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선생의 선비정신 전통 사회의 지도자로 많은 후세인에 감동을
450년 전 퇴계 선생께서 서원으로 출퇴근하던 고갯길을 걸어 서원에 당도하니 입구에 학문과 교육이 융성한 지역이라는 의미의 추로지향(鄒魯之鄕) 기념비가 세워졌고, 처음으로 지방에서 과거시험을 치렀다는 유적 시사단(試士壇)이 보였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이 계상서당에서 서거한 4년 뒤 1574년에 세웠다. 선조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석봉(石棒) 한호(韓濩)가 쓴 ‘도산서원’의 편액이 걸려있다. 영남유림의 중추적 역할을 한 곳이다.
도산서당(陶山書堂) 가운데 방 완락재(玩樂齋)와 마루인 암서헌(巖栖軒)이 있고 서당 앞 네모난 연못 정우당(淨友塘)과 퇴계 선생이 직접 파서 제자들과 함께 마셨다는 몽천(蒙泉)이 있다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서의 알묘례(謁廟禮)집전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
선비의 삶 그 현장 16대 종손과 대화를 나눴다. 그는 방문객에게 ‘의재정아(義在正我)라는 4자 성어 한 점씩을 들려 보내며 선생의 가르침을 전해주려는 팔순이 넘은 퇴계 가(家) 종손의 삶이야말로 자신보다는 타인을 우선하는 경(敬)에 입각하여 사셨던 퇴계의 모습 그대로였다.
선비라 하면 자신에 엄격하고(薄己)/ 남에게 인자하며(厚人)/ 부모에게 효도하며(孝)/ 나라와 사회에 공헌하고(忠)/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好學), 다시 말해 우리 전통사회의 진정한 지도자를 말한다.
‘퇴계 선생의 선비정신과 행복한 삶’을 이어가는 김병일 이사장은 “당신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리고자 이곳에 왔다며 낮은 자세로 본인소개를 한다.
퇴계 이황(李滉)선생의 묘소 옆에 새워진 나지막한 비석에는 관직이 없고,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간결하게 적혀있다. 이는 선생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선생께서 손수 지은 자명과 제자인 고봉 기대승이 지은 묘갈명이 뒷면에 새겨 있다.
하계마을은 진성 이 씨 퇴계 선생 후손들의 집성촌이다. 도산서원을 비롯하여 퇴계 종택, 묘소, 이육사 생가 터 등 마을을 중심으로 각종 문화재와 함께 전통 고가옥이 어우러져 있는 마을이며 3대에 걸쳐 25명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시킨 독립운동의 성지이자 15명의 조선조 문과 급제자를 배출시킨 가문을 비롯하여 선비정신의산실로 평가되는 한국 유일의 집성촌이다.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는 퇴계 선생의 14대 후손으로 아호인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264에서 취음한 것이다. 1944년 1월 16일 북경감옥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이론 중심의 당위론적 가르침보다 일상의 실천적 삶에 대한 존경심이 일상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주향백리(酒香白里) 화향천리(花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라는 말이 있듯이 퇴계 선생의 아름다운 삶 역시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50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많은 후세인에게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30년 넘도록 공직에 머물면서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내신 김병일 이사장도 도산선생의 소원 선인다(善人多)를 이어내기 위해 이곳에 정착한 것인가. 현대사회에서 보기 드문 선비인 성싶었다.
그의 집필인 ‘퇴계처럼’이란 〈글 항아리〉 속에는 그가 현대판 선비인 면면이 더욱 부각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참 좋은, 최고의 수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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