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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말

두루뭉술한 정치인 언어 진정성 찾아보기 힘들어 / 말 잘한다고 어진 것 아냐

▲ 권혁남 전북대 신방과 교수
이완구 총리 내정자가 기자들과의 식사 중에 뱉은 거침없는 상식 이하의 말 때문에 큰 곤욕을 치렀다. 그렇지 않아도 비리 백화점으로 지탄받던 터에 식사 중 발언내용이 알려지면서 총리 부적격 판단을 받고 말았다.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서는 거친 말을 쏟아내도 공적 발언에서는 매우 신중한 것이 정치인들이다. 어떨 때는 신중하다 못해 너무 에두르고 두루뭉술하게 말하기 때문에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사후에 책임질 말을 아끼다 보니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치인의 말이 과연 그 일을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무슨 숨은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게 바로 정치 언어이고, 정치인 화술의 문법이다. 정치인 화술 문법의 제1조는 “말은 화려하게 하되 나중에 책임질 말을 삼가라”이다. 대표적인 게 정치인들의 사과발언이다. 우리같은 일반인들은 ‘잘못했다’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을 쉽게 한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잘못했다, 죄송하다는 말은 안하고 ‘유감이다’는 지극히 정치적인 말로 끝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유감이라는 말도 부담스러워 일왕 아키히토는 1990년 5월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한일 과거사에 대해 사과의 뜻으로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고 하였다. ‘통석의 염’이란 ‘애석하고 안타깝다’는 뜻인데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아니어서 사과의 진정성을 놓고서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옛말에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그 따뜻함이 솜과 같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말은 그 날카로움이 가시와 같으므로 한마디 말은 천금과도 같다”(利人之言 煖如綿絮, 傷人之語 利如荊棘, 一言半句 重値千金)고 하였다. 또한 정치학자인 최상룡 명예교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의 자원은 돈, 칼 그리고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돈과 칼은 시스템으로 해결되지만 말은 그렇지 않다. 정치가 바로 언어다”고 하였다.

 

그렇다. 정치에서 언어와 수사학은 매우 중요하다.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표현하고 수식하느냐에 따라 대중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진다. 미국 공화당의 ‘언어세공사’ ‘언어의 흑마술사’로 불렸던 프랭크 룬츠가 만든 정치 언어들인 “온정적 보수주의”, “삶의 문화”, “기회 장학금” 등의 정치적 반향은 매우 컸다. 특히 “지구 온난화” 대신에 “기후 변화”란 용어를 사용토록 함으로써 지구온난화의 책임이 공화당에 있는 것처럼 인식되었던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성공하였다. 우리나라 역시 보수정권이나 대기업들은 “지구 온난화”란 말보다는 “기후변화”란 말을 더 선호하고 있다.

 

미국정부는 이라크 전쟁에서도 정치적 언어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는데, 미군은 “적의 위치가 ‘스마트 폭탄’에 의해 ‘외과적 정확성’(surgical precision)으로 제거되었다”는 식으로 발표하였다. 미군의 오폭에 의해 사망한 무고한 이라크 시민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부수적 손실’(collateral damage), ‘우호적 발포’(friendly fire)란 언어를 사용하여 미군의 실수에 대한 공중의 분노를 축소시키려 하였다.

 

공자는 논어에서 “말 잘하고 얼굴을 잘 꾸미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이 드물다”고 하였다. 말 잘하고 잘 생긴 정치인이 판을 치는 오늘날 영상정치시대에 대한 경종처럼 들린다. 결국 공자 말씀은 말과 진리는 같지 않으며, 말 잘 하는 것이 결코 정치인의 덕목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 같은 범인들에게 던져주는 가르침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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