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환 신부님은 1931년 12월 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다복한 가정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59년 12월 8일 한국에 온 지정환 신부님은 1960년 3월 15일 전동성당 보좌신부로 발령받고 천주교 전주교구 소속 신부로 활동하다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해 1967년 5월 23일 임실 치즈 공장을 설립했다.
“내 이름의 성이 한자로 ‘물가 지(池)’인데, 사실은 ‘땅 지(地)’자를 쓰고 싶었다. 농민들 밑으로 들어가 진정으로 ‘땅 같은 지(地)’씨가 되고 싶어서였다.”
아마도 그런 일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고, 진실로 한국 농민의 조력자가 되겠다는 야심찬 포부였으리라. 벨기에의 한 귀족 청년의 흉중에 서린 초심이 나의 가슴 안에 그려졌다. 여운정(餘雲亭)팀과 지정환 신부님과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임실 치즈 마을홍보관’ 영상에서 신부님의 업적을 시청하고 감동이 하도 커서였다.
부랴부랴 <별 아래> 로 찾아가 뵈었다. 문화공간 여산재(餘山齋)를 소개했다. 거기에 신부님의 시비(詩碑)를 세우고자 하는 뜻을 여쭈었다. 그로부터 여운정 팀(김남곤, 공숙자, 조미애, 김사은, 김진영, 소재호, 정군수…)들이 지정환 신부님과 자리를 함께하면서 짧지만 깊은,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별>
지정환 신부님은 2019년 4월 13일 오전에 선종, 빈소가 전주 중앙성당에 마련되었다.
4월 17일 오전 10시 고 지정환 신부님의 장례 미사가 봉헌되었다. 사제와 수도자, 신자 등 1,000여 명과 <무지개 집> 식구들이 배웅했다. 무지개>
전주교구 총대리 박성팔 신부님은 “지정환 신부님은 1963년 7월 7일 부안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개간한 농지 30만 평을 가난한 농민 100여 가구에 3,000평씩 나눠주었다. 2016년 2월 한국 국적을 취득했을 때 ‘나를 한국 사람으로 인정해줘서 고맙다’라고 말씀하셔서 수도자들이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지정환 신부님은 성경 말씀에 따라 고통받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데 정성을 쏟았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신부님이 편안한 모습으로 선종하셨다”라고 전하셨다.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님은 강론 말씀을 통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지 신부는 장례 미사 때 신도들에게 ‘희망과 하느님의 계획을 전달해 달라. 자신이 한국에 오고 치즈를 생산하고 병을 얻어 떠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며 자신은 하느님이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의 도구였을 뿐이다’라고 부탁하셨다”라고 전하셨다. 덧붙여 “지정환 신부는 2003년 일선에서 물러난 뒤, 불어 사료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하여 전주교구 사료를 모두 번역을 끝마쳤고, 전국에 있는 사료들도 상당 부분 완료했다. 이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 신부의 큰 발자취다”라는 말씀도 하셨다.
지 신부님의 관을 운구할 때 장례 미사를 마치는 성가로 노사연의 만남이 흘러나왔다. “내 첫 부임지인 부안은 첫 사랑이고, 두 번째 부임지인 임실은 고향입니다. 영원히 한국과 함께 할 것입니다”라던, 평소 지정환 신부님의 말씀은 이제 현실이 됐다. 지정환 신부님은 이날 오후 2시 치명자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됐다.
향후 교황청이 뽑는 ‘선교의 모범’이 되는 참 증인으로 고 지정환 신부님을 선정해주기를 삼가 빌어본다.
/국중하 우신산업㈜ 대표이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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