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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 옹주

‘옹주’라는 명칭은 고려 충선왕 때부터 사용됐다. 당시에는 왕자의 정실부인, 왕의 동성자매, 종친들의 정실부인, 왕녀까지도 포함시켜 옹주로 칭했다. 조선 초기까지 고려의 제도를 계승해 대군의 부인, 왕의 후궁, 왕의 서녀, 개국공신의 어머니와 처, 왕세자빈의 어머니, 종친의 딸까지 두루 옹주로 불렀다. 옹주가 왕의 서녀를 일컫는 호칭으로만 사용된 것은 조선 세종 이후다. 옹주에 대한 대우는 공주보다는 낮지만 왕의 딸로서 존귀한 지위에 있어 국가로부터 많은 은전을 받았다.

 

500만 관객들 부른 영화 ‘덕혜옹주’가 조선왕실의 가계도에 관심을 갖게 한다. 고종은 1황후와 1황귀비·5후궁에게서 모두 9남7녀를 낳았으나 대부분 어려서 사망하고 3남(순종·영친왕·의친왕) 1녀(덕혜옹주)만이 장성했다. 명성황후는 4남 1녀를 낳았으나 차남 순종만이 성장해 보위를 이었다. 영화로 다시 한 번 관심을 불러일으킨 덕혜옹주(1912~1989)는 귀인 양씨의 소생으로, 고종이 극진히 아낀 것으로 전해진다.

 

덕혜옹주는 황녀인지 아닌지 끝내 진실을 가리지 못한 채 30년 전 별세한 이문용 여사(1900∼1987)를 연상시킨다. 이 여사는 최소한 전북에서는 옹주로 인정받았다. 그는 생애 마지막 15년을 전주 경기전에서 ‘문용옹주’로 살았다. 문용옹주가 자신이 고종황제의 친딸이라고 밝힌 것은 1960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0년간 전주교도에 수감된 때다. 어머니 염 상궁이 옹주를 뱄을 때 궁중에서 쫓겨나 독살됐으며, 경상도 김천에서 평민의 신분으로 어린시절을 보내다 어머니와 가까이 지내던 임 상궁의 주선으로 서울로 올라와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됐다고 한다. 중국과 만주를 전전하다가 광복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후 좌익운동을 하던 시동생의 도움을 받은 것이 문제가 돼 영어의 몸이 된 비운의 황녀였다.

 

문용옹주의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본인의 말과 일부 증언, 고종과 많이 닮은 점 외에 옹주라는 증거가 없으며, 왕의 친딸이라면 어떻게 왕실혈족 기록물에 전혀 언급되지 않을 수 있냐는 게 반박 논리다. 옹주는 진위 논란이 일었을 당시 ‘다섯척 내 이 작은 체구하나 눕힐 자리조차 없구나’고 탄식했다 한다. 나라의 멸망이 가져온 왕실의 수난사다. 황실문화재단과 전주이씨대동종악원 전북지원이 지난 6월 옹주의 제사를 치렀다. 옹주라면 덕혜옹주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이었을 고인에게 그나마 위로가 될 것 같다.

 

김원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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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kimwy@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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