한국적 전통과 디자인 융합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인식시키기도 했다.

 

공공디자인 작업도 활발해 서울 광화문 KT본사 1층의 복합문화공간, 서울시 청사 시민청, 지난봄에 개관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 화제의 공간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비움’의 브랜드를 달고 나오는 생활 소품뿐만 아니라 공공 구조물, 상징물, 공간 등에 우리 문화의 가치를 담는 디자인 작업을 확장시켜가고 있는 그는 공공 사이트와 구조물 변환 프로젝트, 지역 사회 상징물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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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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