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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 '을'의 동행

권력과 돈의 힘으로 을을 눌러서는 안돼 갑과 을은 동행자다

▲ 이기선 전북도 자원봉사센터장

‘땅콩회항’이라는 민망한 말로 국제적인 망신을 산 국내의 한 재벌기업의 일가가 또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번에는 ‘물벼락 갑질’이란다. 한 곳에서 터지니 그동안 쌓여있던 온갖 행태들에 대한 증언이 봇물을 이룬다. 외국인 가정부와 자가용 운전기사를 상대로도 온갖 막말과 폭언도 있었다니 말문이 막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망가의 집안에서는 특별하게 자녀 교육에 공을 들였다. 자신들이 이룬 부와 명예가 쉽게 허물어지지 않도록 절제와 겸양, 존중과 배려, 나눔과 실천의 덕목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른바 명예에 따른 만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얼마 전 우리 지역에서 40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한 집안의 독특한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관심을 끌었다. 전북 부안군 줄포면 후촌마을 뒷산에서는 매년 음력 3 월 5 일 특별한 제사가 400년 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서 봉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연인 즉, 당시 부안현 건선방 (지금의 줄포면 )에 살고 있던 진사 김응별(1538~1631)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행랑아범으로부터 ‘곧 나라에 큰 난리가 닥칠 것이니 가족들과 함께 멀리 피난을 가는 것이 좋겠다 ’는 말을 듣게 된다. 이 난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었다.

김응별은 행랑아범의 말을 듣고 자신의 가솔들과 함께 줄포 포구에서 배를 타고 서해의 먼 섬인 왕등도로 들어가 난리 속에서 살아 날 수 있었다. 난리가 끝난 후 고향에 돌아온 그는 폐허가 된 논밭을 경작하고 줄포만의 갯벌을 메워 농토를 넓혀갔다.

이 과정에서 행랑아범은 김응별의 수족노릇을 하며 집안을 일으켜 세웠으며, 김응별은 행랑아범의 조언을 받아 이웃주민들에게 식량을 풀어주는 등 선행을 베풀었다. 세월이 흘러 행랑아범은 불귀의 객이 되었고 김응별은 행랑아범 덕분에 주변의 칭송을 들으며 94세까지 살았는데 세상을 떠날 즈음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제삿날이 되거든 행랑아범도 함께 제사상을 마련하고 자신과 똑같이 예우하도록 이른 것이다 . 이후 김응별의 자손들은 1632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행랑아범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400여 년을 사이에 둔 두 부자(富者 )의 상반된 이야기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와 명예를 일구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근본적인 차이다 .

김응별 집안의 제사이야기가 울림이 있는 것은 선조가 입은 은혜를 후손들이 잊지 않고 그 뜻을 받아 이를 시행하고 있다는 것이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 한쪽은 지금의 위치에 오르도록 도움을 준 ‘을’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고 ‘을’에게 하는 ‘갑질’은 당연한 자신의 권리인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

과거에는 ‘을’이 ‘갑’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었다. 지금은 ‘을’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할 말은 하는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갑’들은 ‘을’에게는 여전히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권력이나 돈의 힘으로 ‘을’을 누르는 ‘갑’이 되어서는 안 된다 . ‘갑’과 ‘을’은 함께하는 동행자여야 한다. 진정한 부와 명예는 그것이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나누며 살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위의 두 사례가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나누며 사는 것이 마지막 승자였음을 강조하고 싶은 이유다.

정치, 경제, 연예계 등 여러 분야에서 끊이지 않고 터져 나오는 ‘갑’들의 횡포소식은 ‘을’들을 슬프게 하고 우리 모두를 분노케 하고 있다. 그래서 400여 년 전 이야기를 꺼내어 이를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들의 노력을 더 하여 ‘갑’은 자신을 만들어 낸 사람이 ‘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갑’과 ‘을’이 동행자로서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가는 날이 가까워지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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