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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평전〉 펴낸 안도현 시인 "현재진행형 '백석의 삶'…영원한 탐구 대상이죠"

   
▲ 10년 넘게 준비한 끝엶백석평전’을 펴낸 안도현 시인이 인터뷰를 마치고 완주군 구이면에 있는 작업실 돌담길을 걷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1980년대 초반부터 일었던 한국사회의 문화운동은 기존의 어떤 형태의 운동보다도 더 대중적이고 힘 있게 사람들을 끌어들여 시대와 현실을 공유하게 했다. 그 문화운동의 중심에는 문학이 있었다. 60년대 김수영이나 신동엽으로 대표되는 참여문학운동, 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을 돌아보면 우리사회 문화운동의 선도적 역할은 문학에 의해 이루어졌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80년대에 뜨겁게 전개됐던 전북지역의 문화운동 역시 젊은 문학인들이 주도했다. 역사와 시대를 직시하는 문학인들은 ‘남민시’ 동인이나 ‘땅전’과 같은 무크지 운동을 이끌어냈다. 20대였던 시인 안도현도 그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30년. 80년대와 90년대, 2000년대를 관통해오는 동안 세상과 늘 치열하게 맞서있었던 시인의 삶은 온전히 글로 담겨 수많은 독자들을 문학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 진보지식인으로 주목받아온 그는 지난해 7월 이후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 됐다.

 

그렇다면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시는 단정한 모습을 보여야 하고, 세상이 차가울수록 시는 따뜻한 편에 서야 한다’는 그의 시정신을 만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어려워진 것일까.

 

지난 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항소심에서 무죄 판결) 정치참여의 후유증을 단단히 겪고 있는 안도현 시인(53)이 최근 ‘백석평전’(다산북스)을 펴냈다. 시가 아닌 평전으로 시인을 만나는 일은 새롭다. 더구나 스무 살에 백석의 시를 처음 만났다는 시인이 10년 넘게 준비해온 이 평전은 ‘시인적 직관과 통찰력으로 백석의 생애를 완벽히 구성해내는데 성공했다’는 찬사와 함께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시인은 이 책 서문에서 ‘백석을 베낀 시간들’을 고백한다. 그렇고 보니 안도현의 시에서 백석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안도현 시인(53)을 만났다. 시대의 경계를 가르고 백석과 안도현이 만나는 지점을 만나고 싶었다. 인터뷰는 우석대 그의 연구실과 완주군 구이면 작업실을 오가며 이루어졌다.

 

-백석과의 인연이 꽤 깊더군요. 스무살 때 백석의 시를 처음 만나셨다니 30여년 세월인데 그때는 백석의 존재가 완전히 가려져 있던 시절 아니었습니까.

 

“그렇죠. 저도 박항식 교수님이 펴낸 ‘수사학’에서 백석의 시를 처음 읽었어요. ‘모닥불’이란 시였는데, 그동안 읽었던 시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어요. 〈사슴〉이란 시집이 있고 〈문장〉에 가끔 작품 발표를 했다는 것이 전부였어요.”

 

-월북시인에 대해 관심이 높았었던 때였나요.

 

“오히려 관심을 갖는 일조차 금기시 되던 때였죠. 월북작가들에 대한 관심은 87년 6월 항쟁 이후에 그들의 작품이 책으로 나오면서 이루어졌다고 봐야겠죠. 우리 사회 민주화 분위기와 함께 월북 납북 작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그때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더구나 백석은 평남 정주에서 태어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활동한 재북작가여서 발표된 시도 제대로 발굴되지 않았었죠.”

 

-백석 시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궁금해집니다.

 

“제가 스무 살 때까지 읽었던 시와는 전혀 다른 시였다는 겁니다. 시 한편이 주는 인상이 아주 강했어요. 향토적인 듯하면서도 모던하고, 시인이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도 독특했어요. 아주 잘 찍은 사진 한 장을 보는 듯 한 감동이었습니다. 백석만의 그러한 독특한 시적 성취는 우리 근대시사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30년 동안 짝사랑해왔다는 고백이 있던데요. 스무 살 이후 시인의 시를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습니까.

 

“별로 없었죠. 30-40년대 잡지 속에서 한 두 편씩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전부였으니까요. 그런데 작고하신 이광웅 시인이 백석시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감옥에서 나온 직후니까 87년쯤 되었을 것 같은데, 노트 한권을 보여주시더군요. 백석의 시를 직접 필사한 것이었어요. 정갈하게 쓰인 그 노트에 새로운 백석의 시가 있었습니다. 그 시를 읽으면서 가슴 떨렸던 기억이 있어요.”

 

-백석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많은 시가 실려 있지만 그의 삶과 시에 대한 연구 작업은 여전히 미진한 것 같습니다.

 

“우선은 발굴된 그의 시가 많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시집은 ‘사슴’ 한권뿐인데, 그 마저도 국내에 대여섯 권 있을 정도로 귀하죠.”

 

-그래서 이번 평전이 더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또한 앞서 나온 일대기와 시선집이 없었다면 연구의 진전이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기왕에 나와 있는 백석 일대기는 여러 한계로 오류가 있거나 백석을 지나치게 과장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애초 평전의 취지를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백석의 생애와 관련된 사실의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재구성하자는데 두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평전을 펴낸 특별한 이유가 또 있습니까.

 

“정서적으로는 30여 년 동안 내가 깃들일 둥지로 나의 시를 견인해준 백석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전’이라는 형식으로 백석의 생애를 복원해 본다면 그를 직접 만나는 방식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백석의 후기 시가 연구자들에 의해 발굴되면서 30년대에 ‘모던보이’로 불리던 시인이 만주로 건너간 후에, 또 해방 후 북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다른 시를 쓰게 되었는지도 궁금했지요. 그래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기왕에 나온 다른 책들과 다른 성과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백석이 어떤 계기로 시를 쓰게 되었는지, 그가 일본에서 유학하며 습작할 때 누구의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그동안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었어요. 이 책에서는 1920년대 일본의 모더니즘 시론을 폭넓게 수용했다는 점을 밝혔지요. 시와 산문에 드러나 있는 내용과 그의 행적을 비교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독자들에게는 백석의 젊은 시절 연인이었던 자야 김영한 여사와의 연애담이 아무래도 흥미로울 텐데요.

 

“사실 자야여사가 에세이 〈내 사랑 백석〉을 펴낸 후 독자들의 관심이 더 높아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에세이 역시 기억의 오류로 사실이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었어요. 그동안 지나치게 과장되었거나 풍문으로만 떠돌던 백석의 연애담과 결혼생활도 가능한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백석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시인들에 비해 대중적 관심이 훨씬 높은 것 같습니다. 이유가 있을까요.

 

“수많은 시인 중에서 그런 관심을 받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이긴 하죠. 정지용 김기림 신석정 등 동시대에 활동했던 시인들은 이미 해방 후 교과서를 통해 알려지고, 그러면서 교과서적인 시인으로 굳어졌지만 백석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백석이 독자들에게 알려진 것이 1988년 이후이고, 교과서에 그의 시가 실린 것은 90년대 중반부터거든요. 늦게 알려진 덕분에 궁금증을 자아내는 측면이 있고, 다른 시인들은 문학사적으로 규정되었거나 평가가 이미 이루어진 옛날시인처럼 느껴지는데, 백석과 그의 시는 현재 진행형인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렇다보니 백석의 작품이 발굴될 때마다 언론이 주목하게 되고 관심이 증폭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백석은 식민지와 분단 시대를 살았던 시인인데도 친일의 혐의가 없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백석은 해방 이전의 민족시나 저항시 계열의 시인이 아니었지만 친일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해방직전에는 거의 모든 시인들이 친일 작품을 썼지 않습니까. 더구나 백석은 일본 유학에 조선일보 장학금으로 유학생활을 했어요. 친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만주로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면 이념이 대립된 시대에 어느 한쪽에도 서지 않겠다는 그런 입장이었을까요.

 

“아니죠. 오히려 어느 한쪽을 확실히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일을 하지 않겠다는. 그런데 독특한 것은 시는 또 아주 모던한 경향을 보이거든요.”

 

-문학사 쪽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백석을 굳이 민족시인으로 규정하거나 전체적으로 색칠할 필요는 없지만 당시 지식인의 민족의식, 특히 글 쓰는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민족의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이었습니다. 북에 돌아가서 쓴 시들도 겉으로는 체제 찬양하는 시지만 당시 북에서 발표됐던 다른 시인들의 시와 비교해보면 표현방법에 있어서 백석만의 특징이 아주 강합니다.”

 

-시 못지않게 동시로도 작품 활동이 활발했었다고 하던데요.

 

“백석은 북에 돌아간 이후 시를 발표하지 않고 동시를 썼어요. 동화시 같은 새로운 장르도 개발했지요. 그러다가 57년쯤 격렬한 아동문학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백석은 동시가 이데올로기로부터는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교훈이 담겨있긴 하지만 직접적이지는 않은. 그런데 백석이 동시를 발표하자 북한 문단의 주류 아동문학 작가들이 공격을 시작했죠. 백석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아동문학평론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더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류 측은 아동문학작품에도 사상성을 적극적으로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고, 백석은 아이들이 읽는 작품은 사상성 보다는 문학성 예술성이 먼저여야 한다는 입장이었죠. 문학창작의 자율성과 집단적 획일주의가 맞선 셈인데, 이 논쟁으로 결국 백석이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문학사에서 백석은 온전히 자리를 잡았다고 보십니까.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죠. 아쉬운 것은 해방이후에 발표한 시에 대해 본격적인 평가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북한 체제에 순응적인 시들이 많다보니 단순하게 체제순응의 시라고 규정해버리고 있거든요.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하면 새로운 평가와 사실이 드러날 수 있을 겁니다.

 

-서문에 ‘백석을 베낀 시간들’을 고백하셨더군요.(웃음) 그래서인지 백석의 시와 닮은 점이 보이기도 합니다. 거대담론보다는 일상의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관심도 그중 하나일 듯 하고요.

 

“조심스럽지만 어떻게 보면 백석으로부터 배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세계를 보는 태도와 자세겠지요.”

 

-화제를 돌려보죠. 요즈음 시는 어떻습니까.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난해한 시가 너무 많다고도 하는데 가뜩이나 시가 안 읽혀지는 시대에 독자들을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요.

 

“특히 일부 젊은 시인들의 시는 지나치게 자폐적이고 난해해서 시인이나 비평가들조차도 읽기 힘들어합니다. 한국현대시 자체가 소수 전문가들의 소유로 변해가는 어떤 전환기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가자고 할 필요는 없겠지요. 사실 이런 경향은 세계적인 흐름 이예요. 일상문화의 변화 탓도 있을 겁니다. ‘스마트 폰’이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나 자신을 강조하고 나 자신에 관심을 갖게 되는 성향이 더 강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젊은 세대들의 시쓰기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자기 안에서 자기 세계만 들여다보니까.”

 

-청소년기에 시를 많이 읽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사실 창의력을 키우는 텍스트로 시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적어도 학교교육 안에서는 시가 거의 유일한 셈입니다. 시교육의 목표를 창의력 신장으로 잡는 것이 바람직하죠. 그러나 오늘의 학교교육에서는 아이들이 시를 국어시험에 나오는 지문의 하나 정도로 압니다. 시를 즐기지 못하고 문제풀이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지난해 7월, 시를 쓰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힌 후에 정말 시는 한편도 안 쓰셨습니까.

 

“1년 동안 메모도 안했습니다. 제 시쓰기는 보통 어떤 소재를 만나면 메모하고 그것을 컴퓨터에 옮겨 나중에 시를 쓸 때 꺼내어 쓰거든요. 아예 시를 안 쓰겠다고 마음먹었더니 메모도 안 떠오르더군요.”

 

-세상에 대한 관심도 무디어지는 것 아닐까요.

 

“할 이야기는 트위터로 하죠. 절대 무디어진 것은 아녜요.(웃음)”

 

-시는 언제부터 다시 쓸 수 있게 될까요.

 

“제 나름대로 시인이 시를 안 쓰는 것도 세상과 맞서는 방식일 수 있겠다 싶어서 택한 일인데 예상보다 마음이 편합니다. 이번 기회에 나를 비우고 좀 더 새로운 시쓰기를 얻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안도현 시인이 펴낸 〈백석평전〉은 한편의 장대한 소설 같은 책이다. 백석을 향한 짝사랑, 그리고 그 경계를 뛰어넘는 존경이 품격 높은 그만의 상상력과 조우하면서 백석의 생애를 온전히 복원하고 있는 덕분이다. 그의 말대로 ‘현재진행형인 백석’은 안도현의 영원한 탐구 대상이다. 시가 아닌 평전으로 문학의 정신을 다시 새롭게 만나게 해주는 일은 시인 안도현이 독자들에게 돌려주는 선물이다. ‘시를 쓰는 자유를 내려놓음으로써 더 많은 자유를 누렸던’백석 처럼 시인은 잠시(?) 시를 내려놓고 있다. 더 큰 자유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다.

 

● 안도현 시인은 전북 문화운동 이끈 주역…통일·교육운동도 앞장

   

안도현 시인은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대구 대건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전국의 백일장을 휩쓸었을 정도로 문재를 날렸다. 경희대 장학생 입학자격을 얻었으나 원광대 국문과를 택했다. 대학을 졸업한 80년대 초부터 지역 문화운동의 현장을 지켰던 그는 시인이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국어교사였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전교조 교사로 교육운동을 벌이다 학교에서 쫓겨나 해직교사가 됐다. 94년 복직이 되어 다시 교단에 섰지만 3년만인 97년, 이번에는 스스로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됐다. 대중적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놓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 〈연어〉를 내놓은 지 1년만이었다. 전업 작가가 된 후 창작 작업은 더 치열해졌으며 시집과 산문집을 아우르는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한국의 대표적 시인이자 인기작가가 됐다.

 

그는 한동안 연애시류의 시쓰기와 대중들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산문쓰기에 집중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이른바 ‘인기작가’나 ‘대중작가’ 되고 대중적 이미지를 공고히 다지는 동안에도 그는 통일운동과 교육운동을 실천했다. 북한어린이돕기로 통일운동의 전면에 나섰으며 사회변화에의 갈망을 정치운동으로 풀어냈다.

 

2000년대 중반부터 그의 정치활동은 치열해졌다. 덕분에 〈연어〉의 작가 안도현의 대중적 이미지는 ‘정치적 진보 지식인’으로 바뀌었다. 정치활동 보폭은 갈수록 넓어져 2010년 6·2 지방선거때 치러진 교육감 선거에서는 진보진영 후보의 홍보위원장을 맡아 선거캠프를 주도했으며, 국회의원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후원회 대표가 되어 벌이는 그의 정치활동은 더 이상 대중들에게 낯설지 않게 되었다. 지난 19대 총선에서는 정치활동 전면에 나서 민주당 비례대표 공천심사위원으로도 참여했다. 올해 봄, 선거법위반으로 기소돼 법정 다툼을 거쳐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그의 정치활동이 적극적이고 공개적으로 전개되면서 대중들은 시인 안도현이 앞으로 정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갖기 시작했지만 “정치는 하고 싶다. 그러나 정치인은 결코 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이후 자유로워졌다.

 

대구매일신문(1981년)과 동아일보(1984년) 신춘문예에 당선하며 등단한 그는 〈서울로 가는 전봉준〉부터 〈북항〉까지 열권의 시집을 냈으며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 〈사람〉을 비롯해 여러 권의 산문집을 냈다.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 〈짜장면〉 〈증기기관차 미카〉 등으로도 주목받았으며 그를 인기작가로 만든 〈연어〉는 130쇄를 기록, 6개국의 언어로 번역돼 출간됐다.

 

2004년, 우석대 문예창작과과 신설되면서 교수로 임용돼 다시 교단에 선 그는 10년 동안 준비해온 백석의 시와 생애를 통찰한 〈백석평전〉을 펴내 주목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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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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