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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풀리지 않는 항일지사들의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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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근 소설가 

2022년 올해는 기미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지 103주년이 되는 해이다. 50여 년을 ‘남원항일운동사’를 집필하기 위하여 전국을 누비며 항일운동의 유족들을 찾아다녔던 필자로서는 해마다 3. 1절이 다가오면 풀지 못한 숙제 때문에 씁쓸한 감회에 젖는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을 했던 집안의 자손들은 한결같이 생활고에 시달리는 고난의 삶을 살고 있고, 친일지주랄지 일제에 부역하며 동족을 핍박했던 친일관료출신의 후손들은 여전히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행이 국가보훈처에서 항일독립운동가에게는 서훈을 하고 그 후손들에게도 경제적인 보상을 하고 있어 위안을 삼으면서도 풀리지 않는 숙제 때문에 마음앓이를 할 수 밖에 없다.

남원항일운동사를 집필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의 유족을 많이 만났다. 그 과정에서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는 방법을 물어오는 유족에게는 그 길을 알려주었고, 조상이 항일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후손들에게는 그 사실을 알려주어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5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남원출신으로 항일운동을 하신 분들 가운데 서훈을 받아야 할 분들은 거즌 받은 셈인데, 그렇지 못한 몇 분 때문에 오래 묵힌 빚이 되어 필자의 마음이 무거운 것이다.

그 분들은 1930년 대에 ‘부자가 소작인을 억압하고 그 노동력까지 착취하는 불공정한 사회와 싸우자’고 평등사회를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일본인 재판장으로부터 1년을 선고받은 양홍주와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말까지 청년동맹과 신간회 그리고 형평사를 통하여 항일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3년 4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한 이두용과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이대수·이태수 등과 함께 청년회와 야학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운동과 신사회건설을 주창하며 항일운동을 했던 이백수와 1919년 4월 4일 남원북시장 만세운동 당시 일경이 쏜 총탄에 맞아 부상을 당한 이일남이 있다.

위의 네 분들이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한 이유를 보면 양홍주는 항일운동이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는 점과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이었고, 이두용은 사회주의 운동가로 전향한 사실이 없으며 2차대전 말기 ‘임전보국단’에 가입했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1944년 12월 30일에 사망하여 전향을 할 수 없었으며 임전보국단에 가입했다는 것 역시 출옥후 계속 일경의 감시 속에서 살았던 이두용이 자의로 가입했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이백수의 경우는 함께 활동했던 이대수와 이태수가 보훈처로부터 서훈을 받아 그 공적이 충분히 인정되는 데도 일제에 체포 구금된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공적조서가 반려되었으며 이일남은 일경의 총탄에 맞아 얼굴 한 쪽이 함몰된 상태로 평생을 어렵게 살았는데도 집에서 부르는 이름과 호적 이름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이제 당시 이일남의 행적을 증언해 주었던 증인들도 남아있지 않아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조상들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렵게 살아 온 후손들에게 국가가 할 일은 오직 하나 조상의 명예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되찾아주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필자의 오래 묵힌 숙제를 해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윤영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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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지사 #양홍주 #이두용 #이백수 #이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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