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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건축기행] ‘남원 예촌’ 삼국부터 조선까지…각 시대의 건축 언어 집합체

길을 지우고 담을 들이다
광한루 곁, 머물기 위해 지은 한옥

남원 예촌 야간 전경모습/전주시 건축사회 제공

남원에 가면 대개 광한루원부터 간다. 오작교 앞에서 사진을 찍고, 춘향과 몽룡 이야기를 한 번쯤 떠올린다. 그러고는 어쩐지 할 일을 다 했다는 얼굴로 다시 차에 오른다. 남원은 오래도록 그런 도시였다. 들르기는 하지만 오래 앉지는 않는 곳. 해마다 백만 명 가까운 발길이 광한루원 담장 앞에서 잠시 멈췄다가, 다시 큰길로 빠져나갔다.

그 담장 북쪽, 구도심 쪽으로 한옥 한 마을이 들어섰다. 남원 예촌이다. 2016년에 문을 열었다. 전라북도와 남원시가 낙후한 구도심을 살리기 위해 추진한 사업이다. 말하자면 의도가 분명한 마을이다. 스쳐 가는 남원을, 하룻밤쯤 머무는 남원으로 바꾸는 일. 예촌은 그 목표를 품고 광한루원 곁에 앉았다.

남원 예촌 건축물 실내 모습/전주시 건축사회 제공

△길을 지운 자리=예촌에서 먼저 볼 것은 집이 아니라 길이다. 광한루원과 마주 보던 남쪽 2차선 찻길을 없애고, 그 자리에 사람만 걷는 길을 냈다. 광한루원 담장과 나란히 새 담도 둘렀다. 차가 사라진 길은 금방 티가 난다. 발걸음이 느려지고, 목소리도 조금 낮아진다. 괜히 담장 옆을 따라 걷게 되고, 넝쿨이 어디까지 올라갔나 눈이 간다. 예촌은 그렇게 사람을 먼저 걷게 만든다.

마주 본다는 것은 결국 예의의 문제다. 광한루원의 담은 기와를 얹고 키 큰 대나무를 세워 단정하다. 예촌은 그 격식을 그대로 따라 하지 않았다. 낮은 돌담을 쌓고, 담을 타고 넘는 넝쿨을 심었다. 한쪽이 반듯하면 한쪽은 조금 풀어지고, 한쪽이 점잖으면 한쪽은 살짝 수더분하다. 그래서 두 담 사이의 길도 딱딱하지 않다. 차를 비우고 사람을 들인 이 한 수가 예촌이라는 단지의 성격을 먼저 말해 준다.

밖에서 바라본 예촌마을 내부 모습.//전주시 건축사회 제공

△예(禮)가 예술(藝)이 되는 마을= 이름부터 뜻이 깊다. 예촌은 예(禮)의 마을이자 예(藝)의 마을이다. 전통의 예가 예술로 피어나는 곳이라는 뜻을 담았다. 대지는 1만 1000여㎡에 이르지만, 건물이 그 땅을 꽉 채우지는 않는다. 지상 한 층짜리 한식 목구조 건물 열한 채와 부속 채들이 낮게 앉아 있고, 건폐율은 15.1%에 그친다. 요즘 같으면 “이 좋은 땅에 겨우 이만큼만?” 하고 계산기부터 두드릴 법한 숫자다. 그런데 한옥에서는 그 비움이 손해가 아니다. 마당이 있어야 바람이 들고, 사람이 앉고, 괜히 하늘도 한 번 올려다본다.

남원 예촌 전경./전주시 건축사회 제공

쓰임은 잠을 청하는 숙박 한옥, 연수와 세미나를 위한 다목적관, 관리동과 식당, 물 위에 띄운 정자로 나뉜다. 조용해야 할 숙박 한옥은 한편에 모으고, 사람이 오가는 공간은 다른 편에 두었다. 그 사이를 사주문과 낮은 내담이 가르지만, 담이 길을 막는 것은 아니다. 영역의 성격을 살짝 나누어 줄 뿐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모든 채가 제 마당을 갖는다는 점이다. 채를 튼 ㅁ자와 ㄷ자로 앉혀 안마당, 곧 중정을 품게 했다. 마당은 한옥에서 방보다 큰 방이다. 비어 있기에 햇빛도 담고, 바람도 담고, 밤이면 조용히 내려앉는 어둠까지 담는다.

남원 예촌  부용정 /전주시 건축사회 제공

△삼국에서 조선까지= 예촌의 한옥은 한 시대의 것만 따라가지 않는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시대의 건축 어법을 한 단지 안에 모았다. 자칫하면 전통 건축 종합선물세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예촌에서는 생각보다 억지스럽지 않다. 건물들이 낮게 앉아 있고, 마당과 담이 사이를 눌러 주기 때문이다.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연못 위의 부용정이다. 백제의 하앙식 구조로 지어, 처마가 멀리 뻗고 정자가 물 위에 가볍게 떠 보인다. 곡선으로 흘러내린 처마의 선이 물에 비치면, 집은 한 번 더 그려진다. 한옥의 깊이는 꼭 넓이에서만 오지 않는다. 기단에 오르고, 대청마루에 다시 오르고, 누마루에서 한 번 더 오르는 작은 단차들이 걸음의 속도를 늦추고 시선의 높이를 바꾼다. 넓게 잡은 대청은 때로 무대가 되고, 마당과 이어지면 그대로 객석이 된다. 무엇으로 쓰겠다고 딱 못 박지 않아도, 사람이 모이면 저절로 쓰임이 생기는 것. 한옥의 좋은 점은 이런 데 있다.

△명장의 손=예촌이 특별한 가장 큰 이유는 짓는 방식에 있다. 시멘트와 스티로폼 대신 소나무와 황토, 대나무와 해초, 짚으로 옛 방식을 되살렸다. 요즘 건물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낯선 재료들이지만, 한옥에게는 오래된 친구들이다.

서까래와 들보에 옻칠을 입힌 한목 건축물./전주시 거축사회 제공

그 일에는 분야별 명장들이 손을 보탰다. 대목과 건축 총괄은 최기영 대목장이, 기와는 이근복 번와장이 맡았다. 옻칠은 박만수·박강용 옻칠장이, 구들과 흙벽은 유종 토수가 맡았다. 이름만 적어도 괜히 목소리가 낮아지는 직업들이다. 예촌의 재미는 옛 기술을 박물관 유리장 안에 넣어 둔 것이 아니라, 오늘 밤 누군가의 잠자리 밑에 깔아 두었다는 데 있다.

우뭇가사리 물을 바른 황토벽은 습도를 고르고, 서까래와 들보에 입힌 옻칠은 벌레와 곰팡이를 막아 목조가 지닌 약점을 덜어 준다. 아궁이에 참나무 장작을 지펴 구들을 덥히면, 저녁 내내 은은한 나무 냄새가 마당에 깔린다. 보여 주기 위한 전통이 아니라, 살기 위한 전통이다.

△머물기 위한 한옥= 예촌은 옛것을 살리되 불편까지 그대로 가져오지는 않았다. 창호지의 약한 단열은 이중창과 전통 창호를 겹쳐 보완했고, 방에는 비단 침구와 민화, 다락의 이불을 들였다. 투숙객에게는 마패를 본뜬 열쇠를 쥐여 주고, 도착 시간에 맞춰 초롱불로 맞는다. 조금 쑥스럽지만, 여행지에서는 그런 연출도 나쁘지 않다.

남원 예촌 건축물 실내 모습/전주시 건축사회 제공

이곳에는 건축사의 도면과 대목장의 손이 함께 있다. 한옥은 도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나무의 결을 보고, 흙을 바르고, 칠을 올리는 순간마다 장인의 판단과 시간이 스민다. 그래서 예촌에서는 누가 설계했는지만큼이나, 이 선을 누가 손으로 맞췄을까가 궁금해진다.

한옥은 박제가 아니다. 사람이 들어 자고, 불을 때고, 마루에 앉아 바람 소리를 듣는 동안에만 살아 있다. 물론 하룻밤 잔다고 조선 시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아침이면 휴대폰 알람이 울리고, 커피 생각도 난다. 그래도 몸은 조금 느려져 있다. 남원이 스쳐 가는 도시였다면, 예촌은 그 스침을 한 번 붙잡아 앉히는 집이다. 길을 지우고 담을 들인 자리에서, 오늘은 조금 머물다 가도 좋다고 말하는 집이다.

 

설계 맡은 이길환 건축사 “도면 앞세우지 않고 장인들에 자리 내줘”

남원 예촌에서 설계자는 조금 뒤에 서 있다. 이 집들은 누가 그렸는지보다, 누가 나무를 만지고 흙을 바르고 기와를 얹었는지가 먼저 보이는 곳이다. 그렇다고 설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옥에서는 무엇을 드러낼지보다, 무엇을 물러서게 할지가 더 어려운 설계일 수 있다.

이길환 건축사는 전북에서 오래 작업해 온 건축가다. 군산 옥구에서 자랐고, 원광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뒤 1996년 익산에 사무소를 열었다. 그의 건축은 지역의 기억과 사람의 동선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건물을 혼자 빛나는 물건으로 세우기보다, 그 땅의 역사와 생활 속에 앉히려 한다. 그렇게 쌓아 온 작업은 오늘날 공공건축 설계공모에서 길종합건축사사무소이엔지를 눈에 띄는 이름으로 만들었다.

남원 예촌에서도 그는 자기 도면을 앞세우지 않았다. 대목장의 자귀질, 번와장의 기와, 옻칠장의 손끝, 토수의 흙손이 제 몫을 하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한옥은 혼자 짓는 집이 아니다. 예촌에서 이길환의 설계는 크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장인들의 손이 지나갈 자리를 조용히 마련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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