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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풍경
'첼리스트로, 생물학 박사로' 두 길 가는 고봉인 씨 "과학자로서, 음악가로서 몸과 마음 치유하고파"음악은 마라톤·계속 성장하는 게 중요·한단계씩 오를 것 / 대학서 연구소 운영하며 좋은 연구자들과 실험·신약 개발하는 게 꿈
김은정 기자  |  kimej@jjan.kr / 등록일 : 2017.01.05  / 최종수정 : 2017.01.05  22:26:17
   
▲ 대전 카이스트에서 만난 고봉인씨가 첼로 연주 연습을 하기 위해 악기를 챙겨 연구실을 나서고 있다. 안봉주 기자
 

‘나의 음악은 악을 배척하고 삶의 승리를 구가하고 슬픈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인류사회에 희망을 주고자 하는 의욕이 담겨 있습니다. 나의 고국과 형제자매 여러분 부디 나의 음악을 통하여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고 내가 절실히 염원하는 민족의 평화적 사회와 민족끼리의 화해가 하루 빨리 실현되기를 바라고 또 다 같이 노력합시다.’

여러해 전 통영의 윤이상 기념관에서 만난 작곡가 윤이상의 글이다. 그 때 이 글을 보면서 전주 출신의 젊은 첼리스트 고봉인을 떠올렸다. 고봉인은 2008년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연주회에 초청돼 우리나라 연주자로는 처음으로 북한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해 화제를 모았던 첼리스트다.

그는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났지만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과학자가 되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바이오융합연구소 전문연구원으로 유방암 줄기세포를 연구하고 있는 젊은 과학자이자 첼리스트. 과학과 음악, 두개의 길을 동시에 걷고 있는 그의 삶은 아직 낯설다.

지난 해 말, 첼리스트이자 생물학 박사인 고봉인씨(32)를 그의 연구실이 있는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만났다. 연구에 전념해야 하는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연습을 하고 연주활동을 해나가는 그의 일상이 고단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지난해만도 협연과 두 차례의 독주무대까지 치러냈던 그는 머뭇거림 없이 답했다.

“쉽지는 않지만 두 길을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과학과 음악, 어느 한쪽도 포기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사실 저에게는 생물학 연구나 첼로 연주가 잘 맞는 일이에요. 이루고자 하는 바람도 같고요. 신약 개발로 질병을 치료하는데 기여하고 좋은 연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힘이 되는 것, 서로 맞닿아 있지요.”

과학자의 길에서 인류의 건강을, 음악가의 길에서 인류의 정신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선물인가. 겸손함과 따뜻함을 갖춘 올해 서른두 살의 청년 고봉인을 인터뷰하는 일은 그래서 더 즐거웠다.

-첼리스트 고봉인을 연습실이나 공연장이 아닌 연구실에서 만나는 일이 조금은 낯설군요. 지난 가을에 독주회를 가졌죠. 어땠습니까. 독주회로는 꽤 오랜만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많이 설레었어요. 협연은 더러 했었는데 독주는 꽤 오랜만이었거든요. 그래서 욕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대중들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친숙한 곡보다는 제가 연주하고 싶은 곡을 선곡했었거든요. 윤이상, 브리튼, 코다이 등의 곡들이었는데 아무래도 대중들에게는 좀 어려운 곡들이었던 것 같아요.”

-첼로 무반주곡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니 음악에 조예가 깊은 청중들이 아니고서는 ‘어렵다’고 느낄 법 했겠습니다.

“이번 무대는 금호의 독주회 시리즈였는데, 선곡하면서 많이 흔들렸던 것이 사실이에요. 한국에서는 프로그램을 대중적인 곡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고 주위에서 조언을 하셨거든요. 사실 선곡은 매우 중요하죠. 선곡에 따라 연주회의 성공이 가름되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연주회의 성공을 그런 기준으로만 얻고 싶지 않았어요. 제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짜고 싶었죠. 윤이상 선생님 곡을 두 차례 무대 모두 첫 곡으로 올린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윤이상 선생님 곡은 연주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쉽지 않지만 제 목소리를 가장 깊게 들려줄 수 있다고 여겨온 까닭에 청중들이 낯설어 해도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좀 어려워도 한번 들어보세요’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죠.”

-그런 마음이 청중들에게 가 닿았을까요.

“꼭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우선 객석이 많이 차지 않았거든요. 프로그램을 보고 미리 포기하는 청중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대중적인 곡들로 선곡했으면 객석을 꽉 채웠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겠군요.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선곡을 후회하진 않아요. 그런 방향은 제 목소리를 제대로 들려주는 무대가 아니니까요. 음악을 접하는 태도의 차이일 터인데 청중들의 태도에만 연주가 맞추어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윤이상 선생님에 대해 각별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윤 선생님은 독일에 가서 처음 알았어요. 연주회마다 프로그램에 어김없이 윤이상 곡이 있었어요. 이분이 누굴까 싶었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 시대의 아주 중요한 작곡가셨죠. 그 분의 존재가 자랑스러웠습니다.”

-윤이상 곡은 연주자들도 어려워하는 곡이라고 들었습니다.

“적잖은 연주자들이 피하는 곡들이 많죠. 그러나 한국인 연주자들은 많이 연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한국인 첼리스트로서 윤이상 선생님 곡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다른 천재 작곡가의 곡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니에요. 한국 사람이 연주하기에는 아주 좋은 곡이죠. 동질적인 감정이 있거든요. 제가 아무리 브람스나 베토벤을 잘 한다고 해도 유럽의 연주자들처럼 그들의 감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보다는 부족한 것이나 마찬가지죠.”

-화제를 돌려보죠. 과학과 음악 두개의 길을 동시에 간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더구나 한국에서는 낯선 문화이기도 하고요.

“저는 처음부터 병행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어요. 어려서부터 아버지처럼 과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음악 또한 마음을 접기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음악을 먼저 시작하게 되었는데 대학 다닐때까지만 해도 어머니께서는 반대하셨어요. 연주자의 생활이 워낙 외롭고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을 아시니까.”

-과학자는 아버지 영향이 컸겠군요.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는 참 행복하게 일을 하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자연스럽게 ‘나도 과학자가 되면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 싶었죠. 그래도 음악의 길을 먼저 갔는데 선배들이 ‘대학은 일반 대학을 가서 다른 것을 제대로 공부를 해보라’고 권했어요. 자신들은 그렇게 하지 못해 후회가 된다고 했어요. 저도 40-50대가 되어 후회하지 않으려면 마음에 품고 있는 과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정했죠.”

-두가지 다 해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나요.

“결국은 내 삶에서 밸런스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이 보기 나름인 것 같더군요. 저는 음악에서 배운 점을 과학에 유입할 수 있고 반대로 과학에서 배운 것이 음악에 적용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 보면 환경이 중요한 것 같아요. 부모님의 영향도 그렇고 외부적인 요인도 그렇고요.

“제 생각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패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저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엇인가 선택을 하면 인생을 걸고 하는 일이 다반사인 한국에서는 그 기준이 다르겠죠. 저는 다행스럽게 좋은 환경을 얻어 제 의지를 실현할 수 있었어요.”

-꽤 일찍 유학을 떠났었죠.

“중학교 3학년 때인데, 처음에는 게링가스 교수님이 계신 독일의 뤼벡으로 갔었어요. 1년 뒤에 교수님을 따라 베를린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미국계 공립고등학교에 들어가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죠.”

-우리시대의 현존하는 첼로 거장으로 불리는 게링가스 교수님은 어떤 인연으로 만났습니까.

“99년 오디션에서 뵈었어요. 운이 좋았죠.”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대학 진학을 위해서였습니까.

“그런 셈이죠. 하버드대에 들어가면서 옮겼으니까요.”

-학과 공부도 아주 잘했던 모양입니다. 음악과 병행하면서 원하는 대학을 들어갔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대학에서도 복수전공으로 음악 석사과정을 마쳤던데요.

“사실은 학부 때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제 주변에 전공이 아닌 다른 패션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위로를 많이 받았죠. 그럼에도 결국에는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가 싶기도 했는데 그 순간을 생각하면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었어요. 연구하는 것도 음악도 정말 재미있는 일이거든요.(웃음)”

-포기를 안하면 그만큼 고단하잖아요. 두 개를 거의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겠고요.

“부담보다는 탐이 날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 독일에서 공부했던 선배들 중에는 정말 훌륭한 연주활동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 선배들이 좋은 오케스트라나 훌륭한 음악가들과 협연하는 무대를 보면 ‘내가 음악가의 길로만 갔다면 나도 저들처럼 되지 않았을까’하는 그런 생각이 들죠.”

-그럴 때면 무엇으로 위안을 받나요.

“욕심을 버리는 일이죠. 늘 ‘리마인드’하는 것이 있는데, 정명화 선생님이 저게 주신 말씀이에요. ‘음악은 마라톤이다. 지금 아무리 잘해도 나중에 잘 못하면 쓸모없게 된다’고 하셨죠.

계속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 말씀을 생각하면서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 단계씩 올라가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다지게 됩니다.“

-연구 분야가 궁금합니다.

“혈관 쪽입니다. 지금까지는 유방 암 줄기세포 연구를 집중적으로 해왔는데, 최근에는 뇌졸중 연구로 넓혔습니다.”

-의사가 아닌 연구 분야를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버지의 영향이 컸어요. 새로운 약을 개발해 치료에 쓰이게 하는 것,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려면 연구 쪽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구와 첼로 연습, 연주활동까지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지 않게 일상을 꾸려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일상을 지켜가는 것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우선 시간이 부족할 텐데요.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고집이 있으면 시간은 찾아집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키고 있는 하루 두 시간의 연습시간은 사실 프로연주자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거든요. 그러나 연구에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는 저에게는 두 시간을 빼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보통 저녁 먹고 연습을 하는데, 상황이 그러하니 타이밍을 잘 해서 인큐베이션 등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활용합니다.”

-치열한 계산법이 동원되는군요.(웃음) 책은 많이 읽습니까.

“많이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어렸을 때는 공상과학소설 같은 류에 마음이 있었는데 대학교 때 교양과목을 들으면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음식에도 관심이 있어 관련된 책을 많이 읽는 편입니다. 요리도 즐겨해서 가끔 지인들을 초대해 콩나물국을 대접하기도 합니다.”

-이제 곧 전문연구원 과정이 끝나는데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가 연구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학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좋은 연구자들과 의미 있는 실험을 통해 인류의 건강에 기여하는 신약을 개발하는 것이 꿈이기도 합니다.”

-과학자인 아버지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특히 아버지가 쌓아 오신 인간관계는 놀랍습니다. 아버지는 연구 성과를 곧바로 열어놓습니다. 연구는 공유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계시는 것 같아요. 특히 생물학은 혼자서는 절대 멀리 갈 수 없는 영역인데, 저는 아버지의 그런 자세가 혈관 분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은 제가 가고 싶은 길이기도 합니다.”

두 시간 남짓한 인터뷰로 첼리스트 고봉인이 과학과 음악의 길을 동시에 걸어가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게 됐다.

아버지의 연구가 혈관연구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새롭게 개발된 약들이 인류를 어떻게 구해내는지를 과학의 길에서 알게 되었다는 그는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일 또한 수많은 청중들과 감정을 교류하면서 위안과 힘을 건네는 일이라는 것을 더 깊게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권력이나 파워가 아니어도 내가 가진 것을 공유하고 나누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힘들어도 이 길을 가야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그가 고단해도 이 길을 가고자하는 명쾌한 이유다.

   

● 고봉인씨는 2008년 평양 윤이상 연주회서 남한 연주자 최초 북한 오케스트라와 협연

첼리스트 고봉인은 1985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돋보였던 음악에 대한 재질과 과학에 관심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백승희)와 생물과학자인 아버지(카이스트 의과대학원 고규영 특훈교수) 자질을 그대로 이어받은 덕분이었다.

첼로를 시작한 것은 여덟살 때.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그대로 안은 채 음악가의 길을 먼저 걷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반겼으나 어머니는 과학자의 길을 권했다. 그의 재능을 주목한 사람은 첼리스트 정명화씨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연주자의 꿈을 키웠다. 1997년 차이코프스키 국제청소년 콩쿠르 첼로부문 1위를 수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전주 신흥중 3학년 때 독일로 유학을 가 첼로거장 다비드 게링가스의 제자가 되었다.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생이었던 그는 미국계 일반 고등학교인 존 F 케네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과학자의 길을 동시에 걸을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두가지 길을 다 갈 수 있다고 용기를 준 것은 유럽에서 만난 선배 연주자들이었다.

하버드대에 진학, 생물학을 전공하면서 뉴잉글랜드 음악원의 복수학위 과정을 동시에 거쳤다. 2005년에는 독일 첼로 마스터클라스 란드그라프 폰 헷센상을 수상하면서 유럽 음악계에 이름을 알렸다.

예술가와 과학자의 길을 함께 가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그 과정 자체가 그에게는 삶의 의미이자 행복이었다.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지 않는 열정으로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럽과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러시아 심포니오케스트라,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비롯, 국내외 오케스트라와의 협연과 유럽 미국 일본 중국 한국을 오가며 여러 차례 독주회와 협연을 가졌다. 2008년 10월에는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연주회에 초청돼 남한 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북한 오케스트라와 윤이상 첼로협주곡을 협연했는데 그 스스로 ‘내 인생의 가장 의미 있는 연주회가 아닐까 싶다’고 말할 정도로 큰 의미를 두고 있다.

3년 전부터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문연구원이 되어 유방암 줄기세포를 연구하고 있는 그는 연구에 집중하느라 다소 거리를 두었던 연주무대에 다시 서기 시작, 첼리스트 고봉인을 다시 주목하게 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이어진 협연과 7년 만에 가진 10월의 두차례 독주회로 진지하면서도 따뜻한 음악세계를 전해 호평을 받았다.

올 하반기 3년 동안의 연구 과정이 끝나면 미국으로 돌아가 과학자로서의 길을 더 단단히 다질 계획. 물론 첼리스트로서의 길도 더 넓게 이어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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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ㅁㅁ
사람 마음가지고 장난치면 벌받아요.
(2017-03-07 10:5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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