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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더위야 고맙다 - 은종삼
[금요수필] 더위야 고맙다 - 은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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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8.09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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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종삼

“아내가 냉동고에서 꺼내 준 얼음수박인데요. 36도 더위가 맛을 더해주네요. 카페의 몇천 원짜리 아이스크림 저리 가라네요. 창밖의 땡볕에 뭉게구름, 생명력 넘치는 진녹색 기린봉 바라보며 얼음수박 입안 가득 더위를 즐기고 있습니다. 같은 수박도 어느 때 먹느냐에 따라서 맛이 다르죠. ‘더위야 고맙다.’ 페친님들 미안합니다.”

이상은 최근 먹음직스러운 얼음수박 사진과 함께 나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넘 좋습니다. 부럽네요.” “무더위를 슬기롭게 건너가고 있으시군요.” 등 페친들의 댓글이 달렸다. 한여름의 더위가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재난급 ‘폭염’이라고 한다. 8월 들어 40도를 오르내리자 기상관측 이래 111년 만의 최고치 기록을 세웠다고 대서특필이다. 초열대야에 에어컨 찾아 떠도는 ‘폭염 난민’ ‘불지옥’이라는 표제어도 나와 있다. 온열질환자가 3천 명이 넘어섰고 사망자만도 40여 명에 이르고 닭 350만 마리를 비롯하여 373만 마리 가축이 죽어 나갔다고 뉴스는 전한다. 참으로 소름 끼치는 더위다. 세상은 온통 폭염과의 전쟁 중이다. 휴대폰에 폭염경보 메시지가 일상인 듯 뜨고 있다. 더위를 피하고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다. 이런 와중(渦中)에 나는 더위를 즐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인가.

“덥지 않아” 흰 여름 양복을 입은 나에게 빈정대는 말투였다. “더워서 좋은데” 친지는 나의 이 생뚱맞은 대답에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나는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 “여름이니까 더워야지, 덥지 않으면 여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얼핏 들으면 역설적 궤변 같기도 하다. 그러나 참으로 ‘더워서 좋다’는 나의 이 말은 진심의 토로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어 얼마나 좋은가. 참으로 축복받은 백성이다. 여름이 덥지 않고 겨울이 춥지 않다면 사계절의 즐거움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봄의 꽃놀이, 여름의 물놀이, 가을의 단풍놀이, 겨울의 눈놀이 사계절이 언제나 즐거운 놀이터다. 이 어찌 생명체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연일 섭씨 36도를 오르내리고 있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고통은 아닌 듯싶다. 자연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러나 자연과 교감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고통일 수도 행복이 될 수도 있다. 잠깐 눈을 돌려 창밖을 보자. 푸른 하늘 한여름 뭉게구름이 아름답고 시원하지 않은가. 초목은 무성하게 힘찬 기운을 뿜어내고 들녘은 희망찬 곡식이 패고 있다. 감, 밤, 대추, 석류가 알알이 굵어가고 사과와 배가 새콤달콤 맛 들어가고 있다. 참으로 한여름 더위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등골 가슴골 땀이 축축하다. 에어컨은 아예 없고 선풍기와 창밖의 자연 바람이 땀을 닦아주고 있다. 에어컨이 없어도 그다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이나 피서(避暑)보다는 더위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것이다. 정자에서 부채 하나로 시조를 읊조리던 우리 선인들의 여름나기를 배울 필요가 있다. 펄펄 끓는 삼계탕 나르는 음식점 아줌마 등 ‘더위’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을 떠올리면 에어컨은 사치다. 안도현 시인은 “다슬기 냉채를 먹으며 어찌나 시원한지 에어컨을 끄고 먹었다”고 여름 일기를 썼다. 더위가 가져다준 행복 일기다. 더위야 고맙다.

△은종삼 수필가는 진안 마령고 교장으로 정년퇴임 후 계간지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안골은빛수필문학회장을 역임하고 행촌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칼럼·수필집 <청와대의 침묵>, <행복은 제정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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