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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국극 부활 나선 이소자 선생 "전통 잇는 아이들 가르치는 내가 더 즐겁고 행복"

햇님여성국극보존회 발족 연고 없는 남원서 부활의 꿈 / 30여년 이민생활 사재 털어 후학 양성 전용극장 지을 것

   
▲ 30여년의 이민생활을 접고‘여성국극’발전기금으로 전 재산을 털어 부활의 꿈을 실현하고 있는 원로배우 이소자 선생이 직접 만든 의상을 바라보며 흐뭇해 하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창극은 최초의 작품 ‘은세계’가 1908년 공연된 이후 1950년대 말까지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우리의 공연예술 양식이다. 새로운 대중문화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부유하기도 했었으나 1962년 국립창극단이 문을 열어 그 맥을 이어왔으니 100여년 한국적 공연양식의 온전한 역사는 지켜져 온 셈이다.

 

2년 전쯤에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재직했던 유영대 고려대 교수를 인터뷰 한 적이 있다. 판소리 연구자이기도 한 유 교수는 국립창극단 무대를 통해 창극의 양식을 다양하게 실험하면서 시대에 맞는 창극을 발굴해내는 작업으로 주목을 모았다. 그가 지향했던 창극은 보편적 음악극으로서의 양식. 그래야만 창극이 우리시대의 공연양식이 될 수 있다고 유 교수는 확신했었다.

 

한 시기, 대중들과 호흡했던 창극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보존의 가치로만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긴 하지만 공연무대에서 새로운 가치로 조명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최근 창극의 또 다른 변형 양식인 ‘여성국극’의 온전한 부활을 꿈꾸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그것도 판소리의 탯자리인 남원에서 움트는 의미 있는 운동이다. 자연히 관심이 더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 운동을 이끌어낸 사람이 원로 여성국극배우 이소자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올해 여든 넷. 이소자선생의 나이다. 선생은 여성국극의 초창기 무대를 지켰지만, 그 명맥을 온전히 이어온 국극배우는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수십억 원에 이르는 전 재산을 여성국극의 부활과 발전에 내놓겠다며 기증식을 가졌다. 지난 6월 남원에서 열린 국악인의 밤에서다. 놀란 것은 국악인들만이 아니었다. 이 지역과 연고도 없는 선생은 왜 남원에서 여성국극을 부활시키려하는 것일까. 선생에게 여성국극은 어떤 의미인가, 삶의 여정이 궁금했다.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선생은 손사래부터 쳤다.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인터뷰는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지만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선생은 열정에 넘쳐보였다. 인터뷰는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그의 자택에서 있었다.

 

-건강하십니다.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연세를 짐작하기 어렵던데요. 직접 뵈니 그런 생각이 더 드는군요.

 

“젊게 봐주니 고맙습니다. 예전에는 걸음도 후적후적 다녔는데, 아무래도 나이는 못 속이는지 조심조심 걷게 되요.(웃음) 팔십 노인인데 특별히 아픈데 없이 이만큼 유지하고 사는 것도 감사해야죠.”

 

-남원과는 지역적 인연이 있습니까.

 

“특별한 인연은 없어요. 젊은 시절 유독 전북지역에 공연을 많이 다녔는데 인연이라면 그것이 전부예요.”

 

-집 분위기가 공연 연습실 같습니다. 무대 의상이나 소품들이 참 많군요.

 

(그의 집은 넓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은 무대의상과 소품으로 들어차있고, 거실 곳곳에도 소품들이 놓여있었다)

 

“공연을 위해 내가 만든 의상이에요. 경비를 좀 줄여보려고 이것저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하죠. 소품도 그렇고. 애초에는 이 건물 지하에 연습실이 있었는데 남원에 설립한 햇님여성국극보존회 운영비를 보내야 해서 세를 내줬어요. 그래서 춤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은 거실에서 연습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지금도 춤을 가르치십니까.

 

“내가 만든 창작무용이 있어요. ‘밤길’ 이라고 이야기가 있는 춤인데, 독특한 양식으로 되어 있지요. 탈 같은 소품도 필요하고. 호감을 갖는 사람들이 있어 배운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가르쳐줘요. 탈 만드는 기술은 나만의 비법이 있는데 안 가르쳐줘요. 아직 공개하고 싶지 않거든요. (웃음)”

 

-남원에서 열린 춘향제때 여성국극 ‘춘향전’을 공연했는데 평은 어땠습니까.

 

“올해 무대가 두 번째인데 아주 좋았어요. 평도 괜찮았고, 아이들도 즐겁게 했습니다. 작년 무대는 첫무대여서인지 아무런 경험이 없는 애들을 가르쳐서 무대를 올리려니 어려움이 많았거든요.”

 

-주로 판소리를 전공한 학생들이었겠지만 국극이란 양식이 아주 생소했을 텐데요. 국극은 또 연기에 좀 더 비중이 있지 않나요.

 

“소리는 잘하는데, 연기를 맞추려니 더 힘들었어요. 그래도 한번 경험이 있어서인지 애들이 곧잘 하더군요. 작년에는 학교에서 결정한 일이니 할 수 없이 하는 아이들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지원자도 많아지고, 자기 역할에 관심도 많아 이 아이들이 연습을 잘 하면 남원에서 좋은 여성국극을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우선 가르치는 내가 더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지난 3월부터 남원을 오가면서 애들을 가르쳤죠.”

 

-아이들을 지도할 때 선생님 목표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욕심이야 애들을 좋은 국극배우로 만드는 것이죠. 아직은 고등학생들이지만 졸업하고 나면 여성국극단에 참여시킬 수 있겠다는 희망이죠. 우선 판소리 실력이 좋은 아이들이 많아 금세 따라오더라고요. 사실 이번 공연을 앞두고 본 공연장에서는 리허설도 제대로 못했는데 학교 강당에서 리허설을 완벽하게 해서인지 실수도 없었고, 그런대로 좋은 기반이 되었습니다.”

 

-여성국극을 연고도 없는 남원에서 재현해내시는 것이 궁금합니다.

 

“2011년에 서울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내가 제작한 여성국극 춘향전을 올렸어요. 순전히 사비를 들여서 제작한 무대였죠.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긴 하지만 나름대로는 오랫동안 가져왔던 여성국극 부활의 꿈을 실현하는 첫 번째 시도였어요. 다행히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용기를 얻었지요. 그러다가 남원 국악예고 이상호이사장님을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았습니다. 그래서 춘향제에도 초대를 받았는데, 이상하게 남원과의 인연이 마음에 딱 와 닿았어요. 몇 번 오고가면서 여기면 되겠다 생각했지요. 그래서 작년에 남원에서 햇님여성국극보존회를 발족했습니다.”

 

-지난 6월에는 선생님의 재산을 온전히 여성국극을 위해 기부하겠다는 기증식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감동의 파장이 컸습니다.

 

“애초에는 내가 가고나면 적당한 사람에게 재산을 맡기고 여성국극을 발전시키는 일을 하게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 내 일을 도와주시는 분이 ‘선생님 살아 계실 때 이런 일을 다 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더군요. 생각해보니 옳은 이야기라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사단법인을 추진할 때 힘든 과정이 있었어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도움보다는 경계하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기증식으로 확실하게 방향도 정하고 의지도 보이고 싶었습니다.”

 

-기금은 얼마나 되고 어떻게 쓰여지는지 궁금합니다.

 

“구체적인 금액으로는 환산해보지 않았고, 다만 내가 갖고 있는 부동산이 좀 있습니다. 서울과 용인 쪽에 집과 땅이 있지요. 그것들을 다 처분해 기금으로 돌릴 생각이에요. 이 집도 이제 엄밀히 말하면 내 집이 아닌 거죠. 이미 기증 했으니까. 이제 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아마 기금 운영 형식은 장학재단을 통한 형식이 되지 않을까 싶고요. 우선 어느 정도 정리되면 여성국극 전용극장을 건립할 생각입니다.”

 

-여성국극의 부활을 삶의 목표로 세운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나의 젊은 시절을 바쳤던 것이고, 또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국극은 참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여성국극 무대에서 가장 가슴 설레고, 행복했던 것 같아요. 그만큼 매력 있는 공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그 명맥이 딱 단절되었잖아요. 물론 몇몇 공연이 그사이 재현되어 다행이지만, 어디에선가는 지속적으로 여성국극이 올려지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세로 보아서는 여성국극 1세대가 아니실까 싶은데요.

 

“아닙니다. 나는 좀 늦게 시작했어요. 이십대에 배우가 되었으니까요. 나는 소리는 못했어요. 판소리를 잘했다면 제 삶이 달라졌을 겁니다. 소리 공부를 안 해 아쉬움이 많았지만 그때부터 소리를 배우기에는 또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배우로서의 역량을 쌓기 위해 연기 연습을 더 많이 했던 것 같아요. 1세대는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1.5세대쯤이나 될까요.”

 

-어떻게 배우가 되셨는지가 궁금하군요.

 

“1·4후퇴 때 어머니와 군산으로 내려왔어요. 하루는 거리를 걸어가는데 한 남자가 오더니 배우냐고 물어봐요.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했죠. 그랬더니 공연 연습실로 데리고 갔어요. 지금 기억으로는 ‘십자성 가는 길’이라는 작품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배역을 하나 주더군요. 아무 경험도 없는 사람이 잘할 리 없죠. 그래도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완전히 뺏겼습니다. 절간 같은 곳에서 몇 달씩 연습을 하면서 밥이나 겨우 얻어먹는 생활이었는데도 열심히 배웠어요. 공연이라고 해야 평지도 아닌 곳에 가설무대를 만들고 멍석을 깔고 솜뭉치 같은 것으로 조명을 만들어서 했는데 첫무대에 섰을 때는 떨려서 앞이 하나도 안보였어요. 대사만 얼마나 열심히 외웠는지 안 틀리고 겨우 해냈지요. 그 후에 아세아 극단으로 들어가서는 제법 배우다운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여성국극단 활동은 언제부터 하신 겁니까.

 

“아세아극단에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겨우 밥이나 얻어먹는 정도여서 그만두고 부산으로 갔죠. 그때 부산에서 백조가극단이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된 강효실씨가 했던 역할을 해보라고 하더군요.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는 사람이 여성국극을 구경가자고해요. ‘햇님여성국극단’이었어요. 박귀희 김소희씨가 참여했던. 당시에는 그분들이 다 그만둔 이후였는데, 공연이 너무 좋더라고요. 얼마나 그 공연을 하고 싶었는지 대사도 없는 남장 역을 맡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하는 품이 초짜 같지 않다’는 무대감독의 말도 용기가 되어 망설일 것도 없이 여성국극에 발을 디뎠어요.”

 

-국극은 창극의 다른 용어로 시작되었지만 소리보다는 극의 비중이 커진 양식이죠. 당시 여성국극은 시기는 길지 않았지만 한 시절, 정말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대중들이 아주 좋아하는 공연이었어요. 여성들로만 구성되었으니 여자배우들이 남장을 하고 무대에 서는 것도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습니까.

 

“‘바보온달’을 목포에서 공연할 때였어요. 평강공주를 사랑하는 고야수라는 악역이 있었습니다. 나는 고야수의 졸병을 맡았는데, 고야수 역할을 맡은 배우가 너무 악역이어서 못하겠다고 한거예요. 내게 그 역할이 왔어요. 일생일대의 기회였지요. 당시 무대에는 마이크 두개가 전부였는데, 뭔가 제대로 하고 싶더군요. 그래서 대사도 그렇지만 한껏 폼을 잡으며 관중들을 웃음 터지게 했어요. 나중에는 그것이 유행이 되어 ‘마의 태자’ 등 다른 단체 단원들도 그런 방식을 따라했지요. 그 뒤로는 주로 악역만 했는데 여성국극에서는 악역이 특히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다른 배우들은 관중들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피하죠. 저는 기꺼이 했어요.”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지만 여성국극 역시 단명한 우리 공연양식 중의 하나입니다. 1960년 초반에 국극단이 사라졌죠.

 

“나도 60년 이후에는 단체 활동은 못했어요. 그래도 여성국극에 대한 마음을 온전히 접지 못하고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을 모아 작품을 만들었어요. 68년엔가는 KBS의 의뢰를 받아 방송도 했는데,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극단 활동을 하신 겁니까.

 

“74년에 미국 이민을 갔어요. 세상을 좀 넓게 보고 싶어서 갔는데, 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고생을 많이 했죠. 예술을 작파하고 뷰티샵이나 명품가게 등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했어요. 겨우 아파트 임대비 해결하는 빠듯한 생활이었지만 참고 견뎠습니다. 나중에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영주권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77년에 잠깐 나왔을 때 여성국극 공연을 하던 동료들의 제안을 받아 국극을 다시 하기 시작해 2-3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여성국극 부활을 절실한 꿈으로 안게 되었을 겁니다. 여성국극을 내 힘으로 살려봐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가 2009년에 완전히 귀국하면서 그 꿈은 더 단단해졌지요. 그래서 춘향전부터 만든 겁니다. “

 

-여든 살에 새로운 출발을 하신 셈이군요. 2011년에 제작해 올린 춘향전이 첫 결실인데, 제작비 부담은 없었나요.

 

“미국에 있으면서 먹는 것 하나까지 아끼면서 돈을 모았어요. 30년 세월입니다. 처음에 부동산을 샀는데, 다행히 그것을 잘 활용해서 이번에 내놓을만한 재산이 되었어요. 얼마 남지 않은 여생, 헛된 삶이 된 것 같진 않아 감사하고 있습니다.”

 

선생과의 인터뷰는 흥미진진했다. 가난한 어린 시절, 춤꾼이 되고 싶었다는 그는 스무 살이 넘어서야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 길에서 만난 여성국극. 30년 이민생활에서도 늘 여성국극단 시절의 무대를 추억하며 살았다는 그의 오랜 꿈은 이제 현실이 된다. 그런데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 과연 여성국극은 대중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까.

 

“일본에는 다카라스카가, 중국에는 월극이란 여성배우만의 공연 양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여성국극이 있지요. 지금은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여서 시간과 돈만 있으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외레 우리만의 공연이 살아나야 한다고 봅니다. 보존의 의미로라도 지켜져야 하는 것이 전통이지 않을까요.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상설공연을 하고, 그래서 젊은 세대들이 그것을 기억하고, 외국인들이 우리 공연양식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남원이 여성국극을 살려내는 터전이 될 겁니다.”선생의 웃음이 환했다.

 

● 이소자 선생은 군산서 캐스팅 '배우의 삶'…전 재산 기부 '여성국극' 부활

   

이소자 선생은 1930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영희.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는지 그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데, 집안이 망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3남매와 강보에 싸인 그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가뜩이나 곤궁했던 시절, 어머니가 가장인 그의 집은 늘 배고픈 일상이었다. 소학교를 거쳐 배화여중에 입학할 때만 해도 춤을 잘 추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늘 예능에 끼를 보이는 딸을 건사하느라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는 그가 집밖으로 나다니지 않고 집에서 음전하게 살림하다 좋은 사람만나 시집가는 것을 원했다. 1·4후퇴 때 어머니와 군산으로 내려와 지냈던 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극단 관계자의 눈에 띄어 배우가 되었다. 이를테면 ‘길거리 캐스팅’이었다. 스무 살이 넘어 시작된 배우로서의 생활은 가난하고 궁핍했으나 하고 싶었던 일이어서 행복했다. 당시 대중들의 인기를 휩쓸었던 ‘햇님여성국극단’의 공연을 보고는 매료돼 고민 없이 여성국극 배우가 되었다. 대부분 소리를 하다가 배우가 된 단원들과는 달리 소리 공력이 없었던 그는 소리를 배우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다. 연기에 더욱 공력을 쏟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성기를 구가했던 여성국극단은 60년대 초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 역시 개인적으로 공연활동을 하다가 7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다시 돌아온 것이 2009년, 35년 이민사는 외로움과 가난함의 시간으로 엮어졌다. 생계를 위해 예술을 내려놓고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의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면서 모은 돈으로 한국에 부동산을 샀다. 자신을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돈을 쓰지 않았다. 덕분에 5년 전 영구귀국 했을 때 그는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갖게 됐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여성국극 부활의 꿈을 실행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사비를 들여 제작한 ‘춘향전’을 2011년 서울 무대에 올리면서 힘을 얻고 의지를 다졌다. 2013년, 뜻을 같이 하는 인사들과 함께 남원에서 햇님여성국극보존회를 출범시켰으며 지난 6월에는 전 재산을 여성국극 기금으로 내놓아 화제를 모았다. 남원국악예술고등학교 국악인재들을 여성국극 배우로 키워내는 일을 여생의 소망으로 삼고 있는 그는 여성국극의 온전한 부활이 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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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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