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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만들어 낸 그녀들

이윤애 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장
이윤애 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장

추석 며칠 전부터 명절증후군 운운하며 각종 매체들에서 평등하고 행복한 명절나기를 위한 대안들을 부지런히 제시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큰 기대 없이 적정한 선에서 타협한다. 나의 명절도 아내이고 엄마이고 며느리이고 딸로서 역할수행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이번 추석연휴는 길어서 영화보기로 시간을 꽤 투자할 수 있었다. 자투리 시간을 즐겁고 보람차게 소비하려 할 때 영화보기만한 꺼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추석을 맞아 개봉한 영화들이 풍년을 이루었고 재미까지 갖추었다. 흥미로운 풍경도 있었다. 연휴기간 영화 다섯 편을 유료로 관람하면 다섯 편을 공짜로 볼 수 있는 ‘5+5’행사를 내건 영화관도 있었다. 다섯 편이나 볼 여유까지는 갖지 못해 ‘안시성’, ‘명당’, ‘협상’ 세 작품만 관람했다.

‘안시성’은 천하를 지배하려는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수십만 군대와 고구려 변방의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5천명 군사들이 대결한 안시성전투를 다룬 영화다. 물론 양만춘이 승리한다. 성주의 따뜻한 리더십과 뛰어난 전략전술, 군사들의 용맹함이 승리의 비결이었다. ‘명당’은 땅의 기운을 점쳐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천재 지관 박재상과 왕이 될 수 있다는 천하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장동김씨 가문과 흥선군 사이의 대립과 욕망을 드러낸 긴장감 넘치고 반전이 있는 영화이다. ‘협상’은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고 상대의 눈동자의 흔들림과 숨소리마저도 읽어내는 최고의 협상가 한채윤과 국제범죄조직의 무기밀매업자 민태구가 태국에서 한국 경찰과 기자를 납치해 인질극을 벌이며 협상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그려냈다. 모니터를 통해 전개되는 협상과정은 관객들의 긴장감과 몰입도를 최고조로 올려준다.

영화를 선택할 때 재미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지만 영화가 여성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분석해 좋은 영화인지 나쁜 영화인지 구분하는 버릇이 있다. 주인공이든 조연이든 단역이든 여성을 폭력의 대상으로 보는지 성역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차별적으로 묘사하는지 주체적 여성으로 그려내는지를 따지며 본다. 그래서 한국영화는 항상 나의 기준으로 나쁜 영화이거나 아쉬운 영화로 분류되곤 했다. 이번 세 편의 영화도 모두 나쁜 영화이기보다는 아쉬운 영화였다.

영화속에서 그려진 그녀들. ‘안시성’의 백하, ‘명당’의 초선, ‘협상’의 한채윤은 나의 관점에서 꽤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백하는 안시성의 여성전사들로 구성된 백하부대의 용맹한 부대장이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을 보자 전략전술도 무시한 채 적진으로 달려들어 결과적으로 아군에게 위기를 초래한 무모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초선은 월령각의 대방으로 박재상과 흥선군, 장동김씨 사이에서 관계를 조율하고 정보를 매개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하지만 치밀하지 못한 지략이 들어나 죽임을 당한다. 내가 작가라면 백하 혹은 초선을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그려내는 시나리오 한 편 쯤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더욱 더 아쉬웠던 인물은 한채윤이다. 그녀는 냉철함과 기민함, 전문성을 겸비한 최고의 협상가였으나 종종 협상가의 자질을 의심해야 할 만큼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는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카리스마 넘치는 전문협상가였다면 나는 한채윤의 매력에 흠뻑 빠졌을 텐데 어째 악당이 더 멋져보였다.

감정적이거나 엉성하거나 전문성이 조금 아쉬운 그녀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간직해 온 성역할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아쉬운 모습으로 올 가을 극장가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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