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청와대에서 대통령 연설을 담당하는 연설비서관이었다. 연설비서관이란 직업은 특별하다. 통념으로 짐작해보자면 웬만큼 능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넘나보기 어려운 영역이다. 그런데도 그는 8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같은 자리에서 보냈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정부에서 3년,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서 5년이다. 청와대에서 나온 지 6년. 그가 책을 냈다.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이름을 붙인 책이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게 배우는 사람을 움직이는 글쓰기 비법’이란 부제가 붙었다. 책 제목부터 부제까지 심상치 않은(?) 이 책은 짧은 시간에 화제가 되었다. 화제가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책과 저자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음을 뜻한다. 책은 6만권 판매를 앞두고 있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기관과 단체들의 강연요청은 말 그대로 ‘쇄도’하고 있다.
사실 글쓰기에 관한 책은 넘쳐난다. 소통의 시대, 자기언어와 표현 방식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고 있는 덕분이다. 그러나 수많은 글쓰기 책 중에서 이 책만큼 짧은 시간, 대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예는 드물다. ‘글쓰기’와 ‘대통령’의 묘한 융합(?) 덕분이었을까.
저자를 만났다. 강원국씨(52, 메디치미디어 주간)는 이 책을 ‘두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과 8년 동안의 배움에 대한 감사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현직 시절, 그에게 특별한 주문을 했다. “대통령 연설문을 쓰면서 경험한 것을 공유해라. 책으로도 쓰고 강연도 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일을 경험한 자네는 특혜와 특권을 누린 결과가 된다.”
‘두 대통령과 함께해서 행복했던 8년’을 ‘글쓰기’로 추억해낸 그는 책을 내고 난 뒤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일상을 맞고 있다. 예고 없이 찾아온 변화지만 그는 기꺼이 이 시간들을 즐긴다.
사람을 움직이는 글쓰기의 비법이 따로 있을까.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글의 감동은 기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진정성에서 나오지요. 그래야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말과 글이 따로 가지 않는 그와의 인터뷰는 편안하고 즐거웠다.
-강의가 많은 모양입니다. 강의를 통해 글쓰기 비법을 다 털어놓으시면 책은 잘 안 읽히겠는데요.(웃음)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정말 높은 것 같습니다. SNS영향이 아닌가 싶은데, 제가 회사다닐때만 해도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말없이 성과 내는 사람, 결과로 보여주는 사람이 인재로 인정받았죠. 그런데 지금은 설득하는 과정이 모든 일의 중심이 되다보니 말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사람이 능력을 인정받는 것 같습니다.”
-강연을 하다보면 그런 분위기를 실감하십니까.
“제 이야기를 들으러 오시는 분들 중 직장인이 많습니다. 사실 요즈음은 직장생활의 대부분이 글 쓰는 일, 이를테면 보고서니 기획안이니 문건을 작성하는 일이죠. 자연히 글쓰기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요즈음은 연령이나 계층에 관계없이 글쓰기에 관심이 많더군요.
“제 강연에도 일흔이 넘는 분들이나 주부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기본적으로 자기표현 욕구가 그만큼 강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어떤 비법을 들려주시나요.
“사실 글쓰기는 글쓰기 강연을 듣는다고 해서 느는 것은 아닙니다. 글쓰기는 그냥 글을 자주 쓰면 늡니다. 진짜 글을 잘 쓰고 싶으면 시간을 내어 글을 많이 써보는 것이 정답일거예요. 비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제 경험을 바탕으로 전합니다.”
-책을 읽어보니 강 주간께서도 글을 잘 쓰지 못했다고 하셨던데, 어떻게 글 쓰는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까. 대학에서는 외교학을 전공하셨던데요.
“젊은 시절 꿈은 기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대학 4학년 때 결혼 하면서 직장을 잡아야 하는 바람에 기자직을 놓쳤죠. 첫 직장이 대우그룹 홍보실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글쓰기는 남일 이었어요. 그런데 마침 제가 입사한 해가 회사 창립 20주년이었어요. 제가 사사 제작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원고를 맡은 외부 필자에게 문제가 생겨 제가 원고까지 맡게 된 겁니다. 그때만 해도 기자직은 연령제한이 있어서 한번정도 기회가 남아 있었는데, 사사 만드느라고 그마저도 놓쳐버렸죠.”
-아예 글쓰기의 기본이 없었다면 그런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고군분투하면서 사사를 제작했어요. 그러고 나니 제가 대우그룹 안에서는 글 쓰는 전문가가 되어 있더라고요. 김우중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게 되셨을 때 자연스럽게 스피치 라이터(speech-writer)가 되었죠. 그때부터 연설문 쓰는 일이 시작된 겁니다.”
-청와대와의 인연도 그렇게 이어진 것이겠군요.
“그렇죠. 김대중 대통령 때 경제 분야 글을 쓰는 행정관이 필요했었나봐요. 마침 연설비서관실에서 전경련 회장 원고를 누가 썼는지 알아보다가 저를 찾게 된 것이죠. 그래서 예상치도 않았던 청와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국민의 정부에서 3년을 행정관으로 근무하고 다시 참여정부의 연설비서관으로 일하게 되셨는데, 아주 이례적인 경우 아닌가요.
“8년이니까, 아마 저 같은 경우는 없을 겁니다. 국민의 정부가 끝나고 참여정부에서도 일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않았거든요. 노무현 대통령 인수위 시절에 2개월 동안 파견 나가 연설문 쓰는 일을 맡았었는데, 그동안 쓴 연설문을 노대통령께서 단 한 번도 읽지 않으셨어요. 참담했죠. 그랬으니 더욱이나 다시 인연이 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참여정부 5년을 연설비서관으로만 지내셨잖습니까.
“어차피 정권이 바뀌면 청와대 조직도 바뀌게 되죠. 같은 정권이 연장되었다고 해도 들어올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겠어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원칙이 있었습니다. 논공행상식이 아니라 적임자를 앉게 하는거죠. 공이 있다고 해서 자리로 보상해주면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대통령께서 글을 쓰는 사람은 그대로 일을 맡게 하라고 해서 제가 연설비서관실에 남아있게 되었어요.”
-인수위때 썼던 글을 한 번도 읽지 않으셨지만, 인정은 받으신 셈이군요.(웃음)
“글이 마음에도 안 들고 ‘내 연설문도 아니다’고 생각하신 것이죠. 그런데 취임식 날 오찬과 만찬 때 혹시 준비된 원고가 있느냐고 찾으신 거예요. 취임식 연설에 집중하느라 오찬과 만찬 연설을 미처 못챙기셨던 것이죠. 마침 제가 마련해놓은 연설문이 있어서 드렸죠. 그런데 청와대 비서실 첫 순시 때 저를 찾으시더니 ‘자네 덕분에 낭패를 면했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는 제가 비서관도 아니고 행정관이었는데. 정말 솔직한 분이었습니다. 감사나 사과를 할 때는 격을 따지거나 말을 가려서 하지 않으셨어요.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셨죠. 미안하고 사과할일이 있으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대로를 전하셨습니다. 사실 그날도 대통령이 낭패를 볼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준비를 하는 것이 정상이죠. 그날 그 말씀 듣고 두 달 동안의 피로가 싹 가셨어요. 그때 이분을 모실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었죠.”
-두 대통령으로부터 말과 글을 배웠다고 하셨더군요.
“물론입니다. 사실 제가 그 두 분의 글을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8년 동안 두 대통령의 연설문 초안을 쓰고, 수정 첨삭까지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그 소중한 배움을 월급까지 받으면서 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운이에요.”
-그렇다고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죠.
“개인적인 삶이 거의 없었다고 봐야죠. 계속 사무실에서 글을 쓰는 일상이었으니까요. 제가 오랫동안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 하나뿐인데, 그런 일상을 성실함으로 버텼거든요. 사실 그런 일상을 알고 나면 연설비서관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다른 일들은 대통령께 보고하면 그것으로 업무가 끝납니다. 대통령이 판단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연설문은 대통령이 직접 말로 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시원찮게 끝나면 그 시원찮은 것을 갖고 연설을 해야 하는 결과가 되죠. 그러니 대충 오케이 할 수 없는 겁니다. 지적받고 혼나면서 결론을 뽑아야 하는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지요.”
-8년 동안 그러한 일상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았겠습니다.
“참여정부 5년 동안은 내내 혼나는 일이 일상이었어요. 사실 연설비서관은 특별한 실력이 필요 없습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대통령의 생각과 말에 글을 맞추어야 하지요. 대단한 식견과 글 솜씨 재주가 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두 가지 능력을 다 갖춘 연설비서관은 좋은 연설문을 쓰지 못합니다. 대통령의 글이 아니라 자기 글을 쓰게 되거든요.(웃음)”
-그것은 좋은 리더를 만났을 때 나 해당되는 것 아닐까요.
“그렀겠네요. 그렇지 않으면 리더의 생각과 글을 대신해주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저는 좋은 리더들을 만난 덕분에 두 대통령의 분명한 생각을 옮기기만 하면 되었어요. 문체까지도. 그러니 이런 경우는 글 솜씨조차 필요 없는 겁니다. 성실하고 몸 건강하고 말귀만 알아들으면 되었죠. 제가 오랫동안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합니다.(웃음)”
-두 분의 글쓰기가 많이 달랐었다면서요.
“두 분 모두 ‘대통령의 연설(말)’을 위해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스타일은 물론 달랐어요. 김대중 대통령은 연설문 원고를 일일이 수정하고 다듬고, 고쳐서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녹음을 해서 돌려주셨죠. 노무현대통령은 글을 쓴 사람을 불러 직접 지적하는 방식이었어요. 그분의 원칙은 내 글을 쓸 사람과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었어요. 그야말로 실무자와 격의 없이 만나셨죠. 제가 처음에는 연설비서관도 아니고 행정관이었는데, ‘직접 내 글을 쓰는 사람과 이야기하겠다’며 저를 부르셨어요. 행정관들이 초안을 작성하거든요.”
-연설문에 대한 주문 같은 것이었습니까.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였는데, ‘자네가 내 연설문을 써야하니 어떻게 써야하는지 알려주겠다’고 하셨어요. 두 시간 정도로 기억하는데 ‘글은 모름지기 이렇게 써야 한다’며 이야기를 하셨어요. 책에 소개된 서른 두 가지 내용입니다. 일종의 지침이었는데, 글쓰기의 기본이자 주옥같은 비법이었죠. 제 경우는 그 내용을 5년 동안 계속 학습해 온 셈입니다. 제가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참여정부에서는 연설비서관으로 연설문을 책임 짓는 역할이었으니 부담이 더 컸겠습니다.
“두 분 모두 정말 좋은 글을 쓰는 분들이시잖아요. 그러니 연설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부담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특히 노 대통령께서는 직접 글을 쓴 사람을 만나 대화하면서 지적하고 수정하고, 또 좋은 생각이 나면 다시 더하고, 이런 과정을 연설 직전까지 하셨거든요.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모두 배움의 과정이었죠.”
-기억나는 일화도 적지 않겠는데요.
“노대통령은 글쓰기를 즐기고 조금이라도 더 수준 높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다음날 연설 하는데 그 전날 밤에 다시 구술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한번은 국회 연설이었는데, 전날 밤에 1시간 30분 정도를 구술하셨어요. 이것을 연설문으로 정리하려면 5시간은 족히 걸리죠. 마음 졸이며 작업하고 있는데, 새벽 3시쯤 어디까지 썼냐고 전화를 하셨어요. 3분의 2정도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이제 그만 자고 나머지는 나한테 보내라’고 하시더군요. 고생했다면서. 대통령도 못 주무시고 기다린 거죠. 두 시간 후에 다시 전화를 하셔서 메일로 보냈다고 하시더군요. 그 짧은 시간에 마무리 인사까지 다 쓰셨더라고요. 글의 수준도 정말 놀라웠죠.”
-두 분에 대한 그리움이 크실 것 같습니다. 책을 쓰면서는 어땠습니까.
“사실 책을 써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미리 써놓은 메모나 자료가 없었습니다. 작년 11월에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12월까지 두 달 동안 8년 동안의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는 거예요. 모두 담아내기 버거울 정도였어요. 두 대통령 모시던 시절로 돌아간 듯 한 느낌이었죠. 정말 행복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쓰기 비법’이란 부제를 달았더군요. 어떤 글이 사람을 움직이게 할까요.
“좋은 글쓰기는 철저하게 말하듯이 쓰는 것입니다. 글쓰기를 어렵다고들 하는데 잘 쓰려고 하니까 그런 겁니다. ‘잘 쓰려고 한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말을 어떻게 하면 잘 꾸밀까하는 고민이 전제되어 있어요. 그러나 자기 생각을 글로 옮기는 글쓰기는 어떻게 쓰느냐보다는 무엇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글짓기와는 다르죠. 문학은 창작을 하고, 글짓기를 합니다. 그러나 생활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말하듯이 쓰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글쓰기도 쉽고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좋은 글쓰기의 비법은 상대방과 교감할 수 있는 글쓰기에 있다. 그는 두 대통령의 연설문을 쓰면서 그 비법을 전수받았다.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쉬운 말로, 가장 많은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비법의 중심에는 배려와 공감이 있다. 말과 글이 넘쳐나는 시대, 그의 글이 주목받는 이유도 거기 있다.
● 전주출신 강원국씨는 '책 내는 일' 인생 목표…편집인으로 '제 2의 삶'
강원국씨는 전주가 고향이다. 교육공무원이었던 부모님 덕분에 유복하게 자란 그는 특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교육청 장학사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외할머니와 지내야했던 그는 전주교대부속과 중앙초등학교를 거쳐 풍남초등학교를 졸업했다. 6년 동안 세군데 학교를 전전하면서 그는 일종의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다고 기억한다. 동중학교 다닐 때는 제법 공부를 잘했지만,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화나게 하는 일을 만들어 개인적으로는 생애에 가장 많이 맞는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다. 그래서였는지 별일 없이 합격하리라고 생각했던 전주고 입시에 실패하고, 신흥고도 턱걸이로 합격했다. 아버지는 ‘처칠도 육사를 세 번이나 떨어졌다’는 말로 위로해주었다. 그래도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경험했던 시절은 전주고 앞을 지나 신흥고에 다녔던 3년 동안이다.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던 1980년 5월, 그는 3학년 반장이었다. 전주에서는 신흥고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선두에 그가 있었다. ‘정치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몸이 앞서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유인물과 피켓을 준비하고 행동을 선도하는 그는 주동인물이었다. 학생들을 독려해 거리 진출을 시도했던 그는 결국 실행에는 이르지 못한 채 정학처분을 받았다. 학교에 복귀했지만 그 해 입시정책이 바뀌어 3학년을 한해 다시 다녔다. 1년을 재수하고 할머니의 뜻대로 서울대 외교학과에 들어갔지만 군대 먼저 다녀온 후, 학과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대학 4학년 때 결혼하면서 취업이 급했던 그는 애초 기자가 되려고 했던 계획 대신 대우그룹의 홍보실에 취직했다. 1년쯤 다니다 언론사 시험을 보려고 했지만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인생은 결코 생각대로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글쓰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그는 사사 제작을 하면서 사내에서 글 쓰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해 전경련 회장의 연설문을 쓰는 스피치라이터가 됐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 연설비서실 행정관으로 들어가 참여정부 연설비서관까지 8년 동안 일했다. 청와대를 나와서는 효성 상무와 벤처기업, KG그룹 상무를 거쳐 출판사 메디치미디어의 주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생 후반은 편집인으로 살고 싶었던 그는 꿈을 이루었으나 다른 책을 기획하면서 ‘내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첫 결실이 ‘대통령의 글쓰기’다. 책은 기대 이상으로 화제를 모았다. ‘책을 내고 난 뒤 인생이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그의 일상은 변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목표의식이 더 뚜렷해졌다는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많은 사람들에게 ‘책 내는 일’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보길 권하고 있다.
책을 내고 그는 얻은 것이 많다. 지금까지의 삶속에서 남을 위해 뭔가를 했던 기억이 없다는 것도 큰 깨우침이다. 20년 가깝게 기업에서 일해 온 경험을 살린 두 번째 책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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